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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처마와 뒷간 The Eaves and the Toilet / 송 기 호 (Ki-Ho Song)
ysoo 추천 0 조회 187 19.01.09 1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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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와 뒷간
The Eaves and the Toilet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 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1991년에 중국에 갔을 때에 한 조선족 학자와 대화하면서 헷갈린 것이 있었다. 87평 아파트를 배정받았다고 해서 나는 33평에 산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도저히 그렇게 큰 평수에 살 것 같지 않아서 자세히 물어보니, 우리는 3.3㎡의 평(坪)이었던 데에 비해서 중국은 1평방미터(㎡)의 평(平)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2007년 7월부터 평 단위의 도량형을 규제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런 혼란은 앞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30평 대신에 100㎡ 아파트라고 쓰자니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우리가 쓰는 평(坪)은 일본에서 들어와 일제시대부터 사용된 단위이다. 전통시대에는 평이 아닌 간(間)으로 가옥의 규모를 쟀다. ‘ 간’ 은흔히 ‘칸’ 으로써왔는데 현재는 간이 표준말이다.

가요에도 나오듯이 가장 단출한 집은 ‘초가삼간’ 이었다(사진 1 참조).

2평 크기 방 하나에 1평 크기 부엌 하나로서 생활공간의 최소 단위였던 셈이다. 여기서 간이란 기둥 4개로 만
들어진 공간인데, 기둥 사이는 여섯 자로서 1.818m에 해당한다. 여섯 자는 9척장신이 아니라면 몰라도 일반사람이 누울 수 있는 길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1간을 면적으로 환산하면 3.3㎡, 즉 1평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단위인 ‘평’ 과 우리의 전통적 단위인 ‘간’ 의 면적은 동일하였다.


초가삼간은 바로 지금의 3평집으로서 10평방미터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얼마나 옹색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간은 길이 단위로도 쓰였으므로 초가삼간은 정면 3간, 측면 1간 규모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사진 1. 초가삼간인 전북 남원의 송흥록 생가


초가삼간은 그나마 나은 것일 수도 있다. 2004년 화성 동탄 신도시 15지점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집자리를 보니 선사시대 집과 별 차이가 없었다. 움막집 또는 토막집이라 불리는 이런 집은 땅을 파서 위에 거적과 같은 것을 얹고 다시 흙을 덮어 추위와 비바람만 겨우 가릴 정도였다. 조선시대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허름한 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다음은 정조가 화성에 건설한 신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민가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이번 행차에 수원부(水原府)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는 아직 두서가 없다. 그 가운데 대략 지어놓은 집이라 할만한 것은 움막도 아니고 참호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질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 지금 헤아려보건대,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가 번창하여 서울 근처의 큰 도회지가 되는 것은 짧은 시일에 기대하기 어렵다(정조 실록 14년<1790> 2월 11일)."


집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신라시대부터 이미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와 각종 장식을 세세히 규정해 놓았다. 그 규정이 너무 복잡하여 일일이 이해하기 어려운데, 여기서는 진골에 대한 규정만 예로 들어보겠다.


"집은 길이와 폭이 24자를 넘지 못하고, 중국 기와를 덮지 않고, 들린 처마(飛簷)를 만들지 않고, 물고기 장식을 달지 않으며, 금·은·구리·돌·오색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계단돌은 갈지 않고, 삼중계단을 설치하지 않고, 담장에는 보와 마룻대를 만들지 않고 석회를 바르지 않는다. 발 테두리에 각종 비단의 사용을 금지하고, 병풍은 수놓지 못하고, 침상은 바다거북껍질이나 침향나무로 장식하지 않는다(『삼국사기』옥사)."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에 와서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예조에 지시하기를“상하 신하와 백성의 가옥에 정한 제도가 없어, 서민 집이 참람하게 관료 집을 따라가고 관료 저택은 감히 궁궐과도 비슷하다. 사치와 아름다움을 다투어 숭상하여 상하에 순서가 없게 되었으니, 실로 옳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간으로 하고, 대군(大君)은 여기에 10간을 더하고,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하며,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하게 하라.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熟石)을 사용하지 말고, 화공(花拱: 기둥머리의 꽃모양 장식)과 진한 채색과 단청을 쓰지 말아서 검약에 힘을 쏟도록 하라. 다만, 사당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집이나 구입한 집, 외방에 세운 집은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3년<1431> 1월 12일)."


