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
- ▲ 조선일보 DB
지난 14일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배 관장을 만나 디자인과 공학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그는 특히 페트로스키의 디자인 이론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1970년대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교수로 재직할 때 국내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디자인을 강의한 적이 있어요. 디자인 이론의 첫째는 '기능에 충실하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벤츠가 왜 좋은 디자인으로 꼽힐까요. 우선 고장이 적고 잘 달린다는 차의 기본 기능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에 따르면 기능뿐 아니라 비용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디자인의 역할이다. 배 관장은 "경차 '티코'는 원래 스즈키가 개발한 모델이었는데, 대우가 만들면서 생산원가를 250만원에 맞추기 위해 설계를 완전히 새로 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는 당시 생산원가가 450만원인 기아 '프라이드'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배 관장은 품질 개선과 같은 영역에도 디자인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우전자 사장 시절 가장 큰 고민이 불량률을 낮추는 것이었어요. 일본에서 개발된 TQC(전사적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장 직원들을 한 사람씩 만나 '조립할 때 퓨즈 하나만 잘못 조립해도 나중에 반품이 들어와 회사에 손해가 난다'고 설명했더니 품질이 좋아지기 시작하더군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리더가 갖춰야 할 디자인 능력임을 깨닫게 됐죠."
배 관장은 1990년대 당시 '탱크주의' 광고로 세간에 회자됐다. 전자제품은 복잡한 기능보다 단순하면서도 튼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광고였다. 그는 "당시 전자업계는 하이테크를 강조하는 분위기였지만 실제 소비자가 화를 내는 것은 첨단 기능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니라 왜 고장이 나느냐는 것이었다"면서 "단순하고 튼튼한 디자인으로 전환하면서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디자인 행정도 디자인 이론에 입각해본다면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강변에 가보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차양 같은 것을 설치했는데, 멋만 강조한 나머지 크기가 너무 작아 본래 용도인 햇빛차단 효과는 거의 없습니다. '기능에 부합해야 좋은 디자인'이라는 기본을 모르기 때문이죠."
그는 갈수록 행정을 비롯한 '서비스 디자인'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우체국은 경쟁력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집배원들은 하루 평균 800통의 우편물을 배달하는데, 한국 집배원들은 하루 1500통을 배달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이죠. 서비스 디자인이 국가나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배 관장은 MIT 기계공학 박사 출신으로 한국과학원 교수, 대우국민차·대우전자 CEO, 정보통신부 장관,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를 지냈고, 올 2월 공모 절차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