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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반여량은 짐마차 뒷구석에 편안히 누웠다.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쬐었지만 몸에 배인 답답한 훈향(薰香)과
차디찬 시기(屍氣)를 말끔히 태워 주는 것 같아 피하지 않았
다.
"뜨겁지 않나?"
일심각 무인들이 남창마방(南昌馬房)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온
마부(馬夫)는 인심이 좋아 보였다.
"괜찮습니다. 아주 편안하군요."
또각, 또각...!
더럽고 늙은 말은 걷기도 힘에 겨운 듯 천천히 걸어갔다. 마부
도 급한 일은 없는지라 눕다시피 기대앉아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녘이라 그렇지. 조금 지나면 차양(遮陽)을 해야 할걸?"
"차양으로 할 것은 있습니까?"
'물을 필요도 없다. 이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한다. 마
음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아야 한다.'
"없어."
"하하하!"
반여량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때쯤이면 오급산에 도착할 거야. 거기로 몰아주면 되겠
나?"
"천천히 가죠."
'이 마부는 돈을 받고 마차를 몬다. 마부는 마차를 몰고, 나는
감여를 하고... 그러면 그만이다.'
반여량은 이번 여행을 끝으로 새롭게 태어날 작정이었다.
철저히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며 비정한 인간으로... 하지만 그
전에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부터 치미는 천성을 깨트려야
한다. 또한 지금도 가슴 깊숙이 각인되어 절절이 사무치는 한
한에 대한 그리움도 지워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혼자 있는 것
이 좋다. '무인이 곁에 있으면 감응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된
다.' 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팔자가 좋군. 하기는 나도 좋은 팔자지. 이렇게 산천이나 유
람하면서 거금을 받으니. 캬악! 퇘엣!"
마부는 누런 가래침을 내뱉었다.
"불편하지 않나? 거기는 짐을 싣는 곳이야. 이해할 수 없네그
려. 곽가장에서 이런 짐마차에 사람을 태우다니. 더 좋은 마차
도 구할 수 있을 텐데. 하기는 덕분에 내 팔자가 늘어졌지만."
"하하하...!"
'내가 왜 웃지? 웃을 만한 말도 아닌데.'
괜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해야 즐거운 게다. 그러
나... 지금부터는 이런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리라. 비정한 인
간이 되려면 인간적인 감정부터 지워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는
최악의 마부가 걸린셈이다.
"가는 길목에 내 집이 있는데 들렸다 가면 안 되겠나? 어제 황
망히 불려가서 걱정들 하고 있을 게야."
"거기가 어딘데요?"
"그리 멀지는 않아. 흠! 우리 집에서 점심을 뜨고 가면 되겠
네. 어떤가? 우리 며늘아이 음식 솜씨는 일품이지. 아, 길가에
서 먹는 밥에 비하겠나?"
"좋군요."
"무슨 말이 그래?"
"하하하! 오늘 저녁, 신세질 곳이 생겼으니 좋다는 말입니다.
설마 집에까지 데려가서 노숙(路宿)하라는 말은 않겠죠?"
"응? 자고 가자고? 그럼 나는 좋지만... 허허허! 이놈하고 같
이 자게. 이래봬도 마구간은 제법 넓어."
마부는 말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반여량은 마부의 말에 일일이 맞장구쳤다.
잊으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아도 그놈의 율금향만 맡으면 갸름
한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어떤 때는 함빡 웃는 얼굴로, 어떤
때는 새촉하게 토라진 얼굴로, 또 어떤 때는 아미(蛾眉) 끝을
파르르 떨면서 분노한 표정으로... 그러나 어느 얼굴이든 전부
예뻤고, 가슴을 찡하게 울려놓곤 했다.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수천 번을 더 다짐해도 잊을 수 없었다. 명치끝에 무엇이 걸린
듯 답답해서 실없는 소리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과거의 반여량은 곽가장에 묻어 두어야 한다. 그래, 지금부터
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성격도 냉정하게 뜯어고치
고, 매사를 치밀하고 꼼꼼하게 처리하는 거지. 그렇게 살아가
는 거야. 과거의 모든 사람을 잊어 버리고.
"곽가장, 곽가장... 말은 많이 들었네만 인심이 이리 야박할
줄은 몰랐네. 아, 그래 옷이나 한 벌 제대로 해주면 어디가 덧
나나?"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이마에 세월을 고스란히 얹어 놓은
마부는 연신 투덜거렸다. 아마도 반여량이 불쌍하게 보였나보
다.
