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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드라망 원문보기 글쓴이: 부루나/원더우먼♠
꽃비 가득히 내리던 사월 초파일, 광명이시고, 지혜의 등불이시며, 대자재비하신 부처님! 불기2555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이곳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에 모인 사부대중은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며 귀의 하나이다.
삼계의 모든 고통을 편안케 하시고 뭇 중생을 고해의 바다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이 사바세계에 나투신 고귀한 뜻을 새기며 한량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머리 숙여 합장 하나이다.
자비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무지와 무명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뜻을 알지 못하고 아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이기심으로 경쟁과 투쟁을 견고하게 하는 죄업을 다함께 깊이 참회케 하시어 진정 평화를 사랑하게 하시고 평등을 존중하게 하시어 남과 나, 모든 생명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하여 주시옵소서.
어둠을 밝혀주시는 부처님! 어둠속에 있는 아름다운 보배도 등불이 없으면 보이지 않듯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를 알지 못하면 불성의 참 생명을 알지 못하나이다. 바라옵건대 부처님의 법음 이 온 세계에울려 퍼져서 오늘의 오탁악세가 청정하게 맑아져서 찬란한 불국토 되 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옵니다.
이제 저희 불자들은 탐욕과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나눔을 하나되는 밝고 맑은 마음들을 모아 부처님께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 하옵나니 부처님께서 걸어오신 진리의 발걸음을 따라 자비원력을 실처하는 보살이 되기를 서원하나이다. 또한 시방세계가 평화롭고 조국의 국운이 날로 번창하여 남과 북이 통일이 되며 종교 간의 갈등도 하루 속히 소통 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한마음으로 발원하옵나니 저희가 지금 지극한 마음으로 모든 여래를 관욕하옵고 깨끗한 지혜와 공덕의 더미로 장엄하여 오탁의 중생들이 더러운 생각을 여의고 다함께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을 증득하게 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불기2555년 부처님 오신 날 한국불교대학 대 관음사 주지 밀허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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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빈소개
◆ 가릉빈가/사자후 합창단의 봉축 음성공양
◆표창장 수여
기쁘고 좋은 날을 맞아 회주큰스님께서 우리절을 위하여 애써 주신 신도님과 기수단체에 표창을 수여,
공로와 선행을 치하하셨다.
공로상 성명 : 박명희 82기
귀하께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높은 예경심과 적극적인 봉사정신으로 본 도량의 초파일 장엄등 작업에 참여하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의 발 전과 화합에 기여한 공이 지대함으로 감사의 마음을 모아 이 패에 담아 드립니다.
불기 2555년 5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無一又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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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대상 성명 : 성호석 66기 위 불자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신심이 견고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에 상장을 수여함
불기 2555년 5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無一又學
포교 기수상
불기 2555년 5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회주 無一又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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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주큰스님 봉축 법어
승가대학원에 법사로 오시는 이 시대의 대 강백이신 어른스님께서 수업 중에 하신 말씀이다.
그 어른스님께서는 원願이나 원력願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항상 우리 회주큰스님을
우회적으로 언급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처음 시작할 때는 보잘 것 없었는데
원력 하나로 지금은 어마무시하게 큰 빌딩을 세워
포교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어른스님께서는 수업중에 아주 뜻이 고귀한 문구를 만날 때면
그냥 대충 공부하고 넘겨 버리기가 아까우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짧은 문구 하나만 갖고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설법을 하는 스님도 있다고....."
탄생게 하나로 두 해 동안 봉축법어를 해 주신 우리절 회주큰스님이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딱 여덟 글자로
장장 두 시간에 가까운 불기2553년 법어를 해 주셨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삼/계/개/고 아/당/안/지" 이 여덟 글자로불기 2554년 법어를 해 주셨던 큰스님이시다.
불기 2555 년인 올 해는
그 동안 우리절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영험들을 총정리하여
그 중에서 굵직굵직한 여덟 가지를 간추려 봉축법어로 부처님 전에
그리고 우리들 앞에 자랑스레 내놓으셨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에 여덟 가지를 다 말씀드리기에는 무리수가 있으므로
반으로 뚝 잘라 올 해는 네 가지만 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내 년 초파일에 마저 전하겠노라 하여
법석에 웃음꽃이 함박 피어나게 하셨다.
헌화한 꽃들로 둘러쌓인 사자좌에 오르신 회주큰스님의
불기2555년 봉축 법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모니터를 보니까 칠곡도량은 지금 노래하고 난리고, 감포도량은 이제 기도가 끝났고, 구미도량도 이제 기도 끝났고..... 오늘 다른 도량과 약속한 시간이 11시 10분입니다. 그래서 도량과의 시간 조절을 위해 발원문 한 편을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좋은 날에 법요집 381페이지, 관세음보살 찬가를 정성껏 독송 해 보시겠습니다.
관세음보살 찬가 빛의 고향, 갈 수 없는 바다 너머 보타락가산 있어
연붉은 안개 속 초승달 눈썹 드리우시고 멸망의 세상이 된다 하여도 내게는 근심 걱정이 없도다. 자비의 바다, 그 부신 광명 가운데 아승지겁 잠든마음, 공덕의 물로 깨워 주시고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외로울 것 없도다. 천의 눈이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 감포도량은 왜 연결을 안했는고? 구미도량, 손들어 보십시오. 칠곡도량, 손ㄷㄹ어 보십시오. 경산도량, 손들어 보십시오. 포항도량, 손들어 보십시오. 서울 동대문도량, 손 들어보십시오. (국내외 전 도량을 네트워크화 하여 현재 상황을 그대로 모니터할 수 있고 쌍방향 동시에 어느 도량, 어디에서나 큰스님의 법문을 시청할 수 있도록 가히 근본불교, 세계불교, 첨단불교를 모토로 하는 우리절입니다. *^^*) 불기 255년 봉축법어 ●우리 부처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찰진심념가수지 대해중수가음진 나무아미타불() 모두 따라하십시오.
