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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왜 이리 마음이 심란한지 모르겠네그려."
왕기 노인은 연신 자세를 바꿔 앉았다. 비스듬히 모로 앉기도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바로 앉기도 했다. 다리를 꼬기도
하고, 무릎 사이를 활짝 벌리기도 했다.
'무정, 무정... 지옥일정(地獄一定)... 죄업이 무거워 반드시
지옥에 가야 한다. 반드시 삼악도에 들어야 한다.'
반여량은 독해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왕기의 집에 들른 것도 잘못이지만, 감여를 해준 것은 더더욱
잘못되었다. 그들은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단지 인정상 잘못
된 부분을 잡아 준 것이다. 사부가 감여를 해주었다는 말에 마
음이 굳어졌지만, 사실은 이미 그 전에 감여를 해주기로 작정
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도와 주면 살
수 있다 할지라도 돈을 내지 않는다면 도와주지 않으련다. 그
런데 왜 그게 안 될까? 남들은 그리 쉽게 독해지는데...
"여보게, 우리 술 한 잔 하고 가면 안 되겠는가?"
왕기는 심사가 영 불편한지 그다지 즐기지 않는 술을 찾았다.
'술이라...'
담대한 인간이든 소심한 인간이든 마음이 불안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같은 핏줄끼리는 서로 당기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런 점을 의식하고 사는 인간은 몇 되지 않
았다.
그것이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가까운 누군가가 그를 잡아당기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일일 수도 있다. 하는 일이 순리에 어긋
나거나 무모하다면 그 또한 마음이 불안해진다.
마음은 사람들 속에서 자란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뚜렷한 제 목소리를 들려준다.
변화가 없는 곳에는 마음도 없다. 왕기에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리라.
반여량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급한 것은 없었다. 곽가장 야산에서 느낀 음기는 오급
산으로 이어졌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반여량이 할 일은 없었
다. 아니다. 목적지가 파양호 강랑산이 틀림없는 이상 빙빙 돌
더라도 칠백육십리 길. 쉬엄쉬엄 간다 할지라도 보름이면 충분
하다. 그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산천경계를 즐기면 은화 백 냥
이 손에 들어온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
이문(利文)이 가장 많이 남는 장사는 역시 돈장사다. 염왕채
(閻王債:고리대)를 놓는 거야. 세상은 약육강식(弱肉强食). 어
차피 못난 인간은 못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눈물을 쏟
아 낸다고 누가 외눈 하나 깜짝 하던가 말이다.
반여량은 결심을 굳히면서도 진흙 구덩이에 파묻힌 듯 마음이
답답했다.
- 인간은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자연을 이용하려면 먼저
자연이 무궁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인간은 왜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마음을 밀폐시켰기 때문이다. 뇌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호수에
고인 물처럼 정체시켰기 때문이다.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고
인 물은 썩기 마련.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새롭게
끊임없이 사용해야 한다
의념(意念)을 집중하라.
영(靈)과 혼(魂)이 깨끗해지고 오장육부가 원활히 작용한다고
믿어라. 자연의 기운이 호흡을 따라 몸 속으로 흘러든다고 믿
어라.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 산천초목의 모든 기운이 흡입된다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선한 기운이 체내로 스며들고 탁한
기운은 빠져 나간다고 생각하라.
철이 들면서 제일 먼저 들은 소리였다.
- 자연의 소리를 듣되 몸 안의 중심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내 집에서는 내가 주인이어야 한다.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된
다면 이성(理性)을 놓치게 되고, 종국에는 광인이 되고 말 것
이다.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자리한 큰 바위
처럼 굳고 탄탄한 자리를 만들어라.
사부는 제단(祭壇)에 풋과일을 차려 놓고 하늘과 땅과 조상에
게 절을 올린 다음 자신과 반여량의 손목을 붉은 홍사(紅絲)로
묶었다. 그리고 예리한 칼로 홍사의 한가운데를 단숨에 끊어버
렸다.
묶고 끊는 단순한 일. 인간의 자식이 아닌 자연의 자식으로 돌
아가는 의식이었다.
