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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르프라데쉬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노이다(Noida)*의 어느 상점가 골목, 뙤약볕 아래 발밑으로 푹 꺼진 인도(人道)와 오물(汚物)을 살피며 걸으랴, 앞뒤 좌우로 쏟아지는 인파(人波)와 릭샤** 그리고 어슬렁거리는 짐승들을 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순간 지나가던 한 인도인이 의도적으로 어깨를 내밀어 툭 치더니 이내 뒤돌아서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대수롭지 않게 갈 길을 향하던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셨다. 일부러 싸움을 거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아예 방향을 틀더니 고함을 지르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표정에는 살의가 가득했고 일말의 타협이나 너그러움 따위는 없었다.
*노이다-Noida는 New Okhla industrial Development Authority의 약자다. 인도 우타르프라데쉬 주의 고탐 붓드 나가르 구역(Gauam Buddh Nagar District)에 속하며 야므나 강을 경계로 델리 동부와 면하고 있는 기획 도시이다. 인도 수도권인 NCR(National Capital Region)에 속한다.
**릭샤-택시와 유사한 인도의 보편적인 대중교통 및 운송 수단. 인력거, 자전거 릭샤, 삼륜 오토바이로 개조한 오토릭샤, 소형 버스나 짐을 운송하는 템포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종교가 일상에 스며든 평온한 나라, 선하고 해맑은 영혼이 깃든 인도가 우리의 로망이라면 현실 속 인도의 모습은 조금 다를 수 있다. 특히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고, 갠지스 강이 도도하게 흘러 ‘영혼의 도시’라고 불리는 바라나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인도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고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고 인도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거둘 필요는 없다. 모두 환상만은 아니다. 인도인들은 여전히 종교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에 그 본성은 때 묻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때로 무책임하고, 잘못을 저지르며 기만하려는 그들에게 지치게 되더라도 대개의 경우 그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에 실소를 머금으며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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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름대로 인도와 중국을 오가며 어쭙잖게 가진 생각은 이렇다. 사는 환경은 인도보다 중국이 낫지만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중국인보다 인도인들이 조금 더 수월하다는 것이다. 순수함과 용의주도함의 차이랄까.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도 역시 악인(惡人)은 있다. 오히려 惡에 바친 인도인들의 행동은 때로 이성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변질되고는 한다. 단지 종교와 인종 간에 벌어지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인도에 살면서 인도라는 곳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동안 주요 일간지의 기사들을 스크랩했었다. 하지만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열정이 사그라져버렸는데 다름 아닌 하루가 멀다 하고 지면을 가득 채운 사건 사고 소식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러한데 인도에 대해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날이 물질적 가치가 커져가는 이 시대에 인도인들도 다분히 공격적으로 변했고, 거칠어졌다. 요즘 우리도 달관 세대냐 혹은 분노 세대냐를 두고 이야기하는데 세계 어느 곳보다 빈부 격차가 심한 곳을 사는 인도인들도 그저 종교에 의지해 마음이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 종교와 계급에 충실하다는 것, 즉 까르마(karma, 業)를 중시하고 자신의 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유통 기한이 끝나가는 해묵은 묵계(默契)일지도 모른다. 인도에 있으며 인도 직원들을 관리했던 적이 있는데 물가가 올라 울상을 지으며 성토하는 그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왔다.
종교를 믿는다고 모두가 현실에 초탈한 구루(Guru)*가 될 수 없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정신적인 가치만이 실질적인 배고픔과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10루피를 쥐어주니 구루도 나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물질적 빈곤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해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믿고 싶은 인도일뿐이고 실제 인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모습일 수 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모습 속에 인도는 마치 정신이 물질 위에 설 수 있다는 믿음을 현실 속에 구현된 듯 보이지 않는가.
*구루(Guru)-정신적 스승을 의미한다.
실제로 매체를 통해 접하는 인도는 그런 관점이 많다. 수많은 책과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등에서 그려지는 인도의 모습이 그렇다. 바로 인도의 신비로움 또는 그곳에서 얻은 정신적인 감화(感化)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현실에 염증을 느낀 영국의 록밴드 비틀즈가 인도에서 영감을 얻었다거나, 히피(Hippie) 시절 인도를 다녀온 故 스티브 잡스의 일화도 비슷한 얘기다. 같은 동양권에 사는 우리도 대개 인도를 경험하면 유사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그 또한 신기류나 허상만은 아니다.