그러나 규정은 어기게 마련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의 도는 더해가게 마련이다. 다음은 집에 호화스런 단청을 했다가 혼이 난 사례이다.


"청릉부원군 심강이 자기 집에 단청을 했는데, 대간이 임금 앞에서 그의 얼굴을 보며 탄핵하니 급히 집으로 돌아가 손수 지워버렸습니다(인조실록 6년 <1628> 10월 20일)."


또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무령군 유자광의 집에 참람되게 연석(鍊石)을 사용했으니 대신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청컨대 유자광을 죄주고 연석을 철거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유자광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른바 연석이라는 것은 곱게 갈아서 그림을 새긴 것인데, 신은 단지 돌을 다듬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죄가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연석은 철거하도록 명령하고 그 죄를 용서하였다(성종실록 9년<1478> 4월 14일)."


유자광(1439~1512)은 특히 성종과 연산군 때에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다. 그래서 다소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것 같다. 중종 때에는 우의정 성희안이 다른 곳의 건축 재료를 가져다가 집을 지었는데, 나중에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을 깨닫고 국법을 어겼다고 사직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중종 7년 윤 5월 26일).
왕의 친인척들이 세력을 믿고 호화주택을 짓는 일도 잦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제군(諸君)과 부마(駙馬)의 주택이 참람하기가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주변 인가를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편안히 살 수 없게 함으로써 집을 억지로 팔게 합니다. … 영양군과 순원위 등은 집짓는 일이 이미 끝났는데도, 관청에서 정한 가격으로 이웃집을 강제로 사들여 자기 집을 늘리는 데 힘을 쏟으니, 끝없이 사치를 추구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 ”고 하였다(중종실록 29년<1534> 6월 28일)."


제군은 군(君)에 봉해진 사람들로서 주로 왕자, 종친이나 공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왕실에서 법을 어기니 그 아래 사대부도 이를 모방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권세가가 여염집을 강제로 빼앗는 사태가 자주 벌어져, 영조가 이를 엄금하고 매매하는 것마저 금지시켰다.


지방을 여행하다보면 99간집을 보게 된다. 국사학과에 들어와서 첫 답사지가 안동이었는데, 거기서 이런 집을 본 기억이 새롭다. 안동댐으로 가다 보면 신세동 7층 전탑이 있는데, 그 부근에 이 집이 있다.

99간집은 그 집안의 가세를 상징한다. 궁궐에서만 둥근 기둥을 쓰고 일반 집은 모두 모나게 친 사각기둥을 사용해야 했다는 사실도 그 때에 처음 들었다. 그러나 99간집은 앞서 본 조선시대 규정에 어긋난다. 이것은 국가 기강이 무너졌을 때에 사대부가 자신의 세력을 한껏 뽐내는 상징물이었다.


창덕궁 후원 쪽에는 궁궐 건물이 아니라 사대부 집을 모방해서 지었다고 하는 연경당 건물이 있다. 이곳도 99간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20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 들르면 99간집이 어느 규모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초가삼간과 비교하면 산술적으로 33배에 해당한다.


선사시대에는 반지하로 땅을 파고 기둥을 중앙에 모이게 세워 묶은 다음 지붕을 덮어 집을 만들었다.
이런 움집은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 등 각지에 복원되어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촌에서 겨울에 음식이나 채소들을 저장하기 위해서 뒤꼍에 세운 움막도 이런 형식이다. 이렇게 바닥을 지하에 만들고 지붕을 바닥에 닿게 한 것은 난방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주에 살던 읍루족이나 물길족은 구덩이를 더욱 깊이 파서 집을 지었다.


"산림 속에서 항상 혈거생활을 한다. 큰 집은 깊이가 사다리 아홉 개를 놓을 정도인데, 사다리가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 지방은 아주 추워서 부여보다 더 심하다(『삼국지』읍루)."


"땅은 낮고 습하여 성을 쌓고 혈거생활을 하는데, 집 모양은 무덤처럼 생겼고 출입구를 집 위에 만들어 사다리로 드나든다(『위서』물길국)."


