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집터 위에 세워진 기념교회.
성지답사를 가면 많은 기념교회와 텔(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지금은 언덕이 된 곳)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방문하는 장소 대부분은 1838년 미국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의 성지탐사가 시작되기 이전 1000년 동안 방치되고 잃어버렸던 장소들이다.
가버나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로빈슨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돌무더기 위에 베두인들이 텐트를 치고 거주했으며 이곳의 성경적 지명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 후 훼손은 더욱 심해졌고 1894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쿠세페 발디가 토지를 매입하고 철망과 돌담을 쌓아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그 후 이곳의 발굴 작업은 오팔리 신부(1921~26)와 코르보 신부(1968~84)에 의해서 두 차례 진행되었다. 이때 회당과 베드로 집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의 거점으로 사용하셨던 가버나움으로 확증됐다. 하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가버나움 회당
회당(Synagogue)
오팔리 신부가 이곳에서 회당을 발굴하자 학자들은 회당의 연대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회당의 관련성이나 가버나움임을 확증하는데 회당의 연대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회당의 건축 양식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회당의 건축은 초기(주전 1~3세기)와 후기(주후 4~6세기) 양식으로 구분된다. 이 두 양식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회당 출입구의 방향과 장식에 있다. 초기 양식은 회당에 들어가는 입구의 외벽에 장식을 했으나 후기에는 회당의 입구를 초기 회당과 정 반대편에 만들었으며 내부에 교회와 같은 강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가버나움 회당은 전형적인 전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회당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신 1세기 회당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 대한 반격이 시작됐다.
회당이 세워지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조사하기 위하여 회당의 바닥을 드러내자 3만개 이상의 후기 로마 시대의 동전들(주후 3~4세기)과 토기 조각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결과는 초기 회당설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날 가버나움에서 볼 수 있는 회당(석회암)은 주후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 시대보다 300년 뒤에 지어진 회당을 보고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 바닥에서 출토된 로마 시대의 동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1세기 회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코르보와 로프레다 신부는 5세기 회당의 바닥과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이 나왔다.
첫째, 5세기 회당 건물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터 위에 세워졌다.
둘째, 5세기 회당 건물은 1세기 때 자갈로 포장된 건물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 1세기 자갈로 포장된 건물 잔해는 크기로 보아 일반 주택보다는 공공건물이었으며 회당이 세워진 자리에 회당을 다시 짓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을 통해 볼 때 1세기 건물의 잔해는 회당이었을 것이다.
셋째, 5세기 회당의 건물은 1세기 회당의 기초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버나움 회당은 1세기 예수님 당시 회당의 기초 위에 5세기에 하얀 석회암으로 회당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회당 건물의 잔해를 오늘날 석회암 회당의 기초 부분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의 벽면. 예수님 당시 검정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회당 건물 잔해 위에 석회암 회당의 기초 부분이 보인다.
교회-베드로의 집(Peter's House)
회당에서 30m쯤 떨어진 곳에 베드로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교회는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 장모의 집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셨다는 일명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졌다.
베드로 집터와 기념 교회의 변천사. (오른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베트로 집터(주후 1세기), 담으로 둘러친 1세기 집터(주후 4세기), 1세기 집터 위에 세워진 교회(주후 5세기), 교회 모습(주후 5세기)
그렇다면 어떻게 이곳을 베드로의 집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코르보와 로프레다 신부는 이곳에서 주후 5세기 크리스천들이 세운 교회 잔해를 발견했다. 발굴팀은 이 크리스천 교회를 조사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5세기 교회가 큰 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큰 방의 비밀을 역추적하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주전 1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이곳에 집이 지어졌다. 처음 세워진 집은 주변의 집터와 동일한 형태로 대략 8.35m에 이르는 정사각형 모양의 집이었으며 주전 1세기 중반에서 주후 1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둘째, 주후 1세기 말 이 집은 종교적 행위를 하는 곳(가정교회:domus-ecclesia)으로 바뀌었다. 이때 커다란 방 하나는 바닥을 석회로 처리했으며 생활용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공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셋째, 주후 4세기에 이 집은 대대적으로 개조됐고 112.25m에 달하는 담으로 외부와 구분됐다. 여러 방 중에서 특별히 5.8*6.45m의 방은 바닥과 벽이 석회로 처리되고, 아치형 칸막이와 보조 방들로 개조돼 공공장소로 사용됐다. 특히 이 방에서 아람어, 라틴어, 그리고 그리스어로 쓰인 석회 조각들이 발견됐다. 테스타 신부에 의하면 이 석회 조각 위에 쓰인 문자들은 ‘그리스도’ ‘주’ ‘하나님’ 그리고 ‘베드로’를 나타내는 글씨였다.
넷째, 주후 5세기 중엽 크리스천들은 4세기에 만들어진 담장을 유지하고 4세기 공공장소로 사용된 큰 방을 중심으로 커다란 8각형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중앙 바닥은 불멸을 상징하는 공작새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가버나움 회당 복원도
결과적으로 이 발굴 작업은 예수님 당시의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를 발견함으로써 예수님의 고향 가버나움을 확증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하지만 가버나움에서 누가? 왜? 예수님 당시의 검은색 회당을 무너트리고 석회암 회당을 다시 세웠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주후 5세기경 가버나움에서 유대인들과 크리스천 사이에 건물을 가지고 경쟁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유대인 회당에서 30m 떨어진 곳에 크리스천들이 8각형 교회건물을 멋지게 세우자 유대인들은 검은색 회당을 무너트리고 석회암 회당을 다시 세운 것이 아닐까. 교회 건물로 세력을 과시하려는 현대 종교인들의 모습이 이미 2000년 전 가버나움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회당(Synagogue)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를 말한다. 회당 제도는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본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행13:5). 유대인들은 안식일 외에도 회당에 자주 모였다. 회당의 주된 용도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졌다.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를 드린 후 쉐마를 읽었다(신6:4-9). 쉐마를 교독한 후 다시 기도문을 암송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축도하는 순서로 예배는 진행됐다.
*에드워드 로빈슨(E. Robinson)
1794년 미국 코네티컷주의 사우딩턴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 로빈슨은 일찍부터 그리스어에 능통했으며 고대어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그는 성서 언어학의 최고 전문가로 1837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로부터 성서학 주임교수로 초빙을 받자 먼저 성지를 탐사할 시간을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마침내 1838년 3월 카이로에 도착하면서 그의 성지답사는 시작됐다. 그 결과 성경 속의 많은 지명이 확인됐고, 성서지리, 성서고고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