미진수같은 마음 다 헤아려 알고 대해의 물을 마셔 다 하며 허공을 헤아리고 바람을 얽어 묶을지라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말할 수 없도다
모두 반갑습니다.() 특히 일 년 만에 오신 분, 정말 반갑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이렇게 잊지 않고 오신 것에 대해서 경의와 찬사를 보냅니다.
오늘 드디어 뭐 좀 하는 날인 것 같습니다. 비가 촉촉히 와서 분위기도 좋습니다. 오늘을 부처님 오신 나리라 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부처님 생신이죠. Buddha's Birthday라 해서 부처님의 생일이자 우리 모든 불자들의 생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불자들의 마음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이미 불자들의 생일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모두 따라하십시오 부처님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일을 자축합니다.
테레비(젼)를 보면 가끔 오늘을 석가탄신일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방송인은 잘못 알고 있어요. 문화부 등록되어 있는 오늘, 공휴일의 공식명칭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자들은 당연히 오늘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이렇게 말해야 돼요. 그러니까 불자들은 석가탄신일이라는 말을 쓰면 안돼요.
부처님을 알릴 수 있는 제일 좋은 표현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오신 날
●왜 오셨는가?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내용이 법화경에 나와 있어요. 오늘 받으신 주보겸 유인물 제1면에 나와 있습니다, 보고 있습니까? (예)
부처님께서 왜 오셨는가? 열어 보여 깨달아 들게 하셨다. 열 개, 보일 시, 깨달을 오, 들 입, 開示悟入!
부처님께서 오신 이유를 법화경에서 이렇게 밝혀 놨어요. 우리 부처님은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사실은 '온다간다' 할 것이 없어요. 부처님은 태어나고 죽는 법이 없어요. 그럴 때 부차님을 본불이라 합니다. 본래 부처님, 본불!
본불의 부처님은 오고감이 없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대자대비심으로 우리중생들을 위해서 8 막의 각본을 휼륭히 짜시고 한 번 공연하러 오셨어요. 바로 그 분이 석가모니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흔적의 부처님이라 해서 적불이라고 해요.
본래부처님은 중생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어요. 우리 부처님이 흔적을 나투시고 중생계에 한 번 오셨는데 그 흔적의 부처님을 적불이라고 말해요. 흔적을 드리우신 부처님이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법화경에서, 본래부처님은 오고가는법이 없지만 이 흔적의 부처님,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 중생을 깨달아 들게 하기 위해서....(오셨습니다.) 깨달을 오, 들 입. 오입케 하기 위해 오셨다, 열어보여 깨달아 들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중생의 롤-모델
우리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모델이 되셨습니다. 요즘 쓰는 말처럼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의 롤-모델이 되셨습니다. 열어 보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중생의 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부처님의 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걸 우리가 살피지 않을 수가 없어요.
중생의 문에서 느껴지는 불합리한 많은 문제들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첫째, 중생들은 대부분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요. 둘째 (중생들은) 늘 갈증하면서 살아가요 셋째, (중생들은) 정신적인 것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많은 구속 속에서 살아가요. 그것이 집착이라 할 지라도 그 자체가 구속이죠. 중생의 문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불합리하고 좋지 않은 것들로부터 뛰쳐나와 탈출하게 하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거기서 나와서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행복의 문으로 들어서야 하고 성취의 무으로 들어서야 하고 해탈의 문으로 들어 서야 합니다. 해탈을 우리말로 하면 대자유입니다. 대자유라 하면 세속적 자유와 혼돈할 가능성이 있어서 그냥 해탈이라 해 두는 겁니다. 읽어보겠습니다.
행복, 성취, 해탈!
부처님이 왜 오셨는가? 우리를 행복의 문에 들게 하시려고, 우리를 성취의 문에 들게 하시려고, 우리를 해탈의 문에 들게 하시려고 오셨더라.
●행복과 성취와 해탈의 부처님 집으로...
그리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처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대로 경전공부 잘 하고 기도참선 잘 하고, 또 포교 잘하고, 봉사 잘하면 중생의 집에서 나와 부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 하십시오.
나도 행복과 성취와 해탈의 문에 들어 서리라
정법불교! 우리느 반드시 정법불교를 해야 합니다. 정법불교를 수행하고 가르치는 한국불교 대관음사에만 잘 다니면 행복과 성취와 해탈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십시오.
불행이 먼지를 훌훌 털고 언제나 행복해 지리라 갈증의 애탐을 식히고 그것이 무슨 이이든 분명히 성취하리라 구속의 사슬을 단박에 끊고 해탈을 구가하리라.
한국불교대학 대 관음사에 다니게 되면 바로 이런 세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지로 그런가? 지금 우리절에 오시는 모든 불자들은 여기가 큰집입니다. 옛말에 큰집 잘 되면 작은 집도 잘 된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절은 큰집, 모체이고 불자님들 집은 작은 집이지요. 모두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가니까 분원같은 그런 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 관음사 부처님은 우리의 중심인 체이고, 우리 불자님들은 그 역할을 다하는 분신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도량은 모두가 우리집보다는 큰, 큰집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오늘 또 절에 가나?"그러면 '큰집에 간다'그렇게 말하면 시비를 못 걸겁니다^^ 늘 대 관음사를 큰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큰집이 잘 돼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큰집에 가잖아요. 재일이라는 큰 행사가 명절인 거요 재일이라하면 초하룻날, 지장재일, 관음재일, 원불재일, 오늘처럼 특별히 이런 날, 부처님 오신 날에 큰집에 오잖아요. 큰집이 잘 되고 번창하면 얼마나 좋아요. 큰집이 찌그러지고 가족간에 안 좋고 그러면 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절의 8대 불가사의 영험 올 초파일에는 네 가지만! 나머지 네가지는 내년 초파일에 들으러 오시길^^ 우리절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부처님은 아주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법력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절의 분원인 우리집도 잘 되겠구나 하는 그런 믿음과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절이 올해로 나이 스무살, 성년의 시기에 들어왔어요. 이제 선거권도 생기고, 말 그대로 왕성한 시절에 들어왔습니다. 스무살이 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마다 화가 복이 되는, 전화위복의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8대 불가사의한 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제 스무살에 들어 온 우리저 대관음사에 수 백, 수 천 가지 영험스러운 일이 있었겠지만 여덟 가지 정도 소개할까 합니다. 자축하는 의미로 먼저 박수 한 번 쳐 봐요.
