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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땅(地)과 익산쌍릉(益山雙陵)
○ 각 언론(言論)에서 며칠 동안 지면(地面)이나, 인터넷(Internet) 공간(空間)을 차지했던 빅(Big) 뉴스(News)가 바로 “전라도(全羅道) 익산(益山)의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쌍릉(雙陵)”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무덤(陵?)에 대해서는, 이미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16년 서력(西曆) 1,327년에 1차 도굴(盜掘)이 있었으며,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시절(時節)인 1,917년에 일인(日人) “야쓰이(谷井)”란 자(者)가 또 도굴(盜掘)을 했다.〉고 하는 무덤(墓地)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에서는, 이 무덤이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릉(陵)’이라고 자신(自信)있게 ‘발굴(發掘)연구(硏究) 성과(成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동의(同意)할 수 없는 이유(理由)는 단 하나다.」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다는 증거(證據)가 있는가?」 하는 거다. 역사서(歷史書)는 서고(書庫)의 책장(冊欌)을 채우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백제(百濟) 땅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이냐? 묻는 것이다.
○ 기사(記事) 내용(內容)을 보면서, 백제(百濟)강역(疆域)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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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京鄕新聞) 기사(記事) 내용(內容) 인용(引用)〉
익산 쌍릉은 서동왕자, 백제 무왕의 무덤이었다.
경향신문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8.07.18 09:00:00수정 : 2018.07.18 10:02:53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남성인골더미. 1917년 이 무덤을 발굴한 일본인 야쓰이가 인골을 상자에 담아 무덤방에 넣은 것을 101년만인 지난 4월 재발굴 과정에서 찾아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50~70대 남성 노년층. 연대는 서기 7세기 중반. 키는 161~170.1㎝’
지난 4월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의 대묘(대왕릉)에서 확인된 인골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쌍릉 중 규모가 큰 대왕릉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능묘라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에 인골분석으로 ‘쌍릉=백제 무왕설’에 더욱 무게를 둘 수 있게 됐다.
■ 무왕의 서거 년(641년)과 비슷한(620~659년) 인골연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대왕묘의 석실에서 확인한 나무상자에 담긴 인골 조각 10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키는 161㎝에서 최대 170.1㎝,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 연대는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됐다”고 밝혔다. 연구소 측은 고고학·법인류학·유전학·생리학은 물론 암석학과 임산공학 전문가들을 총동원했다고 밝혔다.
…넙다리뼈에서 산출한 키(161~170㎝)의 경우 19세기 무덤방에 고이 놓여진 나무상자. 그 안에 백제 무왕으로 추정되는 인골 120조각이 담겨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 성인남성의 평균키가 161㎝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건장한 축에 속한다.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의 기록에도 부합된다. 주인공의 뼈 상태는 최소 50대에서 평균 60~70대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 연구소측의 분석이다.
목의 울대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며,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고, 불규칙한 결절이 있었다. 무엇보다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 다리와 무릎의 통증 등 몇가지 병리학적 특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 뼈를 관찰한 결과 옆구리 아래 골반뼈에 ‘|’ 모양으로 골절됐다가 치유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뼈가 어긋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치에는 약 3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도 낙상으로 인한 흔적이어서 직접사인은 아닌 듯 했다.
…인골 분석 장면. 키 161~170㎝, ㎝나이 최소 50대이상, 60~70대 사이의 노년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연대측정결과 7세기 초중반으로 판명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엇보다 가속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정강이뼈의 방사성탄소연대 결과가 가장 주목을 끌었다. 연구소가 숨죽이며 기다린 결과인데, 서기 620~659년으로 측정됐다. 무왕의 탄생연대는 미상이지만 서기 600년에 백제 제 30대 임금으로 등극했고, 641년 서거한 기록이 분명하다. 인골연대측정결과는 무왕의 ‘몰연대’에 부합된다.
