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해 (The Dead Sea)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사해가 있다. 사해수면은 해저 392M이고, 깊은 곳의 수심은 수면에서 약 400M 까지 내려간다. 사해의 길이는 약 200리(78Km)이고 넓이는 45리(18Km)이다.
사해는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요르단강과 사해 주위에 있는 와디로부터 물을 받아들이지만 흘러 내 려가는 곳은 없다. 사해는 보통 바다 물보다 7배-10배나 짜서 쓴맛까지 날 뿐만 아니라 농도가 높아서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 않고 뜬다.
또 한 공기 중 산소 함유량은 인근 지중해 해변보다 10%정도 높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사해는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 건강치료를 위하여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다. 사해 주변에는 많은 온천장과 함께 휴양 리조트 시설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최장 길이 85 Km, 최장 폭 17Km 표면적 약 1,015 평방 Km 인 사해는 그 수면이 지중해보다 398m나 더 낮다. 즉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이다. 구약에는 염해(Yam Hamelach = Salt Sea 창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사해(死海) 라고 불리며 염도가 약 33%로서 세계적으로 염분이 가장 많은 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해에 들어가면 손발을 휘젖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떠 있게 된다. 혹시 손발을 휘젖다가 물방울이라도 튀어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이 쓰라려서 그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보통 바닷물이 4-6 퍼센트의 염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해물은 그 5배나 되는 것이다. 사해가 그렇게 많은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물이 흘러 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요단강 등 주변에서 유황과 질산 성분의 물질들이 함유된 약 7백만 톤의 물이 매일 쏟아져 들어 오는데 빠져 나갈 구멍은 없고 요르단 계곡의 뜨거운 열기는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화학물질 등 고체 성분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사해의 포타슘 매장량은 전세계가 이곳에서 나는 것만 쓰더라도 100년을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포타슘은 비누, 비료들을 만드는데 쓰인다.사해 주변에는 사해 물을 분석해서 광물질을 추출해 내는 공장 들이 있다.
사해의 물은 피부병에 특수한 치료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의 검은 흙은 신경통 등에 특효라고 전해진다. 세계 각국에서 치료차 사해에 오는 사람들이 있고, 이 근처에는 이들을 위한 특수 병원도 있다.
사해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시로는 소돔, 고모라, 아마드, 스보임 (창 10:19) 이 있으며, 이 도시의 왕의 목록도 이어 기록되어 있다 (창 14:2), 소알 (창 13:10) 또한 이 지역의 도시였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이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 고 해석하고 있다. (창 13:10, 사 1:10, 마 11:23~24)
고대에 이곳에 많은 물이 있었음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아주 오래 전에는 적어도 사해의 물이 해발 -225 m 까지 채워져 있었으며, 19세기 연국인들에 의해 탐험되었을 때에도 현재의 수위보다 12 m 나 높았었다. 오늘날에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요단강과 요르단으로부터 내려오는 야르묵 강의 물을 차단하여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 자꾸만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 여름철 하루 평균 수분 증발률 (25 ㎜)도 수면이 낮아지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 사해에는 보통 바다의 염분 농도보다 무려 10배가 넘는 26 ~ 33 % 의 소금이 녹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러 여름철에는 바다 위에 결정 (結晶)으로 떠있는 많은 소금은 마치 바다에 핀 꽃이나 얼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불의 부력이 매우 커 사람이 물에 들어가 누우면 모의 절반 가량이 저절로 물 위에 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창 14:3)
※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민 34:3)
※ 그 경계가 또 요단으로 내려가서 염해에 미치나니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 (민 34:12)
※ 또는 아라바와 요단과 그 가요 긴네렛에서 아라바 바다 곧 염해와 비스가 산록에 이르기까지의 동편 지경이니라 (신 3:17)
■ 꿈란 (Qumran)
사해의 서북연안에서 1.3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꿈란은 1947년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꿈란 주위의 동굴들에서 기원전 2세기경의 히브리어 성서 사본과 성서 주석서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된 성서들을 사해사본 혹은 꿈란사본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에세네파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 후 70년까지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원 터로 사용하던 흔적이 있다.