하기는 그럴 만도 하다.
머리를 질끈 동여맨 무명 끈은 땀에 절어 지저분했고, 나그네
라면 누구나 지니는 행랑(行廊)도 없었다. 신발도 신지 않아
맨발이었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가득 배겨 애초부터 신발이라
고는 알지 못하는 인간 같았다.
반여량은 자신을 끝없이 학대했다.
육신이 잠시라도 편안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얼굴과 마주치는
것보다 차라리 생각할 틈도 없을 만큼 고단한 것이 백 번 나았
다. 편안하고 안락한 마차를 마다하고 등이 배기는 짐마차를
선택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신발을 신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지감(地感)을 조금이라도 자
세히 느끼기 위해서였다. 살갗에 직접 닿는 땅의 감촉. 그것이
야말로 생명의 소리였다. 그러나 감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미친놈 취급밖에 더 당하겠는가. 지금
은 누가 뭐라해도 상관없었다. 미친놈 취급을 하면 어떻고, 돌
팔매질을 하면 어떤가.
곁에 한한이 없는데 말이다.
또각 또각...!
반여량은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
다.
단조로웠다. 얼굴을 따갑게 하는 햇볕은 보이지 않았다. 길가
에 뒹구는 돌맹이도 기운을 잃고 축 늘어진 초목(草木)들도 아
무 소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하고 있다.
나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고, 햇볕은 점점 약해져 가을로
접어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뜨거운 햇볕 대신 차가운 북풍한설
(北風寒雪)이 천지를 메우고 말리라.
그들은 또 말까지 한다
나는 나무다. 만천하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이다.
나는 땅이다. 나의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소생한다.
나는 강이다. 지기(地氣)를 받아들이고 운반한다. 혈맥(血脈)
을 따라서 흐르다보면 나를 필요로 하는 만물이 많다.
반여량은 자연을 느꼈다.
자연을 알아야 풍수를 안다고 할수 있다. 자연을 내 몸의 일부
처럼 느낄 때 지세(地勢)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감흥(感興)
을 느끼지 못하고 감여를 한다면 감여장이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감여가란 위대한 시성(詩聖)을 이름이다. 자연을 노래
할 수 있는 자만이 감여가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다. 감여가가
아닐지라도 자연의 기(氣)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
에서 가장 위대한 감여가이다.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손자인 듯한 젊은 소동이 마당에서 뛰어놀다 한달음에 달려 나
왔다.
"뭐 사왔어?"
"허허! 이놈아. 할애비가 무슨 도깨비라도 되냐? 나갈 때마다
사들고 들어오게."
"피이! 그럼 아무것도 안 사왔단 말야?"
"우리 장(長)아가 왜 이렇게 반기나 했더니 선물을 바라고 그
랬구나? 이거 섭섭한걸. 할아비는 할아비가 좋아서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말야."
"물론 할아버지도 좋지. 선물을 사다주니까."
"뭐? 에끼! 이놈!"
마부는 장아라고 부르는 아이를 번쩍 들어 무등을 태워 주었
다.
"들어가세."
엉거주춤 서 있던 반여량은 노인의 권유에 따라 집 안으로 들
어섰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손자는 총명했고, 노인이 소개해 준 아들, 왕생(王生)과 자부
(子婦)도 효심 있고, 현숙해 보였다. 아버지가 이방인을 데리
고 들어왔는데도 전혀 불쾌한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아저씨는 왜 맨발로 다녀?"
장아라는 아이는 신기한 듯이 반여량의 더러워진 발을 쳐다보
았다.
"장아!"
왕생은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정하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
워 크게 실수할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민망했는지 아들을 질
책하고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미안합니다. 아들놈이 철이 없어서..."
"하하하! 그만할 때는 누구나 다 그런 법이죠. 너무 개의치 마
십시오. 그러나저러나 이거 발을 씻어야겠는데..."
"저를 따라 오시죠. 아주 시원한 우물이 있습니다."
반여량은 왕생을 따라 우물가에 이르렀다.
우선 물부터 마셔 보았다.
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성품은 물맛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상쾌한 공기와 맛좋은 물을 먹고 자란 사람들은 대체로
악한 사람이 없다. 왕생과 자부가 효심 깊은 것은 우연이 아니
었다.
