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忠武祠에 봉안되어 있는 이순신의 影幀. |
이순신과 不俱戴天(불구대천)의 惡緣(악연)을 쌓은 고니시의 動線(동선)이야말로 東洋3국의 무수한 生靈(생령)들의 피로써 지옥도를 만든 壬辰倭亂(임진왜란)의 핵심 현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歷史의 法廷(법정)에라도 세워야 할 것 아니겠는가.
< 被告(피고) 고니시, 너의 아비는 일찍이 약장수를 하다가 임진왜란의 主犯(주범)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눈에 들어 그 밑에서 財政(재정)을 담당했다. 너도 무역업을 하면서 때로는 유명짜한 해적 두목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등과 결탁했으니 적어도 해적의 동업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튼 너는 바다를 통해 닦은 기반으로 히데요시의 家臣(가신)이 되었고, 점차 신임받는 직속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또한 너는 이른바 戰國武士(전국무사)로선 색다르게 문자께나 익혔고, 「어거스틴」이란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1592년 4월13일(음력: 이하 임란 관련 일자 同一) 오후, 너는 침략군(15만 병)의 先鋒將(선봉장)인 제1군의 대장으로서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프로이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神父(신부)까지 종군시켰다. 너는 참으로 多重性格(다중성격)의 武將이었다.
너의 딸 「마리아」는 너의 副將(부장)이며 對馬島主 소오 요시토모(宗義智)의 아내였다. 요시토모 역시 세례명 「다리오」란 천주교 신자였으며, 왜란 직전에 弱冠(약관) 20세의 正使(정사) 자격으로 漢城에 들어와 너를 접대한 예조판서 李德馨(이덕형) 등에게 과대망상가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귀띔해 주기도 했다. 물론, 너와 네 사위는 對馬島의 對조선 무역의 독점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랬을 터이지만, 어떻든 네가 利文이 남지 않는 무익한 전쟁만은 가능한 한 회피하려 했음은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死易假道難
1592년 4월14일 오전, 너는 제1군(선봉부대) 1만8700명으로 釜山鎭城(부산진성)을 에워싼 다음에 첨사 鄭撥(정발)에게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는 北京(북경)으로 통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 길을 통과하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하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규율을 지켜 곡식 한 톨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할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한 데 대한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치졸한 문투였다. 너도 애시당초 정발이 너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4월14일 오전, 너는 반나절의 공격으로 釜山鎭城을 함락시켰다. 이어 너는 東萊城(동래성)으로 진격,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을 상대로 또다시 흥정을 벌이려 했다. 너의 수하 騎兵(기병) 하나가 성문 앞으로 다가와 깃발을 땅 위에 꽂았다.
戰則戰不戰則假我道(전즉전부전즉가아도)
「싸우려면 싸우자,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뜻이 아니더냐. 송상현은 즉시 깃발에다 다음 다섯 글자를 적어 네 앞으로 내던졌다.
死易假道難(사이가도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너는 4월15일 하루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송상현은 文官이었지만,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네 부하의 칼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래도 너는 용감한 城主에 대한 예우로 송상현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고 墓表(묘표)를 세워 주기는 했다.
확실히 너, 고니시는 상인 출신답게 흥정을 좋아했다. 너는 이 날 싸움에서 포로로 붙잡은 울산군수 李彦誠(이언성)을 풀어 주면서 일본군이 조선 조정과 교섭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지참토록 했다. 그러나 이언성은 뒤탈이 두려워 너의 서찰을 조정에 전하지 않았다.
고니시, 너는 4월24일 尙州(상주)전투에서 조선 조정에서 급파한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일격에 궤멸시키고 一路北上했다. 4월26일, 충주 彈琴臺(탄금대)에서는 背水陣(배수진)을 친 都巡邊使(도순변사) 申砬(신립)의 부대마저 궤멸시켰다. 신립은 그때까지 조선 제1의 장수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더냐.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너는 히데요시의 侍童(시동) 출신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애시당초 앙숙이었다. 탄금대 전투 다음 날, 너와 제2군 대장 가토오는 漢城 공략을 위한 진로를 놓고 협의했다. 그 자리에서 가토오는 네가 약장수 가문 출신인 것에 빚대어 너를 능멸했다. 지도에 「藥店」(약점)이란 지명이 보이자 일부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신은 이 길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다. 너는 『무사에게 있어 家風(가풍)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맞받기는 했다.
忠州에서 漢城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죽산-용인-서울 남대문에 이르는 左路, 그리고 여주-楊根(양근: 오늘의 양주)-서울 동대문의 右路였다.
너는 가토오에게 제비뽑기로 공격로를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가토오는 『아하! 과연 장사꾼다운 방법』이라고 다시 빈정거렸다. 발끈한 너는 가토오를 치려고 칼까지 뽑으려 했다. 副將들의 만류로 너는 분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너는 右路, 가토오는 左路로 진격하면서 漢城 제1번 入城(입성)을 다투었다. 5월3일, 네가 먼저 漢城에 입성했다. 참으로 임란의 初戰(초전)은 너의 독무대였다.
