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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919 |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베르사유 조약, 5.4 운동, 만국사회당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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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산미 증식 계획, 회사령 철폐, 간도 참변 |
국제 연맹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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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조선어 연구회 성립, 자유시 참변 |
중국 공산당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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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물산 장려 운동(평양), 민립 대학 설립 운동(서울) |
이탈리아, 파시스트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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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
조선 혁명 선언, 암태도 소작 쟁의, 국민 대표 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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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조선 공산당 성립, 치안 유지법 공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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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6.10 만세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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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신간회 성립 |
중국, 난징에 국민 정부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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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원산 노동자 총파업 |
세계 경제 공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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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조선어 학회 성립, 한인 애국단 성립 |
만주 사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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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
농촌 진흥 운동 |
독일, 나치 정권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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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민족 혁명당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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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중.일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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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국가 총동원령, 조선 의용대 결성 |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1939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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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한국 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건국 강령 발표 |
태평양 전쟁 발발(1941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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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표는 주제와 관련된 주요 사실을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한 월일까지 최대한 자세히 작성합니다.
우선순위 |
중요사실 |
선정이유 | |
1 |
3.1운동 이후 |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 |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주의와의 연결이었다.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주장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1921년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고려공산당, 1925년 조선공산당 등이 창당하게 돼 조선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2 |
1927 |
신간회의 성립 |
신간회는 1928년 말에는 141개의 지회, 회원 3만9000명에 이르는 대중적 정치 사회 단체로 성장하였다. 순회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 각지를 돌며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타협적 정치 운동 배격,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을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 각 분야의 민중 투쟁을 지도하였다. |
3 |
1926 |
6.10 만세 운동 |
3.1 운동 이후 국내 민족 운동에서 선봉대의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민족 차별 중지,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동맹 휴학과 같은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 공산당은 천도교계, 학생 단체와 함께 안산일에 맞춰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천도교 측은 격문을 인쇄하기로 하였으나 경찰에 발각되어 압수되었고, 조선 공산당 간부들도 체포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뚫고 예정대로 6월 10일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
4 |
1929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민족 차별에 분노한 광주 지역 학생들이 연대하여 11월 3일 대규모 가두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각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중심으로 이를 반일 시위로 확대․발전시켰다. 광주의 학생 봉기 소식을 들은 서울의 조선 청년 총동맹은 전국의 청년 운동 단체, 학생 단체와 연락하여 전국의 학생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12월 초부터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주요 지방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신간회와 학생 단체들이 이 사건의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 노동자들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한편, 신간회에서는 학생 시위를 전국적인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일제가 신간회 간부들을 대거 검거함으로써 중단되었다. |
5 |
3.1 운동 이후 |
청년 운동 |
3.1 운동이후 제한적이나마 집회·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자 각종 사회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청년회였다. 이들 청년회는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을 개최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은 이들 사이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
발표 주제 : 신간회는 어떻게 해소되었는가?
주제 소개 : 민중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최대 규모의 반일 사회 운동 단체인 신간회가 왜 창단되었고,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를 통해 공동 삶의 원리를 탐구하려 한다.
1. 새호운 사상(사회주의)의 보급 : 3.1 운동이후 제한적이나마 집회·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자 각종 사회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청년회였다. 이들 청년회는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을 개최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 1920년대 초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은 청년, 지식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그 중 청년회는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선전하는 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각인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이 점점 퍼지면서 독립 운동에도 사회주의 계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1925년에는 조선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고 탄생했으며, 이들은 6.10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탄압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2. 6.10 만세 운동 : 3.1 운동 이후 국내 민족 운동에서 선봉대의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별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연합 단체를 만들었으며, ‘민족 차별 중지,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며 수업거부, 동맹 휴학과 같은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 공산당은 천도교계, 학생 단체(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함께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천도교 측에서 격문을 인쇄하기로 하였으나 6월 7일 경찰에 발각되어 압수되었고, 조선 공산당 간부들도 체포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뚫고 예정대로 6월 10일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6.10 만세 운동은 비록 널리 확산되지는 못하였으나 시위의 준비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대함으로써 민족 유일 당을 결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 신간회의 결성 : 1920년대 중반 들어 국내외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타협적 민족주의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최린과 이광수 등은 일제에 맞서기 보다는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다음 자치권을 따내서 실력을 기르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사회주의 계열의 정우회는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1927년에 민족주의자중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민족단일조직으로서의 신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문화정치를 표방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한국 민족운동의 내막을 손쉽게 파악하려는 의도로 신간회를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신간회는 비록 합법적인 기관이기는 하지만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를 배격하는 극히 투쟁적인 강령을 내세웠다. 신간회는 1928년 말에는 141개의 지회, 회원 4만 명에 이르는 대중적 정치 사회 단체로 성장하였다. 순회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 각지를 돌며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타협적 정치 운동 배격,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을 비판하였다.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 각 분야의 민중 투쟁을 지도하였으며, 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을 지원하는 등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을 모두 드러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민중 대회 시도는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게 된다.