반여량에게 부모가 있다면 부모가 치러야 할 의식이지만 홀홀
단신인 관계로 사부가 대리부 역활을 했다.
신에게 자식을 바칩니다. 이제 신의 영을 내려 주시던가 아니
면 혼을 거둬가소서.
자연의 소리는 여간해서 들을 수 없었다
시냇물이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결에 휘날리
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고 무아(無我)의
상태로 앉아 있으면 자연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새싹이 돋아나는 소리, 바위가 세월에 삭는 소리, 얼음이 풀리
는 소리, 나무가 지기(地氣)를 흡입하는 소리...
착각일 수도 있다. 환상일 수도 있다. 세인들 말마따나, 미쳤
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부가 거둬들인 네 아이 중 반여량을
제외한 세 아이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폐인(廢人)이 되고 말았
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한 번 들리기 시작한 소리는 산 위에서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
어났다. 듣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아도 들어야하고,
귀청이 찢어지는 아픔에 몸부림쳐도 들어야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들어온 온갖 소리들은 마치 미친 망아지처럼 곳곳
을 누비고 다녔다. 주체할 수 없었다.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
었다. 사부의 말대로 몸 안에 중심이 없는 까닭이었다.
삭풍(朔風)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 몫이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 거센
폭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잡다한 소리에 부대끼면서 튼튼한
반석을 만들어야 한다. 성공하면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이고,
실패하면 정신을 영원히 놓아 버리고 만다.
반여량은 스물네 살에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사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만큼 뇌
력이 강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 하지만.
자연은 순응(順應)을 요구한다. 역행(逆行)하면 자연은 침묵한
다.
지금이 그랬다.
참되고, 밝고, 온화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 그러나 반여량은 역행하려 한다. 거기에 어떠한 잘못도
느끼지 못했다. 한한에게 버림받은 충격은 스물여섯 해를 살아
오면서 듣고 배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한한이 곁에 있을 적에는 돈을 버는 목적이 있었다. 사부 몰래
그토록 금지시킨 감여를 하였어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한
한이 웃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투성이의 마음만 남았다.
그래도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살아갈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
다.
감여가는 한 곳에 거주하지 못한다.
하늘을 지붕 삼아 구름을 이부자리 삼아 천하를 떠돌며 명당이
라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굶어 죽어야
하고, 맹수를 만나서 잡혀 먹히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
이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심심산골을 찾아다닌다. 세상에서
무인들만큼이나 고독하고 쓸쓸한 직업이랄까.
사부는 평생 동안 그 길을 걸어왔다. 자신에게도 그 길을 걸어
가 달라 부탁하고 운명하셨다. 올바른 감여가가 되라고.
그러면 되지 않는가.
마음의 절반을 차지한 생각이었다.
어림없는 소리.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지 않았는가. 자신은 또 어떤가. 사랑하는 여인마저 빼
앗기지 않았는가. 목표는 필요 없다.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겠
느냐는 사치스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우선은 벌어
라. 독하게 마음먹고 부지런히 벌어라.
마음의 또 다른 절반은 증오와 분노가 차지했다.
* * *
파파팟!
능공십자 학구는 소리없이 짓쳐오는 검광(劍光)을 역시 소리없
이 마주쳐갔다.
쓰윽!
"..."
소리없는 죽음이 뒤를 받쳤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상대는 입을 열지 않았
다. 벙어리라도 비명을 지르게 되어 있거늘.
"차앗!"
"타앗!"
여기저기서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전부 양대원(陽隊員)
이 지르는 고함이었다. 상대는 일체 말이 없었다.
검은 무복을 입고 야밤에만 급습하는 적.
남창부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벌써 여섯 차례나 치른 접전이었
다. 덕분에 양대원은 간밤을 꼬박 밝혔고, 오늘밤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할 판이었다.
학구는 검에 묻은 핏물을 허공에 뿌려 버리고, 부대주 현빙검
(玄氷劍) 고장복(高長福)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역시
지금 막 옆구리를 찔러 오는 검빛을 제치고 목을 베어 내는 찰
나였다.
"당주님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
"음...! 없어."
