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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평택임씨 가문
1. 도시조(都始祖)의 동도(東渡)
임팔급(林八及) 당(唐)나라 말엽 문종(文宗)(재위826-840年)때 18세에 용도각 한림학사(龍圖閣翰林學士)로 시작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계셨다고 기록되어있다.
당(唐)문종(文宗재위826-840年) 9年(835年) 환관(宦官)들이 국정(國定)을 장악(帳幄)하고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가 혼란하자 문종(文宗)은 대신들과 환관(宦官)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이 사건이 당(唐)나라 문종(文宗재위 826-840)이 대신들과 함께 환관(宦官)들을 몰살(沒殺)시키려던 감로지변(甘露之變)(835年)사건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결국 실패하여 많은 관료(官僚)와 대신(臺臣)들이 환관(宦官)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 도시조(都始祖)께서도 이 사건에 연루(連累)되었다는 간신배들로부터 讒訴(참소)를 당하여 축출(逐出)된다.
감로지변(甘露之變) 이후에 관리들이 대량으로 환관(宦官)들에게 피해를 입어 조정의 빈자리가 많았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환관(宦官)들이 더욱 전횡(專橫)을 일삼아 고향(故鄕)인 복건성(福建省)에 낙향하여 산동성(山東省)의 신라방(新羅坊)이 있는 장보고(張保皐)가 창건(創建)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견당대사(遣唐大使)로 계셨다고 한다.
산동성(山東省)의 적산(敵産)지방인 신라방(新羅坊)에서 견당대사(遣唐大使)로 활동하던 중 당(唐)무종(武宗재위840-846年)때인 846年에 도시조(都始祖)에게 간신들의 참소(讒訴)로 다시 화가 미친다.
이에 도시조(都始祖)께서는 뜻을 같이한 동료(同僚) 칠학사(七學士)인 병부상서 유전(劉筌강릉유씨 시조(江陵劉氏 始祖). 어사대부 송규(宋圭남양송씨 시조(南陽宋氏 始祖). 이부시랑 최호(崔互). 태중대부중량장 공윤보(孔胤普)김포공씨 시조(金浦孔氏 始祖). 한림 권지기(權之奇). 허동(許董).설인검(薛仁儉)등 7학사(七學士)와 중국(中國)의 팽성(彭城)으로부터 배를 타고 출발하여 신라(新羅)말 문성왕(文聖王839年-857년年)846年경에 아산(牙山)만 상류(上流)에 동도(東渡)하여 당성진 지금의 평택시(平澤市) 팽성(彭城)에 정착(定着)하였다.
적산 벽화원신라인 장보고가 지은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이었다.
산둥반도 적산에 소재한 ‘적산법화원’은 1972년 터가 발견된 뒤 1988년 다시 지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장보고가 세운 절로 확인됐다.
<1> 도시조(都始祖)의 행적(行績)
도시조(都始祖)와 7학사(七學士)가 동도(東渡)하실때의 당(唐)나라는 문종(文宗824-840年)14년 서기840年경으로 전한다.
감로지변(甘露之變 835年)사건으로 국정을 장악한 환관(宦官)들에 의해 많은 대신(臺臣)들과 관료(官僚)들이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고 연루(連累)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감로지변(甘露之變 835年) 이후에 관리들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어 조정의 빈자리가 많았고 아무도 관직(官職)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환관(宦官)들은 더욱 전횡(專橫)을 일삼았으며 도시조(都始祖)께서도 간신들의 참소(讒訴)로 고향에 낙향(落鄕)하여 계실 적에 신라(新羅)사람인 청해진(淸海鎭)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산동성(山東省)의 신라방(新羅坊)이 있는 신라원(新羅院)인 적산법화원(赤山法貨院832년장보고가 창건)에 견당대사(遣唐大使)로 활동하던 기록이 일본인 승려 엔닌(794-864年)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되어 있다.
평택임씨(平澤林氏)가문(家門)에 전해오는 구전설화(口傳說話)에 도시조(都始祖)와 7학사(七學士)께서 신라(新羅)사람인 장장군(張將軍)의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서 신라(新羅)로 오셨다고 전해오는 구전설화(口傳說話)가 있다.
도시조(都始祖)께서 동도(東渡)하신 후삼국시대와 고려(高麗)초의 모든 역사 기록을 살펴봐도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았는데 일본의 승려인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서기854年에 당나라 체류중에 장보고(張보고).장영(張詠).임대사(林大使).왕훈(王訓)등의 인물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평택임씨(平澤林氏)가문(家門)의 구전설화(口傳說話)와 평택임씨 족보(族譜)및 각 관의 족보(族譜).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등 역사 기록을 종합하여 봤을때 도시조(都始祖)께서는 당나라 문종(文宗재위824年-840年)때에 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출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계셨는데 이 시기의 당나라는 문종(文宗)때로 환관들의 득세로 환관 정치(宦官政治)가 극에 달해 문종(文宗)과 관료(官僚)들이 환관(宦官)들을 몰살하기 위해 감로지변(甘露之變835年)사건을 일으켰으나 도리어 환관(宦官)들에게 발각되어 많은 대신과 관료(官僚)들이 환관(宦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문종(文宗)도 환관들에게 감금(監禁)을 당한다.
그들의 횡포(橫暴)로 많은 관료(官僚)들이 화를 당했으며 온 나라가 혼란(昏亂)에 빠져 이때 도시조(都始祖)께서도 간신(奸臣)들의 참소(讒訴)로 파직되어 고향에 낙향하여 있던 중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의 신라방(新羅坊)이 있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가 건립한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에서 장보고(張保皐)가 당(唐)나라에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으로 있을적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계시던 도시조(都始祖)와 교류(交流)가 있어 견당대사(遣唐大使)직을 맡아 당(唐)나라 무역업(貿易業)과 신라(新羅)의 청해진(淸海進)사이의 무역활동(貿易活動)이 원활(圓滑)하게 이루어 지도록 회역(廻易)과 통역(通譯)을 하는 견당대사(遣唐大使)로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에 계셨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신라방(新羅坊)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견당대사(遣唐大使)로 활동하시던 도시조(都始祖)에게 또다시 신변에 위협이 닥쳐옵니다.
감로지변(甘露之變835년)으로 많은 관리들이 멸족(滅族)의 화를 당해고 많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환관(宦官)들은 더욱 전횡(專橫)을 일삼게 되었으며 문종(文宗)은 더욱 욕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唐14代王 문종(文宗재위826년-840年)은 곧 한(恨)을 품고 서기 840年에 죽는다.
이리하여 당(唐)나라의 상황은 더욱 암울(暗鬱)해지고 또 다시 환관(宦官)들에 옹립된 문종(文宗)의 이복동생인 이염(李炎)이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르는데 唐15代 황제(皇帝)인 무종(武宗)(서기840-846年)이다.
환관(宦官)인 어홍지(魚弘志)구사량(仇士良)의 옹립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 이덕유(李德裕)가 실권(實權)을 쥐고 있었다.
무종(武宗)은 내정면(內政面)에서는 도교(道敎)를 믿어 도술(道術)를 편애(偏愛)하였고 특히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였다.
唐 무종(武宗)은 회창(會昌)2年(서기842年) 당시 재상(宰相)인 이덕유(李德裕)의 주청을 받아들여 궁궐(宮闕)안에 있는 모든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파괴 할 것을 명하고 사찰들을 모두 철거하고 불경(佛經)과 불상(佛像)들을 큰 절로 옮기게 했다.
회창(會昌)5年(서기845年)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을 단행하여 사찰46000여 곳을 헐고26만여명의 승려와 여승(女僧)을 환속(還俗)시켰으며 환관(宦官)들이 실권(實權)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던 관료(官僚)와 옛 관료들을 제거 하였는데 이때 도시조(都始祖)께서도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계셨는데 폐불(廢佛)과 반대파에 연루(連累)되어 신변(身邊)의 위협(威脅)을 느끼시고 도시조(都始祖)와 뜻을 같이하는 7학사(七學士) 일행(一行)과 같이 장보고(張保皐) 선단(船團)의 배(平澤林氏 口傳說話)를 타고 신라(新羅)로 망명(亡命)하신다.
이때가 唐15代 王 무종(武宗)6年(서기846年)이고 신라(新羅)46代 문성(文聖)(재위839-857년)王 시절이다.