8대 불가사의한 영험!!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가 이제 시작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거창해 보여도 이제 시작입니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적적인 일을 경험했고 또 이루어 왔는데 그 중에서 여덟 가지 그런데 그 여덟 가지 이야기도 아주 깊고 흥미진진해서 다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네 가지만 이야기 하고 내년 사월 초파일에 나머지 네 가지를 마저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아요.
여기 배영식 국회의원(께서) 와 계시지만 국무회의 한참 하다가 "밥 먹고 합시다" 그랬거든요. 이거 다 이야기 하자면 점심공양도 못하는데.....밥은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올 해는 네 가지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법력 제 1 호...... 부지선정
지금부터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가 보겠습니다. 우리절이 몇 년도에 창건이 됐지요? (대중들이 침묵하고 있자) 어찌 작은 집들이 다 이래요? 1992년! 몇일이죠? 5월 15일 올해 5월15일에는 대구문예예술회관에서 모든 도량이 참여하는 기념 합창제가 열립니다. 모두 동참하시기 바라고.... 1992년 5월 15일에 시작할 때 전세가 얼마라 했지요? 삼천만 원 월세가 얼마라 했지요? 월세가 오십만 원
처음 불교대학을 열고..... 첫 법회에서 관음재일을 맞았는데 열 여섯 명이 나왔어요. 이래 가지고는 운영이 안되겠다 싶어서 청도에 가서 참기름을 가져와 팔기 시작 했어요. 그게 지금 대구큰절 대웅전 지하에 있는 판매부입니다. 그런대로 운영이 잘 되었어요. 그래서 월 오십만원을 메꾸어 나갔어요 많은 분들이 불교교리를 배우고, 기도를 하려고 모여 들었어요. 그게 남구청 앞에 있는 4층 건물의 4층이었어 그게. 그런데 한 4년 하니까 장소가 비좁아서.. 지금 우리절도 장소가 비좁잖아요. 그래서 법당 안에 다 못들어오셨는데 .... 다른 건물을 또 하나 지어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신도님들이 이 공간이 너무 부족하고 전세에 월세니까 우리 땅으로 좀 옮겨가야 하지 않겠나 해서 모든 분들이 그런 발원을 하면서 기도를 했지요. 그때 당시 (불사)이름이 본당건립이었어요. 이미 분원의 개념을 잡고 있었습니다. 본당이 있고 다른 많은 곳에 분당이 있야겠다 해서 본당건립 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어느 분이 부지를 제공했는데 그게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너무 비싸게 치였는지 제가 동안거를 갔다왔는데.... 그러니까 그때가 96년도 겨울 안거를 갔다왔더니 많은 분들이 그 땅이 너무 비싸게 매입되었다 그래요. 그 곳은 대구의 북구에 있는 변두리 쪽이었어요. 어쩔수 없이 계약금을 돌려받고 그 땅을 다시 돌려주었어요. 그렇지만 그걸로 인해 모금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 땅을 물색하기 시작하니까 여러 군데 부지가 나왔는데 현재 남구청 뒷편에 KT이동통신 있지요? 그 뒤에 보면 'ME'라고 하는 캐톨릭계 건물이 하나 있고 (ME :만남의 집) 그쪽에 약 600 평 되는 (캐톨릭 소속의) 나대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사라는 제안이 우리 측에 들어왔어요. 그 땅이 얼마였느나? 17 억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 우리가 가진 돈은 얼마였느냐? 4 억이었어요. 아무리 우리 부처님의 신통력을 믿고 한다지만 4 억 가지고 17 억짜리를 어떻게 사겠어요. 그건 욕심이지요. 그래서 그걸 못 사고 그냥 망설이며(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지금 이 자리, 영대 네 거리에 땅이 나왔다고, 지금도 우리절에 다니고 있는 독실한 불자가 소개를 해 주었어요.
여기 부지는 220평인데 10 억 5천만 원이었어요. 10억 5천만 원 정도면 한 번 생각해 볼 만 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남구청 뒤의 650평에 17억에 나와 있는 그곳에 또 마음이 생겨서 우리 거사님 한 분을 보내서 땅을 계약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계약하러 가 보니 3일 전에 이미 다른 사람과 계약이 된 상태였어요.
천만다행이지요. 만일에 그때 우리가 그 땅을 계약했더라면 벌써 부도났고, 이 법당도 없고, 모든 도량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우리가 너무 욕심이 컸나보다. 부처님 뜻이 그런가 보다'생각하고 '땅은 금방 팔릴 수 있는 것구나'하는 힌트를 얻고 지금 영대 네거리 이쪽 부분에 220평짜리 3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다는 얘기를 최종적으로 듣고 가보니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그렇지만 10억 5천에 수리비까지 포함하자면 11억이 넘는 돈이 드는 거죠.
그렇게 이쪽으로 옮겨 오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저쪽 17억짜리 땅에 대해 미련이 남아 있어서 제가 일부 거사들에게 물어봤어요. 이 땅이 더 좋겠는냐 영대 네거리 쪽이 좋겠느냐 하니까 그때는 지하철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지역적으로 봤을 때 지하처ㅣ 들어올 것을 생각해 보면 대로를 끼고 있는 남구청 쪽이 더 좋을 것 같았지만 3~4년 후면 지하철이 생기는데, 지하철이 생기면 이쪽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 영내 네거리는 달서구와 수성구, 중구를 연결하는 지역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이곳이 더 좋다고 몇 번 말했더니 우리 거사님들이 '아니고 스님요, 남구청 네거리가 훨씬 낫지요." 자꾸 그래요. 우리 거사들이 세속에 살지만 저보다 안목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그 차재에 그쪽이 팔리고 나니까 어쩔수 없이 이쪽으로 오게 된거요. 후일 생각해 봐도, 자다가 생각해 봐도 이쪽으로 온 것이 잘 된 것 같아요. 남구청 사거리에 있었다면 지하철까지 거리가 얼마나 멀어요. 걸어가려면 힘 들죠. 그쪽으로 지하철을 낼 수도 없는 거고....
