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인격체다.
그러니 기도를 한다.
기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빎’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나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어떤 원함에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말해 종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이 ‘믿어라. 그리고 기도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용어다.
나는 무신론자다.
신은 없고 사후세계도 없다고 단정하며 산다.
그러니 용서니 소망이니 이따위에 관심이 없다.
용서받을 일을 안 하는 것이고 이루고 싶으면 노력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능력의 부족이라 여기며 내려놓으면 편하다.
죄를 짓고 사해달라는 애원이 우습다.
애당초 죄를 짓지 않으면 될 것을 맘대로 행동하고 나쁜 짓을 한 후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삶은 아닌 듯해서 처음부터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짓도 하려 들지 않는다.
만약에 어떤 행동이 누군가에게 죄가 된다면 죗값을 당당하게 치르고 뉘우치고 싶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말로 우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죄는 어떤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빈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냐는 얘기다.
현실적인 인간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가 어떤 일로 인하여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신에게 용서 빌어야 할 일은 결코 아니고 그 당사자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내 죄를 사해달라는 철면피함이 왜 존재하는지 나는 늘 궁금하다.
그러니 기도 따위는 안 하고 싶어서 안 한다.
원래 죄와 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이라고 하는 절대자를 만들기 위해 인간이 즉 종교론자가 만들어 난 허구다.
신이 있다면 어떤 사람도 죄를 지어 벌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팔면서 나쁜 짓을 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 중이다.
그들은 왜 전쟁을 할까?
종교라는 미치광이 짓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의 나라 일이니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고 죽고 피 터지는 전쟁을 꼭 해야하는지 늘 의문이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전부라면 전쟁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으니 나의 신도 당신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후에 천당이니 극락의 세계에 간다는 종교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산다.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던 중요하지 않고 오직 다음 생에는 천당에서 혹은 극락에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죽으라 하고 믿으며 산다.
참 불쌍한 존재들이다.
왜 하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는 후생을 걱정하면서 지금 이 시각을 불행하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도 후생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 타당한 생각 아닐는지 궁금해진다.
이생에도 행복하고 후생에도 행복한 삶을 살면 될 것을 굳이 이생에서의 삶은 포기하고 후생에 태어나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어리석은 인간의 바람이 어이없어 웃게 만들고 있다.
나를 위한 기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의 행복은 내 방식대로 챙겨가며 살고 있다는 얘기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는 행복했으면 바람을 늘 가지며 살지만 내 바람 때문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고 너그러워지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흔히 보통사람들이 믿는 구차스러운 신에 대한 요구나 기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얘기다.
원하고 싶다.
하지만 내 속에 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얘기다.
그냥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감사하고 즐기고 웃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원하는 것이 없으니 굳이 남들처럼 신이여 도와주소서 하고 애원할 일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찬양하여 목메는 일도 없다는 얘기다.
부탁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여 이루면 될 것을 어리석게 신에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착하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음흉함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를 모르는 인간을 보면 가소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절대로 기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때 이것이 누군가를 해하거나 아프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스스로 자제하면 되고 이것이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면 굳이 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스스로 행하면 되는 것이 내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석가나 예수나 공자를 신임하고 그들이 후세에 남긴 말씀에 감탄하고 감동하고 축복받은 것인 양 입으로 떠들고 난리다.
그런데 종교에 심취한 인간의 대부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말은 그들이 존경하는 자를 따르는 듯하지만, 행동은 개차반인 경우가 허다함을 볼 때 종교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이해는 가지만 인간이 믿으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허다함을 느낀다.
좋은 말씀은 들어야 한다.
그러나 듣고 행하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어 천당에 가고 석가를 믿어 극락 간다는 참 어이없는 생각은 누가 심어주었는지 궁금해진다.
흔히 하는 얘기 중에 일주일 중 엿새는 나쁜 짓 하고 일요일 교회 가서 하느님께 죄를 빌면 죄가 사해져서 천당 갈 수 있다는 얘기나, 무조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간다는 허무맹랑한 얘기에 아직도 수긍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니 웃음이 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자명한 규율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기도하고 따르면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우린 믿어야 한다고 하니 웃음이 난다는 얘기다.
공자님 말씀도 다 옳은 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면 성리학자는 난리가 날 것이다.
사실 공자가 한 말은 상당한 어폐를 지녔다고 여러 학자가 말하고 있고 흔히 여자들에게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게 했던 삼부종사라는 얘기는 얼마나 여성을 업신여기고 천대한 얘기인지 모른다.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자식을 따르라는 것이 삼부종사의 핵심이다.
주정뱅이 아버지를 따라야 할까?
능력 없고 무능한 남편을 따라야 하는 걸까?
부모에게 관심 없는 불효한 자식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까?
생각만 해도 참으로 끔찍한데 그래도 살아가면서 섬겨야 하는 세 세트의 인간에게 여성은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도 역설했듯이 유교는 실은 썩어 문드러진 학문에 불가하고 지배자의 논리에 충실한 남정네가 찬양할 만한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는 듯하다.
세상은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그것의 중심에 제사 문화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제사 문화의 변화는 효라고 하는 사상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에 근거하여서 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존재하느냐 신이나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당연한 얘기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제사의 의미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행할 수 있는 간단하고 간편한 방식으로 변형되어감이 당연하다고 느끼기에 사람들은 수긍하고 흐름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공자의 얘기 따위는 믿을 가치가 희박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제사니 효도니 이런 낡은 생각들은 우리네가 죽은 사후에는 아무 의미 없는 글귀로만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가 남긴 고귀한 어록들이 있다.
그 말을 믿고 따르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을 믿었으면 행동해야 옳다는 얘기다.
흔히 수많은 글을 읽고 한 줄의 진리를 발견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한 줄의 진리를 발견하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얘기처럼 성인들이 얘기를 읽고 스스로 행동하고 실천하려는 맘을 내어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죄를 짓고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마라.
당신이 믿는 어떤 절대자는 반드시 짜증 내며 말할 것이다.
행하라고 얘기했지 죄짓고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며 언짢아할 것이라는 얘기다.
두 손 붙잡고 소원을 말하지 마라.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며 진심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이 믿고 하는 멍청한 기도보다 훨씬 값진 것임을 명심하라.
나이를 먹으니 이루고 싶은 소망이 없다.
그냥 하루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온전히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저녁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 순간 무탈하게 하루를 보냈음에 감사하며 사는 그것처럼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 보면 구차하게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 찾아 기도하는 어리석음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누구에게 용서받을 일은 아예 안 하는 것이 장땡이다.
죄짓고 용서 빌며 애쓰지 말고 감사하며 살다 보면 그게 행복이요 우리네가 갈구하는 천당도 극락도 이 속에 존재함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