꿈란 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가운데 두루말이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이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주석, 신학서, 꿈란공동체의 규율집들로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들이다.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구약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에스델서만을 제외한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특별히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본들이 이곳에서 발견 되었다는 것이다.
○ 잃어 버린 염소
1947년 5월의 어느 봄날. 한 베드윈(Bedouin) 소년이 염소떼를 돌보다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염소를 찾고 있었다.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친구를 불러 동굴 속으로 들어 가 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안은 길이 8.5 m, 너비 3 m, 높이가 3 m 나 되는 꽤 큰 굴이었다.
그곳의 한쪽 구석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들 사이로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높이가 60 ㎝ 가량되는 큰 항아리들이었다. 무하마드와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들이 드러났고, 꺼내보니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두루마리였다. 너비 44 ㎝에 길이 1 m ~ 8 m 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보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골동품상에 가져가면 몇 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소년은 그것들을 꺼내 들고 동굴을 나왔다. 무하마드가 다섯 개, 아메드가 세 개..........
○ 신비한 두루마리
두 소년은 베두윈 족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아메드는 골동상 한 군데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세 개를 팔고 돌아갔다.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겠다고 하였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맡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골동상 주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사무엘 대사교를 찾아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사교는 할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사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 글은 히브리 글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태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구약은 그때까지도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히브리 글자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가 구약의 원본이라면?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확대경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트레버는 어지러운지 잠시 일손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하느님!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어떤 은총으로 내가 이 귀중한 것을 보게 되었을까? 사무엘 대사교님, 이것은 틀림없는 구약성서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다 뿐이지 제 생각에는 구약 원본이 틀림 없습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트레버는 한참을 더 살핀 뒤 두루마리 가운데에서 구약성서의 이사야 서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트레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의 것입니다. 어서 사진을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서 원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 사해문서
그들은 곧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는데는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사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처럼 거룩한 경전을 구해서 보내주신 대사교님께 축복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문서는 구약 원본이며 기원 전 1백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발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발견입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빕니다."
그 무렵, 이름 난 성서 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장 수케닉 박사도 옛 두루마리 세 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드 소년이 판 두루마리였다. 그 또한 이 두루마리가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나머지 두루마리 다섯 개를 사무엘 대사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무엘과 수케닉이 만난 날, 두루마리 여덟 개가 합쳐진 날, 그 날은 인류가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날이 되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두루마리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수케닉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여러분, 이 두루마리에는 구약의 이사야서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에세네 교파에서 썼던 '공동체 계율','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기쁨과 행운을 얻는 일이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 쿰란 공동체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드 브오 (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 그리고 그곳 베두윈들을 데리고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벼랑으로 갔다. 브오 신부는 그곳에 에세네 교파가 살았던 자취가 반드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 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을 대비하여 여기 저기 흩어 놓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브오 신부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 내었고, 그 안에서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나 쏟아져 나왔다. 탐험이 계속 될수록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바위 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 도시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또 키르바트 쿰란 (Khirbat Qumran)이라고 불리는 수도원 건물도 있었다. 수도원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그 방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했다. 뒷날 실험하여 보니,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는 같다고 밝혀졌다
○ 에세네파
브오 신부의 탐험으로 밝혀진 사해 동굴의 옛 유적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 사해 바닷가를 거닐기 전에 이미 이곳 동굴들에서는 에세네 (Essenes)파로 불리는 한 무리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들' 이 아닌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뒤 유태인들을 수천년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 10군단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진 듯하다.
