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구역에서 지리산을 가본 이라면, 섬진강을 가르는 역전 바로앞 다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 다리 이름이 구례교인데 지금의 다리는 1983년 세워졌군요.
그 이전의 다리 모습은 이랬습니다.
*출처: 구례소식지 173호
1983년 6월 24일에 세워졌다는데, 아쉽게도 흙탕물이라 섬징강의 본면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음 지도로 보니 다리 길이가 약 300m에 교각은 5개이니 60m당 한개이군요.
저는 1988년 여름에 구례구역에 내려 피아골로 들어갔으니 이 다리를 건넜군요.
정보가 없던 시절이라 구례구역의 '구'가 옛 구(舊)일 것 같은데 입 구(口)라 그 뜻이 무얼지
설왕설래 했던 것과 구례읍 시장을 들렀다가 피아골 숙소에는 밤에 도착한 게 기억이 아련하네요.
그 이전에 지리산 화엄사를 간 이들이 건넌 다리는 어떠했을까요?
바로 이렇습니다.
1937년 세워졌다고 하는 구례교 모습입니다. 교각이 22개인데요.
저 다리가 설마 6.25에서도 살아남고 1983년까지 있었을까요?
군경 토벌군의 진입로가 되었을 이 다리를 빨치산의 본향인 구례 빨치산들이 가만 두었을까요?
나무 위키에 구례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구례는 전라남도에서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이 다리는 제일 중요한 접근로가 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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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라이버러리 로 들어가봅니다.
1933년 5월 24일 전남에 '유수한 대교가 될' 구례교를 착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4년 12월에 276m 대교가 완성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교각은 1937년이 아니라 1934년이 되는군요.
'뒤로는 지리산의 험란함과 앞으로는 섬진강의 장류로 인해 구례는 마치 장벽에 쌓인듯,
허구한 세월에 내왕객과 차마 운행에 크나큰 불편을 느끼어 왔었다.'
그때 초도식(初渡式) 장면입니다.
맨 오른쪽이 일본기 두개가 양쪽에서 휘날리는데요.
위에서 본 교각과 거의 같은 숫자로 보이니, 이때 다리가 6.25를 고스란히 이겨냈다는 거.
빨치산들이 화엄사나 해인사 등등의 사찰도 불태우지 않고 퇴각을 한 것도 염두에 두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모튼 일제이후 구례를 통해 지리산을 찾은 이들은 1983년까지 모두가 이 다리를 건넜다는 거.
변화 무쌍한 근현대사 속에서도 이 게 지리산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다만 제가 알기로 빨치산은 걸코 화엄사나 해인사를 불태울수 없는 정치적 신념을 지닌 집단입니다.
오히려 빨치산을 잡겠다고 600년이 넘은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렁을 내린 집단은 이승만 정부 한국군입니다
1951년 9월 18일 조상들의 유장한 유산을 차마 폭격할수 없었던 김영환대령은 해인사 폭격명령을 거부하여 처형 직전까지 가는 처벌을 받지만 지금은 인류의 유네스코 유산을 지켜낸 영웅이 되셨지요.
네 그런걸 보면 역사는 단선적으로 이해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등산박물관(김진덕) 주류 역사라는게 결국 승자의 목소리 아닐까요? 특히 한국 근대사는 이데올로기로 글절되어 있구요.
우리 세대가 받았던 제도 교육이 왜곡시킨 이면을 볼수 있어야
좋은 등반사도 가능하지않을까요.
@압록(김세옥) 맞습니다.. 지금 선배님이 하시고 있는 '여성 등산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하고 싶은데요.~
즐겁게 감상합니다.
가을철엔 산악회 행사도 많아서 바쁘실 것 같네요.
산서회 월례모임때 뵙겠습니다~
오밤중에만 입산하여...전 보질 못했네요~~~ㅎ
^^ 지리산 언제 가보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