이렇게 지붕에 출입구를 만들어 출입하는 형태의 집은 근세기까지도 길야크족과 같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비슷한 유적이 2000년도에 공주 장선리의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 휴게소 부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수직으로 깊이 판 구덩이들이 산구릉에 집중되어 나왔고, 구덩이는 수평 구덩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지하 감옥들 같은 느낌을 받는데, 1600년 전 쯤 삼한시대의 집자리들이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건물 바닥은 지상으로 올라오고 지붕도 위로 올라가고 그 사이에 수직으로 선 벽이 생긴다. 난방술의 발달에 따라 이런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기둥은 처음에 땅바닥에 바로 꽂는 형식이었으나, 지붕에 기와를 얹고 건물이 커짐에 따라 하중을 이기기 위해서 주춧돌이 도입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물지를 발굴하는 곳에 가보면 바닥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것만 보인다. 땅에 기둥을 박아 세운 지상건물이니 기둥 구멍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멍의 배치를 보고 건물 형식을 추정하고 있다.


벽이 생겨서 지붕이 올라가게 되면 처마가 생긴다. 처마는 지붕이 단순히 벽 밖으로 삐져나와 생긴 것 이상으로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퍼부을라치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가끔은 창 밖으로 새나오는 주인집 대화를 엿듣는 기회도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한 없이 바라본 적도 있다. 땅바닥에는 처마선을 따라서 동그란 구멍이 나란히 패였다.


"왕이 대답하기를“교태전의 처마를 보수하는 일은 사치를 위해 크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 만들 때에 실내를 밝게 하는 것만 생각해서 처마 서까래를 짧게 했기 때문에 비바람이 불면 사람들이 발을 붙일 수 없어 부득이 보충하는 것이다. … ”고 하였다(명종실록 12년<1557> 1월 14일)."


교태전은 왕이 잠자던 건물인데, 처마가 짧아서 이를 덧대는 공사를 했더니 신하들이 사치를 한다고 비판하였다. 사실 사치하는 집은 서까래를 덧대서 겹처마를 만들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반대했고, 이에 대해서 왕이 해명하는 말이다. 여기서 처마의 용도를 알 수 있다.


처마는 비를 가리는 데에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실내 조명을 조절하는 역할도 하였다. 처마를 길게 하면 빛이 적게 들어왔고 짧게 하면 비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우리나라 건물은 마당에 비친 빛이 반사되어 실내로 들어오는 간접 조명 방식을 택했다. 땅에 반사된 은은한 빛이 실내에 고루 비치도록 한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의 마당에는 박석이라고 하는 얇은 돌을 깔았다. 그런데 그 면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미처 다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빛이 산란하여 은은한 빛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왕은 항상 남쪽을 바라보고 앉는데 매끈한 돌에서 반사되는 강한 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을 것이다. 처마는 위의 기록처럼 반사되는 빛의 조명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절에 가보면 대웅전 마당에 비친 빛이 들어와 부처님을 비추게 되어 있다. 다음은 대목수 신영훈 선생의 글이다.


"밑에서 치켜 올라가는 빛의 조명은 상당히 까다롭다. 자칫하면 그림자로 해서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거나 납양특집의 머리 푼 아가씨의 처절한 얼굴처럼 섬뜩해 보이기가 십상이다. 부처는 법당 안쪽 깊은 곳에 만든 불단 위에 진좌한다. 가장 어두운 조건이 갖추어진 위치에 있다. 거기에서 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야 한다. 몹시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그 빛에 충족하기 위하여 실내용 조각 기법이 계발되었고 발전하였다. 이는 서양 조각의 실외용 직사광선을 받게 하는 기법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는 실내용 조각 기법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대좌 아래에는 늘 촛불을 켠다. 이것도 아래에서 위로 빛을 주는 조명에 해당한다. 불상 조성에서는 이런 빛을 늘 고려하고 있다. 지금은 전등불로 부처님을 조명하고 있다. … 위에서 내려쪼이는 빛이다.

서양 무대 조명법에서 배운 지식이 발동한 것이다(신영훈, 『절로 가는 마음』책만드는집, 1994년, 220~221쪽)."


지금은 어려워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서산마애불에 가면 실내등을 이리저리 비춰서 불상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실험할 수 있었다. 전등을 위에서 비추면 험상궂은 얼굴이 되고 아래에서 비추면 자비로운 얼굴이 되었다. 이렇듯 아래에서 반사해서 올라가는 빛이 비칠 때에 가장 아름답도록 만든 것이 불상이다. 그런데 지금은 실내등을 매달아 위에서 비추니 부처 본연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처마 끝에 소나무로 차양막이를 하는 소나무 차양(松詹) 풍습도 있었다. 생솔가지를 꺾어 엮어서 매달아 더위를 막는 것이다. 이처럼 처마는 온도를 조절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소나무 차양 풍습은 고려시대 기록에 이미 보인다.