또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에 그 신비주의(神秘主義) 만큼 요긴한 것도 없다. 다만 이런 의문이 든다. 신비는 신비에서 그친다. 그렇기에 배낭여행의 천국이었던 인도가 몇 건의 추문(醜聞) 이후 성폭행 위험지역이 되지 않았을까. 그 극단적인 시각의 변화에는 사실 신비를 넘어 선 인도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인도는 아직은 여성의 인권이 바로 서지는 못한 곳이고, 해가 진 뒤 개인행동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인도에서 일을 도모할 때 정신적인 감화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다. 인도 여행의 영업 비밀을 누설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솔직히 인도에 대해 낭만 일변도의 시각은 조금 불편하다.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와 미망(彌望)하듯이 좀 더 현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비로소 인도의 실체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인도의 입장에서도 유익할 것이다. 사실 나를 찾는 것은 꼭 인도가 아니어도 되니까 말이다.
바라나시
그런데 난 또 인도에서 가장 영(靈)적인 도시로 향했다. 사트나(Satna)에서 기차로 예닐곱 시간을 달려 바라나시(Varanasi)*에 도착하자 곧바로 갠지스(강가) 강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 빈틈없이 가득 찬 인파를 헤치며 가트(Ghat)**에 도달하자 영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뿌연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 갠지스의 모습에 ‘마침내’라는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힌두교의 성지(聖地) 바라나시는 살아있기에 가봐야 하고 죽었으니 돌아가야 할 장소, 즉 생(生)과 사(死)가 마주치는 곳이다. 순례자들이 가득하고, 가트로 향하는 길을 따라 장례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의 공식적인 상주인구는 120만 명 정도인데 느낌상으로는 1200만 명도 훨씬 넘는 대도시 같았다.
*바라나시(Varanasi)-바라나시는 베나레스(Benares) 혹은 카시(Kashi)로도 불린다.
**가트(Ghat)-가트는 강으로 이어지는 계단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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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으로 이어지는 계단길(가트) |
산 자는 축복받기 위해 오고, 죽은 자는 떠나기 위해 온다고 하니 모든 힌두교도들이 일생에 한번이라도 오기를 꿈꾸는 곳이다. 인도인들에게는 종교의 수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힌두교만이 아니다. 자이나교와 불교에도 유서 깊은 도시이다. 특히 고타마 붓다(석가모니)가 첫 강론을 행한 불교의 성지 사르나트(Sarnath)*가 인접해 있다. 또한 바라나시는 학문과 예술이 융성했다. 수많은 인도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 영혼의 고도(古都)를 거쳐 갔다.
*사르나트(Sarnath)-고타마 붓다의 탄생은 기원전 567년으로 기원전 528년 무렵 불교가 창시되었다. 당시 바라나시는 카시 왕국의 수도였다.
한편 신성(神性)에 있어서 바라나시는 파괴의 신 시바(Shiva)**의 도시다. 파괴에서 재생, 죽음에서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니 그야말로 윤회의 실체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실로 다채로운 수식어를 지닌 바라나시, 철학과 예술을 논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이 있을까. 장례 행렬 중에는 힌디어로 ‘람의 이름은 진리다’라는 말을 외치는 무리들도 있었다. 람은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일찍이 ‘바가바드 기타’에 등장한 크리슈나가 그러했듯이 비슈누 신의 화신(化身)이다. 즉, 람의 이름이 진리라는 외침은 죽음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인간의 역동적인 삶을 보여주는 도시는 많지만 죽음까지 역동적인 곳은 드물 것이다. 이런 광경 속에서 눈이 돌아가며 도취되지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시바(Shiva)-시바는 브라흐마, 비슈누와 더불어 힌두교 주요 신의 하나로 파괴의 신이다.
