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는 2003년 노벨 수상작가이다. 그의 작품을 한국에 대다수 번역한 왕은철 교수의 노고가 쿳시의 작품들을 읽는 데에 빛을 나게 한다. 나는 쿳시의 소설을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이번에 읽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밖에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쿳시의 문학적 성향과 역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노년의 여성 작가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하는 내용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코스텔로의 연설과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코스텔로라는 작가의 사고와 견해를 따라가는 데에 있다. 각 장마다 다루는 내용들이 각기 다르고, 서로 연결이 어렵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서야 코스텔로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믿는 것에 대해 서술하라는 심판관의 절차에 대응하는 방식들은 작가,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의 사고들을 모두 아우른다. 그의 논리는 빈약할 때도 엉뚱할 때도, 심지어 우스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읽어보면 안다. 쿳시가, 코스텔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게 분명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으로 다가올지라도 그의 발저가 범상치 않은 우리가 놓치는 것들의 근원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관념 소설이기 때문에(나는 그렇게 생각해) 따라가기 벅찰 수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가치있는 소설이다.
짐 크레이스는 미국 작가인데, 그리고 죽음과 사십일이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사십일은 예수가 황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다는 성경에 말씀으로 착안한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본문부터 읽고, 앞표지나 뒷표지에 쓰여져 있는 문구는 읽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나오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줄은 중간 정도까지 꿈에도 못알아 차렸다. 왜냐하면 예수가 성스럽거나, 신비스럽데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성격은 지극히 소심하고, 연약하다. 쉽게 말해서 약간 꼴값하는 정도이다. 그를 둘러싼 다른 고행자들과 악마스러운 무사는 예수의 금식기도를 방해한다. 말이 길어지는데 스포짓을 하는 것 같아 말을 줄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를 경악스럽게 한다. 이 작가의 문체와 철학이 지극히 미국작가스럽지만, 물론 미국작가스럽다는게 뭐냐고 한다면 나도 모른다. 그런데도 미국작가 스럽다. 그가 거장이라고 하는데 거장의 면모는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인데, 조만간 알려지지 않을까. 참고로 김석희가 번역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