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길 한강(3)
(서빙고역∼마포구청역, 2017년3월22일)
瓦也 정유순
서빙고역에서 지하통로를 따라 이촌동 아파트단지 입구로 하여 조금 복잡한 길을 찾아 강변으로 나온다. 처음 오는 사람은 헷갈릴 수 있으나 이렇게라도 한강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게 퍽 다행스런 일이다. 이촌동은 여름에 장마가 지면 한강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홍수를 피해 강안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촌동(移村洞)이라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촌동(二村洞)으로 뜻을 달리하여 표기하게 되었다.
<서빙고역-네이버 캡쳐>
강변 한강공원으로 나오면 동작대교가 바로 눈앞이다. 1984년 11월에 개통된 동작대교(銅雀大橋)는 용산구 이촌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는 한강 11번 째 대교이며, 도로교와 지하철4호선 전철교의 복합교량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동작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교량이름을 동작대교라고 한다. 동작대교의 특이한 점은 남단이나 북단이 직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기존의 도로에 곡선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남단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막혀 있고, 북단은 미군기지에 막혀 있다.
<동작대교와 관악산>
동작대교에서 이촌동 북단으로 건너오면 좌측으로 초고층아파트가 보인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서울특별시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 정책에 따라 재건축된 한강변의 유일한 초고층(최고 56층) 재개발 아파트이다. 보통 재개발 하면 세대수를 늘려 기존세대의 추가 분담금을 줄이는 방식을 택하는데, 2015년 8월 1일부터 입주가 시작된 래미안첼리투스 아파트는 기존 세대수(460세대) 그대로 일대일 재건축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추진하여 성공한 사례라고 한다.
<동부이촌동 래미안첼리투스 아파트>
한강의 대표적인 천연유수지(遊水池)였던 이촌동 하천부지는 한강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많은 휴식을 제공한다. 미루나무 가로수 길이 봄바람 맞으러 가던 고향냄새가 물씬 나고, 가지가 늘어진 수양버들과 파란보리가 고향의 봄을 불러온다. 유수지는 물이 흐르다가 잠시 쉬어 가는 곳으로 홍수를 조절하던 곳이다. 옛날 서울 한강의 대표적인 유수지는 잠실, 압구정, 반포, 이촌, 여의도 샛강 등이며, 경기도 일산도 한강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숨을 고르던 곳이었다.
<미루나무 가로수 길>
<물오른 수양버들>
<갈대 이삭도 봄바람에 살랑살랑>
<보리 밭>
한강나루터도 늦은 기지개를 펴고 조선 정조(正祖)가 화성행차 때 배다리[船橋]를 띄웠던 자리 부근에는 한강의 최초의 대교인 한강대교가 떡 버틴다. 한강대교는 용산구 이촌동에서 동작구 노량진을 잇는 교량으로 한강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人道橋)로 1917년 10월에 첫 준공하였다.
<한강대교와 노량진수원지 아파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다리 중간부분이 대부분 유실되었다가 1929년 9월에는 노들섬∼용산부분이 개통되었고, 1937년 5월에 노들섬∼노량진부분이 다시 개통되었다. 당시 주관자는 조선총독부 한국인 직원이었던 최경열(崔景烈)이란 사람이고, 길이 1,036m로 총 공사비 250만원에 연인원 28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대교와 노들섬>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적군이 밀려오자 당시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야반도주하였고,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사람은 명령을 내려 한강다리를 폭파해 버렸다. 그래서 적군에 밀려 철수하려던 국군과 피난민들의 퇴로가 차단되어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다. 이는 우리의 전사(戰史)에 큰 오점(汚點)을 남겼으며 국민의 지탄을 받았지만 당시 명령을 받고 폭파한 육군 공병감 최창식(崔昌植)에게만 책임을 물어 총살하였다.
<한강대교 북단>
제1한강교로도 불렸던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등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도심이 발달하고 교통량의 증가로 1979년 4차선 교량을 8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시작하여 1981년 12월에 준공하여 쌍둥이다리가 되었고, 한강인도교라는 이름도 한강대교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한강도하체험장>
한강대교의 중간에 있는 중지도(지금은 노들섬)를 중심으로 백사장이 잘 발달되어 여름에는 서울시민들의 수영장이었고, 겨울에 얼음이 꽁꽁 얼면 스케이트와 썰매를 즐기던 휴식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는 당시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당 후보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 6∼1956. 5)가 30만 군중 앞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며 포효(咆哮)를 하던 곳이다. 해공선생은 불행하게도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고 선거일 전에 호남선 열차 안에서 돌연사하고 만다. 이때 나온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은 공전의 인기곡이 되었다.
<한강대교와 노들섬>
한강대교를 지나면 바로 한강철교가 나온다. 한강철교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놓여 진 다리이다. 용산역과 노량진역을 이어주는 한강철교(A)는 1900년 7월에 최초 준공되었으며, 지금은 교량이 4개(A·B·C·D)선으로 이루어 졌다. B선은 1912년 9월에, C선은 1944년 6월에, D선은 1995년에 건설하였으며, 지금의 용도는 A선은 경인선과 직통전철, B선은 화물열차, C선은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의 철도, D선은 수원행 인천행 전철이 사용하고 있다.