그 때 신도들이 기도를 많이 했어요. 어쨌든지 본당건립을 해야되겠다 기도를 많이 한 덕인지 당시에는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나중에 와서 보니까 이 지점을 택한 것이 저말 전화위복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한국불교대학 역사 속에서 부지선정이 우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법력 제1호다 이런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당시에 우리 신도님들이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바로 행복과 성치와 해탈의 문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우리부처님의 불가사의 법력 제 2 호...... 빚 청산
두 번째로, 빚을 어떻게 청산하느냐 하는 것이 그 당시의 큰 숙제였어요. 그 때 가지고 있었던 돈이 4억 5천정도였는데 약 6,7억 정도의 돈을 빌려야 하는 형편이었어요, 그래서 은행돈 5억을 빌리고 사채를 1억 빌렸는데 이 사채는 우리 신도회에서 기별로 100만 원 씩도 내고, 10만 원도 내어서 저에게 빌려 주었어요. 나중에 일이 잘되어서 돈을 돌려 드리겠다고 하니까 안받는다고 하대요. 그래서 또 1억을 벌었지요. (법석에서 박수 터져나옴)
그 때 당시에 내가 가진 것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스님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스님으로 살아가면서 스님으로서 겪는 일을 글로 표현하면 이게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이 포교도 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학교시절에 글 재주가 있어서 상을 타 본 경험이 있어서 잘 하면 이 일대 땅을 다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낸 책이 뭐지요? 저거는 맨 날 고기묵고. 그 책이 스테디셀러라 해도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그 책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누구를 내세웠느냐 하면, 김병조씨라고... 우리 불자있지요? 김병조 거사는 저와 같이 공부하던 변동빈이라는 도반이 있었는데 비록 속퇴는 했지만 그 도반과 김병조씨가 잘 아는 사이라 제가 그 분을 찾아갔어요. 사실, 이러이러해서 책을 냈는데 당신이 목소리 보시를 좀 해라했더니 선뜻 목소리를 빌려줬어요.
투자가 곧 수익, 투자없이 수익이 없어요. 당시에 전국 MBC에 광고를 냈어요. 그때 당시, 임원진들 한테는 이 이야기를 안했어요, 너무 놀랄까 싶어서.... 한 달에 광고비를 얼마나 냈느냐? 그 어려운 살림에 한 달에 4천만원을 때려 넣었어요. 한 달에! 그랬는데 광고비의 몇 배가 되는 수입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거요. 그렇게 책을 백만 권쯤 팔았어요. 그래서 이 일대의 땅을 거의 다 사 버렸어요.
심지어는 신라장모텔이라고 하는, 현재 우리 복지법인 자리 있지요. 우리 국회의원님들께서 애써 주셔서 올해 신라장 모텔이었던 그 부분을 뜯어내고 5,6,7층을 리모델링합니다. 국가에서 15억5천만 원을 지원해 주어서 무량수전을 증축합니다.이것도 아주 대단한 사건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후일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 은행돈 5억이면 한 달에 지불해야 할 이자가 500만 원이오. 그러니까 1억당 100만 원이더라구요. 저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자라왔는데... 그 이잣날이 얼마나 빨리 닥치는지.....^^ 감당이 안돼요. 글ㄴ데 이 책이 팔리기 시작하니까 그것 갚는 건 아무 문제도 안되고 여기 한옥이 많았거든요 그 한옥을 하나씩 다 사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이쪽 옥불보전 자리, 여기까지 들어왔습니까. 저쪽으로는 저쪽대로 진출해서 복지법인을 설립했죠. 우리가 봉사를 조직적, 내용적으로 하려면 복지법인이 있어야 되겠다 생각해서 복지법인을 설립하고 복지사엄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이지요.
제가 눈이 그렇게 좋지를 못해요. 20대 한창 혈기왕성할 때 뭘 좀해 볼 것이라고 1 년 정도 잠도 안 자고 하다가.... 그러다가 안질을 못쓰게 버려 버렸어요. 피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로 피가 맺히고 고생했어요 그래서 쉽게 눈이 충혈되고 그래요. 그때는 패기로 '내가 뭘 해 봐야지' 하고 정진을 했는데 그 이후로 책을 조금만 보면 눈이 고장나요. 그래서 남보기에도 조금 그렇고....
저는 남의 책을 보는 것보다 제가 명상을 해서 책을 펴내는 것이 훨씬 편해요. 남이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저는 눈이 피로해서 잘 못봐요. 그 대신 가만히 앚아서 명상하다가 생각을 정리해서 이것을 글로 써요. 그러면 내 머리 속에 있는 것을 글로 쓰기 때문에 훨씬 덜 피로해요. 그러니까 글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내 속에 있는 글이 나가는 것의 눈 피로도가 달라요. 그래서 글을 보는 것보다 많이 쓰기 시작했어요. 글 쓰는 게 더 편했기 때문에 글을 많이 썼어요. 제가 쓴 책이 100 권도 넘을 거요.
안질이 안 좋고 눈이 늘 피로 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된 일 같아요. 안그랬으면 남이 쓴 책이나 읽고 있는 거지요. 내 책을 쓸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지요. 처음에 빚이 많아 그 부담감 때문에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 책이 이렇게 우리 도량을 확충하는 대단한 힘이 됐던 걸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전화위복이 된, 부처님의 아주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두 번째 큰 사건은 책의 발간으로 빚을 청산하고, 절을 비롯해서 모든 도량을 확충하는 근거지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부처님의 불가사의 법력 제 3 호...... 납골봉안당(납골당)
세 번째 사건은 아시는 분도 더러 있을 겁니다. 저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납골당이었어요. 납골당! 납골봉안당...... 그때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그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실 겁니다.
저의 집은 경주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장손집안이었고 제가 장손이었어요. 제가 출가를 한 후로 부모님들이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겠습니까 저 또한 마음이 편치 못했어요. 장자가 공부 열심히 해서 가문을 빛내고 그래야 하는데 출가를 해 버렸으니 우리 집안에 맥이 다 빠져버리게 되었어요. 그래도 저는 일년에 한 번정도 부모님께 인사 드리러 갔어요. 그러면 부모님 하시는 말씀이 "그래 마~어쩔 수 없이 이생에서는 이렇게 살지만 죽고나서는 너한테 가서 좀 살고 싶다"그래요.