"신해일에 관청에서나 여염집에서 소나무 차양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더운 여름에 궁궐도감이 왕의 침전에 소나무로 차양을 만들면 그들에게 은병(銀甁: 화폐) 두 개를 하사하는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왕이“관청과 여염집의 소나무 차양(松棚)을 금지하는데 나 혼자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띠(茅)를 엮어서 차양을 만들도록 바꾸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감 관리들이 은병 두 개를 잃었구나”라고 말했다(충렬왕 3년<1277> 5월)."


임진왜란 중에도 오희문은 종을 보내서 소나무를 베어와 소나무 차양을 만들었다.


"또 소나무 차양을 만들려 해도 긴 나무를 얻지 못하여, 소즐이 종과 말 세 필을 끌고 유선각의 호산(護山)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왔다(『쇄미록』1593년 6월 24일)."


이런 소나무 차양의 실제 모습은 김홍도가 1785년에 자기 집의 후원을 그린 초당 그림에도 나타난다(그림 1 참조).


파란 솔가지가 처마를 따라 있으니 눈으로 보아도 시원했을 것이다.
가물 때에는 처마에 물병을 매달아 비를 기원하였다.


그림 1. 소나무 차양 모습


"집의 김만균이 병류(甁柳)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추궁하여 심문해야 한다고 하자, 스스로 물러나 교체되었다(현종실록 11년<1670> 5월 10일)."


병류란 처마 끝에 버드나무 가지로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 비를 빌던 일종의 주술 행위라고 한다. 이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종3품 벼슬을 날려버렸다.


그런데, 이런 처마의 풍류를 이제는 볼 수가 없다.
비가 와도 피할 처마가 없어졌다. 그 원인은 다음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런 특성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이다. 건축법에서 깊은 처마를 건평으로 계산해서 호되게 세금을 물리면서부터 처마가 급속도록 얕아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처마조차 없는 집들이 도심에 가득 들어서게 되었다. … 우리 건축가들은 현대 건축을 조영하면서 우리의 것은 버리고 직사광선을 희구하는 서구형 건축을 추종하였다. 처마 없는 집이 다량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 처마 깊이를 규제한 조항도 있다. 깊이가 1m를 넘으면 건축 면적으로 계산하여 재산세를 물리는 기막힌 제약을 두고 있다. 건평 50평일 때 1m 넘게 옛날 방식대로 처마 깊이를 잡으면 80평이 넘는 대규모 건축물로 재산세를 물린다는 식이다. 더구나 호화주택으로 간주하고 특별세까지 더 징수한다는 방침이다. 처마가 발달할 수 없게 하는 주범인 셈이다(신영훈, 『우리문화 이웃문화』문학수첩, 1997년, 42~43쪽)."


이리하여 햇볕이 안방 깊숙이 침투하여 방안을 찜통으로 만들어버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달아 강제 냉방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서구식 건축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전형이라고도 하였다.


부드러운 곡선의 처마선은 우리 문화를 대표하기도 한다. 집이 날아갈 듯 하다는 말이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에 처마선을 들어 올렸기 때문에 마치 비상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다녀보면 처마선의 들린 정도에 따라 문화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억지로 구부렸다고 할 정도로 심하게 들려 있는 반면에 일본은 그야말로 직선적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은 부드럽게 들어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처마들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2003년 3월에 부안 내소사에 들렀다가 화장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무 벽에‘화장실’, ‘변소’, ‘WC’란 글씨가 함께 써 있었다. 아쉽게도 ‘해우소’ 란 글씨는 없었다. 이 무렵에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는 백제시대의 대형 화장실이 발굴되었다. 화장실 구덩이는 길쭉한 타원형 구덩이 모습으로 큰 것은 깊이3m, 폭 1.8m, 길이 10m에 달했다. 여기에 발판을 놓아 여러 사람이 일을 보았다(사진 2 참조).


구덩이에 채워졌던 토양에서는 7세기 백제인들의 편충, 간흡충, 회충과 같은 기생충 알이 검출되었다.