■ 인골을 상자에 담아 놓아둔 이유
익산 쌍릉은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약식으로 발굴됐다. 야쓰이는 이때 주요 유물들은 모두 수습하고 인골더미는 나무상자에 담아 무덤방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 같다. 나무상자의 연대가 백제시대가 아니라 근대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발굴과정에서 인골이 나오면 불길하다는 이유로 불에 태워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야쓰이가 남의 나라 왕릉을 무단으로 파헤쳤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인골상자를 무덤방에 놔두고 나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 관리사업의 하나로 쌍릉을 다시 발굴하다가 아쓰이가 무덤방에 놓고 간 인골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낙상으로 인해 골절된 부위.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낙상이 직접사인은 아닌 것 같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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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왕릉(王陵) 주장(主張)에 결코 동의(同意)할 수 없다 -
● 자! 한숨을 거두고, 위의 기사 내용(內容)은, 신문사(新聞社)측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측의 이야기일 것이다.
한 번 따져 보자.
인골(人骨)에 대한 과학적(科學的)인 조사방법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核心)인 그 인골(人骨)에 관한 것이다.
위의 무덤은 이미 발굴(發掘)되었다. 고려(高麗)때 이미 도굴(盜掘)되었고,【서력 1,327년】이후 590년이 방치(放置)되다가,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약식으로 발굴됐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곳을 발굴(發掘)한 ‘일본인(日本人)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는 무덤 속에 있는 인골(人骨)을 버리지 않고, 상자(箱子)속에 담아두었는데, 이것을 이번 발굴(發掘)에서 발견(發見)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 여기서 합리적(合理的)의심(疑心)은 : 그 인골(人骨)이 당시의 무덤 속 주인공(主人公)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證據)할 수 있는가? 하는 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측에서는 인골(人骨)에 대해, 〈인골 분석으로 키 161~170㎝, 나이 최소 50대 이상, 60~70대 사이의 노년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연대측정 결과 7세기 초중반으로 판명됐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推測)일 뿐이다.
➨ 이미 도굴(盜掘)당한 무덤에서, 그 인골(人骨)은 무덤속의 주인공(主人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자면 〈순장(殉葬)인골(人骨)이거나 또는 고려(高麗) 때 도굴(盜掘)할 당시의 꾼들의 인골(人骨)일 수도 있는 것이며, 인골(人骨)이 무덤의 주인공(主人公)이다.〉라는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가 될 수 없다는 거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시대에도 삼국(三國)의 왕릉(王陵)이나,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의 왕릉(王陵)에 대해 관리(官吏)들이 임명(任命)되어 무덤을 돌보았고, 이곳 주변에서는 함부로 나무나 풀도 베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傳)한다. 그러나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삼국(三國)의 왕릉(王陵)은 없다. 일부 있다는 것도 추정(推定)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 백제(百濟)왕조(王朝)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서(歷史書)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氣候)등의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소(要素)를 갖췄느냐? 하는 것이다.
반도(半島)백제(百濟)는, 자연환경(自然環境)적으로 따져 보면 :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➊ 백제(百濟)가 왜 택국(澤國)이란 별칭(別稱)으로 불렸는가?
➋ 백제(百濟)가 왜 남국(南國)이란 별칭(別稱)으로 불렸는가?
➌ 토산(土産)을 살펴보자. 충청도(忠淸道)에서, 건포도(乾葡萄)·자단향(紫檀香)·백단향(白檀香)·자작(自作)나무·안식향(安息香)·회향(茴香)·해죽(海竹)등이 토산품(土産品)으로 나왔느냐?
전라도(全羅道)에서, 정향(丁香)·대모(玳瑁)·감자나무열매·비자(榧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푸른귤(靑橘)·산귤(山橘) / 약재(藥材) / 영릉향(零陵香)·곽향(藿香)·회향(茴香)·묵은 귤껍질(陳皮)·푸른 귤껍질(靑皮)등이 토산(土産)으로 산출(産出)되었느냐?
➍ 송서(宋書)에서는, 〈백제(百濟)는 고려(高驪)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東)쪽 천여(千餘)리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곳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이냐?【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➎ 남사(南史)에서도, 〈백제(百濟)는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강대(强大)해져,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千餘)리에 있었으며, 요서(遼西) 땅을 점거(占據)하였는데, 진평2군 땅으로, 이곳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하였다. 【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그렇다면 요동(遼東)의 동(東)쪽 천여(千餘)리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인가? 또 요서(遼西) 땅은 어디를 말하는가? 또 이곳에 두었다는 백제군(百濟郡)은 어디에 있었느냐?