"저 실례지만 아버님 연세가...?"
"하하하! 건강해 보이시죠? 남들도 다 그럽니다. 못살아도 백
살까지는 사실 분이라고. 임진년(壬辰年) 생이시니까 올해로
예순셋이십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죠?"
"그래요? 잘해야 쉰서넛 정도로 뵈시던데..."
반여량이 생년을 물은 것은 마부 노인이 건강해 보여서가 아니
었다. 자신이 익힌 모든 지식을 실생활에 활용해 보고 싶어서
였다.
"그럼 씻고 들어오십시오."
왕생이 친절한 말을 남긴 채 방안으로 들어가자 반여량은 막대
기 하나를 골라 땅에 꾹 찔러 넣었다. 모든 이치를 살피려면
동서남북(東西南北)이 어디인지는 알아야 한다.
반여량은 막대기 그림자를 표시해 놓고 일다경쯤 기다렸다. 미
미한 그림자, 그것으로 족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발을 씻었다. 발 씻은 물을 버리니 동쪽으
로 흘러간다. 묘방(卯方)이다. 임진년생에게 묘방은 십이신살
(十二神殺) 가운데 육해살(六害殺)에 해당된다. 우물을 제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장(家長)의 생년에 따라 방위는 틀리지
만, 물이 나가는 방향은 육해살로 맞추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땅의 지기(地氣)와 서로 상응하게 되며, 질병에 걸리지 않는
다.
아픈 사람이 있는 집안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는 것은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집안에 있는 나무는 큰 나무가 없이 전부 올망졸망했다.
좋다.
만물(萬物)은 오행(五行)을 따라 변천한다. 서로 상생(相生)하
면 발전하고, 상극(相剋)하면 폐퇴(廢頹)한다.
나무와 흙의 관계는 나무가 우선이다. 나무는 활동 중이기 때
문이다. 나무를 앞에 놓으면 목극토(木剋土)가 된다. 즉, 나무
와 흙의 관계는 서로 상극이다.
흙이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나무의 성장을 억제해야 하고,
나무가 성장하려면 흙의 기운을 빼앗아 와야 한다. 인간이 흡
수해야 할 흙의 기운을 나무에게 빼앗기는 격이다. 집안에 큰
나무가 없어야 하는 이유였다. 또한 집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땅이 균열한다. 저녁이면 나쁜 기운을 내뿜어 건강에도 좋지
않다.
나무를 심지 않으면 어떤가? 모순되게도 나무는 있어야 한다.
집을 짓는 재료는 모두 죽은 물건들이다. 나무도, 돌도, 흙
도...
더 이상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공간인
것이다. 때문에 음연양(陰陽)의 조화를 맞춰 주기 위해서, 답
답한 기운을 몰아내고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풍성한
생기를 내뿜는 나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땅의 기운을 적게
흡수하는 작은 나무...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군.'
반여량은 단 두 가지만 보고도 집안 분위기를 파악할수 있었
다.
발을 씻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벌써 음식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거 찬이라고는 나물밖에 없어서..."
마부의 아들은 음식을 내오면서 연신 미안해했다.
"하하하! 냄새가 좋습니다. 빨리 주십시오."
'이러면 안 돼. 나는 무정한 남자. 무정한 남자... 감정을 억
누르고 냉랭한 표정을 취해야돼. 아! 무정할 바에는 이리 오는
게 아니었어.'
반여량은 무심히 저지른 행동을 후회했다. 심한 갈등을 느낀다
는 증거였다. 행복한 가정은 보는 것 자체로 즐거웠다. 하지만
마음은, 결심은 이런 모든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다른 생각을 했다.
방문은 남쪽으로 나 있다. 재살(災殺) 방위.
장아라는 아이를 이 방에서 출산했다면 남풍(南風)을 맞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총명할 수밖에. 임진년생의 장성살(將星殺)
은 북쪽이다. 문 입구를 만들 때 장성살만 피한다면 신동(神
童)은 아닐지라도 총명한 아이를 낳게 된다. 굳이 장성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가 태어나 첫숨을 들이킬 때 남풍을 들
이킬 수 있으면 된다.
침상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반안살(攀鞍殺)
이다. 두침(頭寢)을 북쪽 방향으로 정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
은 그리 신기할 것이 못 된다. 인간은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
잠이 들든 간에 항시 머리를 반안살이나 천살(天殺) 방향으로
두기 마련이다. 두침을 그런 방향에 두고 자면 일어났을 때 전
신이 개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몸이 찌뿌듯해 개운치 못
할 것이다.