우타르프라데시에 위치한 바라나시의 역사는 기원전 11~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라나시는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가운데 하나로 이미 기원전 1800년경부터 주민이 정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바라나시는 종교적으로 발전했는데 수천에 달하는 힌두 사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해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곳의 힌두 사원들은 철저하게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때문에 바라나시의 힌두 유적은 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으며 도시는 한 때의 전성기를 뒤로한 채 급격히 쇠퇴했었다.
그렇게 300년에 걸친 억압을 견뎌내고 16세기 무굴 제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라나시는 중흥기를 맞이했다. 특히 아크바르(Akbar, 1542~1605) 대에 이르러 유화 정책과 더불어 힌두 사원이 건립되고 기간 시설이 확충되는 등 도시는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년) 때 또 다시 극심한 탄압 속에 힌두 사원은 허물어지고 대신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는 등 일시적 후퇴기를 맞아야 했다. 그러다가 아우랑제브 사후, 바라나시는 지방 힌두 왕(Raja)들의 지배를 받으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원은 무자비하게 파괴되어도 갠지스 강물은 도도하게 흘렀던 것이다.
바라나시의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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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의 첫 인상에 넋이 나가 한 눈이 팔린 사이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선 숙소를 잡아야 했기에 가트에서 발길을 돌려 도시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도 둘러볼 시간이 많았지만 한 켠에서 강물에 몸을 담고 기도(뿌자)를 드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죽음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묘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사람의 육신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내 마음은 어느 순간 이 도시에 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우타르프라데시다. 어서 빨리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인도 전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라나시는 가장 실종률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인도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 이곳의 어둠이 얼마나 위험한지 간과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바라나시의 뒷골목은 복잡하게 얽힌 미로와도 같았다. 골목 어귀에 형형색색으로 발광하는 장신구 가게들을 지나치자 사람 두어 명이 나란히 가면 어깨가 부딪힐 만큼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길을 물어 숙소를 찾는 사이 어느덧 해는 저물었고, 칠흑과 같은 어둠이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막다른 길에 신상이 하나보였다.
아뿔사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바라나시가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고 했던가? 바로 눈앞에는 학문과 예술을 상징하는 여신 사라스와티(Saraswati)의 신상(神像)이 길 한가득 서 있었다. 오는 도중에 길을 물었더니 분명 이리로 가보라고 했었다. 언제 인도인들이 가르쳐주는 길이 믿을만 했냐만은 낭패였다. 시간은 가고, 오늘 밤 이 위험한 도시에서 나를 구원해줄 숙소는 나타나질 않았다. 흥분한 나머지 가트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골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줄곧 호주머니 속에 든 다용도 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 신기류 같은 도시 바라나시는 그럴만큼 위험해 보였다.
학문과 예술을 상징하는 여신 사라스와티(Saraswati)의 신상(神像) |
밝을 때와 달리 어두울 때 보면 좀 괴기스러운 힌두교 신들의 형상은 대개 여러 개의 팔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눈앞의 사라스와티 역시 네 개의 팔을 지니고 있었다. 두 팔로 시타(Sitar)*를 들고 나머지 두 팔에는 각기 베다(Veda)**와 묵주를 쥐고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여신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나마 칼리(Kali)***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다. 칼리는 새까만 피부에 네 개의 팔을 가졌다. 한 손엔 피가 흥건한 칼과 다른 한 손엔 잘린 목을 든 채 시바(Shiva)를 밟고 선 경우가 많은데 목에는 인간의 잘린 목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다. 낮에 보아도 섬뜩한 것이 칼리 여신이다.
