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이씨 가문에 무예와 지혜가 뛰어난 삼형제가 있었다.,그러나 형제는 계유정난으로 인해 운명이 갈렸다.
우연히 양산에 있는 군 부대에 도시락 배달을 가다가 지금 현재 4차선도로가 아닌 옛길로 가다보니 이징석,이징규 이징옥의 형제의
태생지를 지나 치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중에 이징옥은 역사적으로 세조에 반기를 든 장수로 이름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형제의 운명이 갈리는 비극이 되었다.
그래서 3형제의 무덤을 찾아 보기로 하고 이래저래 정보를 수소문 하였는데 그 중에 이징규의 묘는 창녕에 있다 하지만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창녕군청과 몇 군데 알아 보았으나 알아 내지 못하다가 우연히 자료를 보고 찾아다녀 왔다.
창녕에는 이징옥의 형제의 선대의 묘가 있는데 이징규의 묘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찾기 어렵다.
먼저 이징석의 묘를 찾아 갔다.
이징석의 묘는 양산에 있고 묘역이 찾기 쉬운 곳에 있고 비의 명문에는 장강공 이징석묘비라 되는 있으며
시호는 장강이라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의 보면 시호는 장강이라 되어 있는 비의 전체적인 모습이 다시 세워진 느낌이 많이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비문의 내용이 아니었다.
조선초기의 묘제는 무덤이 크지 않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흙을 돋운것으로 생각된다.
이징석의 묘 아래는 그의 아들 팔동의 묘가 있다.
이징석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1416년(태종 16)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무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1421년(세종 3) 상호군을 거쳐 연일진병마절제사(延日鎭兵馬節制使)가 되었고, 1423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우도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27년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고, 또 좌군총제로 승진하였다.
1432년 중추원부사를 임명받고, 이듬해에는 도원수 최윤덕(崔閏德)의 부장인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3,01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兀刺) 등지로 가 파저강(婆猪江)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한 공으로 중추원사에 올랐다.
그 뒤 경상도병마도절제사·경상좌도처치사·경상우도도안무처치사 등을 거쳐 지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사퇴하였다. 그 동안 뛰어난 무예로 변방의 진(鎭)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동생 이징옥이 청렴결백해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렴결백은 복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면서,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해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다.
평소에 너무 탐욕해 동생 이징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상중에 징옥을 구타해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했다. 1451년 문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추원부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에 제수되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자, 당시 함길도도절제사로 있던 동생 징옥이 크게 분개해 병마를 이끌고 북으로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두만강을 건너려 하다가 종성판관 정종(鄭種) 등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피살되었다.
이에 아들과 함께 연좌되었으나, “평소에 동생과 사이가 나쁘고 내통이 없다.”하여 석방되었는데, 이는 수양대군이 그의 무예를 아껴 포섭하기 위한 의도였다. 1455년(세조 1)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梁山君)에 봉해졌으며,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강(莊剛)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징석(李澄石))]
그 다음은 이징옥 이다.
이징옥은 세조와 반목하면서 후손이 단절되었다고 하나 유모가 난리를 피해 경주로 오면서 후손이 이어지고 있는데
묘는 없고 신도비와 그를 기리는 사당이 남아 있다.
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 부사직으로 무과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복소윤(司僕少尹)에 제수되었다. 1423년(세종 5)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 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입하여 노략질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공을 크게 세우자, 세종이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만에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해 조선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1449년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야선(也先)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집권한 뒤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하자, 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서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鄭鐘)·이행검(李行儉) 등의 습격을 받아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징옥(李澄玉))]
마지막으로 이징규이다. 이징규를 묘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끝에 찾았는데 조선시대의 묘가 아니고
현대의 묘제로 지어졌고 후손 또한 단절인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않다.
어떻게보면 삼형제 중 제일 불운한 인물로 생각된다.
묘는 창녕에 있으며 묘비도 현대에 만들어 졌는데 부근에 망가진 무인석이 애처롭기만하더라
단종 때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킬때 아우인 이징규를 잡아갔는데 이징옥이 잡혀서 죽자 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형인 이징옥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당했는데 후손 조차 모르고 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새로이 조성한 묘를 보면서
삼형제 삼장수의 운명이 참으로 애처롭다는 생각이드니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인생 무상함을 느낀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