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8)
화가 이우환은 어릴 적 어머니와의 대화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는 쌀을 씻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매일 똑 같은 쌀 씻기를 하면서 어떻게 즐거우실 수 있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똑 같은 쌀 씻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 일을 할 때마다 매일 다르게 느낀다고.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생기를 주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흥이 오르기도 한다고. 쌀과 물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잘 움직일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매일 쌀 씻는 것이 항상 새롭다고. 어린 후환의 눈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쌀 씻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쌀 씻기는 매일, 매 순간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예술적 행위라고 부른다.
(31)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평생에 이뤄지는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뿐인 일. 이 말은 차 마시는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다도(茶道)에서 쓰인다. 어제도 차를 마셨고 엊그제 역시 차를 마셨지만, 차를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임을 가슴에 새겨 차 한 모금을 아주 새롭게 음미한다는 마음의 자세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한 인간이 지닌 지성의 문제로,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알려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이 내면에 지닌 지성으로 해내는 일이다. 우리의 일상이, 삶이 아무리 매일 반복되더라도 매 순간은 진실로 새로운 순간이다. 우리가 지성을 발휘해 그 진실을 매일 매 순간 의식하려 노력한다면, 무미건조하게 여기던 것들 것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색과 형과 향을 지닌 꽃이 피어날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예술이 피어날지 모른다.
(51)
삶과 예술, 예술과 삶. 이 둘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술은 우주 어딘가에 지구로 떨어진 출처가 불분명한 운석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술은 분명히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온 아기가 엄마를 빼닮듯,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예술이 인간과 삶을 쏙 빼닮지 않을 수는 없다. 아이가 엄마의 정수를 담고 있듯, 예술은 인간과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
(62)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정말 <모나리자>를 봤는지, <모나리자>를 누가 언제 그렸는지,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떻게 살았는지, 화가가 살던 시대상은 어땠는지, 그를 후원해 준 사람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모나리자>라는 작품에서 파생되는 나오는’ 지식을 알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모나리자>라는 그림 자체, 그 이미지 자체, 그 물리적 대상 자체를 진심으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기 위해 노력했는지 묻는 것이다. 예술작품 하나를 몸으로 만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심을 다해 보고 듣고 감각하며 생각하고 느끼는 체험을 했는가 묻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체험의 과정 속에서 당신만의 독창적인 ‘의미’가 내면에서 샘솟듯, 꽃피듯 생성되었다면, 그 작품은 평생 당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당신 스스로 창조한 ‘의미’와 함께 생생히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당신의 기억 속에 생생히, 또렷이 남아 있는 ‘본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정신을,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구성할 것이다.
(70)
50대에 그의 내면을 물감으로 물질화한 이 자화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한껏 찌푸린 미간과 꼿꼿이 당겨 세운 하관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삶의 난관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가 엿보임과 동시에, 검고 큰 눈동자에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감지되어 때문이다. 중년이 되어 맞닥뜨린 어떤 난관의 거친 파도 앞에서 렘브란트는 전의를 불태우려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그는 그런 내면의 심정을 숨김없이 마주했고, 속속들이 자화상에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50여 년을 산 한 화가의 자아 성찰의 힘과 진정성을 발견한다.
(94)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무지한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영영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 번데기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 번데기 속에서 누군가는 자기만의 해답을 발견해 찢고 나와 나비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실패하기도 한다. 물론,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다면 끝내 나비가 될 수도 있다. 애벌레가 번데기 껍질을 까고 나와 나비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는 온전히 애벌레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 어디쯤에 있을까?
(112)
그렇다. 이 모든 행위는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것이다. 나태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행위에 골몰할 힘을 얻게 된다. 내 눈을 넘어 오감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뒤흔드는 작품을 만났을 때,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것을 영혼이 흠뻑 젖을 때까지 감각하고 생각하고 느낄 한없는 시간의 여유를 창조할 수 있다. 그 작품과 대화를 나눈 뒤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나태해지는 시간의 공터를 습관처럼 만들어놓을 수 있다면, 당신을 흔들었던 그 작품은 당신의 삶과 맞물리며 어느 날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 작품을 마음속으로 붙잡아 한껏 곱씹어 보며 진정 내 영혼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태한 시간이 모여 당신의 기억을 구성하고, 나아가 당신의 내면, 당신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구성할 것이다.