남제서(南齊書)에서는, 〈북위(北魏)가 수십(數十)만기(萬騎)를 출정(出征)시켜, 백제(百濟)를 쳤으나, 백제(百濟) 왕(王)의 기습공격(奇襲攻擊)으로 대패(大敗)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이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온 곳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인가?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이 백제(百濟) 땅이라고 할 때, 북위(北魏) 수십만(數十萬) 기병군단(騎兵軍團)은, 무슨 방법(方法)으로 백제(百濟) 영토(領土)로 들어왔을까?
➏ 북사(北史)에서는, 〈논과 밭이 습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사람들은 모두 산에 살아간다.〉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이 이런 곳인가?【土 田 濕, 氣 候 溫 暖, 人 皆 山 居.】
➐ 수서(隋書)에서는, 〈그 사람들은 신라(新羅)·고려(高麗)·왜(倭)등과 섞여 사는데, 또한 중국인도 있다.〉고 하였다면, 백제(百濟)는 다민족(多民族)국가(國家)였다는 말인데, 이런 나라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있었는가?【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
➑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에서는, 〈백제(百濟)왕은 동(東)쪽의 왕성(王城)과 서(西)쪽의 왕성(王城) 두 성(城)에 산다고 하였는데, 동서(東西) 양경(兩京)이니 곧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이랄 수 있다.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에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이 어디를 말하고 있는가? 【其 王 所 居 有 東 西 兩 城.】
➒ 통전(通典)에서는, 〈백제(百濟)가 당(唐)에 의해 격파(擊破)된 후, 백제(百濟) 땅에는 5부(部)·37군(郡)·200 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 땅, 어디에서 그 정황은 찾을 수 있느냐?【後魏孝文遣眾征破之.中略.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中略,其舊地沒於新羅,城傍餘眾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土地盡沒於新羅,靺鞨,夫餘氏君長遂絕.】
➓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우순(虞舜)편에서는, 〈백제(百濟) 서남(西南)해중에, 큰 섬이 15 개소가 있어, 모두 고을을 두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모두는 백제(百濟)에 속해 있다.〉고 하였는데, 백제(百濟) 서남(西南)대해(大海)는 어디를 말하며, 그곳에 큰 섬(島) 15개소가 있는가?【括地志云:百濟國西南海中有大島十五所,皆置邑,有人居,屬百濟.】
➨ 이 정도(程度)의 의문(疑問)에 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반도(半島) 서남(西南) 백제(百濟) 땅을 노래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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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본문계속)
■ 이미 고려시대 때 도굴당한 쌍릉
익산 쌍릉은 고려시대부터 여러 차례 ‘무왕과 서동왕자’의 이름으로 기록에 남을 정도로 유명한 왕릉이었다.
즉 <고려사> ‘지리지·전라도 군마군조’는 “후조선 무강왕과 그의 비 능이 있는데 민간에서는 무강왕을 말통 대왕 혹은 어릴 때 서동이라 불린 백제 무왕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고려사절요> ‘세가·충숙왕조’는 도굴 기록이 등장한다.
“충숙왕 16년(1327년) 도적이 금마군(익산) 무왕의 능을 발굴했다. 애써 잡은 도굴범이 탈출하자 정승 정방길이 전법관(수사관)을 탄핵했다. 그러자 ‘도굴된 지 2년이 지나도 장물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는데 무슨 처벌이냐’는 변호가 잇달았다. 그러자 정방길은 ‘무슨 소리야. 도굴범이 그 무덤에 황금유물이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되받아쳤다.”
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진 쌍릉에서 황금 유물이 도굴범의 표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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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왕릉(王陵) 주장(主張)에 결코 동의(同意)할 수 없다 -
○ 고려사(高麗史)를 인용(引用)하고 있다면 : 고려사(高麗史)에 기록(記錄)된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전혀 관계(關係)없는 많은 기록(記錄)들은 어떻게 된 노릇일까?