4.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함으로서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존재했는데, 1929년 11월 3일 공산주의 삐라가 가두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목포의 학생은 적기를 흔들면서 공산주의 노래를 불렀다. 서울에서도 학생조직이 공산주의 찬가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신간회 내 지도자격 공산주의자들은 학생 및 공산당원 용의자에게 가해진 잔학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신간회 지부 조직을 총동원하여 대중 집회를 지휘하였다. 결국 1930년 신간회의 지도격인 공산주의자들은 폭동을 선동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검거된다. 그 후 신간회의 공산주의 세력은 몰락하고 지방의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5. 신간회의 해소 : 민중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최대 규모의 반일 사회 운동 단체였던 신간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자 초기 강령과 달리 온건 ․ 합법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인한 노동, 농민 투쟁 격화로 코민테른도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 대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결국, 1931년 전체 대회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해소를 결정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은 혁명적 노동 ․ 농민 조합을 결성하여 비합법적 민중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신간회의 해소에는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의 의견차가 존재했다고 보인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사회주의 노선은 노동, 농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신간회 중 지방의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1930년 이후로 새로 등장한 민족주의 노선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천도교 신파와 협력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6. 공동 삶의 원리 : 신간회의 해소와 공산주의자들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는 공동 삶의 원리는 2가지로 그 중 하나는 “주체성을 가지자”이다. 신간회의 해소는 우리 민족 운동 상에 큰 과오였다. 신간회의 해소를 당시 언론에서 살펴보면 『조선일보』에서는 공산주의측이 국제연장주의에 맹종한 탓이라 하였다. 즉 민족적 고려 없이 국제기구인 코민테른의 정책에 추종했다는 것이다. 신간회에서 공산주의가 해소를 주장한 직접적인 원인은 1928년 코민테른에서 신간회가 개량주의화되었다고 비판한 것을 성급하게 받아들인 한국공산주의자들의 해소 추진에 있었다. 코민테른이 국제 조직이라 하여도 실은 소련공산당이었고, 코민테른의 지시는 소련공산당의 지시였을 뿐인데, 그것을 과민하게 받아들여 맹종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최대 규모 반일 사회 운동 단체였던 신간회를 해소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1929년에 조선공산당도 해체된 상태였고, 1931년에 신간회도 해소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모이지 못하고 지역적인 활동에만 머무르다가 8.15광복 이후 소련의 휘하에 들어가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주체성이 없이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만을 고려하다가 우리의 본모습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주체성이 바로 서는 것이다. 자신의 주체성이 바로 섰을 때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공동 삶의 원리는 “집중”이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의견 차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 해방’이라는 더 큰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함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에 힘을 분산시킴으로서 결국 신간회의 해소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준 셈이다. 우리들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목표로 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다른 것에 힘을 소진하다가는 성공할 수 없음을 신간회의 해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댓글 * 양종원 :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보아도 주제를 다시 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제가 새내기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보다 중요한 주제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원이가 제시한 공동 삶의 원리에 구체성과 실제성이 결여된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이라는 주제는 15장에서 다루는 민족 운동의 큰 갈래인 학생운동과 신간회를 모두 다루기 위해 잡은 주제였습니다. 두 갈래의 운동을 어울러서 설명하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을 그 연결고리로 하여 주제를 선정하여 보았습니다. 이번 발표 주제는 사회주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로 민족 운동을 바라보기 위해 잡은 것으로 이러한 내용들은 충분히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주제로 잡아보았습니다.
이번 발표에서 사실상 다루는 주제는 학생 운동과 신간회이고 바라보는 시선을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으로 다루어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느끼신다면 주제를 수정하겠습니다.
* 양종원 : 다시 생각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단순한 주제가 아니니까요.
수정하였습니다.
* 양종원 : 주제를 좁히고 구체적 사실로 제한한 것은 바람직합니다만, 제목을 좀더 다듬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제목을 다듬어 보았습니다.
* 양종원 : '신간회는 어떻게 해소되었는가?'라는 제목은 구체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좋습니다만, 내용 구성과 제시한 삶의 원리가 제목에 못미쳐 아쉽습니다. 1) 제목를 다듬어 보았습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발표 팁> [민족과역사] 발표에서는 주제로 잡은 역사적 사실의 의의나 의미를 먼저 다루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입니다.
* 양종원 : '신간회는 어떻게 활동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는 공동삶의 원리를 명료히 드러내기 어렵겠습니다. 좀 더 생각하기 바랍니다.