*시타(Sitar)-인도 전통 악기
**베다(Veda)-인도의 신화, 종교, 철학과 관련된 고대 문헌
***칼리(Kali)-칼리는 산스크리트어 칼라(검은색, 죽음 등)에서 비롯되었으며 파괴의 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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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보아도 섬뜩한 것이 칼리 여신. 한 손엔 피가 흥건한 칼과 다른 한 손엔 잘린 목을 든 채 시바(Shiva)를 밟고 선 경우가 많은데 목에는 인간의 잘린 목을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다. |
반면 사라스와티는 눈을 맞출 만 했다. 사라스와티는 브라흐마(Brahma)*의 아내로 브라흐마의 일부로 탄생했으나 그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브라흐마가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재미있게도 사라스와티는 브라흐마의 구애를 피해 다녔고, 이에 브라흐마는 사라스와티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앞뒤 좌우에 머리를 달고 항상 지켜보았다고 한다. 결코 신을 희화할 수 없지만 그 신성(神聖)에 비해 인간적인 모습이다. 창조의 신을 집착하게 만든 것을 보니 실로 대단한 여신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신상 앞으로 몇몇 어른들과 더불어 아이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매년 초 열리는 사라스와티 축제일(Saraswati Puja)이 다가온 것이다.
*브라흐마(Brahma)-브라흐마는 비슈누, 시바와 더불어 힌두교 주요 신의 하나로 창조의 신이다.
하지만 나는 사방팔방 고개를 돌려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인도인을 다시금 붙잡고 숙소의 방향을 물었다. 마침 숙소의 이름은 옴(Om) 게스트 하우스였다. 언제부턴가 인도에서 답답한 상황이 생기면 혼자 ‘오옴’하며 마음을 다스렸기에 묶기로 정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신상이 막아 선 길로 계속 가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가냐고 물으니 신상 아래를 눈짓했다. 알고 보니 이 신상은 원래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후면 갠지스 강으로 옮겨져 강 한 가운데에서 침수 의식이 거행될 것이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복종하듯 몸을 웅크려 여신의 치마폭을 지나가니 곧 숙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져갈 무렵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찾은 옴 게스트하우스 |
갠지스 강은 자석처럼 사람의 마음을 이끌었다. 바라나시의 가트는 매우 길었고, 첫날은 아침에 일어나 가트에 가고, 점심을 먹고 다시 가트로 향하기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강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밤길을 나설 엄두는 내지 못했다. 바라나시의 밤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옴 게스트 하우스답게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가로이 숙소에서 마련한 요가(Yoga) 수업을 듣기도 했다. 요가는 본래 운동이 아닌 수행일 텐데 돈을 주며 도를 닦는다는 점이 재밌었다.
이튿날부터 중심부인 다사수와메드(Dasaswamedh)에서 우측의 라나(Rana) 가트로 향했다. 갈 수 있는 최대한 멀리 걷는 사이 바라나시의 아이들이 끊어질 듯 말 듯한 인연(因緣)처럼 강바람 속에 연(鳶)을 날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느덧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외국인에게 한몫 잡으려는 뱃사공들 덕분에 놓을뻔한 정신줄을 되찾았다. 사실 이쪽으로 걸어올 생각은 아니었다. 결국 화장터가 있는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 가트로 가야할 것이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갠지스에 온 것은 생(生)의 이유도 있지만 사(死)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도 사람들은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일까.
링가(남근像)와 요니(여근像)에 대한 숭배는 시바의 도시에서 익숙한 모습이다 |
마음의 준비가 되자 발길을 돌려 다시 다사수와메드로 향했다. 되돌아가는 사이 곳곳에서 링가(남근像)과 요니(여근像)를 발견하게 된다. 링가와 요니에 대한 숭배는 시바의 도시에서 익숙한 모습이다. 만 만디르(Man Mandir), 미르(Meer), 라리타(Lalita)를 거슬러 올라가며 갠지스 강물에 멱을 감는 인도인들을 눈여겨보았다. 멀리 화장터에서 시신이 타들어가고, 그 흔적이 멀리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데 머리끝까지 강물 속에 몸을 담그는 모습은 入水로 치자면 최고 난이도로 보였다. 강 위의 새들은 하늘을 빙빙 맴돌고 있었다.