너한테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은 "빨리납골당 좀 만들어라." 이 말이오. 그때는 대웅저 거물 하나 밖에 없어서 납골당 지을 처지가 못됐어요. 그러다가 아버지 먼저 돌아가셨는데....납골당지어서 잘 모시겠다고 제가 약속을 했죠. 우리 부모님은 묘 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더라구요. 한 줌의 재가 있다면 네가 좀 모시면 좋겠다는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책임감이 생긴 거지요.
그래서 도심사찰로써는 최초로 납골당을 만들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는 가운데 이게 소문이 나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불자까지도 항의를 해왔습니다. 지금 큰절종무소는 동사무소만큼 크지않습니까 그렇지만 반쪽 건물 지어놓고 아주 힘들던그 시절에는 종무소가 헛간처럼 작았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제 멱살을 잡고 애를 먹였어요
그때 우리 부모님 납골은 내 방에 모셔두고 있었어요. 당시에 제가 미리 납골당을 지을 거라고 선언을 해 버렸더니 우리 신도님들이 저를 믿고 돌아가신 분들을 저에게 모두 맡겨버려서 제 방이 공동묘지처럼 납골로 꽉 찼어요. (대중들 서프라이즈~!! 하하하)
그 납골을 이미 받아 놓고 납골당을 안하다고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거요. 그래서 멱살을 잡혀 가면서도 생각했지요. '끝내 내가 여기 납골당을 만들어서우리 부모님과 나를 믿은 신도님들의 납골을 모셔야 되겠다' 는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언론에까지 거론되기 시작했어요. 우리 언론도 참 깨인 언론이야. 당시에 전병철 보도팀장과 TBC, KBS같은 방송사는 말할 것 없고 지역의 신문들이 모두 우리 편을 들어줬어요. 당연히 절에서 납골당을 해야지 무슨 소릴 하느냐고 얘기를 하니까 동네사람들의 (항의도) 시들해졌어요.
그 당시 시의원하시던 분들이 주민들과 같이 지금 납골봉안 되어있는 미타전까지, 그때는 미타전이 찻집이었잖아요. 거기까지 찾아와서 난리가 쳤어요. "지금 이것은 국가에서 장려하는 장례문화다. 장려사업이다. 여의도 면적의 국토가 일 년에 매장지로 들어가는데 어떻게 되겠느냐?"고 조리있게 말했어요.
그렇게 찾아왔다가 우리 신도님들한테 혼쭐이 났어요. 어떻게 혼쭐이 났느냐? 우리 신도님들이 지금은 가만히 있지만 한 번 화가 나니까 입이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라니까요.(신도님들 모두 폭소 하하하) 전화를 했는데 그쪽에서 잠을 못잘 정도로 노이로제가 걸려 버렸어요. 그후에 시의원 몇 분이 저를 다시 찾아와서 "저희들으 이제 절대 나서지 않을 거니까 스님께서 재주껏 하십시오. 저는 스님편은 못 들지만 스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 반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우리 편이 된 거요.
그러니까 남구청장으로 계시던 분도,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찾아 왔어요. "스님, 스님 하시는 일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민들을 일대일로 만나 설득할 테니 스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 하는 겁니다. 납골당은 신고제이지만 청장의 도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청장 권한 속에 있는 거요. 결국은 허가제와 비슷합니다.
그 후, 조용히 한 번 만났어요. 아주 볼품없는 식당에서..... 은밀히 만난다고 거기서 만난 거요. 아주 은밀하게.....단 둘이 만났어요. "스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책임지고 해 드릴 테니 가만히 계시소."하더라구요. 최씨 성을 가진 그 청장님이 신의가 있었어요. 매일같이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득을 시켰나봐요. 나중에 전화가 와서 그래요. "됐습니다. 내일 허가증이 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납골당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
납골당이 시내에, 도량 안에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 하는지 몰라요. 어차피 사람은 죽어. 죽게 되어 있잖아요. 그분들을 이렇게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쾌적한 도량에 모시는 것은 가족으로서도 아주 좋은 일이지요.
납골당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서울에 있는 벽제화장터 일대를 여러 번 다녀왔어요. '어떻게 하면 냄새가 나지 않을까?' 납골당이 혐오시설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지금 우리 납골당은 그 안에서 음식을 먹어도 될만큼 쾌적하고 깨끗잖아요. 거부감이 있을 수가 없어요. 산 자와 죽은자가 같이 활동할 수 있는 그런 공간 아니오,
납골함도 그 당시에는 진공 용기가 나오지 않을 때에요. 거기서 제가 아주 많은 걸 배웠죠. 특수비법을 배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납골함 안에 동판을 대고, 그 안에 다시 도자기를 넣어 세 겹으로 쌌어요. 그래서 옛날에 모신 납골도 전혀 문제가 없잖아요. 아무튼 이렇게 많은 공부를 통해 납골당을 만들었어요.
3년 전에 최씨라는 분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를 회상하면서 '스님, 제가 왜 그때 앞장서서 반대를 했는지.... 지금 너무너무 후회가 됩니다. 다시는 제가 스님하시는 일에 대해서 반대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는데 몸이 많이 쇠약해졌더라구요.
납골당이 있으면 장례차가 왔다갔다해서 집값이 떨어진다고 동네주민들이 그렇게 반대 했는데 신도님들도 아시겠지만 장례차가 올 필요도 없고 납골 하나만 딱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동네주민들은 시신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거요.
납골시설이 다 끝난 상태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만약에 그때 (해결이) 잘못 되었더라면 우리 부모님도 모시지 못했고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이런 좋은 편의시설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지 않았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러한 문제가 일어난 것이 오히려 잘되었단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KBS MBC 이런 데서 방송을 막 해바렸거든요.
