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정은 진사 이민적(李敏迪, 1663∼1744)이 효종 때 학문을 닦기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그 후 순조로부터 효자 기념의 정려비를 받았던 이한오가 노모를 이곳에 모셔 효도하던 곳으로 전한다. 체화정은 안동 시내에서 풍산읍으로 들어가는 큰길가에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풍산장터에 차를 세우고 조금만 걸어 나오면 연못을 앞에 두고 산기슭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자의 이름을 체화라 한데는 정자 주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가 있는데, 이민적과 그 형 이민정(李敏政)의 우애를 그윽하게 담아내고 있다. 정자에 걸려 있는 체화정과 담락재(湛樂齋)란 편액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 시 “상체지화(常棣之華)와 화락차담(和樂且湛)”에서 따온 말이다. 상체 시의 내용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것인데, 상체는 ‘아가위’ 꽃에 꽃받침이 두드러져 보이듯 형제간의 사이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가깝고 친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화락차담이란 아무리 부부의 금실이 좋아도 형제간에 화합해야만 진정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담락재 편액은 풍속 화가로 잘 알려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안기찰방(安奇察訪)의 직책을 마치고 한양으로 가던 중에 썼다고 전한다.
봄, 체화정에도 봄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것 같다. 삼신산을 붉게 물들인 영산홍이 곱다.
체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일반적으로 방 앞쪽에 퇴칸을 두는 경우 칸살을 방보다 좁게 잡는 법인데, 체화정은 3칸 마루를 부설하고, 어칸에 온돌방 1칸을 두면서 좌우 퇴칸에 마루방을 들인 독특한 공간구성을 취했다. 정자 앞쪽 퇴칸에는 계자난간을 둘러 전면의 연못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즐기기에 적합하도록 배려하였으며 낙상을 방지하는 기능을 취하고 있다. 양쪽 마루방의 천장은 우물반자의 눈썹 천정으로 마감되고 전면은 3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온돌방과 양쪽 마루방은 4분합문을 부설하여 필요시에는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어 6칸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마루방 외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하였고 배면과 측면 쪽은 쌍여닫이 골판문을 달았다. 정자로 오르내림은 우측에 계단을 두었으며, 아궁이는 어칸 마루 하부에 설치하였다.
가을, 체화정. 물빛에 잠긴 체화정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정자 앞에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체화정은 배롱나무가 절정을 이룰 때인 한여름과 정자 앞으로 난 길가 가로수인 은행이 곱게 물든 늦가을이 되면 찾는 발길이 잦다. 또 정자 앞에 조성된 연못과 배롱나무의 운치, 정자가 지닌 다소곳함이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연못은 물길을 끌어다가 조성한 것으로 연못과 정자의 구성은 조경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자 앞 연못을 조성할 때 삼신선산(三神仙山)을 상징하는 인공 섬 3개를 만들었으며 그 섬들에 삼신산의 이름을 따라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洲)라 이름 붙였다. 삼신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일컫는 말로 중국에서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처음 정자를 지었을 때의 모습과는 세월이 흐르며 많이 바뀌었지만, 정자의 주인인 이민적, 이민정 형제가 주고받은 시를 통해 그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민정의 시
사람에게 좋은 땅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 하늘이 아껴두어 오늘에야 새 기둥 빛나네 마을은 또렷하게 시내를 따라 들어섰고 늘어선 산들은 겹겹이 눈에 들어 아름답네 달이 처마 끝에 떠오르니 하늘은 읊을 만하고 바람이 못 수면에 부니 한낮에 잠자기 적당하네 늙을수록 한가로워 일없음을 아노니 아우는 노래 부르고 형은 화답하며 노년을 보내리 |
이민적의 시
늙을수록 나는 속세 인연 끊고 싶어 물을 끌어오고 바위에 기대어 몇 기둥을 얽었네 고요한 빈터 연기 나무에 갇히어 푸른빛 띠고 차가운 밤 달빛은 주렴에 들어 아름답네 동북쪽의 창가에선 산을 보고 읊조리고 일상의 베갯머리 여울 소리 들으며 자네 일찍이 그간의 많은 취미 아노니 이십여 년이나 헛되이 달리려고 했네 |
위 시에는 만년에 속세의 번다한 인연을 끊고 한적한 곳에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한 삶을 구가하는 형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형 이민정의 시구에 아우가 부르면 형이 화답하는 형제간의 소박한 우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 시구에 나타나는 풍광이야 변한 세월만큼이나 다시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정신만은 정자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 있을 것이다. 큰길 쪽에서 바라보는 체화정이 산수화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정자 위에서 바라보는 연못의 그림자 풍경은 연못을 파고 삼신산을 그 안에 둔 이민적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체화정을 더 예스럽게 보이게 하는 불밝기창
체화정을 건립한 만포 이민적의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혜숙(惠叔)이다. 1744년(영조 20)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백형(伯兄)인 이민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만년에 남쪽 언덕의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그 앞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어 물을 끌어다 물고기를 길렀으며, 그 좌우에다 이름난 꽃을 빙 둘러 심어놓고, 백형 옥봉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거처하며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만포 이민적이 죽은 후,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 1719~1793)가 체화정을 이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 1528~1594)의 8대손이며, 이민정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결혼한 뒤에도 내실에 거처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어버이 곁에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에 1812년(순조 12)에 그 효성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으며, 풍은공은 한 해 전인 1811년에 그 충의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도 체화정 길 건너 맞은편 동네인 하리에는 풍은공 종택인 충효당(忠孝堂)이 있고, 충효당에는 별당으로 쌍수당(雙修堂)이 있다. 이 충효, 쌍수라는 이름이 풍은공 이홍인의 충의와 용눌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체화정은 주변의 풍광만을 누리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예안이씨 일가의 효성과 우애와 충의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여름, 배롱나무가 만개한 체화정.
겨울, 눈 내린 체화정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