서기846年경 중국 복건성(福建城) 동령(東鈴)에서 칠학사(七學士)와 함께 당(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장보고(張保皐)선단의 배를 타고 신라국(新羅國)의 청해진(淸海進지금의 완도)을 향하여 항해(航海)하던중 고국(故國)과 고향(故鄕)을 버리고 정처없는 망명(亡命)길을 택하신 팔학사(八學士)들의 서글픈 망향(望鄕)의 심경을 읆으신 동도시(東渡詩)가 전해오고 있다.
흥팔현동도시 (興八賢東道詩)
林八及 : 八人浮海兮 桂櫂蘭檣 (팔인 부해혜 계도난장)이로다.
<여덞 사람이 건너옴이여 계수나무 돛대에 난초의 삿대로다>
薛仁儉 : 仙李運盡兮 賢士被讒 (선운진혜 현사피참)이로다.
: <당나라의 운수가 다 함이여 어진 선비가 참소를 입었도다 >
劉 筌 : 波濤 闊湧兮 舟楫利逝 (파도 활용혜 주즙이서)로다.
<파도가 넒음이여 뱃길이 편히가도다.>
宋 奎 : 接浙而去兮 謝暗投明 (접절이거혜 사암투명)이로다.
<파도를 조리질하며 떠남이여 어두운곳 버리고 밞은곳 찿아가네.>
許 董 : 吾從東矣兮 可以免禍 (오종동의혜 가이면화)로다.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화를 면함이다.>
權之奇 :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현사출동혜 갈성진충)이로다
<어진선비가 동쪽나라로 가니 있는충성 다 바치로다.>
崔 沍 : 李老入海兮 殷道衷亡 (이노입해혜 은도충망)이로다.
<기자와 미자 두 어진이가 해외로 떠남이여 은나라는 곧 망할것이다.>
孔德狩 : 見機而作兮 疏廣之從 (견기이작혜 소광지종)이로다.
: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學士公께서 동도하실 때 함께오신 7賢과 더불어 뱃머리에 서서 각각 읆어신 東渡詩>
<산동 반도(山東半島)를 출발하여 망명(亡命)의 한(恨)을 뒤로하고 황해(蝗害) 바다를 건너 긴 여정의 항해(航海)를 하여 신라국(新羅國)인 청해진(淸海進 완도(莞島))이 얼마남지 않은 해상(海上)에서 도시조(都始祖)와 칠학사(七學士)가 타고 있는 장보고(張保皐) 선단(宣單)의 배에 변고(變故)가 전해진다,
청해진대사(淸海進大使)장보고(張保皐 ~846年)가 신라(新羅)조정의 자객인 염장(閻長)에게 암살되는 변고(變故)가 발생하였고 청해진(淸海進)이 염장(閻長)에게 장악(掌握)되어 혼란(混亂)에 빠져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도시조(都始祖)께서는 장보고(張保皐)와 당(唐)나라 조정에서의 인연과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신라방(新羅坊)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견당(遣唐) 대사(遣唐大使)를 하시던 인연(因緣)으로 청해진 대사(淸海進大使)인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依託)하기 위해서 먼 뱃길을 달려왔는데 장보고(張保皐)가 암살(暗殺)되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衝擊)과 혼란(混亂)에 휩싸였을 것으로 추측(推測)한다.
도시조(都始祖)와 칠학사(七學士)께서는 배안의 혼란(混亂)을 진정(眞淨)시키고 청해진(淸海進)으로 가면 망명자(亡命者) 신분(身分)으로써 무슨 변고(變故)가 있을지 몰라 청해진(淸海進)지금의 완도(莞島)을 떠나 흥덕왕(興德王재위826~836)代에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제2군진(軍陣)인 장보고(張保皐)휘하의 당성진(唐城鎭) (지금의 화성 남양만(南陽灣)과 아산만(牙山灣) 일대)으로 상륙(上陸)하기로 결정(決定)한다.
도시조(都始祖)와 7학사(七學士)일행들은 뱃머리를 돌려 남해안(南海岸)에서 서해안(西海岸)을 거슬러 올라가 당성진(唐城鎭)이 있는 아산(牙山)만 상류(上流)에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재위839~857년) 7年인 서기846年경에 동도(東道)하여 지금의 평택시(平澤市) 팽성(彭城)에 동료 칠학사(七學士)와 함께 정착(定着)하였다.
도시조(都始祖)와 그 일행이 신라국(新羅國)의 당성진(唐城鎭)상류인 아산(牙山)만 상류에 정착(定着)하면서 처음에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하였다는 기록이 같이 온 팔학사(八學士)중 강릉유씨(江陵劉氏)시조(始祖)인 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이 지은 시에 나타나 있으며 팽성에 일곱메집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것이 증명하여준다
* 등팔학산(登八學山) 팔학산에 올라가서
산명 이학사(山名以學士) 산(山)이름 팔학이란 무엇을 뜻하나
자아팔인래 (自我八人來) 우리들 팔학사(八人)들이 온 뒤부터라
기하성모동 (基下成茅棟) 산아래 마련한 띠(茅)한채(棟)에
소요 감락재(逍遙堪樂哉) 거닐며 노는재미 정말 즐거워
문양공(文襄公)유전(劉筌)이 지은 시조(時調)중에서
팔학사(八學士)중의 일행인 유전(劉筌)이 뒷산에 올라 학사(學士)들의 터전인 뗏집을 내려다 보면서 지은시가 강릉유씨 가보(江陵劉氏 家寶)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 띠,또는 뗏집 : 떼거리로 몰려사는집. 지금의 공동주택(빌라.아파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있는 농성
중국 복건성 토루 형식으로 추정되는 임씨 도시조 임팔급이 싾은 토성으로 고려 광종때 호족연합정치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호족말살 정책의 정변으로 불에 타 소실되어 붕괴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중국 복건성의 토루 외부의 적을 침입을 막고 공동체 생활을 하기위해 지었다. 지금으의 공동주택인 아파트나 연립
떼거리로 몰려 사는집 띠집 또는 뗏집
평택 농성과 같은 시기에 임씨 족단이 싾은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 정북동토성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에 소재하는 정북동 토성
복건성 사각형 토루
<2> 호족(豪族)으로의 성장(成長)
도시조(都始祖)인 팔급(八及)公과 칠학사(七學士)들께서 지금의 평택시(平澤市) 팽성(彭城)에 동도(東道)하여 정착(定着)하던 시기의 신라(新羅)말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混亂)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中央 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統制力)을 상실해 감에 따라 지방세력(地方稅力)들이 유례(類例)없이 크게 성장(成長)하게 됩니다.
더구나 당시 동아시아의 혼란(混亂)은 신라(新羅)말의 혼란(混亂)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세력(地方稅力)을 우리는 호족(豪族)이라는 명칭(名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호족(豪族)은 이후 후삼국(後三國)시대를 지나 고려(高麗)가 건국(建國)되는데 핵심(核心)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연히 호족(豪族)의 존재(存在)는 한국(韓國) 중세사(中世史)와 도시조(都始祖)와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存在)입니다.
도시조(都始祖)께서는 장보고(張保皐)가 암살(暗殺)되던 해(846年)에 동도(東道)하였는데 장보고(張保皐)선단의 배를타고 오시다 청해진(淸海進)의 변고(變故)로 당성진(唐城鎭)의 아산만(牙山灣)에 상륙(上陸)하여 아무 연고(緣故)도 없는 신라(新羅)땅에서 장보고(張保皐)선단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정착(定着)하였다고 한다.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사람들이 청해진(淸海進)의 장보고(張保皐)가 염장(閻長)에게 암살(暗殺)되고 청해진(淸海進)이 장악된 상태에서 청해진(淸海進)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시조(都始祖)와 행동(行動)을 같이 했으리라 추측(推測)합니다.
장보고(張保皐)가 암살(暗殺)된후 신라(新羅)와 당(唐)나라와의 교역(交易)이 중단되어 있던 시점에서 서남해(西南海)에 해상(海商)세력들이 출현(出現)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해상(海商)세력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存在)는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한 왕건(王建)의 왕씨(王氏) 가문이다.