사진 2. 왕궁리 화장실 복원 모습


이 기생충은 주로 오염된 채소로 감염되는 것이기에, 당시에도 인분을 사용하여 채소를 재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쇠고기나 돼지고기에서 감염될 수 있는 조충란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육식은 아주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 지금의 화장지 용도로 뒤처리에 사용한 나무 꼬챙이들도 발견되었다. 지금도 밥상에 오른 호박잎이나 경상도에서 즐겨 먹는 콩잎장아찌만 보면 길가다가 급히 일을 보았던 추억이 떠오르는데, 고대에는 이런 막대기로 처리를 했던 모양이다. 일을 보다가 신을 빠뜨렸는지 백제시대 짚신도 발견되었다. 이제는 이렇게 화장실까지 발굴되어 고대인의 생활모습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화장실 유적은 1990년에 일본 후쿠오카의 고로칸(鴻臚館 ) 유적에서 처음으로 발굴되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도 뒤처리용 막대와 기생충들이 확인되어 화제가 되었다. 왕궁리 유적이 7세기, 고로칸 유적이 8세기에 해당하니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불국사에서는 물을 흘려보내 씻어내는 지금의 수세식과 같은 뒷간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읍루인들은 화장실 주위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불결한데, 가운데에 뒷간을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산다(『삼국지』읍루)."


이 설명은 구체적인 모습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뒷간 주변에 둘러 살았던 것 같다. 뒷간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드는 우리의 풍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뒷간이란 말은 입에 올리기도 거북스러워했으니, 자연히 역사 기록도 별로 없다. 다만 이런 기록이 하나 눈에 뜨인다.


"왕이 “성균관 유생들의 뒷간이 궁궐 후원에 가까우니 옮겨 짓게 하라.”고 지시하였다(연산군일기 9년<1503> 11월 9일)."


"미친 노파가 창덕궁 뒷간 구멍으로 들어왔으므로 노파를 잡아서 돌려보냈다. 사약 한득경을 의금부 감옥에 가두고 파면시켰다(세종실록 4년<1422> 1월17일)."


이처럼 성균관이나 궁궐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뒷간이 있었다. 경복궁에는 28군데,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21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창덕궁 대조전 뒤에 있는 경훈각 건물에서 뒷간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유럽의 궁전과 비교된다.


"프랑스의 루브르나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 비단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17세기까지는 궁궐에 독립 건물이나 혹은 건물의 일부 시설물로서는 화장실이 설치되지 않았다. 당시 일반 가정에도 화장실이 없어서 집집마다 병에 오물을 모아 아침이 되면 창에서 도로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한 휴대품이 파라솔이고, 길바닥의 똥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 위해서 개발된 신발이 하이힐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청년사, 271~272쪽)."


올해 11월에 세계화장실협회가 서울에서 창립된다고 한다. 희한한 학회가 생긴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서양의 화장실 역사를 보면 우리가 주도하는 것도 수긍할 만하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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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簷

비첨 (飛檐) [명사]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


簷 처마 첨 1. 처마(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 2. 드림(차양처럼 무엇이 덮여 사방으로 늘어진 것)

[부수]竹(대죽) [총획]19획


檐 처마 첨,질 담 1. 처마(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 2. 전(甎ㆍ塼)(화로ㆍ갓 따위의 전) a. 지다 (담)

[부수]木(나무목) [총획]17획


松詹

송첨 (松簷) [명사] 소나무의 가지로 인 처마.


김홍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부분) 개인 소장, 집 처마에 송첨을 달았다. 출처 :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소나무잎의 송첨


소나무는 위에서 설명한 것 외에도 땔감이나 재목으로 이용됨으로써 그 효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소나무잎을 특수한 목적에 이용했던 송첨(松詹)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집의 처마는 볕을 가리는 차양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남향이나 서향에서는 처마만으로 햇살을 모두 가릴 수 없어 처마 끝에 덧대여 보첨(補詹)시설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보첨에 송첨이란 것이 있다.

송첨은 생솔가지를 잘라 두름을 엮어 처마 끝에 다는 것인데 소나무향이 그윽하게 풍겨 집안의 분위기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고 한다. 이 송첨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벌목할 수 없는 금송제(禁松制)가 있어 함부로 가지를 치기도 어려웠으므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거나 관아에서 함부로 단속할 수 없을 정도의 든든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었던 고급시설이었다고 한다.1)


다음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송홧가루는 식용 이외에 그림을 그리는 데도 사용되었다. 감지(紺紙) 위에 송홧가루로 그린 황금색의 그림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여기의 대나무그림은 유덕장(柳德章, 1694~1774년)이 감지은니사경(紺紙銀泥寫經)의 뒷면에 송홧가루로 그린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나무잎의 송첨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주)넥서스)



鴻臚館 홍려관こうろかん [鴻臚館]

[역사]奈良·平安 시대, 京都·難波·大宰府·博多 등지에 설치한, 외국 사신의 숙사(宿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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