대 관음사에서 지금 납골시설을 추진 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이 더 많다고 .... 그래서 그게 오히려 광고가 되어버렸어요. 가만히 있는데 홍보가 다 된 거요. 말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거요.
그래서 지금은 시민들, 특히 불교인들이 납골을 어디에 모실까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곳이 여기라. 최신식 시설에 쾌적하고 앞앞이 삼존불이 모셔져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납골당이 한국불교대학 대 관음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이렇게 간단히 얘기해서 그렇지 그때는 장기간 이문제가 노출이 되어서 지역 언론이 떠들어대고 지역 정치인이 이 문제에 가담이 되어 아주 시끄러웠어요.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이 오히려 홍보적으로 도움이 되었어요.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저한테 그랬어요. 처음에는 제가 책임자가 아닌 줄 알았대요. 얘기를 하다가 제가 책임자라고 하니까 "스님이 이래 젊었는데 책임자요?" 하는 겁니다. 지금도 제가 젊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제가 더 젊었어요 ^^(으하하하) 그러면서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사필귀정이라 그래요. 그래서 저도 속으로 '사필귀정이지'했어요. 분명히 그 할아버지는 납골당이 안될거라고 생각했는데 되고보니 사필귀정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국가의 미래를 봐서라도 납골당, 이것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 되리라고 봤죠. 그게 사필 귀정이죠.
우리부처님의 불가사의 법력 제 4 호...... 유치원 설립
그 다음, 네 번째는 유치원 설립 문제였어요. 이 유치원을 설립하자면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조건이 무척 까다롭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 일대에 성인시설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유치원 설립 때문에 서명에 동참하셨던 분들도 아마 여기 많을 겁니다. 당시에 이 문제가 10개월 끈 큰 사건이었어요.
유치원시설은 이미 다 완공했는데 지금 남부교육청에 (있는) 딱 한 사람이 (유치원 설립을 반대하면서) 트는 거요. 한 사람이 트는 바람에 시설을 아무리 잘 해 놓아도 (유치원 허가가) 안되는 거요. 당시에는 영남불교대학이었지요. 그 거대한 불교대학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해도 한 사람이 법적으로 들고 나오니까 이게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중간브로커로 라씨 성을 가진 충청도 사람을 넣어서 일을 진행했는데 이 충청도 사람이 보기에는 얼방해도 두꺼비처럼 먹을 건 다 먹고 아무 것도 안해요. 그렇게 나는 충청도 사람한테 당한 적이 한 번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충청도에는 분원을 안 낼 생각이라~ (법석에서 와하하하... 큰스님께서도 웃으시며) 이건 농담입니다. 사람이 다 그렇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유치원 설립문제가 일파만파로 번져 납골당보다 문제가 더 커졌어요. 그 당시에 왜 유치원 설립이 저항을 받았는가하면 저 건물, 대웅전을 처음에는 본당이라 그랬어요. 본당 건물 7층짜리를 막 짓자마자 '이제는 유치원이다' 학교는 지으려면 돈이 너무 드니까 유치원을 지어서 새싹들을 키워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치원을 2000명을 수용하는 유치원을 짓겠다. 그 정도는 되어야 그게 학교처럼 거창하고 대구불교의 미래가 밝아지지 않겠느댜 싶어서 그렇게 발표를 하고 나니까 유치원 원장들이 그 얘기를 듣고 "저 본당 건물이 짓는 걸 보니 우학 스님이 이번에도 분명히 일 낸다. 이러다가 우리 유치원은 다 굶어 죽는다."면서 떼로 몰려왔어요. 불교유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유치원이 앞장서서 수십 명이 저 찻집으로 몰려왔어요.
제가 머리카락이 없었으니 다행이지..... (하~하하하~ 법석에서 동시에 터진 큰 웃음) 납골당 지을 때도 머리카락 없어서 덕 본 게 있고..........유치원은 원장들이 거의 다 여자대요. 여자들이 내 머리카락 길었으면 놔 뒀겠어요? 여자들은 싸울 때 머리카락을 쥐고 왔다갔다하대~^^ 아마 싸울 때 잘 싸울라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저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머리카락 다 깎아버려요. 무명초를 뭘 달고 다녀요~
유치원 원장들이 자기들만 온 게 아니라 교사들, 학부모들 서명을 받은 몇 미터나 되는 서류를 들고 와서 절대 한국불교대학에서는 유치원을 만들 수 없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진정서지. 이 진정서를 교육청 여기저기다 제출하고 한 부를 가지고 온 것 같애. 그러면서 "이래도 스님이 유치원을 하겠느냐?"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래도 하겠다."그랬지. 그러니까 원장들이 물러났어요.
그 뒤로 옥불보전 1,2,3층을 모두 유치원으로 할 거라고 서류를 제출했더니 서류를 넣을 때마다 결국은 빠꾸(반환) 되는 거요. 이유는 판판이 있어. 그 때 이미 남부교육청이 기존 유치원 원장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분명히 로비 흔적이 있었거든요.
어제 교육감님이 찾아오셔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스님, 유치원은 어린이집보다 세우기가 더 쉽습니다." 그래요. 어린이집은 허가제인데 유치원은 신고제라는 거요. 우리는 그때 그걸 잘 몰랐지.
아무튼 유치원이 (설립)될 가능성이 0.01%도 안되었어요. 공무원으로서 하는 일을 나무랄 수도 없는 거요. 그 이유는, 유치원 시설 반경 50미터 이내에 성인시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거요. 길 건너에 (성인시설이)있어도 안되는 거요. 유치원 (수업)마치면 유치원버스 타고 집으로 가버리는 데도 (성인시설이 있으면)안 된다는 거요.
우리는 50미터 안에 성인시설이 두 개 있었는데 (옥불보전) 뒤에 보면 쉐라톤모텔이라고 하나 잡혀 있었고. 또 지금 BUD밴드 연습하는, 젠하우스 건물 지하 있지요? 거기에 단란주점 이라고 술 먹는 데가 있었는 모양인데 그게 또 성인시설이라. 그건 20미터 이내에 있었으니 절대불가요 절대불가!!