화장터에서의 業
마침내 화장터가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조금이라도 화장터를 둘러본 뒤 숙소로 물러나기로 했다. 화장터로 다가가자 시신 두 구의 화장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붉은 화염 속에서 회색과 검정색으로 피어나는 연기는 마치 길쭉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화장 의례는 복잡하지 않았다. 시신을 운구해오면 강으로 옮긴 뒤 시신을 천으로 감싼 채 강물에 담갔다가 꺼냈다. 그리고 화장터로 옮겨 시신에 치장해놓은 물건들을 강물 속으로 던져넣은 뒤 쌓아놓은 장작 위에 시신을 올렸다. 의식이 거행되고 시신은 몇 시간에 걸쳐 서서히 태워졌다. 남은 재는 강물에 뿌린다. 궁핍해 장작이 모자라거나 젖은 장작을 쓰면 시체는 다 타지 못한 채 강길을 나선다고 들었다. 시신을 태운 뗏목은 때로 강 반대편에서 멈춰 섰고, 그 주변으로 짐승들이 모여들었다. 바라나시에서 길거리의 개들을 피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화장터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화염 속에 사그라져가는 시신의 윤곽에 익숙해지고, 진동하는 냄새에도 눈과 입과 코를 막지 않게 되었다. 좀 더 물러난 거리지만 화장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트의 위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언가 홀린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방정맞은 행동이었다. 순간 호주머니 속의 카메라를 꺼내 화장터의 풍경을 담고 싶어졌다. 도의적 책임 뿐 아니라 원래 화장터에서는 법적으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법이 아니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한 인도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은 아니었다. 바라나시의 인도인들 중에는 외국인이 사진을 찍는 순간을 노렸다가 돈을 뜯어내는 무리들도 있었다. 경찰한테 신고할까, 나한테 돈을 줄래 하는 식이었다. 비록 타오르는 시신에 직접 포커싱을 맞춘 게 아니었지만 화장터 풍경을 담으려 했던 행동만으로도 빌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인도인은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직감한 나는 서둘러 카메라에서 필름통을 꺼내 바닥에 내팽겨쳤다. 그나마 현명한 처신이었다. 다가오는 그를 향해 텅 빈 카메라를 보인 뒤 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는 갑자기 크게 울먹이며 주변의 인도인들을 부추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주변의 인도인들의 호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운이 좋은 셈이지만 책임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다 문제가 커지면 곤란했다. 그는 집요하게 나를 쫓아왔다. 팔을 낚아채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다시피 하고 나는 급히 가트를 떠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문득 머릿속에 사라스와티의 신상이 간절히 떠올랐다. 거의 전력질주를 하듯이 골목을 가로지는 사이 어느덧 주변이 어두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 어둠 때문이 아니라 다시 화장터를 가보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긴장 속에 집중했는지 얼마간 달리자 어둠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여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여신의 발 아래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누군가 추격해오지는 않았을까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에 일렁이는 골목을 한참동안 돌아보았다. 삶도 그렇듯이 여행도 다닐수록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엇이든지 익숙해졌을 때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하필이면 바라나시에서 말이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화장터에서 겪은 일은 시간이 지나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바라나시에서 남긴 業인 셈이다.
힌두교의 죽음 의례
힌두교도들은 죽음을 신성시한다. 윤회(輪廻)를 믿기에 그들에게 생과 사는 단절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관련된 의례 또한 무척 신성시된다. 화장(火葬)이란 일종의 정화와 통과 의례로 역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든 의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소멸되었지만 사자(死者)가 조상(祖上)이 되기까지 슈라다제(Sraddha祭)*를 마쳐야 한다. 이는 어딘지 우리에게도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 슈라다제가 끝나기 전까지 죽은 사람은 쁘레따(Preta)**의 상태에 머문다는 것이다. 일종의 구천을 헤매는 존재인 셈인데 쁘레따는 오직 슈라다제를 통해서 조상(祖上)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그 뒤에야 비로소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가 모두 안정된 상태가 된다는 얘기다.
*슈라다제(Sraddha祭)-슈라다제에 대한 해설은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김진영씨의 논문 ‘힌두 죽음의례의 신성화 구조와 기능: 베다 텍스트의 슈라다제를 중심으로(남아시아 연구 제19권 3호 2014)’를 참조하였다.
