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와 강대국의 국제정치
- 권영근 (행복에너지, 2021)
5장 6.25전쟁
- 전쟁의 승리는 적군을 얼마나 많이 살상했는지가 아니고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by 클라우제비츠)
- 625전쟁 당시 미국이 추구한 정치적 목표는 가능한 장기간 동안 중국군과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싸우게 함으로써 미군 재무장과 더불어 지구상 주요 지역 국가들과 동맹을 채결하는 것.
- 한국과 북한 입장에서 보면 625전쟁은 실패작. 얻은 것이 없는 반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 반면에 미국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성공적. (1) 130억 달러 규모 미 국방비를 500억 달러 수준으로 증액 (2) 유럽,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동맹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들 국가에 미군을 장기 주둔 (3) ? 결과적으로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
- 625전쟁은 근대시대 최초의 제한전. 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는 태평양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겨냥하여 가능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전쟁 수행. 트루먼은 625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켰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전쟁무기를 제한하고, 전쟁목표를 제한.
전쟁은 맥아더와 같은 야전군사령관이 아니고 트루먼과 같은 통수권자가 수행하는 것. 전쟁은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정보 등 국력의 제반 수단을 동원하여 수행.
- 트루먼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반도에서 중국군 참전 유도, 우방국에게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리고 공산 세력의 위협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서울에서 재철수 하였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의 처참한 모습을 연출.
1절 정치적 목표와 전쟁수행
: 미군 전쟁 수행은 가능한 한 장기간 동안 중국군과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위한 성격
1. 유엔군의 정치적 목표 변화
- 625전쟁 참전 결심, 38선 북진결심, 625전쟁을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38선 부근에서 정전 협상을 통해 종료할 것이란 결심, 포로의 자유송환을 추구할 것 등은 모두 트루먼이 내린 것.
- 625전쟁에서 트루먼은 정치적 목표를 38선 원 회복, 남북통일, 38선 원상회복, 포로의 자유 송환으로 지속적으로 바꿈. 이는 이들 목표가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명목상이 목표일 가능성을 암시.
- 625 전쟁을 통해 미국이 냉전승리의 초석을 마련. 오늘날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로 부상할 수 있게 해준 전쟁은 625전쟁이라고 말함.
2. 유엔군의 실제 정치적 목표와 6.25전쟁 수행에 관한 재해석
- 당시 미국이 남침 억제를 위해 소련을 겨냥하여 사전에 경고했더라면 북한군이 남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남침 준비를 모르는 척하는 한편 한국을 포기할 듯한 제스처를 취했는데 이는 북한군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 중국군의 참전을 모른 척했던 것도 동일한 이유로 한반도에서 중국군과 미군이 격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 1950년 6월 미국은 한반도에서 추구해야 할 정치적 목표가 38선 원상회복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진정한 목표였다면 트루먼은 유엔군을 낙동강까지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고 맥아더의 건의를 수용하여 한강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노력했어야만 했을 것. 남침한 북한군을 쉽게 저지하면 미국인과 자유진영 국가 국민들의 공산세력의 위험을 절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
- 트루먼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이후부터는 중국군의 참전을 종용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전개했고 상황을 조성해갔다.
- 유엔군이 중국군의 추격이 거의 없는 가운데 고속으로 38선 부근으로 남하할 당시 유엔사는 중국군의 인해전술 운운. 그런데 이는 공산세력의 위협이 상당한 수준임을 미국인과 자유진영 국가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을 것.
- 이 같은 치밀한 계획과 각본에 입각한 전쟁 수행을 통해, 3년의 기간 동안 중국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방식으로 미국은 625전쟁에서 추구한 목표를 완벽히 달성. 냉전 승리의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2절 북한군 기습 남침인가? 중국군 기습적인 참전인가?
-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실패’는 없었고, 북한 남침과 중국군 참전 정보를 의도적으로 간과.
1. 북한군 남침 징후 관련 주요 인사 증언과 주요 기관 보고
2. 중국과 소련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미국의 반응
3. 미국의 정보 능력과 한반도의 중요성
- 트루먼은 당시 미국 정보능력이 미미한 수준이고, 한반도가 주요 정보 수집대상 지역이 아니라서 북한군 남침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주장. 미국은 1943년 이후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의 패권경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 오늘날에도 미국은 한미동맹을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아태지역 동맹체제에서 함정의 닻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하게 간주.
-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외교 통신망뿐만 아니라 군 통신망 감청. 통신망 감청을 통해 연합국이 얻은 이득과 관련 처칠 수상은 수십 개 사단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고 말함. 통신망 감청을 통해 유럽 2차 대전을 1년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함.