고장복의 음성은 약간 떨려 나왔다. 방금 치른 일전에서 옆구
리에 적지 않은 검상을 입은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수없
이 넘나든 백전노장의 몸에 칼집을 새겨 놓은 적.
학구는 상대를 인정했다.
결코 비수당에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무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사(生死)를 도외시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오히려 암습
(暗襲) 면에서는 한 수 뛰어난 것 같았다.
접전을 여섯 차례 치르는 동안 베어 넘긴 적은 서른네다섯 명,
그에 반해 살상된 비수당원은 스물여덟 명,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대원까지 합하면 절반에 가까웠
다.
이틀 밤을 싸운 것치고는 엄청난 고전(苦戰)이었다. 거기에 더
황당한 것은 상대를 전혀 모른다는 것. 쳐오면 맞받아치고, 침
묵하면 기다려야 했다.
'부닥쳐 오면 깨트리고, 막으면 뚫을 뿐입니다.'
말이 씨가 된 셈인가?
"중상자(中傷者)는 남고, 경상자(輕傷者)는 따라간다. 대원을
다섯조로 나눠라. 일조(一組)씩 교대로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휴식한다. 술도 꺼내서 나눠 줘라.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되니
까. 과음(過飮)은 삼가하도록."
학구는 모든 대원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망전(亡戰)이다. 이럴 경우 되도록 빨
리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원칙이다. 인원도, 무공도, 왜 공격
하는지도 모르고 맞받아치기만 한다면 몰살위험까지 각오해야
한다.
혈육로에서 친구를 베며 터득한 교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비수당이 외곽(外廓)을 풀어
주면 적은 곧바로 일심각 무인들을 공격하리라. 미운 놈들이지
만 명령을 받은 이상 보호해야 한다.
고장복이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않고 수하들 틈에 섞여들었다.
"이놈들!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게 엊그제인데... 대주
님의 명이 계셨다. 과음은 삼가하고, 피로를 푸는 선에서 마셔
도 좋다."
함성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신출내기라면 모를까, 비수 당원들은 지금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적은 언제 또 공격해올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이 순
간에도 독사처럼 풀숲을 헤쳐오고 있는지도. 아니면 저 나무
위, 저 바위 뒤, 저 계곡물 속에 숨어 있는지도.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는 대원은 없었다.
상처가 중한 자이건 경한 자이건, 경계를 서는 자이건 서지 않
는 자이건, 모두 호로 하나씩을 받아들고 입 속에 털어 넣었
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대원이 팔이 잘
리고 목이 잘려 드러누웠지 않은가. 검에는 붉은 핏물이 흐르
고 손에는 아직도 뼈를 가르던 감촉이 남아 자르르 울려오지
않는가 말이다. 심장도 거세게 뛰었다. 눈알은 씨뻘겋게 충혈
되었고, 마음속에서는 알지 못할 공포가 스멀거렸다.
죽음... 이것은 사람을 죽여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발만 실족
하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검은 동공으로 휘말릴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말할 자격조차 없다.
술은 용기를 북돋워 준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동료가 있어도 과
감히 시신을 뛰어넘어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지금 비수당원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휴후!"
수하들이 얼마나 상했는지 꼼꼼히 돌아본 고장복이 학구 곁에
주저앉으며 긴 한숨을 불어 냈다.
"어떻게 된 거지? 남창이 지척인데... 곽가장을 안중에 두지
않는 적, 그리고 소식조차 보내 주지 않는 장주님. 감여가 한
명에 일심각 무인과 비수당 양대 전원이라... 도대체 무슨 일
을 맡은 거야?"
고장복이 금창약(金創藥)을 찍어 바르며 물어왔다. 갈비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심한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상 한 번 찌
푸리지 않았다. 만약 상처가 너무 중하니 돌아가라는 말을 하
면, 그는 검을 들고 비무를 청할 사람이었다.
"단지 일심각을 따르라는 분부이셨다. 그런데 이게..."
"검법이 낯설어. 처음보는 검법이었어. 끄응!"
기어이 고장복의 입에서 비음(鼻音)이 터져 나왔다.
