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의 대화록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하던 차에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서양철학의 입문을 공부하면서, 서양 철학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사람 중에 하나인 소크라테스가 왜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총 33장까지 있는 짧은 글 이다. 1장에서는 「변명」의 서론에 해당되며, 2장은 문제 제기, 3장부터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시작 된다.
법정 안에서 보여 지는 소크라테스는 매우 담대한 모습이다. 그는 떨림이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평소의 태도로 나 자신을 변호하더라도,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평소 시장의 환전상의 테이블이나 기타 장소에서 늘 쓰고 있던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듣더라도, 놀라지 말고 이 때문에 내 말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고발자들 오래된 고발자들과, 그 후의 고발자들로 두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천상의 일을 사색하고 지하의 일을 천착하며,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보기에 하는 자(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든다)」라고 비판하였으며, 고발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변명이 성공하길 바라며 변명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게 비판적인 변명을 한다.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이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여기며 자기들의 웅변술과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많은 수의 돈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지혜로는 현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대화를 했다.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활동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소피스트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봐야겠다. 소피스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려고 한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 소피스트의 모습이 보여 질 때가 많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완전한 것 인거 마냥 교만하게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자랑하려든다. 누굴 훈계하고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모습들이 많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누구를 가르치거나 훈계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진정으로 아는 것에 도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의 고발에 대해 변명을 한다. 멜레토스는 「청년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신앙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했다」고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고소장의 내용에 대해 역설하면서 자기의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다수가 청년들을 선도한다는 것을 말(馬)의 예화를 통해, 온 세상이 말을 잘 길들이는 데 단 한사람이 말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그 반대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멜레토스가 청년들을 전혀 생각해 오지 않았던 것을 꾸짖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후의 모습은 인상에 깊었다. 대부분의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을 데려와 재판관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여 재판을 흐리게 하여, 올바른 재판을 할 수 없게 한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그의 어린 자식들을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보다도 법을 준수 하는 사람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생각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것은 우리는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판결해야할 일들을 많이 겪는다. 우리는 그때마다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고, 그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자기의 형편들을 무기 삼아 사람들에게 하소연 한다. 법과 윤리에 근거하여 올바른 판결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을 흐릴 때가 많다. 특히 요즘 같이 물질 만능의 시대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어버린다. 물질이 넉넉한 사람들은 돈을 그들의 무기로 삼아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피폐가 계속 된다면 법률이라는 것은 물질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결국은 물질을 가진 자들의 말과 행동이 곧 법이 되지 않을까? 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해본다. 이런 상황들을 소크라테스가 본다면 당연히 우리는 질책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악으로 여기고 소크라테스를 악의 패배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선으로 여기며, 죽음을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고 사람들의 말과 같이 거기에는 모든 고인이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라는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몇 번이라도 죽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또 자기가 이생에서 해왔던 대화들을 그 곳에서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라 말을 하며, 죽음 앞에서 담대한 모습을 취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생각해 봐야 하겠다. 우리 대부분은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 왜 죽음을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할까?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에 가져왔던 모든 것을 잃는 그 순간이 사람들에게는 매우 두려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활동의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세상에서 참된 지식과 거짓 지식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