우리가 눈치껏 가만히 보니까그게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아서 세를 준 건물 주인을 찾아 가서 우리가 세를 더 줄거라 하고 우리가 그걸 세를 얻어버렸어요 ('우리큰스님 참 잘 하셨다'는 응원의 박수가 법석에서 터져나오자, (큰스님, 기분좋게 웃음 머금은 음성으로) 이건 박수칠 일도 아닙니다 이건~~
젠하우스 건물은.... 6, 7월부터 우리가 완전히 매입을 해서 1층은 시민들이 와서 자유롭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으로 운영할 겁니다. 2층에서 5층까지는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같은 것으로도 내 주고 싶고..... 하여튼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저 건물을 쓸 생각입니다. 저걸 3년 전에 계약을 해 놓고 돈이 모자라서 "내년에 드린다, 또 내년에 드린다' 해 가지고 지금까지 저러고 있었는데 이제 6, 7월이 되면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 옵니다.
거기에다 할 만한 마땅한 게 없었는데 지금은 BUD밴드가 들어가 있습니다. 거기가 술 팔던 그 장소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문제가 되는 성인시설) 하나는 없애 버렸지요. 그런데 모텔은 없앨 수가 없어서 그냥 놔두고 작업을 했는데 아주 힘들었어요. 정상적으로는 잘 안 되어서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요. 도저히 법적으로 안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행정심판이라는 게 있었는데 우리가 그쪽으로 일을 몰아갔어요.
당장 3월에 유치원을 개원해야 하는데 2월 초까지 해결이 안나는 겁니다. 그래서 유치원 허가를 좀 쉽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층은 그냥 어린이집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야 다른 유치원 원장들도 '10개 미만 반이니까 별 거 없지'하고 양보를 하겠지 싶어서 원래는 15개 반이 나오는 거였는데 10개 반으로 3세부터 5세까지 어린이집을 먼저 개설했어요.
지금은 어린이집 내기가 더 힘든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이집 낸 것도 아주 잘 한 일 같아요. 3세부터 들어와서 7세까지 연결해서 공부하게 되는 거니까 아주 잘 된 거죠.
일단 어린이집을 먼저 개설해서 운영했고 그 뒤로 유치원이 문제가 계속 생겨서 10개월을 정도 애를 먹었어요. 문제가 되는 성인시설 하나는 해결했는데 유치원 반경 200미터 이내에 성인시설이 있어서는 안되는데 우리유치원 반경 이내에 성인시설이 모두 몇 개 있었느냐? 스물여덟 개 있어! 그러니 공무원 입장에서는 안될 이유가 딱 되는 거요.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왜 안되느냐? 우리 대관음사에서 운영하고, 또 스쿨버스가 다닐 건데 저 여관과 모텔하고 무슨 상관있냐? 유치원생은 낮에 오고 여관과 모텔 손님은 밤에 오는데 무슨 상관이 있냐고 온각 얘기를 해도 안 통하는 거요 이게.
게다가 또 먼저 만들어진 납골당이 또 유치원 설립이 안되는 이유가 되는 거요. 국가에서는 납골당을 장려하면서도 납골당 자체를 혐오시설로 분류해 놓고 있는 거요. (법요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신 배영식 의원님을 보시며) "국회의원님, 이것 좀 빼 주세요"*^^*(ㅎㅎㅎㅎㅎ) 우리 유치원시설하고 종교시설의 납골당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제도라는 것이 참 좋은 게..... 행정심판이라고 하는 상위 심판제도가 있어서 우리가 (이의 제기하는 서류를) 접수시켜 놓았아요 거기에는 많은 변호사들이 붙어 있어요. 심판위원장이 캐톨릭 사람이었는데 생각이 깨인 분이었어. 우리 얘기를 듣더니 고려하겠다 했어요. 그래서 행정심판이 열린 거요. 그때 우리 작전이 뭐였느냐? 무조건 이 사람들이 현장에 와서 (납골시설을) 보게 하는 것이었어요. 현장에 와서 직접 보고 교육에 정말 문제가 있겠다 싶으면 그때는 허가를 내 주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라. 그런데 어찌 보지도 않고 책사머리에 앉아서 되니 안되니 할수 있느냐 말이지요. 말그대로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 거요.
그 사람들을 이곳으로 오게 애를 썼는데 행정심판하는 사람들이 드디어 2월 초에 이곳에 옸어요. 시설을 딱! 보더니 입을 떡! 벌리고 이러는 거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시설을 갖춘 유치원이다. 만약 이것을 허가해 주지 않으면 국가적으로도 재원낭비다!!"
"당연히 허가를 내줘야지, 대 관음사에서 운영하는 것이고 모텔이 있다지만 애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어린이집은 되는데 유치원은 왜 안되느냐? 통과다."
어린이집도 3세부터 7세까지 다니고, 유치원도 5세부터 7세가 다니는데 어린이집은 그런 시설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안되고 유치원은 그런 시설이 있으면 절대 안된다는 것은 차별이요. (이번에는 내빈석에 자리하신 임병현 남구청장을 보시며) 청장님, 이것도 좀 생각해 봐요. (큰스님의 말씀에 법석에 또 한 번 웃음)
제가 이런 불합리한 점에 대해서도 많이 개진을 했어요 이건 잘못 된 거다. 어린이집 다니는 애는 우습게 보나? 유치원은 더 고급스러운 애만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나? 어린이집과 유치원생이 똑같은 아이들이 다니는 것 같아도 그런 차별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나잇대로 분리했어요 3,4,5 세는 어린이집, 6, 7세는 유치원. 우리는 나이별로 했지 다른 차별은 없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이집도 있어서 좋고....... 그때 급하게 허가를 받아서 3월부터 유치원아들을 받았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어린이집, 제일 좋은 유치원, 우리나라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제일 보내고 싶어하는 유치원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남부교육청하고 우리가 얼마나 싸웠던지.... 그 자료가 지금 삼보전 안에 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코너에 당시에 남부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과 이메일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요. 유치원 허가를 받기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쓴 거요. 그랬더니 교육청에서는" 행정심판해서 스님이 이기면 유치원하는 겁니다" 하고 자기들이 좀 포기를 하더라구요.
