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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밖으로(히13장12-13)
성경본문 :히브리서13:12-13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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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해는 이제 다 지나가고 우리는 올해 마지막 주일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왔습니다.
한해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이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세월의 무상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예배의 자리에서는 우리의 삶의 자세,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믿는 바에 따라서 살아왔으며, 지금 살고 있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본문 12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12절이 앞에서 계속된 말임을 보여 줍니다.
11절을 읽어 보시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히브리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쓴 편지이기에 문화가 다른 오늘 우리에겐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겐 익숙한 대 <속죄일>을 떠올리는 장면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장을 차리고 술을 따르며 세상을 떠난 조상에게 절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 즉 유대인은 성막이나 성소, 후에는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 때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그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고, 그 짐승의 시체는 가죽이나 내장이나 전부 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불사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흘린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죽임당한 짐승의 피를 백성의 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피로써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 히브리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바는 짐승의 육체가 영문 밖에서 불태워진 것과 예수님의 죽음이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된 사건에서 유사점을 찾고 있습니다.
영문 안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천막을 치고 있는 주거지역입니다.
그들이 천막을 치고 사는 땅은 거룩한 땅으로 여기고, 그 백성들이 거하지 않는 진 밖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규정에 따라 죽임당한 짐승의 시체는 불사르기 위해서 일단 영문 밖으로, 불결한 곳으로 가지고 나갑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사의식에 시중 든 사람일지라도 일단 불결한 곳으로 나갔으면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정결의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주목하는 바는 예수님 역시 성문 밖에서-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 안에서가 아니라 성 밖에서-부정한 땅에서 자신을 온전한 희생으로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성문 밖에서-하필이면 부정한 땅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백성을 거룩케 했다는 사실은 유대인의 귀에는 거슬리는 이야기입니다.
왜 부정한 땅에서 그 육체가 태워져야 했는가?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정확히 여기 부정한 영역에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이 이 히브리서의 주장입니다.
십자가가 선 갈보리 언덕을 골고다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신 골고다 언덕은 해골이란 그 이름의 뜻만큼이나 부정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주의 거룩하신 자가 거기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지 못한 곳이 거룩하게 된 곳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는 영역에 살수 없어 추방되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 밖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주의 거룩하신 자”가 거기 부정한 곳에 임재 함으로써 부정한 자리에 처해있는 자에게 소망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 밖에 있는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를 깨끗케 하는 정결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성 밖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사실을 밝힙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이 성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권 하에 들어오기 위해서 그 자신이 바깥에 나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쫓겨난 죄인은 거룩한 성 안으로 스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죄인이 성 안으로 들어 올수 없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성 밖에 나가서 성 밖에 있는 죄인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자기 거룩한 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나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와 아들의 거룩함과 맞바꾸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의 거룩함을 소유케 하기 위해서 그 아들이 희생 제물로 드려짐을 성 밖에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성문 밖에 세워졌던 십자가를 통해서 그가 죄를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의 죄는 씻음을 받습니다.
성문 밖에서 흘리신 그의 피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을 만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죄인을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은 그 죄가 정결케 되어야만 했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단절된 인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으로 만드시려고 영문 밖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죄악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거주지에서부터 추방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처한 성문 밖에서 그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충만한 영광으로 가득한 천성을 떠나 죄악된 세상에 오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천국에 입성할 길이 열려졌습니다.
그가 하늘의 영광스런 천성을 떠나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성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천국 바깥으로 나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천국의 특권을 그가 포기 하셨기 때문에, 천성문 밖으로 나오심으로써 실낙원의 저주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복락원의 새아침이 밝아오게 되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인생을 감사하는 인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매사에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문 밖에서 살고 있는 인생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터 추방된 인생을 다시 돌이키기 위해서 성문 밖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습니다.
구출하시기 위해서 구출 받아야 할 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저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구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 되게 하시려고 우리가 처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 역시 그의 수모에 동참하면서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항상 환한 조명 아래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 영과 혼을 전부 구원하셨기에 전적인 헌신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온통 자신을 쏟으셨기 때문에 그의 삶이 우리를 위해서 바쳐졌고 그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서 드려졌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길은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 전부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삶 전부를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전적인 구별과 전적인 희생의 상징입니다.
결코 목에 걸린 장식용으로는 애초부터 부적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요구되고 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마 10:24,25)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처럼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는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 쉬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의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한다고 해봤자 아주 조금 요구할 뿐입니다.