위의 인용(引用)편을 보면 : 〈후조선 무강왕과 그의 비 능이 있는데, 민간에서는 무강왕을 말통 대왕 혹은 어릴 때 서동이라 불린 백제 무왕…〉이라고 한다면, 백제(百濟)가 후조선(後朝鮮)이냐? 하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된다. 이건 희극(戲劇)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Point)는 : 고려(高麗)왕조(王朝)가 반도(半島) 땅에서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룬 것을, 통일환영(統一環瀛)이나 천하통일(天下統一)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거다. 덧붙여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만만세(萬萬歲) 삼창(三唱)하며, 무릎을 꿇고 뒷걸음으로 나간다는 거다.
제후국(諸侯國) 주제를 넘어, 만만세(萬萬歲)를 외치며,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외칠 수 있으며, 황도(皇都)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거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 : 金馬郡本馬韓國[後朝鮮王箕準避衛滿之亂浮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 금마군은 본래 마한(馬韓)국이었다. [후조선(後朝鮮)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해 부해하여 남쪽의 한(韓) 땅에 이르러 개국(開國)하고 마한(馬韓)이라고 불렀다.] 百濟始祖溫祚王幷之.自後號金馬渚新羅景德王改今名.至高麗來屬忠惠王後五年以元順帝奇皇后外鄕陞爲益州.有彌勒山石城[諺傳箕準始築故謂之箕準城] : 백제(百濟)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병합하였다. 그 뒤에 금마저(金馬渚)로 부르다가 신라(新羅)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고려(高麗)에 내속(來屬)되기에 이르렀는데, 충혜왕(忠惠王) 후 5년에, 원(元)순제(順帝)의 기황후(奇皇后)의 외향(外鄕)이라고 하여 익주(益州)로 하였는데, 미륵산석성이 있다. [언(諺)전에 의하면, 기준(基準)이 처음 쌓은 성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준성(箕準城)이라고 하였다.] 又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俗號末通大王陵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 : 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王妃)의 릉(陵)이 있다. [속설에 말통대왕(大王)릉 이라고 전하는데, 또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아명이 서동(薯童)이라고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충숙왕(忠肅王) : 己巳,十六年,元天曆二年.三月,盜,發金馬郡,馬韓祖,虎康王陵,捕繫典法司,及賊逸,政丞鄭方吉,欲劾典法官,贊成事林仲沇,沮之曰,賊繫獄二年,無見贓而死者多矣,方吉曰,固知發塚人多,金仲沇,慙恚. : 3월에 도적이 금마군(金馬郡)에 있는, 마한(馬韓)의 조상 호강왕(虎康王)의 능을 발굴하였다. 체포하여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하였는데 달아나 버렸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을 탄핵하고자 하니,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어도 드러난 장물(贓物)은 없고, 이 일 때문에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무덤을 판 사람이 무덤에 금(金)이 많은 것을 본시 알았다." 하니, 임중연이 부끄러워하고 성내었다.
世宗實錄地理志.全羅道.全州府.益山郡:後朝鮮武康王及妃雙陵.[在郡西北五里許, 谷呼武康王爲末通大王]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전주부 익산군 : 후조선 무강왕(後朝鮮武康王)과 왕비(王妃)의 쌍릉(雙陵)이 있다. [군(郡)의 서북(西北)쪽 5리쯤 있는데, 속호(俗呼)에서 부르기를, 무강왕(武康王)은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고 한다.]
➊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에서는 :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王妃)의 릉(陵)이 있다.〉고 하였다. 다만 〈속설에 말통대왕(末通大王)의 릉(陵)이라고 하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백제(百濟) 무왕(武王)의 아명이 서동(薯童)이라고 한다.〉하였을 뿐이다.
