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 기행
2015. 7. 금계
7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나는 집 밖으로 나와 김 선생 차를 기다린다. 건너편 울타리에 무궁화가 곱게 피었다. 나는 저렇게 분홍색이 섞인 무궁화를 좋아한다.
드디어 김종승 선생 차가 우리 집 앞에 닿았다. 하루 놀고, 하루 쉬고, 퇴직하여 날마다가 공휴일인, 그래서 EH(Everyday Holyday) 회원인 나와 유 선생과 김 선생 셋이서 장흥 탐진댐 드라이브를 하기로 한 날이다.
나는 차 앞자리에 앉자마자,
“지금 내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네.”
자랑을 늘어놓았다.
“왜냐고? 어제 전대 병원 이비과에 갔더니.......”
나는 벌써 서너 달째 중이염에다 비염에다 이석증(耳石症)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목포에서 두세 군데 다니면서 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전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궁리 끝에 큰 맘 먹고 어제는 광주에 있는 전대 병원까지 찾아 나선 길이었다. “세 군데 중 현재 어디가 가장 힘드십니까?”
레지던트로 보이는 의사가 물었다.
“이석증이 가장 힘들어요.”
귓속 달팽이관 부근에 이석(작은 돌)이 들어 있는 기관이 있다. 거기가 몸의 수평 수직을 가늠해주는 자이로스코프인 셈이다. 그 돌들이 지정 좌석을 이탈했다. 고개를 잘못 돌리거나 눕거나 일어나면 지구가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럽다. 그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 침대로 와서 누워보세요.”
침대에 눕자 의사는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끼어 잡아 각도를 조정하면서 눕혔다가 일으키기를 반복했다. 그 때마다 저절로 비명이 터질 만큼 어지러웠다. 대여섯 번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어가며 내 몸과 머리를 조종하더니,
“됐어요. 안 어지럽지요? 이제 큰 돌을 제자리에 넣어놨으니 괜찮을 거예요.”
정말 그 다음부터는 어지럼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목포에서 서너 달을 다녀도 낫지 못한 병이 전대 병원에서는 오 분 만에 나았다. 나는 목포 병원들한테 조금 섭섭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좀 더 일찍 전대 병원을 찾았더라면 어질어질 몸이 공중에 흔들리는 고통을 그토록 오랜 동안 겪지 않았을 텐데 후회막심이었다.
“왜 내가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인지 알겄제? 오늘같이 좋은 날 어질어질하고 다녔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복지관에서 요가 수업을 마친 유 선생을 실은 다음 차는 장흥 탐진 댐을 향하여 기운차게 출발하였다.
한 시간쯤 걸려 탐진 댐 전망대 도착. 탐진 댐은 완공된 지 5년쯤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목포에서도 하당 사람들은 탐진 댐 물을 먹고 구시가지 사람들은 주암 댐 물을 먹는다.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도 탐진 댐 물을 먹고 싶은데....... 아무래도 탐진 댐 물이 더 맑을 것 같았다.
탐진 댐 상류에 보림사라는 절이 있다. 25년 전 고향이 장흥인 매제의 소개를 받은 이후 우리 가족은 십여 년 가까이 보림사에서 일 킬로쯤 아래로 내려온 계곡으로 여름철마다 피서를 다녔다. 아직 우리 세 아들들이 초등학생, 중학생일 무렵이었다. 우리는 보림사 아래 계곡에 텐트를 치고 삼박사일 아니면 이박삼일씩 계곡물을 떠서 밥을 지어먹으며 낚시를 즐겼다. 산골짜기 냇물이라고 얕볼 일이 아니었다. 피라미나 빠가사리(동자개)나 메기를 잡아 튀김도 해 먹고 탕도 끓여 먹었다. 피라미 중에서는 현지인들이 ‘보리피리’라고 부르는 거물도 있어서 길이가 거의 20센티에 육박하였다.
여름이면 가끔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가 노는 계곡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더라도 상류 지역에 소나기가 퍼부으면 삼십 분 후에는 누런 황톳물이 쏟아져 내려와 계곡을 가득 채우며 넘실거렸다. 심하면 바윗돌까지 휩쓸려 내려왔다. 칠흑 같은 오밤중에 우레가 울리고 번갯불이 번쩍거리면 우리 내외는 계곡 높은 곳에 친 텐트 속에서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나 옆 텐트에 드러누운 세 아들들은 무섭지도 않는지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렸다.
우리 가족의 낚시터 바로 아래에는 보가 막아져서 헤엄을 치고 놀기도 좋아 여름이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피서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자연히 부근에 식당도 들어서고 제법 번성하였는데 탐진 댐이 들어서면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물론 식당이나 편의 시설도 자취를 감추어 쓸쓸한 폐허가 되었다.