- 625전쟁 직전 미 육군, 공군, 중앙정보국, 극동군사령부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 및 생산하여 관련 부서에 배포할 정도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역. 미군은 북한군 남침 준비에 관한 정보를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
4. 의도적인 간과?
- 미 중령 니콜스는 1950년 6월 초순 북한군 남침 예정 일자를 6월 25일부터 28일 사이라고 보고. 그런데 도쿄의 맥아더와 워싱턴이 이 보고서를 믿지 않았다고 니콜스는 말했다.
- 마찬가지로 미국의 언론은 이들 사항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고, 반면 중국의 대만 침공에 관해서는 엄청날 정도의 비문과 평문 수준의 경보가 있었다. 이는 당시 가장 의문스런 부분이었다. 1950년 3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의 미 중앙정보국 일일 보고에서는 한국 관련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동아시아 국가 중, 중국과 일본만 알거나 주요하게 생각할 뿐... 나머지 나라는 기타 등등, 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의문스런 부분이라고 말하기 힘들 듯)
- 1950년 4월 20일 북한군의 비약적 전력증강을 거론하며 한국군 전력증강의 필요성을 애치슨에게 강조했던 주한미국 대리대사 드럼라이트는 신성모의 북한군 남침 임박관련 5월 10일자 기자회견을 폄하했다.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한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
5. 왜 ‘정보 실패’를 주장했을까? 정보는 정치의 연장?
- 커밍스는 한반도에서 생산한 북한군 남침 동향 정보를 워싱턴과 극동군사령부가 간과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625전쟁을 통해 미국이 추구하던 정치적 목표로 인해 트루먼과 애치슨은 물론이고 맥아더가 북한군의 남침을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
- 미국은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유엔군 형태로 참전해 낙동강까지 후퇴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것이란 내용의 전쟁계획인 SL-16을 1949년 9월 작성했으며, 이 계획을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모든 관련 부서에 배포했다. 이는 미국인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염원했음을 보여주는 주요 증거일 것.
(다른 책에선, SL-16의 계획은 여러 전쟁 계획 중 하나이며, 특히 전력이 일방적으로 열세일 경우에는, 후퇴 후 전선을 좁히고, 무력이 보강되면 뒤쪽을 치는 식의 방식은 거의 전시 군대 운용의 기본법칙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
3절 북한군 남침, 유엔군 참전, 압록강 진격
- 미국 입장에서 625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던 애치슨 미 국무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의 고민은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장기간 한반도에서 중국군과 치열하고 싸움으로써 미 국방비 400% 증액으로 미군 재무장, 지구상 주요 국가와 동맹 체결)가 이 같은 성격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이처럼 말했다면 이승만을 포함한 한국인들이 미국의 625전쟁 수행을 결코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엔참전국이나 미국의 정치가들이 지원하지 않았을 것.
이 같은 이유로 트루먼은 미국의 625전재 참전을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에 대항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투쟁으로 포장했던 것.
- 38선 복원 또는 남북통일이 당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었음은 1950년 12월 1일의 애치슨 발언 통해서 확인 가능: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남북통일이 아니란 사실을 맥아더에게 분명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
(다른 책에서는 이런 발언을 냉전시기 세력 균형의 관점에서 한쪽이 오버(일방적 승리나 패배)하지 않는 것이 강대국들 사이에 일종의 타협적 귀결점으로 보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음)
1. 미국의 6.25전쟁 참전 과정
- 미국이 워싱턴 시간으로 6월 24일 저녁 9시 26분에 수신한 무초의 전문에서 보듯이 당시 전쟁 상황에 관해 어느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이처럼 불확실한 정보에 입각하여 미국은 곧바로 유엔의 한국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이 이처럼 유엔의 한국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이 전쟁이 남한의 도발이 없는 가운데 북한군의 남침일 수밖에 없도록 한반도 상황을 사전에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여러 해석이 가능한 사실에 대해, 과감한 추론)
2. 트루먼은 왜 한강 방어가 아니고 낙동강 방어를 고집했을까?