➋ 末通大王(말통대왕) / 한국한자어사전 : [백제의 제 30대 임금인 무왕(武王)을 세속에서 이르는 말. 어릴 때의 이름인 서동(薯童:맛등)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또 이어서 설명(說明)하기를…
永通大王(영통대왕) / 한국한자어사전 : [기자 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準王)이 위만(衞滿)에게 쫓기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益山)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일컬었다는, 무강왕(武康王)을 달리 이르는 말.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금마군조(金馬郡條)에는 말통대왕(末通大王)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마한(馬韓)조(祖) 호강왕(虎康王) 릉(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백제(百濟)의 무왕 릉(武王 陵)이라고 하는 건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➍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王妃)의 쌍릉(雙陵)이 있다고 했고, 민간에서는 무강왕(武康王)을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백제(百濟)무왕(武王)이란 이야기는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도대체 어떤 설명(說明)이 올바른 것인가? 이러한 혼란(混亂)도 해결(解決)하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무왕(武王) 릉(陵)’ 타령이란 말인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이 곧 ‘무강왕(武康王)’이고, ‘영통대왕(永通大王)’이고 ‘말통대왕(末通大王)’이란 이야기다. 수백(數百)년 후대(後代)의 백제(百濟) 무왕(武王)이라는 이야기는 뭔가?
고려사(高麗史)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말통(末通)대왕(大王)"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서동(薯童)"을 훈독한 "맛둥"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속설(俗說)이다. 이는 서동(薯童)과 말통(末通)을 어거지로 꿰어 맞춘 결과(結果)로 보인다.
핵심(核心)은, 마한(馬韓)의 땅이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이냐? 하는 거다. 그럼 마한(馬韓)의 54개 나라(國)는 어디에 있었을까?
‘진한(秦韓)=진한(辰韓)’은 경상도(慶尙道) 땅일 게다. 그러면 ‘변한(弁韓)=변한(卞韓)’의 땅은, 전라도(全羅道) 남(南)쪽의 남해(南海) 해중(海中)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반도(半島)사학(史學)의 논리(論理)대로 변한(弁韓)이 곧 가야(伽耶) 땅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러면 왜(倭)와 접(接)했다는 왜(倭)의 땅은 어디에서 찾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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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본문계속)
…뼈의 접합부위. 백제 무왕이 태어난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서거한 때는 64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620~659년이라는 인골의 연대측정으로 보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짙다.|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 제공…
■ 왕릉일 수밖에 없는 이유
1917년 쌍릉을 발굴한 야쓰이는 1쪽도 안 되는 약식보고서에서 무덤의 구조나 내부 석관의 잔존상태 등을 감안할 때 백제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쌍릉이 무왕 부부의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무엇보다 무덤 내부의 구조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구조와 같거나 오히려 큰 편이다. 즉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다. 또 무령왕릉의 목관처럼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コウヤマキ·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목관도 심상치 않지만 발굴된 유물 또한 의미심장하다. 도굴된 채 발굴되었기 때문에 유물은 매우 적었지만 토기 및 옥장신구(대왕릉)와 금동제관장식과 관못(소왕릉)은 왕릉급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특제유물들이다.
예컨대 옅은 갈색으로 타원형 심엽형 고리인 옥장신구는 2013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楊州) 수나라 양제(재위 604~618) 무덤에서 발견된 징식품과 유사하다.
612년(무왕 12년) 수양제가 무왕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 기록이 눈에 띈다. 또 “624년(무왕 24년) 당나라 고조가 무왕을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는 기록 역시 허투루 볼 수 없다. 김낙중 전북대교수는 “이 무렵 중국에 선물로 주었거나 수입한 중국제 옥대를 무왕이 차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쌍릉의 대왕릉. 고려시대부터 도굴의 화를 입었다고 <고려사> 기록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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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왕릉(王陵) 주장(主張)에 결코 동의(同意)할 수 없다 -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41대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해 남(南)쪽으로 피신(避身)한 시기를 대략(大略) 기원전(紀元前:BC) 194∼180년경으로 추정(推定)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부분(大部分)의 사서(史書) 기록(記錄)은, 준왕(準王) 곧 무강왕(武康王)의 쌍릉(雙陵)이라고 하였다. 다만 속설(俗說)에 서동(薯童)이 변하여 말통(末通)이란 말과 음이 비슷하니 혹(或) 무왕(武王)릉 일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백제(百濟) 무왕(武王)은 기원후(紀元後:AD) 600∼641년【재위(在位)】이다. 시차적(時差的)으로 준왕(準王)과는 8백년(百年) 이상의 차이(差異)가 있다.