반여량이 주목한 것은 침상이 벽에서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침상을 벽면에 바싹 붙인다. 그래야 정돈
된 맛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잠자는 동안 벽면
에 깃든 죽은 기운, 사기(死氣)를 고스란히 흡수하는 꼴이 된
다.
"감여를 아십니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는 일정한 방위
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감여를 모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허허! 감여는 무슨... 전에 감여가인 듯한 사람이 여기를
다녀갔지. 십 년도 더 된 일이야."
"그렇군요."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는...?"
"좋군요."
반여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려 버렸다.
반여량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휘황찬란한 보름달과 한한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그녀는
하루도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애써 심신을 피곤하게 해도
밤만되면 여지없이 상념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빼꼼히 휘장을 걷고 사람을 둘러보던 눈동자. 행복해 보였다.
그토록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좌계창과 도란거리는 입
모습에서는 애교가 물씬 풍겨 나왔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여인.
그녀만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휴우!"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반여량은 다시 몸을 뒤척였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밤을 뜬눈으로 꼬박 밝힌 반여량은 약간 피로해 보였다.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하는 것 같던데?"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
"허허! 무슨 젊은이가 노인네보다 생각이 많아?"
노인은 며느리가 싸놓은 짐보따리를 챙겨들며 껄껄 웃었다.
"아버님, 이건 마른 육포(肉脯)인데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 두
세요."
며느리는 상냥하게 시아버지를 챙겨 주었다.
'무정, 무정..."
반여량은 인간적인 따스함은 보지 않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혔
다. 예(禮)를 취하고 문밖으로 나선 그. 그러나 채 두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 버렸다.
"아!"
놀람이 가득 담긴 탄성.
"왜 그러는가?"
반여량의 의아한 행동에 마부노인이 황급히 곁으로 다가왔다.
"전에 감여가가 다녀갔다고 하셨는데 그가 택지(宅地)에 대해
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택지? 좋다고 하던데?"
"죄송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뉘신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이곳은 다시없는 대흉지(大凶地)입니다."
"허허허...!"
노인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반여량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투였
다.
"자네, 안철주라고 들어봤는가?"
"안... 철주!"
반여량은 뜻밖의 곳에서 우연찮게 사부의 성함을 듣고 말았다.
"아는 모양이군. 모든 감여가들이 그 사람을 매도했지만 나는
믿는다네. 그 사람은 자연을 아끼는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좋다고하면 좋은 게지. 이곳의 택지가 왜 안 좋은가?"
"잠시 후에 말하지요. 집에 낫이나 칼이 있으면 주십시오."
반여량은 왕생이 가져온 낫을 들고 집 옆에 있는 대숲으로 들
어갔다. 잠시 후 대숲에서 나온 반여량의 손에는 급히 만든 활
과 역시 대나무로 만든 화살이 들려 있었다.
반여량은 왕생에게 활과 화살을 건네 주었다.
"직접 눈으로 보시면 어째서 대흉지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왕
공(王公), 활에 살을 메겨주십시오. 됐습니다. 팽팽하게 당길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살을 날릴 것은 아니니까. 이제는 그
살 끝을 초옥(草屋) 쪽으로 향해 주십시오. 자... 느껴지는 것
이 없는지?"
"이런!"
잠시 아들과 집 주위를 돌아보던 마부노인이 경악성을 터트렸
다. 집 앞을 지나는 길은 반달 모양으로, 아들이 들고 있는 궁
체(弓體)처럼 둥그렇게 휘어져 지나갔다. 궁체 한가운데를 가
로지른 화살은 집에서 나와 사당(祠堂)으로 향하는 소로(小路)
였고, 화살촉이 있는 곳은 집, 화살깃이 있는 곳은 사당이었
다.
활이 집을 겨누고 있는 형상이었다.
"이런 택지를 일컬어 만궁직전(彎弓直箭)이라 합니다. 단순히
만궁만 있다면 불운(不運)으로 끝나지만 화살까지 메겨져 있으
니... 문제는 사당입니다. 사당은 사자(死者)를 모시는 곳. 사
당과 집이 직충(直沖)이라 온갖 음기(陰氣)와 살기(殺氣)가 집
으로 모여드는 격입니다. 이런 택지를 괜찮다고 말할 분이 아
닌데 이상하군요."