'쿰란 공동체'에서 찾아낸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서 (Esther)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다. (에스더서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또 에세네파가 지켜야 할 '공동체 계율' 같은 기록들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구약과 거의 다름이 없다. 단 '쿰란 공동체'를 처음 만든 '정의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어떤 이는 그가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 전체의 구원을 바랐던 데 비해 에세네파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빌었으므로, 정의의 스승을 예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정의의 스승'은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꽤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 광야에서 선교하던 세례 요한이나 근처의 요단 강에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했던 예수도 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는 발견된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scroll)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은 구약 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 등으로써, 대부분 양피 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들이다. '사해 두루마리'는 그 뒤로 수케닉 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이 사무엘 대사교의 두루마리를 25만 달러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
■ 예리고 (Jericho)
예나 지금이나 짙푸른 종려 가지가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예리고는 황량한 유대 광야의 오아시스로서 와디 켈트의 맑은 물줄기가 촉촉히 적시는 풍요의 땅이다. 예리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바르티메오라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야기(마르 10,46-52), 자캐오라는 세관장 집에 하루 머무르신 이야기(루가 19,1-10)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시대 예리고는 아마도 삼랏 언덕(텔 에스 삼랏)과 헤로데 궁전(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사이에, 또는 그 근방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고대 제라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도시를 가지고 있는 여리고는 사해 북동 쪽 13 ㎞ 지점 유다 광야에 자리잡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여리고는 예로부터 키가 10 m 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의 성읍' (신 34:3, 삿 3:13) 으로 불리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디던 도시였다.
물이 귀한 사막 한 가운데 물이 솟아나오는 여러 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 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한다. 요르단 골짜기 (해발 -225 m )에 위치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다. 헤롯 대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이 났다.
성경의 여리고는 구약과 신약의 각각 다른 두 곳이 있다.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당한 최초의 도시 여리고는 Tell es-Sultan 이라고 불려지는 곳이며 (수 5~6 장), 가나안 점령의 교두보였다. 예로부터 이 도시는 순례자들의 통로로서 물과 음식을 얻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시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여리고 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도 하였다. 이 길 사이는 유다 광야가 놓여 있어 일반적으로 위험한 길이었다 (눅 10:25~37)
예수께서 이 도시를 들러 지나가시곤 하였던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헤롯이 지은 별장이 있는 와디 퀠트 (Wadi Qult)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 (눅 19:1 ~ 10)와 또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만나 구원을 이루시기도 하셨다 (막 10:46 ~ 52). 신약의 여리고는 AD 68~69년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가면서 모두 멸망시켜 버렸다. 비잔틴 시대에 여리고 근처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자리를 잡았으며, AD 480년 이집트 테베의 요한이 와디 퀠트에 자리잡은 성조지 수도원은 유명하다. 요한은 516년에 가이샤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노년에 이 수도원에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525년 그가 죽은 후 코시바의 게오르기아, 즉 성 조지가 이 수도원에 살면서 그를 기념하여 수도원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9세기 이후 십자군 시대에 매우 활발한 수도원으로 자리 잡았으나 십자군 이후 급격히 퇴락하였다.
한편 여리고 서편의 유다 광야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막 1:4~5, 마 3:1), 요단강에서 멀지 않은 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 4:1~11, 막 1:12~13), 성경이나 다른 자료들에서는 예수님이 정확히 어느 곳에서 사십 일간 금식을 하셨는지 찾아 볼 수 없다. 훗날의 구전(later tradition)에 의하면 여리고 옛 도시 뒷켠에 높이 솟아 있는 카란탈 산 (Mount of Qarantal)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던 시험산이라고 한다. 6세기에 산 동쪽 기슭 예수님이 있었다는 동굴 윗켠에 교회가 하나 지어져 있었으나 13세기에 없어져 버리고 다시 1874년에 희랍 정교회에서 지은 수도원(Sadandarion Monastery)이 남아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여리고는 난민 수용소로 변했으며, 1948년부터 1967년에 이르는 동안 7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흙벽돌로 지은 난민촌에서 살았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 도시는 쫓겨난 난민들의 무너진 집들만이 남아 있으며, 아름다운 '종려의 도시'에는 일부 아랍인들이 머물러 살아가고 있다. 1993년 9월 13일 와싱톤에서 조인된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협정으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PLO의 자치 행정구로 인정되어, 당분간 PLO의 행정수도로써 그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가 새로운 건설을 위한 주역을 담당할 도시로 변하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여리고는 알렌비 다리를 통한 요르단과의 교류의 창구로써 팔레스타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과의 통행으로, 외교 및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다.
