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다니는 동네 절 카페에 올린 글이라 우리 지홍 스님의 법명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무척 조심스런 부분이 있어 망설이며 몇자 적어 봅니다.
법우님들도 함께 하시여 더불어 고뇌하며, 무상한 우리네 인생사에 대해 다시 한번 더
뒤 돌아 생각해 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 암사동에는 내가 무척이나 존경하고 떠 받드는 한 덕망 높으신 비구니 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정향사라는 자그만 암자가 있다.
울 엄니가 병환으로 고초를 겪으시다 가망이 희박한 다리 골절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온전한 모습으로 부처님께로 돌아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49제 까지 지내 주신 인연으로
지금까지 귀찮아 하지 않으실 정도로만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곤 하는데 지난 해
부처님 오신 날 며칠 전에도 어김없이 찾아 뵈었다.
스님께선 워낙이 완벽한 성품의 소유자이신지라 큰 행사를 앞두고도 별반 할 일이
없다.신도 중 90 %가 강남 거주 보살들이어서 꽤나 행세하면서 사는 듯 한데 절집 일을
하면선 조금도 티를 내는 법이 없다.
사실 부처님 계신 법당에서 몸과 마음으로 운력을 하며 짓는 공덕은 엄청난 일이란 걸
약은 강남 아줌마들이 모를 리가 없는 지라, 넘이 일을 한다. 저 보살은 봉사하러 나왔
느니 아니 나왔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속으론 다른 신도들이
제발 봉사하러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눈치다.
다행히도 법당 천정에 연등을 다는 일은 높은 사다리를 타야 하므로 온전히 내 몫으로
늘 남아 있어서 한숨을 돌려 본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부리나케 사다리를 오르 내리며 등 설치를 하는데 혼자서 하는
일이 힘에 겨워 보였던지 한 젊은 보살님이 밑에서 등을 집어 올려 주는 일을 거들어 준다.
처음 만나 사이인데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협동하여 열심히 일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던지 옆으로 지나 가시던 한 스님께서 이 학생이
아마 돌처사님 후배될꺼구먼요 하신다.
그제서야 황급히 사다리에서 내려 와서 족보를 캐 보니 정확히 30년 후배가 된다.
동국대 불교학과 4학년이라면서 반가이 인사를 한다.
텁수룩한 단발머리와 눈썹 하나 그리지 않은 해맑은 얼굴에 아래 위로 절복을 입은 수수한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다. 박처럼 맑은 눈동자가 아무래도 예사로운 학생은 아닌 듯 하는
순간, 이 박꽃 보살 뒤로 대가리를 찌지고 뽂고 귀에 훌라 후프 처럼 커다란 이어링을 단
내 딸년 삐선이가 엄청난 대조를 이루면서 실루엣처럼 가물 거린다.
둘은 나이가 갑장이다.
부처님 오신 날 정신없이 퍼 질러 자고 있는 딸년에게 오랜만에 큰소리를 냈다.
불모가 되겠다고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하는 네가 일년 중 딱 하루 밖에 없는 부처님
오신 날 절엘 안 간다는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면서 심하게 다그쳤다.
정향사에 도착할 때 까지 옆자리에서 의자를 한껏 제키고 삐딱한 모습으로 드러 누워선 성질
꽤나 났는지 아랫 입술이 툭 튀어 나온 노랑부리 저어새 주둥이처럼 되어선 한마디도 말이
없다.
도로에 차를 주차하고 토마토 하우스를 가로 질러 정향사가 보이는 골목길로 접어 드니
박꽃 보살님이 강릉 보살님과 함께 절 대문 앞에 평상을 놓곤 그 위에 틀고 앉아서 오시는
신도들에게 선물이다 떡이다를 나누어 주면서 원 하시는 분들께 공양미도 팔고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삐선이를 박꽃 보살님에게 소개 시켜 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 하면 반갑기도 하여 서로의 이름도 묻고 무슨 과에 다니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수다를 떨거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 갔다.
그 날의 만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화성인과 토성인이 우주 정거장에 있는 어느 휴계소에서
얼굴만 쳐다 보고 스쳐 지나 갔다고 하면 틀림 없을 터이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난 얼마 후 스님을 뵙는 자리가 있어서 여러 말씀을
나누다가 아무래도 예사로운 학생 같지 않다면서 박꽃 보살님 얘기를 꺼냈다.
스님 ; 부모님들이 여러 번 찾아 와서 나보고 딸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해서 본인은 아무래도
그러하니 덕 높으신 스님을 찾아 가라고 했습니다.
돌삐 ; 그런 훌륭한 부모님이 계셔서 저런 따님이 나오셨군요.
스님 ; 본인은 영국 유학을 마치고 출가를 작정한다고 하는데 부모님들이 우선 출가를 해서
기본적인 스님 교육을 마치고 나서도 더 많은 공부를 위한 유학도 가능하니 기왕지사
출가를 작심했으면 똑바로 한길 만을 걸어야 한다고 한사코 나를 찾아 와선 졸르고
있답니다.
돌삐 ;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부럽기도 하구요.
스님 ; 이제 우리 절에 중(?)들 버글 버글 거리게 생겼네요.
올 해도 부처님 오신 날이 어김없이 다가 오는 지라 행사 며칠 전에 등도 달겸 해서 스님을
찾아 뵈었다. 만사를 꼼꼼하게 챙기시는 분인지라 섭섭하게도 여느 때처럼 내가 할 일이 별반
없다. 주시는 차를 맛있게 마시며 제 후배 박꽃 보살님은 어떻게 되었냐며 근황을 물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건 신도분이 여러 얘기를 하시는 모양이다.