"이, 이게..."
노인은 말을 더듬거릴 뿐 좀처럼 냉정을 찾지 못했다. 노인을
대신해 왕생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때는 사당이 없었습니다. 이 큰길도 없었고... 마을사람들
이 아버님을 존경하는 뜻으로 대로를 내주었지요. 마차가 드나
들기 편하라고... 사당도 아버님 곁에 있으면 좋다고 하기에
옮겨 왔는데... 어쩌면 좋죠?"
"원래대로 돌려놔야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대로를 없애고, 사
당도 없애 버리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횡액을 당할 겁니다."
"그러면 괜찮겠습니까?"
"하하하! 원래 감여란 신출귀몰(新出鬼沒)한 묘술(妙術)이 아
닙니다. 자연과 어울려서 실아 가야 하는 인간이고 보니 그 영
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가급적이면 좋은 영향을 받고자 하는
것이 감여입니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비록 해가 없을지라도
피하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하하하!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하룻밤 신세진 값은 한 셈인가요?"
"시, 신세라니요."
왕생의 말투가 바뀌어졌다.
하는 일 없이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고 떠도는 놈팡이에서
마음속에 진의(眞意)를 담고 중원을 유랑하는 귀인(貴人)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대로 된 감여가라면 곽가
장이 어떤 곳인데 허름한 짐마차에 태워 내보낼까. 또한 감여
라면 그 유명한 산귀가 지척에 있는데 이름 없는 감여가를 무
엇하러 쓸 것인가. 반여량은 누가보아도 천덕꾸러기처럼 보였
다.
그런 점을 느꼈기에 반여량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어 보이고는
짐마차 한구석에 엉덩이를 걸쳤다. 마부노인의 집터가 만궁직
전의 대흉터만 아니었던들 벌써 길을 재촉하고 있을 터였다.
또한 사부가 집터를 판별하지만 않았던들, 노인이 사부에 대한
믿음이 크지만 않았던들 활까지 만드는 번잡한 일은 하지 않았
으리라.
"반여량이라고 들어봤니? 저 청년의 이름이 반여량이란다."
"반여량! 상방에 사는 반여량... 묘혈을 잘 잡기로 소문난 반
여량이 바로 저 젊은이였단 말입니까? 아버님!"
"그렇게 유명한 젊은이야? 글세...무지해서인지 몰라도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는데..."
노인 왕기(王肌)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하루 밤낮을 같이 보냈지만 땀 냄새 풀풀 날리는 청년이 이토
록 유명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럴 수밖에 마부노인은 자신의
가정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반여량.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상방에서 그가 골라준 묘혈은 한결같이 좋은 자리였다. 집안
사정을 봐서 적당한 값에 감여를 해주어 인심도 얻었다. 비록
촌민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는 이름이었지만 산귀나 낙월노인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는 명감여가였다.
* * *
왕생은 오전 내내 사당을 옮겼다.
위치는 바로 집 옆이었다. 반여량이 일러준 대로 집과 정면으
로 놓이지 않도록 방향을 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는 노궁(弩弓)이 문제였다. 널따란 길을 어떻게 없앤단 말
인가. 하지만 반여량은 활대라도 끊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길 한복판을 파헤쳐 우마(牛馬)가 다닐 수 없는 길을 만들라
고.
"휴우! 점심이나 먹고 해야겠군."
우물에서 시원한 물을 퍼올렸다. 하루 종일 힘든 작업을 했기
에 심신이 노곤했지만 육체적인 피로는 뿌듯한 상쾌함도 가져
다준다. 손발을 씻으면서 사랑하는 아내가 부산하게 점심을 차
리는 모습을 보았다. 찬이라고는 나물뿐이지만 향긋한 냄새가
멀리 퍼져나가고... 행복했다.
그때, 낯선 사람이 조용히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뉘신지?"
"지나다가 들렸습니다. 사당을 옮기시더군요?"
"반여량이란 감여가가 일러준 대로..."
"하하! 반형이 다녀갔군요."
"댁도 감여가이신지?"
"그렇습니다. 이곳 택지가 하도 좋아서 들려봤죠."
왕생는 처음 보는 낯선 사내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반여량을
알고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막 점심을 뜨려던 참인데... 아직 식사 전이라면 같이 한술
합시다."