다음으로 나주(羅州)의 해상호족(海上豪族)인 다련군(多憐君) 나주(羅州)오씨(吳氏)와 아산만(牙山灣) 연안(沿岸)의 대진항에는 박술희(朴述熙) 가문(家門)과 복지겸(卜智謙)가문(家門)의 세력(勢力)들이 있었으며 남해안(南海岸)의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는 왕봉규(王逢規)가 해상호족(海上豪族)으로 강주(康州)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위의 해상호족(海上豪族)들은 후삼국(後三國)시대와 고려건국(高麗建國)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인물(人物)들인데 도시조(道始祖)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人物)들이다.
당(唐)나라와의 해상무역(海商貿易)은 10여년 간 중단되었다가 서남해(西南海)를 중심으로 독자적(獨自的)으로 군소(群小) 무역상(貿易商)들이 등장한다.
송악지방(松嶽地方)의 왕건(王建 高麗建國) 가문(家門)과 나주(羅州) 지방의 다련군(多憐君)(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의 아버지) 그리고 아산만(牙山灣)의 혜성 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면천박씨(免賤朴氏 始祖.고려개국공신)가문(家門)과 복지겸(高麗開國功臣)가문(家門)을 들수 있으며 강주(현 진주)의 왕봉규(王逢規)가 해상 세력(海上勢力)으로 대두되었다.
이들 해상세력(海上勢力)과 도시조(都始祖)께서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와 고려건국(高麗建國). 그리고 고려 초기에 우리 임씨가문(林氏家門)과 밀접(密接)한 관계를 형성한다.
장보고(~846年)의 갑자스런 죽음으로 당(唐)나라와의 해상교역(海上交易)이 중단되어 있다 서남해(西南海)의 소규모(小規模) 해상세력(海上勢力)이 등장하여 해상무역(海上貿易)이 재개(再開) 되는데 그 중심(中心)에 도시조(都始祖)인 팔급(八及)公께서 당(唐)나라와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연결하여 재개(再開)하였다.
당(唐)나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라는 고위직과 신라방(新羅坊)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의 견당대사(遣唐大使)로서의 경험과 당(唐)나라 인맥(人脈)과 같이 온 장보고선단의 사람들과 서남해(西南海)의 해상세력(海上勢力)을 연결한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재력을 확보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서의 기반(基盤)을 다졌다.
당(唐)나라에서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의 기록과 평택임씨(平澤林氏)구전설화(口傳說話)에 당(唐)나라에서 장(張)장군의 배를 타고 신라(新羅)에 오셨다는 구전(口傳)이후 신라(新羅)에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族譜)에 적병이 변방(便房)을 침공함에 公께서 그 지역 사람을 모아 적병을 분연히 토벌(討伐)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동시대(同時代) 같은 지역(地域)인 당성진(當城鎭)의 면천복씨(免賤卜氏) 시조(始祖)인 복지겸(卜智謙~생졸년 미상)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부(父)인 복학사(卜學士 870年경 당나라에서 동도(同度)가 그 일대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서해안(西海岸)의 해적(海賊)들을 토벌(討伐)하였다는 기록이 면천복씨(免賤卜氏) 가문(家門)에 기록되어 있다.
면천 박씨(免賤朴氏) 족보(族譜)기록에도 같은 시기에 면천박씨(免賤朴氏) 시조(始祖)인 박술희(朴述熙 ~945年)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부(父)인 박득의(朴得意)가 아산만(牙山灣)의 해적(海賊)들을 일대 사람들과 힘을 모아 해적(海賊)들을 소탕(掃蕩) 하였다는 기록이 일치(一致)한다.
위와 같이 세 가문(家門)인 평택임씨(平澤林氏)와 면천복씨(免賤卜氏). 그리고 면천박씨(免賤朴氏) 족보(族譜)들의 기록이 지역과 시기가 같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장보고(張保皐) 사후(死後)의 서남해상(西南海上)에 신라조정(新羅朝廷)의 통제(統制)가 안되는 틈을 타 해적(海賊)들이 창궐(猖獗)하여 아산만(牙山灣) 일대 당성진(當城鎭) 주변의 해상(海上)과 그 일대 주민들의 피해가 엄청나자 그 지역 호족세력(豪族勢力)인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면천복씨(免賤卜氏)세력(勢力). 그리고 면천박씨(免賤朴氏) 세력(勢力)들이 연합(聯合)하여 해적(海賊)들을 소탕 하였던 걸로 보인다.
위 기록들이 지역과 시기가 일치(一致)하는걸로 보아 우리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族譜)의 기록이 사실이며 그 이후 당(唐)나라와 해상무역(海上貿易)의 요충지(要衝地)인 서해상(西海上)의 당성진(當城鎭)을 중심으로 당(唐)나라와의 해상무역(海上貿易)으로 재력을 정비한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등장(登場)하며 후삼국(後三國)시대의 궁예(弓裔 연호 태봉 재위 901~918년)정권과 왕건(王建847~918年 재위918~943年)의 고려개국(高麗開國). 그리고 고려초기(高麗初忌)의 세 가문(家門)은 지대한 역할(役割)을 하게 된다.
2. 후삼국(後三國)과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
도시조(都始祖)와 팔학사(八學士)가 신라(新羅) 아산만(牙山灣)인 팽성(彭城)에 정착하여 상당기간 공동생활(共同生活)을 하며 경제적인 돌파구로 당(唐)나라와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하였던 걸로 보인다.
신라 장보고(~946 張保皐) 사후(死後)에 해상무역의 중심인 청해진(靑海進)이 폐쇠되어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당(唐)나라와 일본(日本)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 일부가 서해안(西海岸)을 중심으로 당(唐)나라에서 함께 온 장보고(張保皐)의 부하들과 일부 세력들이 도시조(都始祖)에게 흡수되어 10여年 동안 나.당(羅.唐) 해상무역(海上貿易)이 중단된 것을 도시조(都始祖)께서 아산만(牙山灣)을 거점으로 세해안(西海岸)의 군소(群小) 해상세력(海上勢力)들과 연계(連繫)한 당(唐)나라와의 중개무역(仲介貿易)을 전개(展開)하였다,
남해안(南海岸)의 나주(羅州)세력과 서해안(西海岸)의 해상세력(海上勢力). 그리고 개성(開城)과 패강진(浿江鎭 지금의 大同江)의 해상세력(海上勢力)들과 연계(連繫)한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막대한 재력(財力)을 쌓았다.
도시조(都始祖)께서 서해안(西海岸)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의 중심(中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唐)나라에서의 병부상서(兵部尙書)라는 고위직(高位職)과 신라방(新羅坊)에서 견당대사(遣唐大使)의 이력(履歷), 그리고 당(唐)나라 사정에 밝고 많은 인맥(人脈)을 활용(活用)하여 장보고(張保皐) 죽음 이후 무너진 당(唐)나라와 신라(新羅)간의 교역(交易)에 중심 역할을 하여 양국 간(間)의 무역(貿易)을 성사(成事)시키는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신라(新羅)와 당(唐)나라간의 무역(貿易)을 활성화(活性化)하는 중심세력(中心勢力)이 되었고 많은 재력(才力)을 확보(確保)하여 중부지방(中部地方)을 아우르는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여력(餘力)으로 평택농성(平澤籠城)을 건립(建立)하고 확실한 근거지(根據地)를 확보하여 팽성(彭城)을 근간(根幹)으로 후삼국(後三國)시대 중부지방(中部地方)을 아우르는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성장하여 같이 생활하던 7학사(七學士)들과 재력(才力)을 나누어 각자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셨고 도시조(都始祖)만 평택농성(平澤籠城)에 남아 중부지방(中部地方)의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정착(定着)하였다.
평택농성(平澤籠城)을 기반으로 천안지방(天安地方)과 청주(淸州). 그리고 진천지방(鎭天地方)으로 세력(勢力)을 확장하여 지금의 경기도(京畿道)남부(南部)와 충청도(忠淸道)을 아우르는 확고한 기반(基盤)을 갖춘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통한 막대한 재력(才力)으로 군진(軍陣)을 갖춘 중부지방(中部地方)의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성장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 918~943年)이 고려(高麗 918~1392年)를 개국(開國)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발휘(發揮)하였다.
