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혜원 시인/ 짧은시 모음
♠가로등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눈동자만 남았을까
♠해바라기
해바라기 목덜미는
누가 간지럽혔기에
기분 좋게 웃고 있을까
♠버섯
차갑고 쌀쌀한 세상
비맞고 살기 싫어
우산부터 쓰고 나오는구나
♠강아지풀
얼마나 반가웠으면
뛰쳐나가고 꼬리만 남아
흔들거리고 있을까
♠나무
나무는 말이 없다
한 그루 자체가
커다란 외침이다
♠잡풀
함부로 무시마라
산과 들 빈땅의
주인이 바로 나다
♠ 계단
가난한 사람들
힘들고 지쳐
오르내리는 길
♠바닷게
똑바로 가라고
소리질러도
못들은 척 옆으로 도망친다
♠귓구멍
귓구멍이 깊어
네가하는 말
다 들을 수 있다
♠싸움
치고 받고 싸워야
허기진 욕설과
상처만 남는다
♠대화
큰 소리 치지마라
나직하게 말해도
잘 들을 수 있다
♠고층빌딩
하루 종일 모가지 길게
빼놓고 서있으니
힘들지 않을까
♠노인정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입으로
과거를 낚고 있다
♠벽시계
쉼없이 열두개
숫자 맴돌며
목숨 갉아먹는 소리 낸다
♠사랑의 호수
풍덩 빠져버려도
건져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땅콩
사이좋은 연인
한 집에서 꼭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콩나물 통
콩들이 고개 쳐들고
크게 소리 지르는데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새벽시장
살기 싫거든
새벽시장 가라
참 열심히 산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당신은 당신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산다면
무슨 사랑인가
♠교도소
들킨 도둑 들어오고
안 들킨 도둑 버젓이 살아간다
♠계란
스스로 깨고 나와
장닭이 되어야
새벽을 울린다
♠성냥
평생에
불 한번 딱 붙이려고
사각의 감옥에 갇혀 있다
♠기도 1
죄와 잘못을 드리고
구원과 축복을
선물로 받는다
♠기도 2
나를 버리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하늘의 음성을 듣는다
♠고목
오랜 세월
모진 바람도 견딘
당당함이 살아있다
♠고민
마음의 골목에
쓸데없는 생각이
돌아다닌다
♠고통
이겨내면 이겨낼수록
흐르는 눈물이
기분 좋았다
♠그때
우리
왜 사랑하지 못했을까
서로 알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