○ 여리고 옛 도시 (The Jerico Excavations)
고고학적으로 여리고는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Walled City)이다. 이곳은 1930-1936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죤 카스팅(John Garstang)이 발굴했고, 1952-1958년에는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더린 캐년(Kathleen kenyon)이 정밀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성을 발굴하고 성벽과 둥근 망대(Round Tower)를 발굴하였다. 즉 주전 7000년경에 이미 성을 쌓고 도시 생활을 시작한 증거인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집안 벽을 그림으로 장식하였고 죽은 사람의 두개골은 방바닥에 매장 하였다. 또한 진흙으로 만든 여자의 형상, 동물 형상도 발굴되었다. 이 시대에 속하는 주거 층에서 터어키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오석(Turquoise)으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미 이 시대에 여리고는 여러 먼 곳의 지역과 왕래와 교류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 엔게디 (En Gedi)
오늘날 사해 주변의 좋은 휴양지의 하나로 자리한 엔게디는 사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샘이 넘쳐 나고 있는 곳이다. 사무엘상 24장 1절에 의하면 다윗은 한때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들었다. 나할 데이비드 자연보호 구역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면 다윗의 폭포라 불리는 엔게디 폭포가 나온다. 가던 방향으로 곧장 따라 올라가면 샘 하나를 지나서 동굴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몸을 숨겼다는 동굴이다. 폭포에서 이곳까지 약 40 ~ 50분이 걸린다.
※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삼상 23:29)
※ 사울이 불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삼상 24:1)
※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대하 20:2)
■ 마사다 (MASADA)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 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 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 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를 통하여 마사다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으나 나중에 로마군에 넘어간 사람이다.
그는 비록 조국에 등을 돌렸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기록으로 남겼다. 요세프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마사다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서기 73년의 어느 봄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마사다 최후의 날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 (Jonathan : 주전 160 ~ 143) 이었다. 그 후 유대왕 헤롯 (Herodes) 이 주전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 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그녀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위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롯이 죽은 뒤, 서기 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 "열심당원" 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마사다에는 엄청난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가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들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롯왕이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련되어 있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열심당원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대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960여명. 로마제국으로 볼 때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엄명을 내렸다. 마사다는 끊임없이 로마군 진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기지로 쓰였으며, 그것은 꺼져가는 반란의 불길을 또다시 타오르게 할 염려가 있었다. 또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2년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는 9천에 가까운 군대와 함께 6천이 넘는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일꾼으로 이끌고 왔다.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은 무기와 식량이 넉넉했으므로 아무리 오래 포위하고 있어 보았자 지치는 쪽은 로마군 이었다. 로마군은 먼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대광야 너머에서 날라와야 했다.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실바는 '흰 곶'이라고 불리운 그 바위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길이는 200 m 로 꼭대기가 마사다 성벽보다 겨우 20 m 아래였다.
로마군은 비탈 위로 공성탑을 만들어 올렸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들이 활을 쏘며 엄호하는 사이 다른 병사들이 공성퇴(Battening Ram)를 끌어 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공성퇴는 무서웠다. 공성퇴에서 날아간 20 ㎏ 이 넘는 돌들은 끝내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서둘러 무너진 성벽에 또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 대들보들을 두겹으로 구불구불 쌓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미사일 공격'으로 바꿨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자 나무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실바는 기쁨에 넘쳐 그의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다음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 들어 가기로 했다. 로마 병정들은 유대인들이 한 명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새 물샐틈 없이 지켰다. 그날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남자들을 모두 한 군데 불러 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이다. 어둠이 물러가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있다. 그것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란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자."
벤 야이르의 말이 다 끝나자 어떤 이들은 기꺼이 그 말을 따르려 했지만, 마음 약한 사람들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요.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였소. 다메섹에서는 일만 팔 천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애굽에서는 육만 명이 죽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소.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 주겠다고 꼬이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소.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우리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 하오. 우리는 용기로써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소. 아직도 우리 손은 자유롭고, 이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소.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용기로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읍시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되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경탄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성을 불질러 로마인들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해야 하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겨 놓으시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되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부드럽게 껴안고 아이들을 감싸고 눈물이 그득한 채 긴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들의 손으로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 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내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식구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사람을 죽였다. 그는 주검을 둘러보았다. 모두 숨이 끊어 진 것을 보고 성안에 불을 놓았다. 그는 이윽고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 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 놓았다. 그러나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성은 무서운 고요함에 쌓여 있었다. 타다 남은 불길과 즐비한 주검들이 그들을 맞았다. 로마군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결단과 용기로 이루어진 죽음 앞에서 기뻐할 수는 없었다. 로마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그녀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다섯 아이들을 모두 살려 주었다.