기록(記錄)을 보면 신라 조정(新羅朝廷)으로부터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제수(除授) 받았으며 후삼국(後三國)시대 궁예(弓裔)가 강성하자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전해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記錄)을 보면 895년(眞聖女王 7年) 궁예(弓裔~918)는 장귀평(張貴平).이흔암(伊昕巖 ~918年),임명필(林明弼).종간(宗侃 ~918年).환선길(桓宣吉~918年)등 휘하(麾下) 장수들을 중심으로 관직(官職)을 설치하고 창업(創業)의 기틀을 다졌고 896年에는 송악(松嶽)의 호족(豪族) 왕융(王隆 ~897年)을 받아들여 태수(太守)로 봉하고 896年에는 송악(松嶽)을 도읍(都邑)으로 정했다. 는 기록(記錄)이 등장한다.
기록(記錄)으로 보면 1世代인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의 뒤를 이어서 2世代인 태사공(太師公) 양저(良貯)와 양연(良硯)公과 3세대(世代)이신 임명필(林明弼).임적여(林蹟璵).임상난(林湘煖)公께서 후삼국(後三國) 시대의 임문(林門)을 성장(成長)시켰다.
1世 충절공 팔급(忠節公 林八及)
임팔급(林八及) 후당(後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 간신(奸臣)들에게 탄핵(彈劾)되어 7학사(七學士)일행(一行)을 이끌고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신라(新羅)문성왕(文聖王839~597年)시절인 서기846年 에 망명(亡命)하여, 평택 농성(平澤農城)에 정착(定着)하였다.
신라(新羅)말에 조정으로부터 이부상서(吏部尙書)벼슬을 제수(除授) 받았으며, 장보고(張保皐) 사후(死後)에 신라(新羅)와 당(唐)나라간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이 중단되자 남해안(南海岸)과 서해안(西海岸)의 해상호족(海上豪族)들과 연계(連繫)하여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활성화(活性化)하여 재력(才力)을 쌇아 평택농성(平澤籠城)를 건립(建立)하고 천안(天安).청주(淸州).진천(鎭川)지방(地方)등 중부지방(中部地方)으로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여 군진(軍陣)을 갖춘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강력한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성장(成長)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하는데 중추적인 역할(役割)을 하였으며 한국 임씨(韓國林氏)의 기반(基盤)을 마련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며 묘소(墓所)는 팽성읍(彭城邑) 신대리(新垈里) 있으며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복주김씨(福州金氏)이다.
이분이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시는 분이다
묘갈명(墓碣銘)은 종손(宗孫) 충숙공(忠肅公)이 쓰셨다..
子 양저(良貯) 양연(良硯) 女 강릉유씨(江陵劉氏)인 유전의 아들과 혼인한 정경부인(貞敬夫人) 임씨(林氏)
2世 태사공 양저(태사공 林良貯)
임양저(林良貯)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의 첫째 아드님이자 평택농성성주(平澤籠城城主)로 신라(新羅)조에 출사(出師)하여 태사(太師)와 중량장(重量將)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역임(歷任)하셨다.
덕(德)이 있는 재상(宰相)으로 충직(忠直)의 절개(節槪)가 높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高麗太祖)인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 하고자 할 때 군주(君主)의 도리(道理)가 아니라고 직간(直諫)하여 경순왕(敬順王)의 노여움을 사 선산(先山)으로 유배(流配)되어 생애(生涯)를 마치셨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묘소(墓所)는 선산(善山) 야성(野城)에 있다.
子 명필(林明弼). 적여(林積璵). 상난(林湘煖)
청주공 양연(淸州公 林良硯)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의 둘째 아드님이자 청주호족(淸州豪族) 세력으로 후삼국(後三國)시대 청주(淸州)가 箕萱(기훤)의 지배(支配)하에 있다가 태봉국(泰封國)인 궁예(弓裔)의 휘하(麾下)로 귀속(歸屬)되어 활동(活動)하셨다.
918年 궁예(弓裔)의 부하(部下)로 있던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죽이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하자 궁예(弓裔) 정권(政權)의 순군부(徇軍部) 이직(吏職)에 계시던 아드님이신 임춘길(林春吉)公이 태봉국(泰封國)의 도성(都城)인 철원(鐵原)에서 청주세력(淸州勢力)들을 모아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나 복지겸(卜智謙)의 밀고(密告)로 발각되어 왕건(王建)에게 처형(處刑) 당하였다.
평택임씨(平澤林氏) 구전설화(口傳說話)에 작은 집으로 전해온다.
子 임춘길(林春吉)
정경부인 임씨(貞敬夫人 林氏)
팔급(八及)公의 따님으로 같이 동도(同道)한 팔학사(八學士) 일행인 문양공(文襄公) 유전(劉筌)의 장남(長男)인 유견구(劉堅椇)와 혼인(婚姻)하였다.
貞敬夫人 平澤林氏 中朝 吏部尙書 八及女 정경부인 평택임씨 중조 이부상서 팔급녀
유전(劉筌)의 장남(長男) 견구(堅埧)와 임씨시조(林氏始祖) 팔급(八及)公의 자녀(子女)와 혼인(婚姻)했다는 기록
3世代
충열공 명필(忠烈公 林明弼)
평택농성호족(平澤籠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양저(良貯)의 첫째 아들로 평택호족세력(平澤豪族勢力)이자 한찬(漢讚)으로 고려건국(高麗建國)에 공을 세워 태조원년(太祖元年 918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任命)하였으며 자(字)는 무(碔)이며 익호(謚號)로는 충열공(忠烈公)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따님이신 왕건(王建)의 6妃인 신명왕후(神明王后)이신 숙목부인 임씨(潚穆夫人 林氏)로 왕건(王建)의 妃가 되어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推尊)되었다.
따님이신 신명왕후(神明王后)의 소생(所生)인 원녕태자(元寧太子)의 외조부(外祖父)가 되시는 분이시며 後에 고려(高麗)의 사심관(事審官)인 팽성백(彭城伯)에 봉해졌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이다.
묘소(墓所)는 평안도(평안도) 개천(개천) 운암동(운암동)에 있으며 묘갈명(묘갈명)은 후손 충정공(충정공) 언수(언수)가 쓰셨다.
子 임언(林彦) 임희(林曦) 女 숙목부인 임씨(淑목夫人 林氏)인 신명왕후(神明王后)
시랑공(侍郞公) 적여(林積璵)
평택농성호족(平澤籠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양저(良貯)의 둘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태조(太祖)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후 조정(朝廷)을 개편(改編)하였을 때, 사무(事務)에 통달(通達)하고 공직(公職)에 종사(從事)함에 태만(怠慢)함이 없으며, 처결하는데 민첩(敏捷)하여 진실(眞實)로 여러 사람의 뜻에 흡족(洽足)하였다 하여 알찬(閼粲)직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除授)받았다.
子 임정(林程)
도항공(都航公) 상난(林湘煖) )
평택농성호족(平澤籠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 양저(良貯)의 셋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태조(太祖)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후 조정(朝廷)을 개편(改編)하였을 때, 도항사향(都航司鄕)을 제수(除授)받았다.
子 임엄(林儼) 임식(林寔)
이직공(吏職公) 춘길(林春吉~928年)
청주(淸州) 정북동 토성 성주(井北洞城 城主)인 양연(良硯)公의 아들로 청주호족세력(淸州豪族勢力)이자 태봉국(泰封國)인 궁예(~918年 弓裔) 휘하 순군부(徇軍部) 이직(吏職)에 계셨던 분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왕건(877-943 王建)이 궁예(弓裔~918年)를 죽이고 즉위(卽位)하자 반발(反撥)하여 반란(反亂)을 일으킨 분이시다.태조(太祖) 서기918年 9月 같은 청주(淸州) 세력(勢力)들인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전남 장흥)사람 강길(康吉)·아차귀(阿次貴), 매곡(昧谷:충북 회인)사람 경종(景琮)등과 함께 반란(反亂)을 일으켜 청주(淸州)로 도망하고자 하였다.그러나 복지겸(卜智謙)이 이 사실을 태조(太祖)에게 밀고(密告)함으로써 잡혀 죽게 되었다. 이에 청주(淸州)인 순군낭중(徇軍郎中)현율(玄律)이 경종의 매형(妹兄)이 후백제(後百濟)와의 접경(接境)지대인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龔直)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그러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이 반대(反對)하여 결국(結局)918年에 죽음을 당하였다.
