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효자 김만중 한국명문 (2004-10-24 오전 3:39:13) Hit : 109 Vote : 13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효자 김만중
이조참판 윤지의 딸 해평윤씨는 사계 김장생가로 출가하여 김장생 손자 김익겸의 배위가 되었으며 만 기, 만중 형제를 낳았다. 이 해평윤씨는 선조의 부마 해숭위 윤신지의 손녀다. 해평윤씨의 조부 윤신지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정혜옹주는 해평윤씨의 조모가 된다. 해평윤씨는 증조부[윤방] 가 영의정이고 고조부[윤두수]가 영의정으로 양대 영의정을 낸 명문 출신이다.
해평윤씨가 사계 가문으로 시집을 갈 때 할머니인 정혜옹주가 손녀의 손을 잡고서 "사계 집안은 예학을 하는 집이니 매사에 조심하여 할미가 손녀를 잘못 가르쳤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여라."고 신신 당부했다.
이 해평윤씨의 부군 김익겸이 병자호란에 순국하자 세살박이 만기를 등에 업고 만중을 잉태한 채 조그마 한 배를 간신히 얻어 타고 난리를 피해 두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 두 아들은 어머니의 남달른 엄한 가정교 육을 받았다.
이 해평 윤씨의 둘째 아들이 김만중이다. 자는 중숙이요 호는 서포다. 젖 떨어지기 전에 이미 글을 배웠 고 영특하고 숙성하여 14세에 초시에 합격했고, 16세에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1665년에 정시에도 장원했다.
그뒤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1671년에 경기와 삼남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1675 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대비의 복상문제로 삭직되었다. 1679년 예조참의로 복귀하고 1680년 경신대출 척으로 남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되자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1683년 공조판서, 1686년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 장숙의 언사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고 1689년 남해에 위리안치되어 그곳에서 한많은 생 을 보냈다.
서포 김만중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효자다.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어머 니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늘 책읽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였다. 아들은 어머니가 독서를 즐기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좋아할만한 책은 있는 대로 구해다 드렸다. 옛날 사기에서부터 패관잡기에 이르기 까지 온갖 서적을 구해다 드리고 나이 들어서는 눈이 어두 워지기 시작한 어머니를 위해 책을 밤낮으로 읽어 드리며 심지어 어린이 흉내, 동물 흉내까지 내면서 어머 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유배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 걱정에 병이 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썼다. 한글소설로 당 시 아녀자들이 즐겨 읽었다. 한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한글 문학작품을 남겨 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서포는 " 우리 나라의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고 있다." 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것은 고루한 시대에 아무나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을 격찬하면서 국문 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서포의 견해가 탁월함을 입증한 것이다. 서포의 전반적인 학문이 높은 경 지에 있었기에 한글의 소중함까지 살피는 진보적인 사상이 움텄다고 본다.
남해에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오매불망 아들이 무사히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다 병들어 결국 돌 아가셨다. 서포는 유배지에서 신위를 차려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머니를 그려 통곡하니 섬 사람들 이 그 광경을 보고 따라서 슬퍼 울지 않는이가 없었다. 담제를 마치고 애통한 나머지 그 역시 병들어 죽었 다. 향년이 56세이다. 1694년(숙종 21) 복관되어 부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묘정에 배향되었고 1706년에 나라에서 그가 행한 효행을 인정하여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문효이다. 저서로 구운몽, 사씨남정 기, 서포만필(西浦漫筆), 영정(影幀)이 있다.
"일을 의론할 적에는 권귀의 세력을 꺼리지 아니하며 친한 정의도 아랑곳 없고 경연에서 강할 때에는 말 이 화평하고 강론하는 의사가 밝고 자상하니 사람들이 참된 학사라 하였다." ----------[이조판서 우봉 이재 묘표]에서------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숙종 국구 김만기 길흉화복 한국명문 (2004-10-23 오전 5:49:46) Hit : 129 Vote : 19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숙종 국구 김만기 길흉화복
김만기는 사계 김장생의 증손자다. 1633년에 태어나 1687년에 별세했다. 자는 영숙, 호는 서석 혹 은 정관재라 한다. 청나라 오랑캐의 칩입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김익겸은 김상용과 함께 화약고 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에서 21세란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할머니도 분신자결했다. 이 무렵 동생 만중 은 태중에 있었고 만기는 겨우 3-4세에 불과했다. 어머니 윤씨의 품에 안겨 죽음의 공포와 두꺼운 적막만 이 짓누르는 폐가로 돌아왔다.