절대 요구가 없는 삶에는 절대 행복이 없습니다. 절대 헌신이 없는 곳에는 절대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그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은 그가 당한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은 그가 당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의 제자로서 그가 당한 수치와 모욕을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받아 본 모욕과 비방이 있습니까?
성도의 삶은 마땅히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살았던 삶의 자세를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타락한 가치관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성문 밖으로 나아오는 것은 안일한 삶과 보다 존경받는 삶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이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들은 그런 결단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결단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만 지금 그 결심이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편한 좀 더 안락한 삶을 누리고 싶은 유혹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믿어야만 하느냐 이렇게 힘들게만 살아야만 하느냐?’는 물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적당하게 안 믿는 친척들과 얽혀서 살면 되지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 영문 밖으로 나온 그들이지만 지금은 성문 안의 삶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처음 예수를 영접하던 감격을 되살려 보십시오.
온 세상이 조소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만족하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세상을 돌아보지 않기로 결단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영문 안을 기웃거리면서 아쉬워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문 밖으로 나아갑시다.
영문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세속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제단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참된 제사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삶의 엄청난, 과히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온 세상을 바꾸는 것과 마찬 가지의 대 결단이었습니다.
마치 믿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 조상 섬기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경우에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성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수도관도 들어가 있을 것이고 가스관도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는 아파트가 지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문 밖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거기에는 안일함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대로 성도들은 단호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성문 밖으로 나아왔습니다.
불신으로부터, 비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듣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른 선전이요 메시지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어져 갑니다. 그래서 마치 더 큰 용량의 냉장고를 사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통장에 더 많은 것을 저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 사는 것은 좀 더 안락한 승용차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쾌적한 주거환경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좀 더 편한 좀 더 나은 삶은 결코 영문 밖에서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모세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애굽이 주는 왕위와 야망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애굽이 자기에게 약속해 줄 수 있는 왕위와 영광을 위해서 그는 포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을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제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모세가 살았던 세상도 오늘 여러분이나 제가 사는 세상과 같은 세상입니다.
권력이 난무하는 곳이었고 권력을 가지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서열에 따라서 왕위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영광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장차 상주시는 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오늘 여러분에게 매력적인 것만큼이나 옛날 그에게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좌의 옆에서 기웃거리는 것만도 만족하며 사는데 그것을 잡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영광과 족히 비교하지 아니했습니다.
천국 영화를 보류하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여러분 자신에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는 태도는 어떻게 달라야 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은 옛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성문 밖에서 멸시 당하고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염세주의자나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성문 안에 있는 안락한 삶 그 자체를 기피하는 자가 아닙니다.
일부러 평안함과 안락함을 조소하는 삶이 아닙니다.
스스로 따돌림을 받고 비난당하는 것을 즐기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시내 생활이 따분하니까 바깥으로 나가서 전원생활을 즐기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싫으니까 고독한 삶을 즐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영문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할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와 하나 되기 위해서, 거기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더 잘 섬기기위해서, 그의 이름이 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고난에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나간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삶의 새로운 목표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스런 그 모습이 우리를 가릴 때에 이세상의 번쩍거리는 것에 한눈을 팔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스런 그 모습이 여러분의 시야를 채우게 될 때에 비로소 세상의 번쩍거림에서부터 여러분은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향기로운 체취에 우리의 후각이 만족하게 될 때에 이 세상의 썩어져가는 냄새에 구역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그리스도를 밝히 보기 전에는 여러분의 코가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기 전에는 여러분은 항상 세상에 썩어져 가는 것들과 영화에 눈길을 팔 것입니다.
그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잡겠다고 여러분의 인생을 소모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먼지와 같은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한 해 동안 살면서 무엇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쏟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위해서 정력을 바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의 패역한 이스라엘처럼 살지 맙시다.
홍해를 통해 구원을 체험하고 불평하는 그들을 닮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끼니마다 먹으면서 애굽의 고기 가마에 연연해하는 삶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1년이 되어가는 성도 여러분,
아니 은퇴를 한지 1년이 되어가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하늘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십시오.
중생한 신자의 귀는 그의 말씀으로 만족합니다. 거듭난 신자의 마음은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축하하는 길은 영문 밖으로 그 삶을 바치신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구주 성탄은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 여러분의 걸음을 가다듬는 기회였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