<3> 고려건국(高麗建國)과 임씨가문(林氏家門)
우리 임문(林門)은 신라(新羅)말기(846年~918年)에 도시조(都始祖)인 충절공(忠節公)이신 팔급(八及)公께서 건립(建立)한 경기도(京畿道) 평택농성(平澤籠城)을 기반으로 지금의 충청도(忠淸道) 천안(天安)과 청주(淸州) 그리고 진천(鎭川)을 포함한 중부지역(中部地域)의 강력한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고려건국(高麗建國918年~1382年)에 커다란 공(功)을 세웠다.
그 결과 고려개국(高麗開國 918年)에 건국공신(建國功臣)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高麗王室)의 외척세력(外戚勢力)으로 강력(强力)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使)하였다.
그 임씨(林氏) 가문(林氏家門)의 중심 인물(人物)은 평택호족세력(平澤豪族勢力)이자 고려건국(高麗建國)에 공(功)을 세워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에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任命) 된 대광(大匡) 임명필(林明弼)公과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任命)된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이자 충숙공(忠肅公)이신 임희(林曦)公이 계셨다.
후백제(後百濟)와 통일 전쟁(統一戰爭)이 한창이던 시기에 임씨 가문(林氏家門)의 인물(人物)에게 군사권(軍事權)을 담당(擔當)한던 두 관부(官府)을 동시에 맡긴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 임문(林門)이 군사력(軍事力)과 재력(才力)을 바탕으로 호족세력(豪族勢力)에서 강력(强力)한 힘을 가진 세력(勢力)으로 활동(活動)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인 왕건(王建)에게 두터운 신임(信任)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記錄)에 보면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918年 지금의 국방부장관)으로 삼고 파진찬(波珍湌) 임희(林曦)를 병부령(兵部令918年 지금의 총참모총장)으로 삼고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항(都航司鄕 현재의 해군 대장)을 삼아 군권(軍權)을 장악(掌握)했으며 임적여(林積璵)을 광평성(廣評省)의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임명(任命)하고 임식(林寔)을 광평랑중(廣評郞中)에 임명(任命)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은 국사(國事)를 관장(管掌)하는 가장 중요한 관부(官府)로 그 장관(長官)인 시중(侍中)은 총리(總理)에 해당되는 것이며 호족연합(豪族聯合) 정권(政權)인 고려초기(高麗初期)의 호족 세력(豪族勢力)을 대변(代辯)하는 기구(機構)였다.
이러한 관부(官簿)의 차관(次官)인 시중(侍中)과 그 다음 직책(職責)인 랑중(郞中)에 임명(任命)될 수 있는 인물(人物)이라면 유력한 호족(豪族)이라야 가능한 것이며 고려 건국(高麗建國)에 우리 임문(林門)이 왕건(王建)의 고려 건국(高麗建國)에 군사(軍事)적으로 정치(政治)적으로 중요한 핵심(核心)적인 역할(役割)을 맡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왕건(王建)은 병권(兵權)과 국사(國事)를 관장(管掌)하는 핵심(核心)인 순군부(巡軍府)와 광평성(廣評省)을 임문(林門)에게 맡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조(都始祖)인 팔급(八及)公과 왕건가문(王建家門)의 왕융(王胤)과의 인연(人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조(都始祖)께서 당(唐)나라로부터 서기846年에 신라(新羅)로 망명(亡命)하여 서해안(西海岸)의 해상세력(海上勢力)과 연계(連繫)하여 장보고(張保皐) 사후(死後)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시작할 때 나주(羅州)의 오씨가문(吳氏 家門), 당성진(當城鎭)의 면천박씨(免賤 朴氏) 가문(家門).그리고 복지겸가문(卜智謙 家門)을 비롯한 송악(松嶽)의 왕씨 가문(王氏 家門)과 밀접(密接)한 관계로 당(唐)나라와 연계(連繫)하여 중개무역(仲介貿易)을 통한 신뢰(信賴)와 이해관계(利害關係)로 깊은 관계(關係)를 맺었으며 태봉국(泰封國)의 궁예(弓裔)가 강성(强性)할 때 서해안(西海岸) 호족(豪族) 모두가 궁예(弓裔) 휘하(麾下)에 귀부(歸附)하여 궁예(弓裔)정권 하에서 핵심(核心)적인 일을 하였다.
그때 궁예(弓裔) 정권(政權)下에서 왕건(王建)과 대광(大匡)임명필(林明弼))公의 따님인 신명왕후(神明王后) 林氏와 왕건(王建)이 혼인(婚姻)을 하였으며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제거(除去)하고 고려(高麗)를 건국(918年)했을 때 장인(丈人) 되시는 충열공(忠烈公)이신 임명필(林明弼)公께서 평택농성(平澤籠城)과 천안(天安).그리고 진주(鎭州)의 임문(林門)들을 동원(動員)하여 전폭적으로 왕건(王建)을 후원(後援) 하였다.
그리고 임문(林門)들이 장악(掌握)한 경기도(京畿道) 평택(平澤)과 청주(淸州). 천안(天安) 그리고 진주(鎭州지금의 진천)는 삼국(三國)의 중앙(中央)인 중부지방(中部地方)으로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의 통일전쟁(統一戰爭)에서 중요한 지역(地域)이었다.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평택(平澤).청주(淸州).천안(天安).진천(鎭川) 지방(地方)등 중부지역(中部地域)은 궁예(弓裔)의 초기(初期) 세력기반(勢力基盤) 지역(地域)이었으며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제거(除去)하고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이후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치열(熾烈)한 전쟁(戰爭)터였다.
위 지역(地域)은 남(南)으로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려는 고려(高麗)의 왕건(王建)과 북(北)으로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려는 견훤(甄萱)과의 치열(熾烈)한 전쟁(戰爭)터였으며 양쪽의 전초(全草) 기지(基地)이자 완충 지역(緩衝地域)이었다.
위와 같은 지역(地域)인 중부지역(中部地域)을 장악(掌握)하고 있던 우리 임문(林門)의 세력(勢力)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歸依)하자 관망(觀望)하고 있던 또 다른 중부지역(中部地域)의 호족세력(豪族勢力)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歸依)하였다.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靑道) 중부지역(中部地域)의 호족세력(豪族勢力)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歸依)하자 전선(戰線)은 급격히 왕건(王建)에게 기울고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은 세가 급격히 줄어 왕건(王建)에게 유리해지고 신라(新羅)의 경순왕(敬順王 ~978年)이 935年에 스스로 투항(投降)하여 신라(新羅기원전77年~935年)가 멸망(滅亡)하였다.
후백제(後百濟892~936年)의 견훤(甄萱)이 935年 아들인 신검(神劍)의 반란(反亂)으로 왕건(王建)에게 투항(投降)하고 936年 고려(高麗)의 왕건(王建)과 후백제(後百濟892年~936年)의 신검(神劍)이 김천(金泉)지역인 일리천(一利川) 전투(戰鬪)에서 고려(高麗)의 태조왕건(太祖王建877年~943年)에게 크게 패하여 결국 서기936年에 후백제(後百濟)가 멸망(滅亡)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서기937年에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였다.
위와 같이 우리 임문(林門)은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하는데 지대한 功을 세워 고려건국(高麗建國) 후 2代 王을 거쳐 세분의 왕비(王妃)를 배출하였으며 왕실(王室)의 외척세력(外戚勢力)이자 고려(高麗)의 핵심세력(核心勢力)으로 왕실(王室)의 심장부(心臟部)에서 활동(活動)하였었다.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진천 농다리
후삼국시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천의 강력한 호족세력이던 팔급공의 증손자이고 고려태조 왕건의 아들인 고려2代왕인 혜종의 장인이자 의화왕후 임씨의 아버지인 충숙공 임희공이 왕건과 견훤의 세력다툼전이 한창이던 시기 지금의 대구 팔공산전투을 하기 위해 진군하던 왕건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다리를 축조하였다고 전해온다.
진천 대모산성
성의 총길이는 1,260m에 이르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문터로 짐작되는 자리가 있다. 내성의 벽은 자연지형을 충분히 이용하여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았고, 외성의 벽은 아래 기초부분에 자갈돌을 넣고 점토가 많이 섞인 흙을 채웠다. 성의 외부는 경사가 급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안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이 성은 고려시대 초기에 팔급공의 증손자이신 충숙공 임희(林曦)공이 백제의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행정구역과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世代
고려건국(高麗建國)과 고려(高麗)초에는 4世代이신 팔급(八及)公의 증손(曾孫)들께서 왕건(王建)의 고려건국(高麗建國)에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신 분들이다.