"강서무림의 검법은 아냐. 아니 중원 전역을 통털어도 비수당
양대를 이렇게 박살 낼 정도라면 적어도 구파일방 정도는 되어
야해."
"내 생각도 그래. 나와 검을 마주친 놈. 적어도 나보다 하수는
아니었어. 다시 부딪친다면 승부를 장담하지 못해. 미칠 노릇
이군. 이거야 원 장님이 문고리 잡기 아닌가?"
능공십자와 현빙검은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뜻을 같이하여 곽가장에 입문했고, 무용
(武勇)이 탁월하여 비수당원으로 차출되었다.
혈육로는 잔인했다.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내 한
목숨 부지하기도 급급했다. 그러나 능공십자와 현빙검은 혈육
로를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일 장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살아 남은 여덟 명 중 두 명. 십오 년 세월이 흐른 지금 각기
비수당 대주와 부대주를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장에서는 왜 아직 연락이 없지? 이대로 가다가는 나흘을 버티
지 못해."
"제길! 밤에는 죽어라 싸우고 낮에는 부지런히 쫓아가고... 다
행히 반여량 그놈이 천천히 가니 망정이지."
"전서(傳書)! 전서를 받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으음...! 그럴... 가능성도 있어."
백 명이 출발해서 절반이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전서를 전하러
간 수하도 무사히 도착했다고 단정 내리기는 어렵다.
"네가 가라."
"뭐라고! 이 자식이!"
"대주로서 명령한다. 네가 가!"
"빌어먹을... 대주. 지금 명령이라고 말했냐?"
"후후! 임마,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 네 손에 내 목숨을 건 거
야. 장에서 나흘 안에 조처를 취해 주지 않으면... 비수당 양
대가 처음으로 꺾인다. 나도 죽어. 양대와 운명을 같이할 테니
까."
"끄응...!"
현빙검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친우의 말은 정확했다. 비수당
양대는 앞으로 나흘을 버티지 못하리라.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
가 있으니까. 그것보다 급습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얼마나 더 강한 고수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부엉이의 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느낌과 동시에 발검(拔劍)으로 이어
지는 능공십자가 펼쳐졌다.
쉬익! 싸아악...!
역시 들리지 않는 비명 소리.
'이것으로 일곱 차례...'
이번에 급습한 암습자는 단 세 명뿐이었다. 하지만 비수당 전
원을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능공십자에게 죽은 일 인
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은 각기 동반자를 만들었다.
이번 싸움도 비수당의 손해였다.
현빙검 고장복은 수하 네 명을 데리고 곽가장으로 발길을 돌렸
다.
"제길! 감여가 나부랭이를 따라가라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
았어. 게다가 일심각이라니. 그 잘난 놈들 혼자 하라고 내버려
둘 것이지."
검을 뽑으면 항시 슬픈 곡소리가 울린다 하여 현빙검이라는 작
호를 얻은 고장복도 머리털이 쭈뼛서는 긴장감에서 헤어 나오
지 못했다.
수많은 암습을 받아봤지만 이토록 은밀하고 신속한 암습은 처
음이었다. 마치 형체가 없는 귀신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검날
을 따라 전달되는 묵직한 촉감만 아니라면 귀신으로 치부해도
좋을 성싶었다.
풀잎에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다니. 공격 직전에
내뱉는 가느다란 호흡은 누구도 예외가 없는데.
"정신들 바싹 차려라. 우리에게 형제들 목숨이 달렸다 생각하
고."
특별히 당부할 필요도 없었다.
기습은 반드시 피를 불렀다. 놈들만 흘리는 피라면 상관없겠지
만 이쪽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반드시 그랬다.
쉬익! 쉬이익!
일행은 한시도 쉬지 않고 신법을 전개했다.
멀리 산자락이 거한의 몸뚱이처럼 떡 하니 앞을 가로막았다.
멀지도 않다. 저 산자락을 끼고 돌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는 남창부 시가지가 나타난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조금만...'
고장복은 옆구리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오
한(惡寒)도 치밀고, 입술도 바짝 말랐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
을 수 있다. 어디 검에 맞아본 것이 한두 번이던가.