너는 평양성 공략에 앞서서도 또다시 너의 습관적 행태를 되풀이했다. 너는 李德馨(이덕형)을 협상상대로 指名(지명)하여 회담을 제의했다. 이덕형과 너의 부장 겐소(玄蘇)·야나기가와(柳川調信)가 대동강 한복판에 띄운 배 안에서 만났지만, 애시당초 타협이 無望한 회담이 아니었더냐.
6월18일, 평양성이 너에게 함락되고, 조선 국왕 宣祖는 압록강변 義州(의주)로 몽진했다. 너는 宣祖에게 교만과 조롱으로 가득찬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일본 水軍 10만이 또한 西海로 북상하여 오는 길이니 이제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그러나 너는 조선에 李舜臣이 있음을 아직 몰랐다. 너도 알게되다시피 일본 水軍은 한산해전(1592년 7월8일)에서 이순신 함대에게 대패한 후 대마도-부산 항로만 겨우 유지했다.
이순신의 활약에 놀란 히데요시는 대번에 水軍에 대해 海戰 금지령을 내렸지 않았더냐. 더욱이 이순신은 9월1일 일본 함대 450척이 집결한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 함선 130여 척을 격파했다. 히데요시의 水陸竝進戰略(수륙병진전략)이 빚나가고 만 것 아닌가.
겨울이 닥쳐오는데, 평양성에 入城한 너는 이제 군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들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조선 傳來(전래)의 淸野(청야)전술이 얼마나 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을 터이다. 군량의 현지조달은 불가능한데, 너를 위한 보급선이 西海-大東江의 물길로 올라올 가능성은 全無하지 않았더냐.
육상 兵站路(병참로)도 의병장들이 起兵하여 부산포- 漢城 간의 곳곳을 틀어막고 있었으니, 고니시 너는 이제 배고픈 거지부대의 대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그래도 너는 한동안 善戰(선전)했다. 明 구원군의 선발대로 祖承訓(조승훈)의 騎兵 5000명을 너는 평양성 전투에서 대파했다. 하지만 너는 군량 부족으로 더 이상 北上할 수 없었다. 너는 明의 병부상서 石星(석성)의 심복으로서 遊擊將軍(유격장군)이란 벼슬을 달고 조선에 파견된 책사 沈惟敬(심유경)과의 휴전협상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 고니시는 李如松(이여송)이 지휘한 明의 지원군(4만5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에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朝-明 연합군의 기습을 받은 너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때 만약 柳成龍(류성룡)의 건의대로 황해도의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면 너는 속절없이 포로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황해도의 육군은 너의 武名에 겁먹고 伏兵(복병)전술을 회피했다. 너의 敗軍은 배를 곯아 길가에 쓰러져 죽은 병사를 유기한 채 겨우 漢城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너는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에 의한 병참선 차단으로 병력 피해가 가장 큰 장수로 기록되었다. 1924년 일본 참모본부가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일본전사 조선역)에 의하면 1592년 4월13일 부산포 상륙 당시 1만8700명이던 너의 제1군 병력은 1593년 3월 현재 6626명으로 줄어들어 감소율 64.6%를 기록했다. 함경도 국경까지 침범했던 가토오 제2군(2만800명)도 의병봉기와 寒波(한파)로 고전하여 병력감소율이 40%에 달했지만, 너보다는 훨씬 적었다.
明·日 양군은 전쟁 계속이 불가능함을 알고, 1593년 초부터 講和(강화) 국면에 들어갔다. 양측 협상의 주역은 沈惟敬(심유경)과 너였다. 히데요시는 이 해 3월10일 서울 철수를 허락했다. 4월 중순까지 너와 심유경은 龍山에서 몇 차례 만나 강화회담을 벌였다.
5월1일, 히데요시는 너희 장수들에게 강화조건을 지시하는 동시에 진주성을 再공격하여 기어이 함락시키고 곧 복귀해서 남해안 연안에 축성할 것을 명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20∼29일)에서 너와 가토오,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린 왜병 10만 명은 농성했던 조선의 軍·官·民 6만여 명을 도륙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5∼11일)의 패배를 복수하여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라고 다그친 히데요시의 發狂(발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피의 광란은 너무나 참혹했다. 그런 네가 설사 告解聖事(고해성사)를 한다고 해서 너의 神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든, 이후 너희 침략군은 남해안 지역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심유경과 너는 히데요시의 강화조건을 조선은 물론 明의 조정에서도 받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다. 그것은 漢江 이남 4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明의 황녀를 일본으로 시집보낼 것, 對明무역의 再開를 허락할 것,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등이 아니더냐.
심유경과 너는 각각 본국의 지휘부를 기만하고 협상을 진전시켰다. 심유경은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는 것이라고 본국 조정에 허위 보고했다. 그러나 너희 둘의 사기극은 어찌 들통나지 않을 리 있었겠느냐.
1596년 9월, 明의 정사 楊方亨(양방형)과 부사 심유경이 오오사카성에 가서 히데요시에게 「너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勅書(칙서)를 내렸을 때 고니시 너의 가슴은 콩알만 했을 터이다. 너는 글을 모르는 히데요시를 기만하기 위해 통역을 맡은 승려에게 허위 번역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지 않았더냐.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안 히데요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만약 히데요시가 총애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의 목은 대번에 달아났을 터이다. 1597년 초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발발했으니 너는 반드시 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신임을 회복해야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