나는 탐진 댐 전망대 철책에 기대어 서서 보림사 계곡의 보리피리를 낚아 올리던 손맛을 그리워하고 적막한 밤의 고요를 찢던 뇌성벽력과 찰나를 밝히던 번갯불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때가 있는 법이어서 내가 그리워하거나 말거나 한번 지나간 세월은 그걸로 그만이다. 영원불변하는 사물은 없다. 시간의 혓바닥이 핥고 지나간 다음이면 바위도 부서지고 쇠도 녹슬고 다이아몬드도 삭는다. 시간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다음이면 낚시터도 사라지고 통닭집도 사라지고 피서객도 사라진다.
하기야 인류의 종말도 멀지 않았다. 수십 억 년이 흐르면 지구도 사라지고 태양도 사라진다. 인류의 눈으로 보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일지 몰라도 하느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전교조 목포 지회장을 맡고 있는 고윤혁 선생의 전화.
“선생님, 오늘 김 선생이랑 탐진 댐 가신다면서요. 전에 초등지회장 하던 박기홍 선생이 거기 유치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어요. 잘 모르시겠어요?”
“글쎄, 가물가물한데. 키 좀 크고 머리 곱슬곱슬헌 사람인가?‘
“맞아요. 꼭 들려보세요.”
“그럴까?”
전교조 한다고 교감 못 하란 법은 없다. 하기야 한상준 정연국 선생은 교장도 했고, 심경섭 박인숙 선생은 교육장도 했고, 장휘국 선생은 위대한 광주 시민들이 두 번씩이나 교육감으로 뽑아주었다. 몇 번 더 전화가 오고간 끝에 결국 우리는 탐진 댐에서 가까운 유치초등학교에 가서 박기홍 교감을 만났다.
유치초중학교! 학교 이름이 요상타. 초등학생 20여 명, 중학생 20여 명, 게다가 유치원까지 있으니 한 지붕 세 가족인 셈이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요 시골 농촌의 현실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0년 전에는 농업 인구가 나라 전체의 80% 언저리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내남없이 도회지로 봇짐을 싸다 보니 농촌은 적막강산이 되었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치고 힘없는 노인들만 처지다보니 농자천하지대본도 옛말이 되고 말았다.
탐진 댐이 생기면서 유치면 소재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새로 지은 학교란다. 적은 숫자나마 학생들이 한곳에 오붓이 모인 것이 아니라 통학버스 두 대가 광범위한 산골짜기 이곳저곳을 달리면서 날마다 초등학생 중학생 섞어서 실어 나르기에 바쁘단다.
유치초중학교 운동장 가 옹벽에 그린 벽화가 눈에 쏙 들어오게 유치찬란하다. 물신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작금의 세태가 그래서 그렇지, 사실 사람 살기는 도회지나 시골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궁벽한 시골 학교의 소년 소녀들도 도회지 학생들과 똑같이 찬란한 무지갯빛 꿈을 머금고 비온 뒤 오이 자라듯 무럭무럭 구김살 없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나가고 있다. 사실 어떤 학자들은 초등학교는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는 중소도시에서, 대학교는 대도시에서 다니는 것이 인성이나 감성이나 정서 발달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은 교사도 도회지 학교보다는 시골 학교에 근무하는 것이 훨씬 개미(오묘하고 교묘한 맛)가 있다.
박기홍 교감이 미리 예약을 해 놓았단다. 우리는 박 교감 차를 타고 통닭집으로 갔다. 보림사가 멀지 않은 계곡이었다. 아무데나 이토록 맑은 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물은 석회도 들어 있지 않고 그냥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는 복 받은 물이다. 내가 돌아본 중국이나 터키나 유럽은 죄다 석회 때문에 그냥 물을 떠 마시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장 아주머니가 손님이 네 명이라서 중닭을 잡았다고 설명해준다. 물론 그 집에서 기른 닭이다. 닭이 양계장 닭인지 토종닭인지, 또 토종닭이라면 어느 정도 토종닭인지 길게 따질 필요는 없다. 혀가 가장 확실한 증인이다. 말보다는 혀가 먼저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다. 유 선생 말에 의하자면 양계장 닭하고 토종닭하고 구별하는 방법은 껍질이다. 양계장 닭은 껍질이 기름기가 흐벅지게 많고 느글느글해서 맛이 떨어지는데 토종닭 껍질은 기름기가 적고 감칠맛이 나서 양계장 닭하고는 천양지판이다. 거기에 내 설명을 덧붙이자면 양계장 닭은 뼈를 먹을 수 없지만 집에서 놔먹인 닭은 뼈를 깨물면 달키하고 고소한 즙이 나온다. 또 있다. 양계장 닭은 날계란을 먹기 어렵지만 토종닭은 날계란 맛이 고소해서 몇 개씩 먹어도 끄떡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