종원 학우는 신간회의 해소를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한 것 같았으나 그것이 잘 전달되지 못 해 아쉬운 발표였습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통합하여 만들었습니다. 혁명가 집단이고 타협을 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이 타협을 시도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시대가 힘들고 어려운 시대였는지를 또 얼마나 독립에 대해 간절한 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타협에 신중하지 못 했습니다. 이데올로기 차이와 격차를 이해하고 해소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성급하게 타협했기 때문에 결국 신간회는 더 이어가지 못 하고 해소되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나 결혼을 힐 때는 남녀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줄여나가는 이해심이 필요합니다.
* 김시목 : 쓴 글, 다시 퇴고하세요.
수정했습니다.
정치적 이념이 다른 좌우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신간회는 큰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신간회는 조국의 해방이라는 큰 목표에 다가가지 못하고 해소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신간회의 해소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서로 이념의 차이를 넘어선 완전한 화합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보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생활', '직장생활', '조 모임 활동' 등 다양한 사람이 함께 하는 단체가 목표를 이루려면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맞춰나가야 한다.
우리 민족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였던 신간회는 해소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신간회 해소의 원인을 파악하고, 민족이 화합한다면 우리 역사에 또 다른 신간회가 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 윤연승 : 댓글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완하세요.
수정했습니다.
종원 학우가 발표 주제를 정하는 과정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는 것에 수고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신간회를 통해 당시 처했던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아독존의 공산주의가 민족주의와 합작을 할 만큼 당시의 현실은 너무나 어두웠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바꾸려는 신간회라는 노력이 발전적인 해체로 끝난 것이 아쉽습니다. 만약 신간회가 계몽단계에서 해체되지 않고 더욱 직접적인 활동을 했다면 획기적인 역사로 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던 신간회가 해소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의 가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한발씩 양보했다면 신간회는 그렇게 쉽게 해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부족했습니다.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차근한 과정을 밟았다면 신간회는 아쉬운 역사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도 삶을 살아갈 때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서두르지 않는 여유를 가진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하승연 : 1)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던 신간회가 해소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각자의 가치만을 추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 문장을 좀 더 다듬으세요.
수정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좌우가 합쳐져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민족해방이라는 더 큰 가치에 집중하고 같이 힘썼다면 독립은 생각보다 빨리 왔을 것입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또는 추구하는 가치는 같지만 이루는 방법이 다른 것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것만이 옳다고 믿는 것은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더 큰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하고 해체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포기와 배려,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수업은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살짝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신간회의 결성 대한 교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신간회가 단순히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동등한 결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간회는 과거와 완전한 결별을 꾀하는 혁명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뛰어난 조직력과 리더십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신간회가 해체될 때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 없이 자신들만의 조직을 만들어 신간회를 이어갈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능력의 부재가 곧 조직의 해체를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간회의 결성에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혁명을 빨리 이룩하기 위해 합작이라는 쉬운 길을 택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거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체성을 가지고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간회는 민족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될 것으로 우리의 역사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간회의 해소에 관해서는 책에 잘 다뤄지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종원 학우의 발표 주제는 아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잘 다뤄지지 않았던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 줌으로써 이에 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또한 공동 삶의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발표의 공동 삶의 원리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체성을 가지자'라는 삶의 원리는 저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집중'이라는 삶의 원리는 집중하지 못 했던 저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준 좋은 원리였습니
다. 그리고 신간회가 모든 것을 '집중'하였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하게 만든 좋은 발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장이 '민족운동'인 만큼 종원 학우가 '협동'이나 '화합'에 대하여 다뤘다면 좀 더 좋은 발표가 되었을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협동'과 '화합'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협동'과 '화합'에 대해 다뤘으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발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신간회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중에서도 사람간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줍니다. 관계를 시작하고 나서 또한 중요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는 가입니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간회의 구성원인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서로의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사상을 이해하고 협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신간회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이데올로기를 극복한 단체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소와 해체를 구별하여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에 입장에서 보면 해소이고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해체라는 사실도 강의시간을 통해 알았습니다. 비슷한 단어라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해방을 목적으로 잡았고, 공산주의는 민족의 해방을 넘어서 혁명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눈앞에 처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조직을 결성하였습니다.
이 시간 전에 신간회를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합친 조직이라면 끝까지 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민테른이라던지 공산주의의 자세한 생각을 알고 나니 저의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이데올로기처럼 신중한 생각으로 다뤄야 할 부분이 바로 사람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1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도 계속 되어 물산장려운동, 6.10 만세운동 등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 3.1운동에 많은 친구와 부모님과 친척들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운동이 끊이지 않았을까요? 또 다시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될 텐데 말입니다.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우리들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우리들의 나라를 안겨주기 위해 민족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현재가 비록 잘못 된 길로 간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바른 길로 가려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