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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정리지시를 했던 박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과연 '장기집권욕에 불타는 독재자'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야 하는가? 박 대통령이 생존해있을 때나 급작스런 서거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박대통령을 '독재자'로 이름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제5공화국 시절, 다소간 '열린 여론'을 통해 무수히 쏟아지는 그런 말들을 우리는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나이가 있으니 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런데 박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지 11년이 지난 최근부터 그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측근인사들이 그런 주장에 반박하는 증언들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큰 영애 근혜씨는 얼마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은 적어도 임기 중반 이전에 물러나실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점심 시간에 아버님과 단 둘이서 식사를 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가 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년도 채 안된 시기였는데 '차기 대통령으로 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제게 자주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사람은 다 능력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도 나이가 있으니 능력의 한계가 있어'하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너무 일찍 그런 계획을 공표하면 당시의 정치 풍토상 줄을 잡는다고 정계가 소란스러워지고, 사회도 안정을 잃게 된다는 점을 염려하였던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3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음모를 꾸몄고, 그 길을 온전히 걷기 위해 '자기관리·자기보호'를 했다고 평가하던 사람들에게 근혜씨의 증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근혜씨의 증언을 듣고 일부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독재자라는 탈을 벗기기 위한 변명이라고 되받아 쳤고, 일부에서는 신선한 충격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헌법의 수정연구를 지시 근혜씨는 자신의 증언을 못미더워하는 사람들에게 '당시, 헌법의 수정연구안도 보좌관에게 지시했는데 예를 들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추천을 얻은 자만이 입후보할 자격이 있던 것을 추천없이 입후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부연설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한인사도 그런 증언에 동조하며 '임기중 하야는 분명했고, 그 시기를 놓고 고심하셨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 부속실에 근무했던 이광형 부관은 '박 대통령의 임기 중 하야 준비는 79년 봄부터 서서히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 회고된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79년봄부터 집무실을 정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동안 즐겨 읽던 도서목록들을 다시 만들었고, 도서들을 분류 정리했다. 서재 정리를 지시, 떠날 준비 도서분류, 즉 서재정리는 물론 박대통령이 직접했다. 시간나는 대로 수시로 서재를 정리하다가 부속실 직원을 불러서 들어가 보면 박대통령은 서재 한켠에 서류나 낡은 책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내다버리라고 지시했다. 10·26즈음해서는 서재정리가 거의 끝나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재 정리가 끝나면 새로운 각오로 그 자리에서 더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거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간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일을 벌이려 했는가(이 때는 장기집권이 필수적일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를 떠나려 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박대통령의 한 측근은 후자를 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군대 있을 적부터 측근으로 일해 왔다는 이모씨는 '박대통령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혁명가 출신이므로 성 취해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혁명과제를 성취하면 손을 털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씀했던 점을 기억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최규하 총리에 올림픽유치 지시 박대통령의 혁명과제는 '빈곤으로부터 해방', '자주국방', '정신문화 창달', '문화재 보존', '평화통일'이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5천년 역사에 한이 맺힌 분이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물론 태평성대를 누린 시절도 있었지만 가난한 시절이 많았다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 했습니다. 특히 현실-자주국방과 자립경제-이 어렵다는 부분에 대해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지셨지요." 이광형 부관은,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이제 어느 정도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말한다. 79년초 우리가 미사일을 개발했을 때, 박대통령은 '이제 우리가 김일성에게 호락호락 먹히지 않을 정도는 됐다'며 그러한 힘을 세계에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국력을 세계에 공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우리의 강해진 국력을 세계에 알릴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올림픽 주최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규하 총리에게 지시했고, 정상천 서울 시장이 그 작업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그렇다고 그 올림픽을 자신의 임기 중에 치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회고록 집필 위해 타이핑 연습 이광형 부관은 어느 날 박대통령으로부터 '타이핑 연습 많이 해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5년 가까이 대통령이 목욕하는 욕실까지 드나들 만큼 가까운 곳에서 보좌해 온 사람이다. 그런 관계인 만큼 박 대통령은 자신의 퇴임후 비서관(대통령은 퇴임하면 3명의 비서관을 둘수 있다)으로 이부관을 점찍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관에게 퇴임후 한적한 곳에 살면서 '타이핑'을 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타이핑의 내용은 회고록을 집필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 까하고 이 부관은 추측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대통령은 자신의 퇴임시기를 언제쯤으로 잡고 있었을까? "혁명과제를 완전히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혁명을 일으킨 20년째 되는 해가 아니었을까요." 81년말에 하야, 낙향을 구상 이광형 부관은, 80년에 헌법을 개정하고 81년쯤에 하야선언, 그리고 낙향의 수순을 밟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 작업들이 은밀히 추진되고 있었음을 그는 당시에 감지했다고. 그런 계획이 수립되어 구체화되었는데도 박대통령이 발표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이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박대통령은 이미 정치생리를 잘 알고 있어서 구체적 결과가 있기 전에 너무 일찍 발표해 버리면 자칫 정치공백(요즘 말하는 레임덕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관은 부마사태와 잦은 시위로 인해 80년 연두기자회견에서 그러한 계획들을 발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당시를 회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박대통령은 임기 전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지 않았고, 헌법을 고치지도 않았다. 그런 구상들을 가슴에 안고 총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의 측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수록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
첫댓글 한가지만 더 추가 할께요. 70년대 초에 이미 수도 이전도 계획 하셨고 그때는 상상도 못할 고속철 설계로 대전근방까지 한시간 거리를 예정 하셨다는군요. 봉황의 뜻을 어찌 뱁새가 알겠습니까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박대통령께선 그당시 목표가 두개있었던듯 합니다. 핵무기개발과 행정수도 백지화계획이였지요. 안타깝게도 선진국진입의 문턱에서 박대통령서거에의해 무산된거죠... 정말. 안타깝습니다.
박대통령 비서관이 70년대말에 이렇게 조언했다고 합니다."각하는 청룡상이므로 나라를 잘살게 만든 후에는 빨리 자리를 뜨셔야 합니다." 이 조언이 박대통령의 은퇴결심을 굳혔을 것으로 봅니다. 박대통령이 영구집권을 노렸다는 주장은 낭설입니다.
대단한 박정희 대통령! "님이 그립습니다.박대표님으로 정권창출을해서 꼭 님에 명예를 회복시켜 드립겠습니다."이글은 제가 문경 박대통령 하숙집에 기록한 방명록글입니다.
거짓없이 속이 쉬원-한 글입니다.경제를 국민과함께 반석위에 올려놓으려는 청치는있어도 독제와 영구집권 같은말은 경제계획 반대세력의 저항에서 꾸민 선동책들입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