태수공(太守公) 언(林彦)
평택농성호족(平澤籠城豪族) 대광(大匡)임명필(林明弼)의 첫째 아들로 천안호족(天安豪族)으로 신라(新羅) 조정(朝廷)에 계시다가 927年 4月 강주도독(康州都督) 왕봉규(王逢規)의 신라(新羅) 사신(使臣)으로 927年에 후당(後唐)에 사신(高麗使臣)으로 파견(派遣)되어 다녀오시고 임문(林門)들의 권유(勸誘)로 고려(高麗)에 귀의(歸依) 하였다. 같은 해 10月에 다시 고려태조(高麗太祖)을 위하여 후당(後唐)에 파견(派遣)되었는데 이처럼 여러 차례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遣) 된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과 한학(漢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분으로 後에 천안태수(天安太守928년)로 임명(任命)되셨다.
태조(太祖)는 자신을 보필(輔弼)할 문사(文師)층의 지원(支援)을 얻기 위하여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이신 임언(林彦)公의 따님인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林氏)와 혼인(婚姻)을 맺게 된다.
왕건(王建)의 제7妃인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의 부(父)이시며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의 장인(丈人)이시고 천안낭군(天安郎君)인 효성태자(孝成太子)와. 효지태자(孝祗太子)의 외조부(外祖父)가 되시는 분이다.
子 따님이신 천안부원 부인(天安府院夫人)임씨(林氏)
충숙공(忠肅公) 희(林曦) 평택농성호족(平澤籠城豪族)인 대광(大匡)임명필(林明弼)公의 둘째 아들로 진주(鎭州) 호족세력(豪族勢力)이자 파진찬(破陣贊)으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병부령(兵部令)에 임명(任命)되었다.
임희(林曦)公의 딸은 2대(代) 혜종(惠宗)의 왕비(王妃)인 의화왕후(義和王后)로 책봉되어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혜공주(貞惠公主)를 낳았다.
임희(林曦)公의 字는 수미(秀美)이다.
公은 고려(高麗)2代 王인 혜종(惠宗)의 왕비(王妃)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 고려
태조(高麗太祖)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에 오르시고 고려(高麗)의 사심관(事審官) 제도인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으며 익호(謚號)로는 충숙공(忠肅公)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따님이신 의화왕후(義和王后) 소생(所生)인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 부인(慶化宮夫人) 그리고 정혜공주(貞惠公主)의 외조부(外祖父)가 되시는 분이시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송씨(餘興宋氏)이며 묘소(墓所)는 개성남산(開城南山)
에 있으며 묘갈명(墓碣命)은 후손 충정공(忠貞公) 언수(彦脩)가 쓰셨다.
子 임면(林冕). 女 고려(高麗)2代 王인 혜종(惠宗)의 왕비(王妃) 의화왕후(義和王后)임씨(林
氏)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중시조 백창직(白昌稷)과 혼인 한 정경부인 임씨(貞敬夫人林氏)가 있다.
임식(林寔)
평택농성 호족(平澤籠城 豪族)세력이자 고려개국(高麗開國)공신(功臣)인 도항사향(都航司鄕)을 역임한 임상난(林湘煖)公의 둘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918년)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제거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후 조정(朝廷)을 개편(改編)하였을 때,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郎中)에 임명(任命)되었다.
<2> 고려건국(高麗建國) 후(後)의 임문(林門)의 활동(活動)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918年)하고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의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키고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서기936年)하여 고려(高麗)초기(初期) 태조왕건(太祖王建)에서 고려4代王인 광종(光宗)代까지 우리 임문(林門)의 중흥기(中興期)이자 전성기(全盛期)였다.
우리 임문(林門)은 이 시기에 뚜렷한 모습(模襲)을 드러내 고려초기(高麗草記)의 정국(靖國)을 주도(主導)하였다.
충열공(忠烈公)이신 임무(林碔)公께서 순군부령(徇軍部令국방부장관)을 역임(歷任)하시고 팔급(八及)公의 증손자(曾孫子)이고 충열공(忠烈公) 임무공(林碔)의 아드님인 충숙공(忠肅公) 임희(林禧)公께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歷任)하고 임상난(林湘煖)公께서 도항사항(渡航司航)을 그리고 임적여(林積與)公께서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오르셨으며 임식(林寔)公께서는 광평랑중(廣評郎中)에 임명(任命)되어 건국 초기(建國初期)에 병권(兵權)과 국사(國事)를 관장(館長)하는 자리를 장악(掌握)하여 정국(靖國)을 주도(主導)하였다.
그리고 우리 임문(林門)은 고려초기(高麗初期) 왕실(王室)의 외척세력(外戚勢力)으로 충열공(忠烈公) 임무(林碔)公의 따님이신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林氏)와 임언(林彦)공의 따님이신 천안부원군 부인(天安府院君夫人) 임씨(林氏)께서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제6妃와 7妃에 책봉되시고 충숙공(忠肅公)이신 임희(林曦)公의 따님인 의화왕후(義化王后)께서 고려2代 王인 혜종(惠宗)의 정비(正妃)로 책봉(冊封)되어 2代에 걸쳐 세명의 왕비(王妃)를 배출한 외척세력(外戚勢力)으로서 정치(政治)에 깊이 관여(關與)하여 막강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事)하였다.
충열공(忠烈公)의 따님이신 숙목부인 임씨(肅穆夫人 林氏)께서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아들인 원녕태자(元寧太子)를 낳으시고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推尊)되었으며 천안 부원군 부인 임씨(天安府院君夫人 林氏)가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아들인 효성 태자(孝成太子)와 효지태자(孝成太子)를 낳으셨다.
그리고 충숙공(忠肅公) 임희(林曦)公의 따님이시고 고려(高麗) 제2代 王인 혜종(惠宗)의 왕후(王后)인 의화황후(義化王后)께서 태자(太子)인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그리고 정헌공주(貞憲公主)를 낳으셨다.
그리하여 가장 힘있는 문벌(門閥)로 성장한 우리 임문(林門)은 남해안(南海岸)의 해상(海上) 호족세력(豪族勢力)인 오씨 가문(吳氏家門)과 세해안(西海岸)의 해상(海上) 호족세력(豪族勢力)인 면천복씨(免賤卜氏)인 복지겸(卜智謙)가문 그리고 면천박씨(免賤朴氏)인 박술희(朴述熙)가문과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도(忠靑道)의 중부지역(中部地域)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을 이끌면서 세력(勢力)을 형성하고 패강진(浿江鎭) 세력(勢力)과 송악(松嶽)의 왕씨가문(王氏家門)을 견제하는 정치세력(政治勢力)을 형성(形成)하였다. 태조 왕건(太祖王建)이 고려(高麗) 건국(建國918年) 직후(直後)부터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소생인 왕무(王武)를 太子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무(武)의 모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가계(家系)가 한미한 집안이라 쉽지 않았다.
태조 왕건(太祖王建)은 세가 약한 태자(太子) 무(武)를 위해서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後見人)으로 삼고 병부령(兵部令)인 충숙공(忠肅公) 임희(林熙)公의 따님인 의화왕후 임씨(義化王后 林氏)를 태자비(太子妃)로 태조(太祖) 4년(922年)에 책봉(冊封)한다.
.
고려(高麗)元年에 왕건(王建)이 죽고 고려(高麗) 2代王인 혜종(惠宗 재위943-945年)이 즉위2年만에 왕요(高麗3代王 定宗)와. 왕소
(高麗4代王 光宗).형제에게 피살되자 임씨세력(林氏勢力)에게 불운(不運)이 닥치고 정종(定宗 재위945-949년 )을 거쳐 광종(光宗 재
위949-975年)때에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위해 호족말살(豪族抹殺) 정책(政策)으로 인하여 혜종(惠宗)과 의화왕후 임씨(義化王后
林氏)의 아들인 흥화군(興化君 -957년)이 피살(被殺)되고 외척세력(外戚勢力)이던 임씨세력(林氏勢力)이 쇠락(衰落)을 하는 불운
(不運)을 겪습니다.