- 북한군 남침을 한강에서 방어할 것인가 아니면 낙동강에서 방어할 것인가, 라는 트루먼의 결심은 미 지상군 투입과 관련. 한강에서 방어하고자 하는 경우 북한군이 한강을 도강하기 이전에 한강이남 지역에 미 지상군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트루먼은 북한군이 한강을 도강하기 시작한 이후에나 맥아더가 미 지상군을 한반도 전쟁에서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트루먼이 한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의향이 없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 트루먼은 한강을 도강한 북한군을 낙동강 이전의 어느 선에서도 저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낙동강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남진 속도를 늦추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을 뿐이다. 트루먼 입장에서 미 지상군의 조기 투입을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쉽게 저지하는 경우 한반도 전쟁을 통해 공산세력의 위협을 미국인과 자유진영 국가 국민들이 절감하게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강 방어가 아니고 유엔군을 낙동강까지 후퇴시킴으로써 한반도가 공산화될 것만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공산세력의 위협을 절감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3. 유엔군과 중국군의 격돌을 염두에 둔 트루먼의 준비
- 웨이크 섬 회동에서 트루먼은 유엔군의 만주폭격을 허용해 준 것처럼 암시. 또한 한반도 모든 지역에서 미군을 포함한 모든 유엔군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 것처럼 암시. 한편 트루먼은 압록강 진격을 종용. 그런데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에 중국군이 반격하자 맥아더는 만주폭격을 요구한 반면 트루먼이 이 같은 폭격을 거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트루먼은 625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켰으며, 유엔군이 주어진 자원으로 중국군과 한반도에서 격돌하게 만들었던 것. 중국군이 유엔군과 압록강 진격에 대항하자 만주폭격과 병력증원을 허용해 주지 않음으로써 유엔군 입장에서 일대 재앙이 초래. 결과적으로 유엔군이 평택부근까지 후퇴한 후 38선 부근에서 장기간 동안 중국군과 싸운 후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만든 것. 이 같은 방식으로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제 구축을 완료할 수 있었던 것.
4. 유엔군의 38선 북진, ‘원산 책략’ 그리고 웨이크 섬 회동
-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고를 단순한 선전책동으로 치부했는데 이는 의도적이었다. 38선 북진의 열풍에 휩싸였던 맥아더도, 유엔도 이들의 경고를 의도적으로 간과. 10월 7일에는 맥아더와 유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었다. 맥아더는 유엔군이 38선이란 지리적 선을 넘게 한 반면 유엔사무총장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안정 상태를 보장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란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선을 넘었던 것이다.
오늘날 당시의 중국의 참전 경고를 미국이 불행히도 간과했다는 관점이 일반적인 듯 보이나, 필자는 이것이 아니고 중국군의 참전 경고를 미국이 학수고대했다고 본다.
- 미군 재무장 측면에서 유엔군과 중국군의 격돌이 필요했던 트루먼 입장에서 보면 맥아더에게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을 요구해야만 했다. 이 같은 요구가 압록강 이남 일정 선에서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한국군만 작전을 수행하게 할 것이라는 트루먼과 여타 유엔참전국들 간의 약속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트루먼은 이들 요구를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을 것.
5. 유엔군의 1차 압록강 진격
- 1950년 10월 24일 맥아더는 한국군을 포함한 모든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을 명령. 이 명령에 미 합창이 이의를 제기하자, 맥아더는 본인의 상기 결심이 한국군이 북한 지역에서의 상황을 처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군사적 필요성에 기인하며 전략 전술적으로 지장 받지 않으며 행동하라고 촉구한 국방부장관의 서신과 일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문제는 트루먼 대통령과 본인의 웨이크 섬 회동에서 모두 해결된 부분이다, 라고 말했다.
맥아더가 유엔사령관 직책에서 해임된 이후 유엔군의 38선 북진, 1차 압록강 진격과 2차 압록강 진격이 맥아더의 일방적 결정이었다는 논란이 제기. 그런데 625전쟁에 관한 비밀자료가 해체되면서 유엔군의 38선 북진, 1차 2차 압록강 진격 등 모든 주요 사건이 애치슨과 트루먼의 작품임이 밝혀진 것.
6.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
- 1950년 11월 24일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은, 미국이 청천강 이북 산악지역에 방대한 규모의 중국군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추진됐다. 중국군 부대는 북서쪽 방향으로의 유엔군 진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방어태세를 견지.
-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은 남북통일의 목적이 아니었다. 중국군과 교전하기 위한 성격.
- 미국은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에 중국군이 강력히 반격해 올 것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진격을 추진. 미국은 중국군이 반격해 오는 경우 유엔군을 한반도의 특정 전선으로 후퇴시켜야 할 것으로 판단.
- 미국의 625전쟁 수행은 미국의 재무장과 동맹체제의 구축을 통해 미국을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부상시킨다는 커다란 구상 아래 진행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