**쁘레따(Preta)-쁘레따(Preta)는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존재로 생과 사 사이의 인계(臨界)에 머문다.
슈라다제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째는 나바 슈라다스(Nava sraddhas)로 시신의 화장으로부터 시작해 10일 동안 경단인 삔다(Pinda)*를 바치는 것이다. 주검을 다루기에 ‘부정(不淨)한 슈라다제’라고도 하는데 이때 삔다는 쁘레따가 사후 세계를 여행할 미세한 신체를 구성하는 의미라고 한다. 다음으로 11일째부터 1년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슈라다제인 나바 미스라 슈라다스(Nava misra sraddhas)가 있는데 이는 ‘반쯤 부정한(또는 혼합) 슈라다제’로 특정 의식을 통해 죽은 자가 쁘레따의 상태에서 벗어나 여행할 힘을 얻게 하는 목적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빠르반나 슈라다스(Parvana sraddhas)가 남았는데 이는 12일째부터 시작해서 1년까지 이어지는 ‘순수한 슈라다제’로 사자(死者)가 조상(祖上)으로 옮겨가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인도는 세제(稅制)만 복잡한 게 아니다. 빠르반나 슈라다스(순수한 슈라다제)에서는 12일 째 의식이 가장 중요한데 죽은 자와 삼대 조상들에게 바친 삔다를 섞으면서 비로소 사자(死者)가 조상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삔다(Pinda)-삔다는 쌀과 참깨 등으로 만든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반열에 오른 조상들은 신격화된 위계 체제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계(地界), 조부는 공계(空界), 증조부는 천계(天界), 그리고 먼 조상은 초월계(超越界)에 각기 위치하는 것이다. 각 계의 조상들은 우주의 영역에서 산 자와 신들 사이의 중개자로 활동하며 가네샤(Ganesa)*의 지위를 받는 신군(神軍)이 되고, 친족들의 이익에 관여한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마저 일종의 중간계에 위치시켜 숭배하며 신격화한다니 무척 흥미진진한 얘기다. 이미 그렇게 다양한 신들을 모시면서도 말이다. 나는 하마터면 그 의식을 방해할 뻔한 셈이다.
*가네샤(Ganesa)-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인간(아기)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가 붙은 신이다. 원래 가네샤는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에 태어났는데 시바가 떠난 사이에 어머니인 파르바티가 목욕하는 것을 지키고 서 있다가 돌아온 아버지 시바마저 못알아보고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분노한 시바는 그의 목을 베어버리는데 당장 살려놓으라는 파르바티의 요구에 시바는 가까운 곳에 있던 코끼리의 목을 베어 가네샤의 목에 붙이게 된다. 가네샤는 주로 재산 등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져 상인들과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신이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인도
인도에 대해 이야기하면 바라나시는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메뉴다. 이곳을 경험하며 누군가 그 영험한 광경 속에 빠져들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일이다. 시각, 청각, 후각 등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험한 모습은 사실 그들에게 매우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꼭 어떤 실수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그 일상의 모습에 너무 도취되기만 한다면 아쉽다. 인도의 환상과 현실 사이, 바라나시를 끝으로 어서 빨리 신비롭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수 있다면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인도를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바라나시의 화장터 이후, 인도를 바라보는 내 시각은 다소 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바라나시가 영혼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도시로 남았겠지만 거꾸로 내게는 처음으로 그 신비의 장막이 열렸던 곳이다. 과거 속에만 있을 것 같던 인도도 변할 것은 변했다. 종교에 귀의하고 계급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군중심리에 따라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도 인도다. 갈등과 모순이 가득하고, 참지 못하고 수시로 불만을 터뜨리며, 정신적인 세계 만큼이나 물질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그런 모습이 좀 더 익숙한 현실의 모습으로 와 닿는다. 그러고 보면 예기치 못했던 인도의 모습을 보고 듣더라도 지나치게 놀라거나 당황할 일이 없다. 지나가는 객(客)의 입장이 아닌 실제 인도에 다가선 이들에게 더 필요한 관점이다.
노이다에서 싸움을 걸었던 그 독살스러운 인도인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직접 상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있는 외국인으로 보고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다만 곁에 있던 인도인 친구를 조용히 불러세웠다. 직접 대응하면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이다. 가급적 험한 동네는 혼자 들어가 볼 생각도 말고, 상대와 직접 맞서지 않는 요령이 필요하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