위 본문(本文) 기사(記事)를 보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쌍릉(雙陵) 대왕(大王)릉에서 발견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60대 전후 남성 노인, 키 160∼170.1㎝, 사망 시점 620∼659년'으로 추정된다고 지난 18일 발표했다.】하였다.
무왕(武王) 출생(出生) 기록(記錄)은 없다. 다만 백제왕(百濟王)중에서, 인골(人骨)분석(分析) 결과(結果)에 의한 사망(死亡)시점 “620∼659”년에 왕(王)으로 재위(在位)하고 있었던 인물(人物)은, 무왕(武王)밖에 없으니, 그 무덤이 무왕(武王) 릉(陵)이라는 이야기다.
➨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백골(白骨)시신(屍身)의 정확한 사망일자(死亡日子) 조차도, 사실 대략적(大略的)인 며칠 전(前)의 것인지는 추정(推定)하고 있을 뿐이다. 하물며 1,300 여년(餘年)년 전(前)에 죽었다는 백골(白骨)을 가지고 서력(西曆) 620-659년 전(前)의 사체(死體)라고 한다면, 이것을 밝힌 자(者)는 신인(神人)이라고 본다. 조선사(朝鮮史)는 신(神)들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人間) 삶의 이야기다.
하필이면 서력(西曆) 620년 ∼ 659년인가? 서력(西曆) 660년이 바로 백제(百濟)가 당군(唐軍)에 의해 격파(擊破)된 해이다.
이런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가? 아니면 그저 발표(發表)용으로 국민(國民)들 세뇌(洗腦)과정(過程)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건가!
〈コウヤマキ(高野槙)〉에 대해서
○〈쌍릉(雙陵)목관(木棺) : 일본산 고야마키(コウヤマキ·일본에서만 나는 침엽수)〉라고 기사(記事)에서 말하고 있는데,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 コウヤマキ(高野槙) / 금송(金松)
学名 / Sciadopitys verticillata (Thunb.) Sieb. et Zucc., 1842[2]
和名 / コウヤマキ、ホンマキ
英名 / Japanese Umbrella-pine
コウヤマキ(高野槙、高野槇、学名:Sciadopitys verticillata)は、マツ目コウヤマキ科の日本および韓国済州島の固有種。常緑針葉樹で高木となる。別名ホンマキ。コウヤマキ科は1属1種であり、コウヤマキのみを含む。금송(타카 노마키, 고야전,학명:Sciadopitys verticillata)은 마츠째 금송과 일본 및 한국 제주도의 고유종. 상록침엽수로 타카기이다. 별명홍 마키. 금송과는 1속 1종이며, 금송만을 포함한다.
概要[編集] : かつては世界中に広く分布していたが、新第三紀では北アメリカで、更新世にはヨーロッパでも滅びて、日本と韓国済州島にだけ残存している[3]。 : 과거에는 세계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지만, 새 제삼기에서는 북 아메리카에서 플라이스토세에는 유럽에서도 망하고 ‘일본과 한국제주도에만 잔존하고 있다’[3]。
庭園に植栽し、材木としても利用される。世界三大造園木の1つで[要出典]、木曽五木の1つ。古代には、棺材として最上級とされた。弥生時代や古墳時代には木棺[4]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 정원에 재배하고 재목으로도 이용된다. 세계 세대조경 나무의 1개로[요 출처]、키소 이츠키의 1개. 고대에는 관재로 최상급으로 알려졌다. 야요이 시대 고분시대에는 목관[4]로 사용되고 있다.
곧 こうやまき[高野槙] / 삼나뭇과의 상록 교목. : 고야산(高野山)에 많은 데서 붙여진 이름. 일본의 사국, 구주등지에서 자란다. 금송(金松)을 말한다고 한다. 금송(金松)은 세계의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희귀 수종이다.
● 그러나 위의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서는 : 〈한국(韓國) 제주도(濟州島)의 고유종(固有種)도 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올바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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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본문계속)
■ 그럼 선화공주의 무덤은?
쌍릉 중 대왕릉의 실체가 다름 아닌 백제 무왕릉일 가능성이 커졌지만 과제도 남아있다. 고려시대부터 도굴 기록이 남아있는데다 일제 강점기에 야쓰이가 여러 사람의 인골을 모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은 과제는 도굴된 채로 남아있는 무왕의 부인묘, 즉 소왕릉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소왕릉을 발굴해서 쌍릉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면서 “소왕릉은 내년부터 발굴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왕릉이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 때문이다.