'호호호! 당신은 마치 파란(破爛:넝마) 같아요.'
'파란?'
'당신 몸 말예요. 이리저리 검에 베인 상처가 꼭 못 쓰는 헝겊
들을 모아서 기워놓은 것 같단 말예요.'
매번 당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현
기증이었다. 특히 이번처럼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시간이 없을
때는 흘러내리는 출혈 때문에 더욱 심하게 어지러웠다.
고장복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순
간,
슈욱! 슈우욱...!
갑자기 눈앞에서 한성(寒星)이 흘렀다. 환상 같기도 했고, 착
각으로도 여겨져 자연스럽게 눈을 감게 될 흐름이었다. 그러나
고장복은 습관대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쉬익! 까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음향을 토해 냈다.
고장복은 호방한 검법을 애용했다. 하지만 나이가 중년으로 접
어들면서 또다른 검의 맛을 알았고, 체득하지 못하던 삼혼검법
의 오의도 깨닫는 중이었다. 따라서 그의 검법도 점차로 정교
하고 쾌속하게 변해갔다.
검이 부딪쳐서는 안 된다.
비수당 검법은 살검(殺劍), 모양새는 필요 없다. 일검에 적의
숨통을 잘라내야 한다.
고장복은 위기를 느끼고 허리를 낮게 수그렸다.
아니나다를까 머리 위를 스쳐 지나는 검바람이 머리카락 몇 올
을 잘라냈다.
'동자료에서 예풍혈로 빗겨치는 검, 이놈들은...'
그렇다. 흑의인들이 사용하는 검법은 빗겨치는 검이었다. 그렇
다면 차라리 도(刀)가 더 나으리라. 하지만 검을 사용한다. 전
문적으로 살검을 전수받은 자들이다.
고장복은 크게 휘둘려지는 검날을 피함과 동시에 밑으로 처진
검을 끌어올려 가슴을 찔러갔다. 상대의 몸이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면 순식간에 검법이 변화하여 두 손목을 베어 내리라.
'아!'
탄성은 울림이 되지 못했다.
상대는 검을 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을 바싹 끌어
당겨 옆구리를 베어 왔다.
푸욱...! 사각...!
손끝에 느껴지는 짜릿한 감촉, 그리고 코에 익숙해진 비릿한
혈향, 순간적이지만 눈앞에 흩뿌려지는 피보라.
"크윽!"
상대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고장복은 심혼이 부르
르 떨리는 신음을 토해 냈다. 왼쪽 장문혈에 이은 오른쪽 장문
혈의 검상. 이건 치명적이었다.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상대가 쓰러졌다.
고장복은 오른쪽 반신이 자르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해진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신속하게 사방을 휘둘러 보아 상황을 판단했다.
둘, 둘이 당했다.
공격한 인원은 세 명, 그들은 물론 죽었다. 하지만 이쪽도 두
명이 죽고, 자신은 거동하기조차 힘든 중상을 입었다. 더군다
나 양쪽 장문혈이 다 상해서는 운공(運功)도 용이하지 못하다.
"가라."
"부대주!"
"빨리 가라. 섬섬! 장담을 못하겠구나. 너희들이 살아서 곽가
장에 들어갈 수 있을지. 하지만 되도록이면... 살아 남아라.
비수당 양대가 너희 어깨에 달려 있다."
오십 리 길이 천 리 길처럼 멀게 느껴질 줄이야. 아니, 구만
리 길을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떠나야하리라.
"부대주, 그럼!"
수하들은 애끓는 표정으로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 후 신속하게
신형을 날렸다.
휘이잉! 휘익...!
여름치고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거 영 꼴이 말이 아니군.'
고장복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환단을 꺼내 여덟 알 모두
입안에 털어 넣고 어적거렸다. 약간 씁쓸한 맛과 함께 청량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에 번져갔다.
기분일 뿐이다.
운공을 하지 못하는 한 환단의 약효가 체내에 퍼지려면 적어도
사 나흘은 걸릴 것이다.
겉옷을 찢어 상처를 닦은 다음 금창약을 바르려던 참이었다.
뒷머리를 끌어당기는 듯한 섬뜩함.
