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북괴군이 개입했는지 밝혀보자는 여야 합의는 작년 2월 국회 국방위에서 이뤄졌고 작년 9월 국회에서 조사하기로 했던 것이다.
진실을 밝히자고 합의해놓고 전문가인 지만원 박사를 진상조사위원으로 채택하는 것에 반대한 것은 김성태와 나경원 원내대표.
그동안 자한당은 예산안도 통과시켜주고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좌파정권의 국정농단에 사사건건 휩쓸리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당대회 모드로 빠져들었다.
이종명 의원에 대한 제명조치를 내놓음으로써 광주사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음을 드러냈다.
결국 광주문제는 역사 속의 진실을 가려내고 국군과 선량한 광주시민들의 명예를 되찾는 기회를 놓치고 자한당 집안싸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국회해산' 괜한 말이 아니다.
민간인들이 무기고를 습격해서 총기를 확보하고 교도소로 쳐들어가고 장갑차와 버스 등으로 군인과 경찰들을 죽인 것이 폭동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폭동인가?
차고 넘치는 북한군 개입 증거가 있다는데 과거따지기 좋아하는 것들이 왜 펄쩍 뛰나?
뭐가 두려워서 가치중립적 단어인 '폭동'이라는 말도 못꺼내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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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ies on the Kwangju Incident
광주사태 연구사료: 날자별, 시간별 5.18광주폭동 진행 상황
출처 ⤵️
https://www.study21.org/518/doc/index.htm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 압사시킨 사건
<검찰측 자료:(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 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날짜별, 시간별 광주폭동 진행 상황
1980년 5월 18일
● 오전 9시쯤 돌 가방을 든 시위대 1백 명 가량이 전남대 정문 앞에서 7명의 경비병들에게 돌을 던짐 (광주일보).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조선일보).
● 오전 11시30분쯤 시위대는 광주역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기동경찰이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체류탄) 발사, 해산시킴. 시위대는 흩어지면서 충장로, 대림동, 동산, 산수 등 5개 파출소를 파괴.
● 오후 3시 광주 학생회관 앞에서 폭도들이 페퍼포그차 1대를 전복시켜 화염병으로 불태움.
● 오후 5시 광주시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 2개 대대가 조선대, 전남대 등 2개 대학교와 광주교대 등 7개 전문·초급대 진주함.
● 밤 8시30분 광주 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광주향토사 군인들 막사침.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 밤 9시부터 통금한다고 지방 방송 통해 방송, 통금 실시.
5월 19일
* 시내 거의 철시, 금남로는 차량 완전통제.
* 도청 앞에서 기동경찰이 바리케이드 치고 광주향토사 군인들이 경비.
* [조총련] 카메라 기자들 눈에 띄기 시작.
오전 9시 30분 폭도들이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폭도들이 CBS차 1대, MBC차 3대, 승용차 2대를 불지르고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앞, 금남로통 등 3개소에서 군인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 한 곳에 시민·학생 2천명 정도씩.
오후 2시 20분 시위대 4천-5천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 경찰이 최루탄 발사. 폭도들이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공중전화박스, 버스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1교회 공사장 기름 2드럼에 불질러, 하나는 폭발.
오후 7시40분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폭도 1천 여명이 공중전화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스고 바리케이드 침. 경남 넘버 단 화물트럭 불지름.
오후 7시45분 폭도들이 유동에 있는 대형 아치 불지름.
시위대가 몽둥이와 곡괭이 들고 군경과 대치.
오후 9시경에는 거리에 인적 끊겨.
오후 10시 윤상원이 유포한 유언비어를 통해 광주시민이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음.
5월 20일
오전 10시 별다른 상황 없자 북한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인 "심리전" 1개대대(장발족 무장봉기군 복장)가 악성 유언비어 퍼뜨리기 시작. 폭도 버스에 경찰이 4명 죽었으며 시민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었음에도 유언비어는 경찰이 죽은 사실 숨기고 시민이 죽은 것처럼 거짓말. 상가 점포 절반은 철시.
● 치안본부 발표/ 경찰 4명 사망. 경찰 2명 중상. 임동파출소 전소.
* 요소요소에 광주향토사 군인·경찰 배치, 현저한 움직임 없음. 상가 3분의 1철시.
* 오후 2시 30분/ 군인 한 명이 적십자 병원 앞에서 죽었다는 소문-학생들이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따라가다 개천에 떨어져 시민 학생들이 돌로 쳐 죽였다고 함 (조선일보 서기자 송고).
● 오후 8시10분에 2-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금남로 도경앞 6백m 앞까지 돌진하면서 데모가 가열됨. 오늘이 고비일 것 같다. 5천-1만여 명 몰려 있다(8시40분 현재). 도청 3갈래 길이 완전히 가득차 있다. 대치망 뚫리면 도청을 방화할 가능성.
● 오후 8시50분 데모군중이 시청에 침입, 점령 (시청은 도청에서 6km 동북으로 떨어져 있음).
오후 8시부터 광주 MBC(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방송, CBS는 나와.
오후 8시 10분 무장시위대가 전남도청을 습격할 목적으로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몰려오기 시작.
오후 9시 5분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오후 9시 50분 광주MBC 건물 방화.
5월 21일 (수요일, 맑음)
오전 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무장시위대 수가 2만여명.
오전 4시 30분 폭도들이 광주KBS 건물 방화.
오전 10시 19분 : 광주세무서 건물 전소.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 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5월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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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1일 누가 먼저 총을 쐈나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는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특전사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 중위는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동석 중위
<<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교도소 습격 사건은 광주 외곽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5월 21일 야간에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부터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 이전까지는 광주에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떻게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말인가? 전남대 총무과에서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가 추정할 수 있는 사망사고 원인들은 시민군이 일으킨 사고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침투하였던 북한군이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이도록 유도했다는 증언이 있거니와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시민군이 반납하지 않은 실탄 수로 계산한다면 시민군은 하루 평균 일만 발씩 발포하였다. 그리고 희생자 총상 역시 대부분 명확하게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그간 공수부대가 누명을 써왔던 5월 27일 아침의 상무관 관들의 진실은 임수원 당시 3공수 11대대장이 증언하는 대로 그 이전부터, 그리고 전계량 5.18광주 의거 유가족 회장이 증언하는대로 5월 24일부터 이미 상무관에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진실의 토대 위에서 관찰할 때 도청진압작전시 사망자 수에 대해 과연 시민군과 계엄군 중 어느 편이 진실을 말하였는가? 시미군측 증인 정상용은 "적어도 100명 이상은 거기서 죽은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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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 - 3
첫날 18일, 도발적이고 끈질긴 저항
[이승만학당] 특강 20181026 이주천 교수
https://youtu.be/VsOaMuyQfUo
5.18 광주사태 - 4
적극적인 공세로의 전환, 19일 정황
[이승만학당] 특강 20181029 이주천 교수
https://youtu.be/AjgUV0YY9Jg
5.18 광주사태 - 5
20일 셋째날 : 전면적 민중항쟁
[이승만학당] 특강 20181114 이주천 교수
https://youtu.be/xAu1UMUo15w
5.18 광주사태 - 6
5월 21일 무장시위대의 승리와 진압군 철수
[이승만학당] 특강 20181203 이주천 교수
https://youtu.be/fx7JI7aGt4Q
누구는 태어나기 전부터 유공자였다
(국가보훈처 문서 공개 및 분석)
- 썰방 [RETURNS] 하이라이트
GZSS-TV 안정권 대표 2019-03-20
https://youtu.be/msO-m0Sqp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