"아닙니다. 초면에 실례를 범할 수 있습니까? 대신 몇 가지 여
쭐게 있습니다. 반형이 감여를 보아준 집이 또 있습니까?"
"없는데 왜 그러시는지...?"
"으음...! 이상하군요. 반형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름
있는 감여가라 그가 온 것을 알면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
왔을 텐데..."
"하룻밤만 유숙하고 부리나케 오급산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럼 마을사람들은 그가 다녀간 것을 모르겠군요."
"그렇죠."
"다행이군.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순간, 왕생은 위기를 직감했다. 낯선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뒤
틀려지며 섬뜩한 살기를 쏟아 냈다.
"왜...! 커억!"
왕생에게는 발버둥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불에 달군 인두
가 닿은 듯 목덜미에 뜨겁기 이를 데 없는 열기를 느낀 순간
그의 의식은 세상 저편에 놓여졌다.
쩡그렁!
"아악!"
점심상을 차리던 아내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손에 들렸던 나물 찬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으로 깨어
졌다.
슈각! 푸욱!
"커억!"
왕생 일가족이 참살당한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효심 많
던 왕생뿐 아니라 사랑하던 아내, 총명하던 장아까지.
일가족을 벤 사내는 시신을 집안 한구석에 쌓아 놓았다. 그리
고 마른 섶에 불을 당겨 툭 던져 버렸다.
"저, 저거 불난 것 아냐?"
"왕 노인 댁일세그려."
"아이구! 이걸 어쩌나? 빨리 가보세."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을 때는 불길이 너무 강해 손도
쓰지 못할 형편이었다. 왕기가 반여량과 같이 떠난 것을 모르
는 마을 사람들은 마을 제일 어른인 왕기 노인만 불러댔다.
"왕 노인! 왕 노인! 아이구!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
일세."
"휴우! 평생을 순박하게만 살아온 노인인데... 휴우!"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렸다. 낯선 사내의 모습은 그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만궁직전의 터... 화재를 당한 것은 당연하지. 살신지화(殺身
之禍)라니. 쯧쯧!"
산귀도 만궁직전을 알아보았다.
큰일날 뻔하지 않았는가. 화재가 하루만 일찍 일어났더라도 왕
생 일가족은 물론 반여량까지 참변을 당할 뻔했다. 그렇다면
동기감응과 원방 감여를 비교하겠다는 생각은 물거품처럼 스러
지리라.
"역시 동기감응은 한계가 있어. 뿌리가 부실한 나무야. 김여가
라면 누구나 피하는 만궁직전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여기 터가 그렇게 나빠요?"
곽소연이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잖아도 반여량이 동행을 거부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심사가
불편하던 참인데 마부 노인의 집까지 불타 버렸으니.
반여량도 그렇지. 객사(客舍)에 아늑하고 편안한 보금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좋은 잠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냄새가 퀴퀴하
게 나는 이런 곳에서 머물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녀의 음성에는 투정 섞인 가시가 박혀 나왔다.
"나쁘다뿐인가 횡액(橫厄) 당하기 딱 좋은 자리일세. 원래는
다시없는 양택이었구먼. 하지만 사당을 잘못 옮겼어. 옛말에도
사당은 함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했는데. 쯧쯧."
산귀는 가볍게 혀를 찼다.
만족스러웠다. 안철주는 너무 큰 나무였다. 그래서 그가 펼친
동기감응에서는 아무런 하자(瑕疵)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
만 반여량은 아직 어린 나무다. 그는 만궁직전도 판별하지 못
한 우피전가(牛皮專家:엉터리)이지 않은가. 조금만 더 관찰하
면 동기감응의 요체를 알 수 있으리라.
'음기가 가장 강한 곳은 서쪽이었어. 그런데 북북서라...'
산귀는 오급산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좋아. 하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반여량을 저대로 놓아두는 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너는 쓸데없는 걱정 말고 사람의 이
목이나 철저하게 차단해라."
윤명은 일심각 무인 한 명과 함께 불탄 잿더미 위를 천천히 거
닐었다. 산책이라도 하듯이 유유히...
'탈명화검이 죽은 일은 비밀에 부친다. 강서 무림에 소문이 번
지면 안 되니까. 반여량이 나서는 것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
다. 그가 접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를 불문하고 죽여라.
쥐도 새도 모르게.'
장을 나서기 전에 장주로부터 들은 명령, 그는 충실히 이행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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