…미륵사의 구조는 <삼국유사>에 나온 그대로다.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모여있는 형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운데 금당과 탑은 선화공주가, 서탑과 서금당은 사택왕후, 동탑과 동금당은 의자왕의 모친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동요가 퍼져~서동과 비밀리에 정을 통하고~함께 백제로 와서….”(<삼국유사> 무왕조)
우여곡절 끝에 선화공주의 결혼을 성사시킨 서동(무왕)은 익산에 선화공주를 위한 절(미륵사)을 조성했다. 이것이 무왕과 선화공주 전설의 요약이다. 이 <삼국유사>의 구절 덕분에 최근까지 쌍릉의 소왕릉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런 믿음에 금이 갈만한 발굴 및 연구결과가 이어졌다.
…익산 쌍릉 전경. 오랫동안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릉으로 알려져 왔다.…
■ 선화공주, 사택적덕의 딸, 의자왕의 모친
2009년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해체과정에서 쏟아진 유물 중에 석탑 조성과정을 적은 금판이 발굴됐다. 내용은 획기적이었다. 미륵사 석탑을 조성한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당장 <삼국유사>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공된 설화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내용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미륵사를 유심히 보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탑 하나에 금당 한 채 씩 모두 3세트의 탑+금당으로 조성돼 있다. 서쪽 탑을 조성한 이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과 동탑은 선화공주와 의자왕의 모친이 만든 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왕의 부인이 한 명 뿐이었겠는가. 무왕도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 의자왕의 모친 등 3명을 왕후로 들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일리 있는 추론이다.
…1917년 일제강점기에 야쓰이 세이치가 약식으로 발굴할 당시의 익산 쌍릉…
2016년에는 대왕릉의 주인공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일인 야쓰이가 수습한 유물 중에 쓸려 들어간 대왕묘의 치아 4점을 분석한 결과 20~40세 여성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때도 대왕묘의 주인공을 두고 또 한 차례 설왕설래 했지만, 이번에 인골전체를 분석한 결과 다시 50대 이후의 남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성준 학예연구관은 “앞으로도 인골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 분석을 계속하면서 대왕릉의 추가연구와 소왕릉 발굴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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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왕릉(王陵) 주장(主張)에 결코 동의(同意)할 수 없다 -
○ 우리나라 사학(史學)은, 왜 이런 모양(模樣)으로 퇴보(退步)하고 있는 것일까?
반도(半島) 서남(西南)의 백제(百濟) 땅이 마한(馬韓)의 땅이라면,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등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
또 변진(弁辰)의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은 또 어디에서 찾아야 되나?
더불어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그 경계(境界)가 접(接)했다.[其 瀆 盧 國 與 倭 接 界]고 하였는데, 언제부터 왜(倭)가 반도(半島) 땅에 살았는가?
➨〈접계(接界)〉란 말은 ‘접경(接境)’과 같은 말이고, ‘경계가 서로 맞닿음’을 일컫는 말이 아니더냐!
그런데 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고 쌍심지를 켜고, 입에 거품을 무는 가?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2018년 07월 20일〈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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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17년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인 "야쓰이"란 자(者)가 약식발굴을 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도굴을 했든 발굴을 했든 간에 무덤속을 파헤친 것은 똑같은 일인데, 무슨 놈의 약식발굴이란 말일까.
또 이 者(자)가 무덤속에서 무슨 짓을 하였을까? 왜 상자안에 인골을 남아 남겨 놓았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반도백제(半島百濟)을 증거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남겨 놓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 인골(人骨)이 서력 620-659년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1천 수백년 전에 죽은 인골로부터 이와 같은 정확한 연대까지를 알 수 있다니, 대한민국의 과학계와 사학계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믿기 어려운 것은 왜지?