○ 고고학자 야딘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여 년 뒤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페르샤 이슬람교도들이 유대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이,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나타내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요세프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때 마사다에 있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유대를 버리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요세프스의 기록이 진실임이 밝혀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 (Robinson)과 스미스(Smith)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1963년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하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를 찾아 그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였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사바 (As-Sabba : 저주 받은 땅) 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은, 많은 탐험가들의 손으로, 요세프스가 남긴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갔다. 1963년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고고학자 야딘 (Yadin)에게 요세프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발굴을 부탁했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나중에는 참모총장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 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대광야와 사해 근처의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부터 1964년 5월, 1964년 11월부터 1965년 4월 까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프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 냈다.
야딘은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어 발굴을 도울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워낙 외진데다 참기 어려운 날씨가 계속되는 곳이었으므로,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가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 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세계 스물 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 천 여명은 한번에 두주일 씩 스물 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으며, 가드나 (Gadna : 청소년 전투 부대) 학생들과 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 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은 곳에 발굴 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상 마사다 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 Km 로 불어 천막을 갈기갈기 찢었고,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짝 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우고 말라붙은 개울을 강으로 바꾸었다. 캠프와 캠프 사이를 흙탕물이 넘쳐 흐르고,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롯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바위산 꼭대기 웅덩이들에 고이는 빗물을 옛사람들이 저장해 두었다가 잘 썼으리라고 알 수 있었다.
○ 영웅들의 성지 (聖地)
야딘은 맨 먼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을 파냈다. 그것은 요새가 아니라 화려한 벽화와 로마식 목욕탕이 딸린 헤롯의 왕궁이었다. 대왕은 이 벼랑 꼭대기에서도 찬물, 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야딘은 여기서 처음으로 시체 셋을 찾아 냈다.
해골 하나는 젊은이의 것으로, 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다른 해골은 젊은 여자의 것으로, 까만 머리카락이 금방 손질한 듯 땋여진 채로 남아 있었고, 또 하나의 해골은 어린아이의 뼈였다.
이 세 궁전을 발굴하느라 자원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해야 했다. 헤롯이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 경치 좋고 험한 요새인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3층 왕궁 옆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무너진 이 건물을 되살리기 위해서 발굴팀은 트랙터와 기중기를 써야만 했다. 이스라엘 육군 공병대가 기중기와 트랙터를 뜯어서 올린 뒤 다시 짜맞춰 주었다. 창고에는 기름, 술, 밀가루 단지 깨어진 것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또 식량이나 일거리를 나눌 때 쓰였던 토큰들도 있었다. 한두 군데는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일부러 남겨둔 창고였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 헤롯의 별장인 서궁과 커다란 수영장도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둘러 흰돌로 성벽을 쌓고 군데군데에 탑 38개를 세웠다. 탑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은 모두 110개. 유대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그밖에도 작은 궁 셋이 더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는 미크베 (Mikve) 라 불리우는 유대교의 침례의식 목욕탕이 있었다.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생활도구들, 그리고 '유대인의 자유'라고 씌여진 진귀한 동전, 온 세계를 통틀어 여섯 개 뿐인 은화 세 개, 가장 오래된 천 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소득은, 서기 73년 이전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구약성서 14개였다. 그것들은 시편, 레위기, 에스겔서, 신명기 부분들과 유대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와 외경인 '벤 시라의 지혜서', 그리고 사해 동굴에서 나온 에세네파의 두루마리 성경들이었다.
열 한달 동안 야딘은 유대 반란군들이 쓴 검소하고 한 맺힌 유물들과, 헤롯왕이 세운 사치하고 화려한 유적들이 나타내는 뚜렷한 차이를 지켜 보아야 했다. 고고학상으로는 헤롯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유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이 볼 수 있었다. 마사다를 '영웅들의 성지'로 만든 것은 바로 이 고귀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 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조국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