결국, 행정심판해서 우리가 이긴 거요. 우리 유치원 어린이집 아이들이 모텔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가가 없다 이거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우리는 노인전문 요양원이 있어서 아이들이 위문공연도 자주 가니 노인네들도 좋아하고 얼마나 좋아요. 애들은 어른 모시는 걸 배우고 노인들은 애들 봐서 좋고 서로서로에게 얼마나 좋아요. 이게 기적같은 일 아니냐 말이지요.
유치원 설립문제가 모든 면에서 봤을 때 가능성이 0.01%도 안되었는데 이루어진 것은 그 또한 부처님의 큰 가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박수 한 번 쳐 봐요. (우레같은 박수가 법석에서 터져 나옴)
지금은 얘기 삼아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부처님께서 우리를 버릴 건가, 말 건가?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행복과 성취와 해탈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더라 이 말입니다.
내년까지 절대 죽으면 안돼요 법문 시작할 때 모두에 말씀 드린 대로 올해는 불가사의한 네 가지 일만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네 건의 일이 또 있어. 이것은 내년 초파일에 말씀 드릴 테니까 내년까지는 (이맘 때까지는) 절대 죽으면 안되는 거라. 만약에 내년 초파일까지 못가서 죽으면 이 재미있는얘기를 못 듣습니다.
부처님의 신통불가사의한 힘!! 우리 대 관음사의 신통불가사의한 힘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못듣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반드시, 반드시 건강한 몸으로 좋은 일도 좀 하고, 봉사도 좀 하면서 살아계셔야 합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 아니고 저 외부사람들도 말해요. 저기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해요. "아, 한국불교대학 대구센타(센터)가, 본부센타가 저렇게 대단하고 해외도량까지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수 있느냐? 저것은 기적이다 기적"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여기에 많이 와서 보고 가요. 그러면서 기적의 도량이라 그래요.
저는 우리 한국불교대학 대 관음사가 기적의 도량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우리 신도님들의 뜻이 뭉쳐져 정진한 덕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합니다. 이런 정법도량과 맺은 인연의 끈을 그 어떤 경우에도 놓으면 안 됩니다. 이 끈을 놓고 핑계를 대는 것은 자기자신을 포기하는 일이고 부처님의 가피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오늘 부처님께서 오신 뜻이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행복과 성취와 해탈을 주시려고 오셨더라. 따라 해 보십시오. 행복과 성취와 해탈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오셨다.
우리절은 비가 와도 좋고, 눈보라가 쳐도 관계 없고, 햇빛이 쨍쨍해도 상관 없는 그런 곳이잖아요. 오늘 아침에 TBC생방송도 했습니다만 담당 PD님도 우리 신도님 자제잖아요. 얼마전에 애를 낳아서 제가 애 이름도 지어줬어요. 대구있는 사람은 다 우리 신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PD님이 그래요. 비가와서 안에서 찍으니까 더 좋다고....
이 옥불보전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요. 비가 안왔으면 이 좋은 법당 분위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지 못할 뻔했다 그래요. 이렇게 완전한 도량을 찾아보기는 힘들 겁니다. 물론 대구큰절이 모델이 되어서 다른 모든 도량들도 이런 구색을 갖추게 되리라 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곳에 다니는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참선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수준있는 불자답게 놀아야 합니다. 수준있는 불자라면 경전공부도 수준있게 해야 되고, 기도참선도 수준있게 해야 되고, 봉사도 수준있게 해야 수준있는 불ㅈ 엘리트 불자가 됩니다. 입만 수준있는 불자면 뭐하느냐 이거요.
지금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대 관음사 모든 도량의 신도들은 '나도 수준있는 불자가 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제가 늘 제시하는 선관쌍수, 바로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공부를 하면서 늘 부처님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시간이 되면 선관쌍수 공부를 좀 할까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부시간에 참선과 기도, 간화선과 위빠사나를 잘 조화시킨 수행법을 틈틈이 하고 있으니까 절대 결석하지 마시고 나오시기 바라고 오늘 일 년에 한 번 오신 분들은 일 년에 한 번 왔다가 탄력이 붙으면 일주일에 한 번 오시고 공부도 같이 했으면 좋겠고 재일마다 동참을 꼭 좀 하시기 바랍니다. 재일을 잘 지키셔야 돼요.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나무아미타불()()()
업장이 두터운 우리 중생들은 기도만이 살 길이라. 절에 기도 열심히 붙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그리하시면 운명이 바뀝니다. 지금 사는 삶보다 훨씬 보람있고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입니다.
팔자를 바꾸는 방법은? 첫째, 기도해라. 둘째, 적선해라. 적선이 뭐요? 봉사지요 셋째는 뭐지요? 포교? 포교..말은 잘~~ 한다 ~~ 제가 공부시간에 말씀 드렸는데 세 가지가 다기억이 안되니까 두 가지만 기억해요. 첫째는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적선해야 합니다.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 예로부터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 했거든요 이 두 가지를 초파일 숙제로 내드립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오신 공덕으로 정말 가족들이 다 잘 되시고 건강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 축원드립니다. 내년 초파일에 또 뵙겠습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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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이 이내 밥당으로 ㅋ
큰스님의 봉축법어가 끝난 상단에서는 회주큰스님과 내빈, 대중스님, 신도님 순으로의 관불의식이
이어졌고 신도님들이 부처님전에 바치는 헌화가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 기수에서 밤을 새워
채썰고,볶고, 무쳐서 만들어 낸 비빔밥 한 그릇과 시원한 미역오이 냉채가 법석에 앉아있는 신도님들
앞앞이 전달 되어 법당은 이내 밥당이 되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밥 한 그릇, 부처님 오신 덕분입니다.
한솥밥 먹는 수 많은 인연 지어주심도 부처님 덕분입니다.
내 곁에 계신 모든 부처님 고맙습니다
사월초파일,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참 기쁘고 좋은 날!!!
납월초파일,
그날은 부처님 되신 날,
더 크게 거룩한 날!!!
다시 한 번 환희롭게 그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도 부처님같이.......
우리도 용맹정진!!!
모두 다 같이 부처님 닮아 갑시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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