경종(景宗 高麗5代王재위975-981)때에는 복수법으로 인하여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
院君)인 효성태자(孝誠太子 ? -976)가 피살(被殺)되고 숙목부인 임씨(肅穆夫人林氏)의 아들인 원녕태자(元寧太子 ? -976)와 효녕
태자(孝寧太子 ?-976) 까지 피살(被殺)당하여 외가(外家)인 임씨세력(林氏勢力)이 쇠퇴(衰態)하여 정치의 핵심에서 멀어져 지방
의 향리(鄕吏)로 전락하고 면면히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세를 이어간다,
서기 1100년경 팔급공(八及公)의 6대손 몽주공(夢周公)이 아홉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여기서 1차 분관이 많이 이루어 졌다.
항렬은 아름다울 미(美)로 구미손(九美孫)이라고 한다.
고려에서 평찰품사(評察品事)의 관직에 오르고 아우님이 몽정(夢程) 몽상(夢商)이 있으며 구미(九美)孫 즉 자미(自美), 견미(見
美), 수미(秀美), 두미(斗美), 기미(箕美), 윤미(允美), 백미(伯美), 중미(仲美), 계미(季美)公의 아홉 아들을 두고 모두 君으로 봉
작(封爵)한 인연으로 많이 분관하였다.
전국의 범임씨(凡林氏)들은 팽성(彭城)이 옛 평택(平澤)의 고호이므로 서기1600년경까지 팽성임씨(彭城 林氏)을 단본으로하였다.
두번째 분관은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修1924-1384)公의 아드님인 5미(五味)孫인데 연대로 보아 서기 1300년경이며 충정공의
1子이신 諱 성미공(成味公)과 둘째 견미공(堅味公)에서 평택관을 이어오고. 제미공(齊味公)에서 장흥관(長興貫), 넷째 세미공(世
味公)에서 조양관(兆陽貫)이 분관되고 1400년경 조양관에서 임천(林川), 임피(臨陂), 전주(全州), 보성, 안동(安東), 임하(臨河) 관
(貫)이 분관되었으며 다섯째 의미공(毅味公)에서 선산(善山)貫으로 분관되었다.
고려말에 평택임씨(平澤林氏)1세조(世祖)이며 시조(始祖)이신 충정공(忠貞公) 휘(諱) 언수(彦修1294-1384)公은 1307년에 사마(司
馬)문과시험에 합격하여 금은좌광록대부 대광령 찬성문화사중 평장사에 오르셨으며 아드님의 유공(有功)으로 평성부원군(平城府
院君)에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을 받으셨다.
公의 아들들인 6미손(味孫)인 충간공(忠簡公)성미(成味 -1383).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견미(堅味 -1388) . 판윤공(判尹公)제미
(濟味 -1388).조양군(兆陽君)세미(世味), 시진군(市津君)자미(自味)선산군(善山君)의미(毅味)형제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
문(家門)을 빛냈읍니다.
평택임씨(平澤林氏) 2세인 충간공(忠簡公) 諱 성미(成味 - 1383)公께서 벽산삼한 삼중대광 광정대부 문화시중 동평장사 삼사우사
상호군(壁上三韓 三重大匡 匡靖大夫 門下侍中 同平章事 三司右使 上護軍)을 역임하시고 1378년 우왕(禑王재위1365-1389)4년 밀직
부사로서 서경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가 되었다.
1380년에는 진포(鎭浦)에 침입하여 각지를 횡행하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왜구가 선주(善州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에 이르렀을
때, 사근내역에 지방의 원수들이 집결하고 왜구와 싸우려고 하던 도중, 고려 조정에서는 우왕이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3도 도순
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밀직(密直)임성미(林成味 -1383).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 -1390)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과 평
리 우인열(禹仁烈1337-1403), 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 -1388), 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 -1392), 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 -
1390), 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 -1388)등 8명의 원수들이 이성계(李成桂1335-1408)함께 출전(出戰)하여 남원(南原) 운봉(雲
峰)전투에서 왜구의 적장인 아기발도(阿基拔都)를 사살(射殺)하고 5천여명의 왜구를 전멸(全滅)시키고 1380년9월 황산대첩(黃酸
大捷)을 세웠다.
1382년에는 왜구를 사칭한 화척(禾尺 : 楊水尺)들이 영해군에 침입하여 관아(官衙)와 민가를 불사르는 등 악행을 자행하므로, 판
밀직(判密直)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황보림(皇甫琳) 등과 함께 이를 무찌르고, 잡혀갔던 남녀 50여인과 말 200여필을 찾아오는
등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삼사우사(三司右使)을 역임(歷任)하시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시조(始祖)이신 諱 언수(彦脩)公의 제2子인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인 임견미(林堅味 ?-1388)公께서는 고려(高麗)의 2인자인 문
하시중(門下侍中)이자 이인임(李仁任).염흥방(廉興邦 -1388), 정몽주(鄭夢周1337-1392), 이자송(李子松 -1388)등과 기울어 가는
고려(高麗918-1392)의 버팀목이었으며 무신(武臣)이자 정치가(政治家)였다.
그러나 여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왕14년(禑王32代 1388년)에 무진화변(戊辰禍變) 때에 최영(崔瑩)이 변방의 이성계(李成桂)와
손을 잡고 연합(聯合)하여 계파의 수장격인 임견미(林堅味 ? - 1388).이인임(李仁任 -1388), 염흥방( -1388), 도길부(都吉敷 -
1388)등이 모의하여 우왕(禑王1365-1389재위)에 대한 모반(謀反)을 꾀했다는 죄목(罪目)으로 기습(奇襲) 공격하여 이인임(李仁任)
일가를 제외한 가문(家門)들은 불과 10여일만의 참화(慘禍)로 그 가족들이 천여 명이 도륙(屠戮)되고 학살(虐殺)당하였으며, 강에
쌓인 어린 아기까지 모두 1월 한 겨울의 임진강(臨津江)물속에 던져 버리니 죽음을 면한 자가 몇 명 없었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은
몰입(沒入)하여 관비(官婢)가 된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이때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은 5백여 명의 가솔(家率)들이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등에게 살해(殺奚)되었는데 이때
살아남은 일족들은 개성(開城)에서 지방으로 흩어져 나와 평택임씨(平澤林氏)의 본이 많이 갈라졌다.
무진화변(戊辰禍變)는 고려우왕(高麗 禑王1365-1389)이 자기를 王으로 추대(推戴)해준 임견미(林堅味 ? -1388).염흥방(廉興邦).
이인임(李仁任) 등 권력(勸力)의 실세를 제거하기 위하여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등과 공모하여 친위쿠데타로 자기를 둘러싼
권신(權臣)을 야밤에 기습 공격하여 제거(除去)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같은 해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회군을 거치면서 최영(崔瑩)장군 마저 거세(去勢)되고, 고려(高
麗)는 이성계(李成桂)에게 힘이 갑자기 쏠리는 형국이 되므로서 결국 허무하게 튼튼한 475년 고려왕조(高麗王朝918-1392)가 모래
성처럼 허물어지며 멸망(滅亡)합니다.
최영(崔瑩1316-1388)과 이성계(李成桂1335-1408)에게 반항한 사람은 씨를 말리는 전투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체포령이 내려 도망 다니므로 20여개의 임씨(林氏)성이 생깁니다.
무진참화(戊辰慘禍)때 개경(開經)시가전에서 1,500여명이 전사(戰死)했다고 고려사(高麗史)는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임씨(林氏)남자가 거느린 여자와 아낙네는 잡히면 노비(奴婢)가 되어 승자들에게 전리품(戰利品)으로 넘어가고, 남자는 즉시 처형
하고 사내 피붓이는 강포에 싸서 강에 버렸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는 기록(記錄)하고 있습니다.
임씨(林氏)남자가 거느린 여자와 아낙네는 잡히면 노비(奴婢)가 되어 승자들에게 전리품(戰利品)으로 넘어가고, 남자는 즉시 처형
하고 사내 피붓이는 강포에 싸서 강에 버렸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참화(慘禍)는 무진참화(戊辰慘禍1388年)을 주도한 최영(崔瑩)에게도 일어난다.