(148)
예술가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에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부터 예술이라는 ‘삶의 꽃’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겐 무언가에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대량생산된 물감으로 오밀조밀 칠해진 화면을 보며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버려진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그러모아 만든 독특한 구조물을 보며 색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62)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라는 평범한 이가 바다를 매 순간 낯설게 보고자 노력하며 그것의 숨겨진 미를 매 순간 새롭게 발견하고 감동하는 일상. 그 낯설게 보는 눈으로 미술관에 가 작품의 숨겨진 미를 새롭게 발견하며 미적, 지적 쾌감을 느끼는 일상. 그 눈으로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미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기쁨. 그 눈으로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고 항상 감사히 여기는 풍요. 그 눈으로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놀라운 마법.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마법 같은 일상과 삶이 먼 곳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낯설게 보고자 하면, 모든 것에서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샘솟아 나는 마법이, 예술이 펼쳐지니 말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237)
예술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 이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오직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체험뿐이라고. 내가 하는 체험만이 지금과 내일의 나를 빚는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251)
미술작품에는 정답이 없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작품이 어떤 것도 말해주기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품 스스로 이 작품은 이런저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이 지닌 이런 특징을 일상의 관성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것은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고,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면 되는지 즉각적으로 알려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느끼면 되는지까지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사소통 방식은 참 쉽고 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정신적 활동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고,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생각하고 느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거나 혹은 떠먹여 주기까지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는 것과 같다.
(261)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 예술을 창안해 낸 우리 인간의 삶 역시 정답이 없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예술이 무엇인지’를 먼저 스스로 정의해야 하듯, 삶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당연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가르쳐둔다 한들 자신이 몸소 체험을 통해 깨닫지 않는 이상 삶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만의 ‘삶의 정의’를 체험하고 감각하며, 그 속에서 숱한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영감을 얻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해 가며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 예술가를 자기 나름의 ‘예술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하듯, 삶을 사는 우리도 자기 나름의 ‘삶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삶’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예술과 하나가 된다. 인간은 삶과 다르지 않은 예술을 삶 속에서 낳았다.
(267)
삶에서 하는 일 자체를 예술로 만든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자신만의 수단과 통찰로 진진하고 순수한 ‘나만의 작품’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세잔의 정신을 본다. 내가 미술관에 가서 만난 어떤 작품. 그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재료,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형태, 그만의 오묘한 에너지와 개성, 그만의 비범한 철학과 주장을 내 몸과 정신으로 직접 파헤쳐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 그러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그 작가만의 독창적인 미학과 감각을 외부로 표현해 낸 작품을 만났을 때 맞이하는 찬란한 기쁨.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예술가다.
(304)
한 차례 자발적 일탈을 감행했음에도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여전히 흐릿하다면, 두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그 후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불투명하다면, 세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화랑에서 일을 하다, 불쑥 기숙학교에서 선생을 하다, 불쑥 광산으로 간 빈센트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그 모든 불확실한 일탈의 감행이 모여 ‘건강한 방황’으로 정의되리라 믿는다. 그 일탈의 체험과 기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밝고 분명해지리라. 수많은 시도 끝에 점점 초점이 또렷해지는 피사체처럼.
(321)
“예술인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삶에서 행한 어떤 행위가 행위자에게 정신적 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작업. 그것이 예술이다.” 겉으로 예술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가 실제로 정신적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그 행위를 왜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정신적 만족을 충성하게 누리는 예술이 되기 위한 해답은 결코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삶을 창조해 가야 한다. 그 어떤 외부의 압력과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자기 내면에서부터 끝없이 선명하게 울려오는 ‘나만의 그림 그리기’를 평생 흔들림 없이 행한 세잔처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행하는 삶.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만족을 동반한다. 그렇게 정신적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사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예술가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