반도 서남땅에 백제왕조가 6,7백년 동안 영화를 누렸다면, 그 증거와 정황은 넘치고 넘쳐나야 정상인 것이다. 특히 지배계층에 속했던 8개의 대성(大姓)들은 흔적도 없이 사려져 버리고, 200개나 되었다는 城(성)의 유적은 외계인이 몽땅 파헤져 그 주춧돌마저 수송기에 싣고 가져가버렸나 보다. 현미경까지 동원해 찾아보아도 정황조차 발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또 백제 망시에 백제인들은 무슨 방법으로 돌궐(突厥:투르크)과 말갈(靺鞨)등으로 핍박을 피해 도주할 수 있었을까? 당시 백제인들은 경골술을 익힌 초절정고수 무리들이었을까? 또 충청,전라 땅을 말갈등이 나누어가졌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대한민국 사학계야!
그럼 익산쌍릉은 후조선 준왕의 무덤이라는 결론인지요...
안녕하세요. <비천>님!
무더위가 나라를 온통 삼켜버린 듯 합니다.
익산의 쌍릉은 무왕의 것도 아니요, 후조선 준왕(무강왕)과 그의 왕비 무덤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반도조선을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위작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충청도와 전러도 경상도남북도 지방에 78개가 나라가 있었다고 하면서, 하나의 나라가 수십여만호로부터 수천호까지로 이런 나라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 이곳 지방은 유물유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집 한채 지을 땅이 제대로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그 정황이나 유물유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그렇다면 익산 미륵사나 공주 무령왕릉.또는 불국사나 경내의 탑들. 석굴암.해인사 팔만대장경등이 실제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모두 위작인지요?
안녕하세요. <비천>님!
미륵사. 무령왕릉. 불굴사와 경내의 탑들. 석굴암등은 모조품이라고 보면 타당할 것입니다. 해인사 역시 이름만 같은 사찰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이력들을 살펴보면 역사서에 기록된 것들과 부합되지 않는 면들이 다수(多數)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애기는 : 지금 언급한 것들은 삼국시대와 고려의 것들인데,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반도 땅에 존재했었다는 근거나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高麗(고려)도 마찬가지지요.
일반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하겠지만 역사서 원전에서 말하는 조선 영토속의 자연환경은 반도는 너무 작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이웃나라에서, 고구려나 백제를 침략한 나라에서 기록해 놓은 역사기록의 자연환경이나 지형지세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隋煬帝(수양제)는 여러 번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고, 많은 세작(간첩)을 보내 고구려의 여러 지형과 진지, 군량등등을 염탐하고, 침략을 합니다. 이러한 수(隋)나라때의 고구려가 동서(東西)로 6천리에 걸쳐 있었다고 했는데, 반도 땅은 동서남(東西南)이 바다로 한정되기 때문에 땅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가 없죠.
또한 백제나 고구려는 요동지동 일천리 쯤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죠. 이건 백제가 반도 서남에 자리잡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런 근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제(日帝)가 지들 스스로 이야기하는 자칭 '황기(皇紀) 2600년'을 위해 반드시 반도 삼국(三國)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삼국이 반도에 없었다고 한다면 지들이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황기 2,600년은 그동안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반도 땅에 많은 모조품들을 만들어 놓았고, 또 이들 삼국을 지들이 정복하고, 식민화했다고 하며, 이에 따라서 지들은 천손이고, 반도인들을 2등국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손(天孫)이란 하늘의 자손이란 뜻이죠.
이걸 반도의 사학계는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열도아이들은 그대로 믿고 있지요. 소수만이 긴가민가 할 정도구요. 이게 공교육의 덕택입니다.
이런 공교육으로 인한 결과는 가미까제식의 무조건식의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집니다.
폐허속에서 세계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그 속엔 바로 이러한 교육의 맥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역사요, 국민들에게 사기를 치며, 가르친 그 거짓의 역사는 오늘날엔 진실처럼 굳어져 누구도 이를 부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옛 조선을 이었다는 반도는, 스스로 2등국민으로, 식민화되어, 지금도 국민들 마음속에는 이런 유형의 생각이 흐르고 있습니다. 공교육의 무서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댓글이 일어졌습니다만 대한민국은, 역사학계는 쿠데타이상의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식민화된 역사교육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질문이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네여.카페를 통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문무님.
유주(요동/요서)위치가 지금의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