고장복은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등뒤로 후려쳤다. 현빙검이라
는 작호를 안겨다 준 삼혼검법 쾌오식(快五式) 지상지로(地上
指路)였다.
그러나,
휘잉...!
등뒤에는 여전히 찬바람만 불었다. 아니, 한 사람이 더 있었
다. 그 동안 자신들을 암습했던 흑의인들과 같은 옷을 입은 사
내. 그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삼 장 너머에 서 있었다.
"놀랍군. 여덟 명이나 베었어. 너는 너무 많은 피해를 주었
다."
사내의 음성은 갈가마귀 수십 마리가 까악대는 듯 몹시 탁하고
걸쭉했다. 어찌 들으면 젊은 나이인 것 같고, 또 어찌 들으면
팔십 노인인 것 같고. 소리만 듣고서는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
었다.
"섬섬! 겨우 여덟 명인가? 아직도 한 명은 더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을 하면서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은근히 내력을 끌어 올
려 보았지만 역시 무리였다. 양쪽 장문혈이 망가져 삼류 무인
도 상대하기 벅찰 지경이었다.
고장복은 주저앉고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무리야. 그 몸으로는... 곽가장 무공의 총화(總和)는 삼혼검
법, 삼검(三劍) 이십사식(二十四式)이지. 쾌(快) 팔식(八式),
중(重) 팔식(八式), 환(幻) 팔식(八式). 너희는 쾌(快)와 중
(重)에 치중했어. 쾌팔식은 사당 공통이고, 양대는 중팔식을
음대는 환팔식을 익혔지."
"많이 아는군."
검을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이 싸움은 승산이 없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
不殆)라는데 상대는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
다. 하지만 자신들은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무명(武名)을 알고 싶다."
"가르쳐 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혈함망(血含 )!"
"입 안 가득히 피를 머금은 구렁이라. 들어보지 못한 무명인
데?"
"당연하지."
"검초(劍超)는?"
자칭 혈함망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현빙검. 네가 능공십자에게 밀린 것은 말이 많기 때문이야."
"나를 아는군."
"능공십자라면 벌써 검을 날려 왔어. 말하는 동안 허점을 두
곳이나 보였거든."
"맞아. 그리고 나도 능공십자처럼 성격이 급해."
쉬익!
고장복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형을 쏘아 냈다.
젖 먹던 기력까지 다 뽑아낸 마지막 일격이었다. 이 일초가 어
긋나면... 다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일초, 상대
를 반드시 격살시킬 수 있는 일초.
중팔식 중 마지막 팔초, 명진천하(名震天下)!
- 쾌를 익히는 방법은 수련(水練)이 좋다. 물살을 가르매 한
점파문이 일지 않는다면 비로소 득쾌(得快)했다고 말할 수 있
다. 중을 익히는 방법은 암련(巖練)이 좋다. 바위를 가르매 부
스러짐이 없다면 득중(得重)했다고 말해도 된다.
수없이 지껄인 말이 아니던가.
수하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다뤘는데 하물며 부대주가 되어가지
고.
신형을 하늘로 띄운 고장복은 검을 수직으로 꺾어 덮쳐들었다.
두 발을 잔뜩 움츠려 가슴에 붙인 상태인지라 마치 하늘에서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수리 같았다.
슈우욱...!
흑의인의 검법도 다른 흑의인들과 마찬가지로 베는 검법이었
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섭도록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
반경 일 장을 가득 메운 검기(劍氣)를 무시하고, 검을 번쩍 들
어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리고 그 검은 정확히 회음혈
(會陰穴)을 가르며 지나갔다.
"커억!"
고장복은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참담한 비명
을 토해 냈다.
'여보, 오늘이 지음(芝音)이 생일인 것 알죠?'
'아빠, 오늘은 술 먹고 들어오면 안돼.'
처자식이라도 보고 올 것을.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영면식을 치른 놈이 죽는 마당에 식
솔을 생각하다니. 더군다나 부대주가. 그러나 어쩌랴 방긋 웃
는 아내와 하나뿐이라 애지중지하던 아들놈이 눈앞에 아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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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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