<한강철교와 여의도빌딩 숲>
한강철교 다음에는 새남터가 있다. 새남터는 조선시대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국사범(國事犯)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1456년(세조2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된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의 묘역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에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곳으로, 1956년 천주교도 순교자기념탑이 세워졌고, 1983년에는 지하1층 지상3층 종탑3층으로 순 한국식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새남터 순교 성지>
<새남터 성당>
<새남터의 북소리>를 뒤로하고 앞으로 조금 나오면 원효대교가 나온다. 원효대교는 용산구 원효로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1,470m의 길이로 민간자본에 의해 1981년도에 건설된 국내최초의 디비닥공법 교량이다. 디비닥공법은 콘크리트 받침대 없이 두 교각에서 콘크리트를 쳐 나가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교량 상판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원효대교와 강변북로>
<원효대교>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 면적 2.9㎢(약87만평)이다. 영등포에서 샛강 건너에 있는 모래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일제가 1916년 9월에 이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하였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등 독립투사 등이 이곳을 통해 개별 귀국하였다. 1967년에는 충남 청양의 구봉광산 매몰사고로 16일간 갇혀 있던 광부 양창선도 구조되어 헬기로 여의도공항으로 후송되었다.
<여의도와 원효대교 부근 철새들>
1968년 여의도 윤중제(輪中堤)가 축조되면서 여의도비행장은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의 여의도로 변신하기 시작하여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가로 질러 마포로 연결되는 마포대교(1970년 5월), 원효대교(1981년 10월), 서강대교(1999년)가 차례로 개통되었다. 그리고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 KBS와 MBC 등 언론기관, 증권회사 등 각종 금융관계사, 초대형 순복음교회, 63빌딩, 엘지(LG)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고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다.
<강변북로 상판 아래로 본 여의도 빌딩 숲>
<서강대교>
여의도로 국회의사당이 이전하면서 마포지역이 여의도 다음으로 정치인들의 활동장이 되었다. 마포는 우리말 삼개라는 포구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오는 산물의 하역과 보관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오강(五江,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 중의 하나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농산물을 저장하고, 서해에서 들어오는 새우·조기 등의 수산물의 집산지로 큰 역할을 하였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으로 인하여 조강(祖江, 한강하구)의 수운이 폐쇄됨에 따라 옛날의 기능은 상실되어 한때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라는 가요가 소외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나, 여의도가 개발되고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서울의 서부거점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마포타워>
여의도와 마포 사이에는 밤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고려 때에는 귀향 보내던 섬이었고, 1394년에는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하여 살았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도선하역 등이 성행 하였다고 한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철새와 수변생물들의 낙원이 되었다.
<밤섬과 국회의사당>
<서강대교 교각과 밤섬>
마포구 당인리에는 우리나라 전기산업의 산 역사인 당인리화력발전소(현 서울화력)가 있다. 한강에 황포돛배가 오가던 시절인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되었다. 한때는 학교 입학시험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었지만 공기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연료와 시설의 대폭개선으로 발전 시 발생하는 증기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마포 반포지역 일대 5만여 세대에 온수와 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앞으로 발전시설을 지하화 하고, 현재의 지상 부지에는 시민의 쉼터인 공원과 문화창작발전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화력(구 당인리화력)>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를 지나면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원래 이곳은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 모양이 누에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여 잠두봉 또는 용두봉으로 불리었으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한데서 연유되었다. 한국천주교에서는 순교 100주년인 1966년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교정신을 헌양하였다. 순교자기념성당과 박물관, 순교성인 28위를 모신 경당(經堂, 지하묘소) 등 셋으로 구분하여 순교자 기념공원을 꾸몄다.
<절두산 성지>
양화대교는 두 차례에 걸쳐서 건설되었는데, 제2한강교로 불리는 구교는 한강대교와 광진교 다음으로 건설된 한강위의 세 번째 다리이다. 특히 이 다리는 해방 후 우리 기술진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한강다리로 폭 18m, 길이 1,053m로 1965년 1월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김포공항 확장과 경인고속도로 개통으로 교통량이 계속 늘어나 8차선으로 확장하여 1989년 2월에 신교가 개통되어 이름도 양화대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리 중간에 있는 선유도(仙遊島)는 과거 정수장 건물을 자연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여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재생생태공원이 있다.
<양화대교>
고수부지에 마련된 한강시민공원에는 농구장, 축구장, 테니스장 등 체육시설과 시민들이 여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따라 가면 성산대교 남단이 나오고, 남단을 따라 우측으로 돌아서면 홍제천이 나온다. 1980년 6월에 준공된 성산대교는 마포구 망원동과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다리로 1,140m의 길이에 폭 27m이다. 이 다리는 서울 서부지역의 교통 분산에 효과적이었고, 한강의 12번 째 다리로 성수대교와 같은 트러스트공법으로 세워졌다.
<성산대교>
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하류에서 불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방하천(2급)이다. 하천 본류에는 모래가 많아 물이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모래내>라고도 부른다. 하천 위로는 내부순환도로가 가설되어 교통적체 해소에 한몫을 하지만, 하천의 물을 마르게 한다는 오해도 많이 받는다.
<홍제천과 불광천 합류지점>
<불광천>
<홍제천 징검다리>
<홍제천과 내부순환고가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