최영(崔瑩)은 무진참화(戊辰慘禍) 6개월 후 그 자신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回軍)으로 죽음을 당한다.
이 때 그는 무진참화(戊辰慘禍)에 대해 자신의 처사(處事)가 지나쳤음을 후회했다
고려사(高麗事)는 승자들이 쓴 기록입니다
무진참화(戊辰慘禍)는 조선(朝鮮)초기 건국(建國)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건이
왜곡 기술됨으로써 진실이 가려진 면이 있다.
이 사건은 물론 고려사(高麗史)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있었다
이렇듯이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은 신라(新羅)말과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명망(名望)과 권세(權勢)를 누리고 조선(朝鮮)
조에 들어와서도 융성(隆盛)을 누립니다.
평택임씨(平澤林氏)가문(家門)도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성씨로 많은 무인과 문인을 배출한 명문거족(名門巨族)입니다.
격동(激動)의 고려(高麗)말에 또다시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은 정치적인 비운을 겪고 조선(祖先)조에 들어와 입주나주낙
남선조(入羅州落南先朝)라 불리는 평택임씨(平澤林氏) 4세조인 직장공(直長公) 諱 임첨(林襜? -1424)公께서 나주(羅州)로 이거
(移居)해서 자리를 잡은 이후 여러 대를 거쳐 명현(名賢)과 이름난 조상(祖上)들을 배출하여 융성(隆盛)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선조(先祖)가 금호공(錦湖公) 諱 임형수(林亨秀1504-1547)公이다.
1531년 중종(中宗재위1488-1544)26년에 진사가 되고,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주서·기사관·사서 등을 지내고, 사가독
서(賜暇讀書)한 뒤 설서·수찬·회령판관(會寧判官)·전한(典翰) 등을 거쳐 부제학(副題學)을 역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퇴직, 1547년 명종2년(明宗재위1534-1567) 간신(奸臣) 정언각
(鄭彦殼)의 무고로 양재역(良才驛)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에게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
도안치(絶島安置)된 뒤 곧 사사(賜死)되었는데 선조(先祖)1년에 설원(舌院)복직되었고 이조참판을 또다시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
았다.
公은 뛰어난 문장가로 현재 칠보산기(七寶山記) 오산가(熬山歌),등의 명문(名文)등 금호문집(錦湖文集)이 남아있다.
금호공(錦湖公)의 유명한 해학문은 중국의 임오당의 칭송도 있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선생
과는 규장각(奎章閣)에서 동문수학한 바 있으며 현재의 고등학교 교과서등에 나오는 동양가(棟樣歌)에 실려있습니다..
<<엊그제 버힌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련가 적은 듯 동양제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明堂)이 기울면 어느낚이 받치리“>>라는
글은 유명하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평성군(平城君)의 父이신 송파공(松坡公) 임식(林植1539-1589)이 계셨다.
1564년 명종19년(明宗재위1534-1567) 이이(李珥1536-1584)·유성룡(柳成龍1542-1607) 등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先祖 5
년)에 춘당시(春塘試)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된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575년 사복시주부를 거쳐 공조좌랑에 승
진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이조좌랑·병조정랑·홍문관교리·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변판관과 구성부사를 거쳐 강계부사가 되었
다. 그 뒤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여 고향인 결성(結城)에 돌아간 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그곳 부해정(浮海
亭)이라는 정자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송파공(松坡公)의 동생분이신 관해공(觀海公)임회(林檜1562-1624)公은 선조(先祖) 15年 임오(壬午) 1582년 진사가 되시고
광해(光海君재위1608-1623) 3년 신해(辛亥) 1611년 50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시어 전적이 되셨는데 1613년에 이이첨(李爾瞻1560-
1623)등 대북파의 무고로 양산(梁山)땅에 유배되셨다.
1623년 인조(仁祖재위1623-1649)반정(反正)후 예조정랑으로 등용되셨다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시고 상촌 신흠(象村 申
欽)의 추천으로 광주 목사(廣州 牧使)가 되셨다
이 때 公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셨다.
갑자(甲子) 1624년 이 괄(李适1587-1624)의 난(亂)이 일어나 경안역(慶安驛)에서 적과 대전하시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피
집(被執)되시어 적의 검도에 전신이 난자되셨으나 적을 꾸짖고 호령하시고 마침내 단설(斷舌)하시고 순절(殉節)하셨다.
인조(仁祖1595-1649)조에 도승지 고종(高宗재위1863-1907) 5년 무진(戊辰) 1868년에 이조참판을 증직 받으셨으며 나라에서 정려
(旌閭)를 세울 것을 명하여 나주 송월동에 정려를 세웠으며 나주시 송현동 정렬사(旌烈祠)에 배향되시어 매년 10월 1일 나주시에
서 봉향하고 있다.
그리고 평성군(平城君)파조(派祖)이시고 송파공(松坡公)의 제2子인 평성군(平城君) 諱 임득의(林得義1558-1612) 선조(先祖)님이
대표적인 인물(人物)입니다.
평택임씨(平澤林氏)1세조(世祖)이며 시조(始祖)이신 충정공(忠貞公) 휘(諱) 언수(彦修)公의 10세손(世孫)이고 송파공(松坡公) 諱
식(植)의 제2子이신 평성군(平城君)波의 파조(罷朝)휘(諱)득의(得義1558年-1612年)입니다.
이분은 선조(宣祖1552年-1608年)18년 장천(將薦)에 의하여 등제(登第)하여 선조25年(1592年)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왕
(王)을 호종(扈從)하신 공(功)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셨으며
선조(宣祖)29년(1596年 )에 토적(土賊)이몽학(李夢鶴 -1596년)이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켜 홍주(洪州)로 몰려오자 800
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력(勇力)과 지략(智略)으로 적을 추격하고 섬멸하여 괴수를 참사하니 왕께서 충청도 수군우후
(忠淸道 水軍虞侯)에 제수(弟嫂)하였읍니다.
갑진(甲辰)1604年 청란공신(淸難功臣)에 평성군(平城君)으로 책봉 되었으며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錄勳)
되고 선조(宣祖)조에 양주 축석령(祝石嶺)에 20여 정보의 사패지(賜牌地)를 내렸고 광해(光海 재위 1608-1623年)1年 1609
年에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를 역임 하였으며 1612년(광해4년) 향년 54세로 타
계하셨다.
1647年(인조25年)에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判義禁
府事 五位都總部都摠管知訓練院事)의 증직(贈職)을 추정(秋情)받았다.
인조(仁祖)代에 충남 홍성군 백월산의 홍주 청난사(淸難祠)에 배향되셨고 청난(淸難) 5공신의 승전비(勝戰碑)가 이곳에
있으며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축석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아 예장으로 모셨다가 왕명으로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에 국내(局內)50여정보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받고 천장(遷葬)하여 정충사(靖忠祠)에 배향(配享)하여 부조묘(不
祧廟)로 모시도록 하였다.
평성군(平城君)께서는 생애(生涯)를 오직 충절(忠節)로 마치신 바 그 후손인 평성군파(平城君派) 후손(後孫)들은 평성군
(平城君) 할아버지의 음덕(陰德)으로 계계승승(繼繼承承) 천지만엽(千枝萬葉)으로 번성(繁盛)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간에 끊임없이 종중(宗中)에서는 명현(名賢)과 석학 (碩學) 경세제민(經世濟民)하신 덕행(德行)과 학식(學識)이 뛰어
난 위인걸사(偉人傑士)와 효자(孝子) 효부(孝婦)을 배출(輩出)하여 왔습니다.
하편 집핍중____
첫댓글 정리를 하셨군요. 계속 수고하시구요 출전도 기록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청죽 종친님께서 우리 평택임씨의 가문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시려고 노력하고 계신 것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하고 있으나 , 객관적인 史料가 아닌 부분이 많아 염려스럽습니다. 특히 "<1>도시조의 행적" 에서 장보고와의 관계는 일본인 승려가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출처로 하고 있고으나, 이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일부 특정 글자를 변조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 하여 최근 네이버 까페인 평택관 충정공계 평성군파 종손께서 운영하고 계신 '청난공신 임득의 장군'에서 저와 논쟁 중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너무고생하시는군요
계속우리평택임씨의 역사기록이 될수 있도록 힘써주세요
고맙습니다
좋은자료와정보에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된 글은 아직 본적이 없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