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영화를 극장에 개봉하는 일이다. 영화도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물건들처럼 생산 유통 소비의 3단계를 거친다. 힘들게 만든 영화가 모두 극장 개봉되는 것은 아니다. 제작된 영화들 중에는 개봉을 못하고 창고에 필름이 쌓여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처음 생각보다 영화의 마지막 완성본이 잘못 나왔을 경우, 홍보비를 들여서 힘들게 개봉 해봤자 적자만 더 커질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개봉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요즘처럼 최소 홍보비가 15억원을 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영화의 유통은 전국에 있는 1,800여개의 극장 개봉을 시작으로 비디오, DVD, TV 영화 등으로 매체를 바꾸어 가며 소비자들에게 다가간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auce muiti use)의 대표적인 산업인데, 영화 생산은 프리 프러덕션(제작 전 단계) 즉 기획하고 시나리오 집필하고 장소 헌팅하고 캐스팅 하는 사전 준비단계와, 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하는 크랭크 인부터 마지막 촬영하는 크랭크 업까지를 말하는 프로덕션(제작단계) 그리고 색보정 작업이나 더빙 등 후반작업과 광고 홍보 등 상업적 마케팅 작업을 포함하는 포스트 프러덕션(제작 후 단계)의 3단계로 나누어진다.
3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개봉을 앞둔 민병훈 감독은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의 데뷔작인 [벌이 날다](1998년)는 이탈리아 토리노 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비평가상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러시아 아나미 국제영화제 감독상, 그리스 테살로니카 영화제 은상 등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단관 개봉한 뒤 곧바로 비디오로 출시되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 보았을 뿐이다. 두 번째 영화 [괜찮아, 울지마](2002년)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특별 언급상, 비평가상을 수상하고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국제영화제 예술공헌상과 아시아 유럽상을 수상했지만 아직까지 극장 개봉되지 못하고 있다.
[프린트를 불태우려고도 했다.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영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마케팅 비용을 15억 20억 쓰는 데 그러면 마케팅 비용이 없으면 개봉을 하지 말라는 것이냐.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 편견을 버려야 한다. 관객들은 물론 영화 관계자들도 인디 영화라고 하면 마치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CJ 인디 영화관 중심으로 개봉하기는 하지만 6-7개의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나는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개봉을 앞두고 민병훈 감독이 긴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러시아 국립영화대학과 대학원에서 촬영을 전공한 민병훈 감독으로서는, 잠쉐드 우스마노프와의 공동 연출로 만든 [벌이 날다]나, 중앙아시아에서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 해 찍은 [관챊아, 울지마]와는 달리,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처음으로 한국 배우들과 한국에서 찍은 영화이기 때문에 우리 관객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첫 번째 영화인 셈이다.
[대중과 소통을 하는 것이 결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숫자상으로 백만 명이 들었다고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의 상처를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해 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2004년 부산영화제 PPP에서 코닥상을 받고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 제작 지원을 받아 총 5억 2천만원의 제작비로 2006년 2월부터 5월까지 30회에 걸쳐 촬영된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올 6월에 개최되는 카클로비바리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카톨릭 성직자를 소재로 한 영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가 집필된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신 앞에서 방황하는 한 신학생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의 숙명적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벌이 날다][괜찮아, 울지마]에 이어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민병운 감독의 두려움의 3부작 마지막 편이다. 땅을 파고 들어가 화장실을 만드는 이야기 [벌이 날다]는 가난한 한 남자가 자신의 두려움을 떨치고 자존심을 찾으려고 한다. 개봉되지 못한 [괜찮아, 울지마]는 도박으로 빈털털이가 된 남자가 고향에 돌아오지만 유명한 바이얼리니스트로 잘못 알려지면서 두려움과 마주친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인물들이 부딪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카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신학생 수현(서장원 분)을 통해 불가해한 삶과 완벽한 세계질서에 대한 희구를 담은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보석같은 이미지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내러티브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수현이다. 여자친구 수아(이민정 분)와의 관계를 끊고 신학교 생활에 전념하려고 하지만 수아의 청첩장과 십자가 목걸이를 배달받고 마음이 흔들린다.
수현은 대나무숲에서 떨고 있는 어린 강아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방 벽장 속에서 몰래 기르지만, 강아지가 오래 못산다는 것을 알고 수아가 준 십자가 목걸이와 함께 다시 대나무숲에 풀어준다.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인과관계보다 감성적이며 직관적인 이미지가 훨씬 빛나는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그러나 그 이미지가 흩어져 있어서 상호 조응하며 깊은 울림을 만드는 데 한계로 작용한다.
수현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갔다 오는 길에 수아를 만나러 갔다가 차갑게 돌아서는 그녀에게서 상처 받는다. 이렇게 내러티브는 수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특히 수현이 수도원으로 이동할 때부터 스크린은 빛나기 시작한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가장 아름다운 씬들은 수도원에 모여 있다. 낮게 자란 포도나무 가지들이 줄지어 서 있는 포도나무숲. 그 중심으로 곧게 나 있는 메마른 황토길.
수현은 그곳에서 수아와 똑같이 생긴 헬레나 수녀를 만난다. 헬레나 수녀 역시 수녀가 되기 전 수현과 똑같은 남자와 사귄 적이 있다. 수현은 헬레나 수녀를 피한다. 앙상한 포도나무 가지들이 손을 뻗은 겨울 포도나무 숲에서 헬레나 수녀와 수현이 만나는 씬들은, 앙상하고 상처 받은 인물들의 메마른 마음을 대변해준다. 문신부(기주봉 분)의 에피소드나, 수녀원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다니엘라와 사랑에 빠지는 수사 정수(성준서 분)의 에피소드들은 오히려 내러티브의 중심인 문수현을 흔들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에는 아픈 사람을 위한 기도하는 씬이 두 개가 등장한다. 병석에 누워 있는 어린 소녀에게 기도를 해달라는 어머니의 요청을 약속 때문에 거절한 문신부는, 그러나 잠깐 생각한 후 다시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기도를 해주겠다고 한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가 기도한 소녀는 후반부에 밝게 빛나는 얼굴로 햇빛 아래로 걸어 나온다. 수현은 수녀원에서 온 수녀로부터 아파서 누워 있는 헬레나 수녀가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그러나 나중에 수현은 수녀원으로 찾아가 헬레나의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위해 기도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때와 바뀐 부분이 있다. 하느님이 시나리오를 보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피식 웃는다. 야, 나는 그런 생각 하지도 않는데 넌 왜 오바하냐. 넌 하느님을 찾으면서 실제로 하느님이 어떤 생각하는지 모르네. 이런 생각이 들어 시나리오를 바꿨다. 내 영화는 교과서가 아니다. 민병훈이 바라보는 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주인공인 수현의 세레명은 바오로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태 세레를 받은 민병훈 감독 본인의 세려명이라고 했다.
[종교는 일요일 날 성당에 가서 구속받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인데, 인간적으로 화가 나고 절망적일 때가 있지만 영화 만드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힘들다고 말할 수 없다. 더 깊게 파고들려고 한다.]
민병훈 감독의 다음 영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통해 기적의 순간을 이야기 하는 [천국의 향기]다. 문둥병으로 죽어가는 할머니의 몸에서는 장미 향기가 나고, 그 어머니를 이용했던 아들은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영화가 예술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내면을 들춰내고 사람들에게 문제제기를 해서 다양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타협 걸어오는 사람도 없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본격적인 예술 영화가 무엇인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영혼을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