겉은 태연하지만 극도의 슬픔으로 흐느끼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따스한 사랑을 받으며 씩씩하게 자랐다. 삼촌 익희에게 글을 배우다가 송시열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였다.
몸을 가지는 태도가 의젓하고 침착했으며 사리에 밝고 심성이 너그러웠다.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충의 정신을 배우고 스승을 통해 대대로 내려오는 가정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65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 비 복상문제로 논쟁이 있을 때 기년설을 주장하여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 윤선도에 맞섰다.
그의 딸이 1670년[현종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1672년[현종13] 3월 22일 왕세자 빈으로 책봉되었다.현종 임금 내외는 왕세자 내외의 친영례를 받았다. 임금은 세자를 보면서 "세자가 이제 의젓하구나."라며 미소를 지었다. 중전 김씨도 왕세자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임금은 왕세자에게 " 학자 집안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으니 왕세자는 학문과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고 당 부를 한 뒤에 다담상을 받고 과일, 화채 등을 맛있게 먹는 어린 아들과 며느리를 남겨둔 채 중전 김씨와 함 께 모처럼 궁궐 뜰을 거닐었다.
중전이 말문을 열었다. "마마! 아기가 앞으로 절세미인이 되겠나이다." "나도 놀랐소. 열한살 어린 아기가 한떨기 장미 꽃송이처럼 아름답구려!" 임금도 맞장구를 쳤다. 왕세자빈은 장희빈이 무색할 정도로 절세미 인이었다. 임금 내외는 어린 왕세자빈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등극했다. 사위가 상복을 벗고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조선 19대 왕 위에 오른 것이다. 문무백관들이 신왕의 등극을 축하하여 천세를 삼창하였고 이어서 대사령이 반포되어 죄 인들이 사면되었다.
병조판서로 있던 장인 김만기는 숙종이 왕위에 오르므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에 승진하였 으며 총융사를 겸하여 병권을 쥠으로써 13살 소년왕의 우익이 되었다. 또한 김수항의 천거로 대제학에 올 랐다. 1680년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 남인과 끝까지 맞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딸인 왕비 김씨가 같은 해에 천연두를 앓다가 8일만에 19세로 죽었다.
남인의 거두 허견이 복선군을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는 [삼복의 옥사]가 터졌다. 김만기는 이 사건을 다스 려 보사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노론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1689년 기사환국 때 삭탈관직되었다. 나중에 복직되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 서석집 18권이 있다.
학문과 인품으로 문형이 되고 천운의 길조로 임금의 장인을 겸하여 명예와 권력을 함께 얻어 한 때의 영 화가 성했으나 태어나 3,4세에 21세의 아버지를 잃는 횡액이 덮쳐 불행했고 노후에는 사랑하는 딸을 가슴 에 묻어야 하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특히 태산같은 자랑인 왕비김씨가 19세에 요절하므로 참담하기가 그 지 없었다. 더구나 남인의 시퍼런 칼날이 등뒤에서 번쩍이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생의 영광이 크 고 욕됨은 적었으나 인생의 희비가 남달리 심한 가운데 천수를 넉넉히 받지 못하고 54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왕후장상에서부터 시정잡배에 이르는 만백성에게 길흉화복을 고루고루 주는가 보 다. 위대하도다, 하나님이시여! 거룩하도다, 하늘님이시여!
"효종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지고 국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 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공이 충심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일이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 으나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겸손하고 침착하여 착 한 말에 험이 없었다." ----[우암 송시열 찬 신도비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