귀찮아 하시는 모습도 없이 연신 응대를 하시던 스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경제 사정도 어려
운데 너무 무리해서 등값을 많이 내지 말라신다. 계속 통화를 원하니 스님께선
기다리는 내게 약간은 민망하셨던지 내 쪽을 흘깃 쳐다 보시면서
49제 까지 다 지내 드렸습니다. 하신다.
우리 엄니가 노환으로 고생을 하시다 급기야는 낙상을 하셔서 오른쪽 허벅지 부분에 골상을
입으셨다. 아버님과 형님을 모시고 주치의 앞에서 수술에 관한 서류에 서명을 했다.
저런 상태로 누워 계시면 한달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허니 위험 부담이 엄청 큰 수술이란
걸 알지만 만부득히 수술을 강행합니다. 그리 아십시요 하신다.
수술 하기 하루 전날 아산 병원 내에 있는 법당엘 내려 갔다. 그때까지 난 가끔은 지나 가는
길에 절에 들르면 법당 밖에서 부처형! 안녕하슈 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정도의 무지막지한
인간이었다.
자그만 구내 법당에 퍼질러 앉아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엄니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아들된 넘이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점이 너무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기도를 하시던 한 보살님이 말을 건넨다.
자기는 아들 문제로 울산에서 온 보살인데 본인이 낮에 부전 보살 (금강안)로 부터 법당 키를
받아 놓았는데 혹여 철야 기도를 하실려면 의사를 말씀해 달라고 하신다.
가게 문을 닫고 다시 법당으로 오니 밤 열두시가 넘었는데 울산 보살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절 예법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지라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면수건 한장을 사선 좌복에 깔아
놓고 그전에 본 적이 있는 절을 하기 시작했다.
부처님! 저희 엄니 이미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 가시는 건 괜찮아예 허지만 저렇게 다리 병신
으로 부처님께 가실 순 없으니 제발 이번 수술만이라도 무사히 끝나게 해 주십사고 눈물 콧물이
땀과 함께 범벅이 되도록 어설푼 절을 정신없이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노모보다 아들 넘이 먼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었던지 울산 보살님께서 자기
기도보다 연신 쉬었다 하시라면서 내 걱정을 해 주신다.
어머님이 수술 하시는 동안 야외 주차장 맨 끝에서 목이 터져라 관세음보살을 찾았는데 쏟아
지는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아서 맨바닥에 퍼질러 엎어져서 설디 섧게 울었다.
수술실 앞에 있는 전광판에 이미 수술을 끝낸 환자들 이름 옆으로 회복실이란 문자가 많이도
떴었는데 도무지 어머니 이름 옆 문자판엔 소식이 없다. 영안실이란 불길한 문구가 여러 번
내 머리 속을 어지럽게 오갈 적 마다 금강 철퇴를 휘 두르며 눈을 부라렸다.
중환자실이란 낯설은 문구가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며칠 후에 법당으로 내려 가서 처음으로 스님을 뵈었다.
처음 보는 나를 무척이나 다정히 대해 주신다. 영문을 몰라 하니 수술 전날 내가 부처님께
정신없이 절 공양을 드렸던 얘기를 부전 보살님 (금강안)으로 부터 들으셨던 모양이다.
계면쩍어서 아니 아들 된 놈이 어머님 생사가 갈리는 마당에 하루 저녁 절 공양 올린 일로
너무 그리 말씀을 하시니 송구스럽다고 했더니 참으로 명쾌한 한 말씀을 하신다.
요즘 세상이요 자식이나 마누라 아파서 이리 저리 날 뛰는 사람은 숱하지만 자기 엄니 아푸다고
난리 피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구먼요.
오랜 통화를 하시고 스님이 전화기를 내려 놓으시길래 스님! 저희 엄니 49제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시는지 하고 영문을 몰라 했다.
49제는 박꽃 보살님, 아니 채 법명도 여쭈어 보지 못한 제 소중한 후배되시는, 한 스님에 관한
말씀이셨다.
삭발을 하시고 정향사에 오시기 직전에 열반에 드셨다는 얘기 외엔 이미 출가를 하신 스님의
신분에 관한 일인지라 더 이상의 언급은 불경인 듯 하여 여기서 삼가겠습니다.
무심한 바람은 추녀 끝 풍경을 하릴없이 희롱하고
풋풋한 달님이 돌담 위 하이얀 박꽃을 보듬어 안는
어느 시공을 알 수 없는 늦은 밤
난 일배 일배 두 일배를 연신 외치며 꽃 거꺼 놓고
무진장 마셔 댔다.
정향사의 영원한 귀염동이 돌삐 합장드립니다.
첨언 ; 저희 어머니 49제는 좁디 좁은 아산 병원 법당에서 지홍 스님께서 너무도 황감하게
올려 주셨습니다. 고마우신 은혜는 제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 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스님 주변들과 안면이 없어서 엉겁결에 제를 지냈는데 우리 일지 스님께서 예의
빼어난 솜씨로 승무를 해 주시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제 머리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주마등처럼 펼쳐 집니다.
49제 날 스님을 보필하여 많은 고생을 마다 하지 않으셨던 금강안 보살님과 잠실 주공에
사시면서 참선 수행을 올곶지게 하시는 법이라 ( ? 버비라 버비라 하면서 다른 분들이
부르시는 걸 여러번 들었지만 정확한 법명은 잘 모르겠습니다.)
보살님께도 다가 오는 백중을 맞아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마음을 함께 하며 서툰 글을
용감하게 올려 봅니다.
제불 보살님들의 가피가 모두 함께하시길 빌어 봅니다.
카페 게시글
불자님 글방
부처님 오신 날 우리 정향사에선 (그립고 아쉬운 이야기).
돌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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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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