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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 1.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하지만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고귀한 것으로 이 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2.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하고 현실성없는 이 야기다. 3. 천국, 지옥,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은 어찌알까?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4. 인간을 도덕적으로 하기 위해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한다. 하지만 본적이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든다. 이는 현세의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5.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개벽에 인격체 조물주가 끼어질 여지가 전혀 없다. 6.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도 틀리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7. 사후세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 여야할 일은 현세에 있다 8. 구원을 도적적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에서의 근본을 거부한다. 9.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이다. 10. 아담과 이브의 원죄도 모순이다. 어떻게 신은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놓고, 그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 는가? 그 것은 스승의 태도가 아니다. 가난, 질병, 죽음이 원죄때문이라고 가르치리는 것은 가소로 운 모순이다. 11. 왜 인간은 죽은 후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하는가?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일뿐이다. 죽은 후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은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한 인간으로 서의 당면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보면 이기적 인 행위이다. 12.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 도덕을 행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 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세례, 죄의 고백, 공개 기도 등의 행위는 고대 신앙에 불과 하다.
[출처] 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
이글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구원,기복을 추구하는 한국의 각종 종교세태와 일맥상통한다.한국의 종교(불교도 마찬가지만 특히 메인권력축인 기독교)는 유교적 무속신앙과 지극히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 그리고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종교
지도자 우상시스 템이 전형적이다.종교의 역할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국에서 종교는 폐쇄커뮤니티와 자기 만족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교회를 바꾸지 못한다. 종교가 아니라서 피라미드시스템 조직탈퇴가 불가 하다.나도 지난시절 종교활동을 경험해봤지만 도시화된 지금의 한국종교시스템은 사적부조클럽 그것외에 의미가 없다.관혼
상제의 부조, 가벼운 인적교류 오직 그목적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포스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불편할수도 있겠다.
이런 시선도 있다는것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출처] 조선 실학자 안정복 기독교 비판론|작성자 한강수2017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백순으로 충북 제천출신입니다.
어릴 때 잦은 병치레를 하였고 조부의 잦은 관직이동과 평생을 처사로 지낸 부친 안극을 따라 오랫 동안 자주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에 입문 하였으며 특히 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역사에 애정이 깊었던 어머니 전주 이씨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1735년 조부의 사망으로 고향인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와 살면서 '순암'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고 학문 생활에 몰입하였는데, 경사외에도 음양, 성력, 의약, 복서 등의 서적 과 손자·오자 등의 병서, 불교·노자·소설 등 모든 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후 1740에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을 기본이념으로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역설>을 지었습니다. 1746년경 성호 이익을 찾아 그의 문인되었는데 나이들어 새로운 사상에 접한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그는 다른 실학 자들 보다 개혁적 면에서 참신성이 덜하고 가장 보수적 입장에 있습니다.
1749년 문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753년에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1772년부터 3년간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세손(정조)의 교육을 맡아 보아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 즉위후 1776년 충청도 목천현감으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자학의 경학은 어디까지나 경세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며 남인 중 공서파로 양명학 및 천주학을 배격하여 1785년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저술하여 천주교의 내세 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이러한 보수적 사상은 노론 정권에 이론적 바탕 을 제공하여 죽기 직전인 1790년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보수 적 입장은 당시 근기남인들 사이에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의 관심이 높아지자 사상적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에게 보낸 수많은 서찰에서 드러나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가운데서도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 하였습니다.
<동사강목:1778년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탈피하여 한국사의 독자적 전통성을 내세우고 실증적 역사를 연구한 편년체 역사서, 마한정통론의 계승><열조통기><잡동산이><사론> 등 20여 편의 저술이 전합니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
조선 초기에 좌참찬을 지낸 안성(安省, 1344~1421)이 안정복의 12대조이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름)하여 공신에 봉해 진 안황(安滉,?~15 93) 이 그의 6대조이다. 이후로 현달한 인물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 안정복의 고조 안시성(安時聖)이 현감에 오른 적이 있고,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그보다도 못한 빙고(氷庫) 별검 자리에 나갔으며, 그나마 조부 안서우(安瑞羽, 1664~1735)가 비교적 현달하여 태안군수를 거쳐 울산부사(종3품)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부 안서우는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세상이 되자 당류의 배척을 받아 탐관오리 죄로 울산부사에서 파직되는 비운을 만났다. 안서우는 파직 후 서울을 떠나 전라도 무주에 내려가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들 안극(安極)과 손자 안정복 등 온 가족이 함께 무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조부의 몰락은 안정복과 그의 부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부친인 안극은 일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의 비운을 목도한 후 38세 이르기까지 과거 시험은 물론이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 는 길은 일체 포기하였다. 조부의 파직이 가져다 준 충격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은 안정복의 학문 활동에도 영향을 주어, 출세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좋아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인 유학 경전도 공부했지만, 그는 음양ㆍ성력(星曆)ㆍ 의약ㆍ점복, 손자병법, 불교ㆍ노자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15~16세에는 이미 통 달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세간에 ‘방술가(方術家)’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학문적 경 향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던 안극과 안정복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안서우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736년, 안정복의 나이 25세였다. 광주 덕곡리에 돌아온 안정복은 ‘순암’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순암이라고 불리는 집은 규모가 8칸이 되는 ‘엄(菴)’자형의 가옥 이었다. 또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이택재(麗澤齋) 전경. 이택재는 안정복이 지은 서재 건물로, 학문 연마 및 제자들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과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방술학보다는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어 [성리대전]과 [심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인간의 윤리 도덕과 사회참여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나 그가 왜 광주로 환향한 것을 계기로 학문적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광주 환향 후, 안정복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광주로 온지 1년 후인 26세에 <치통 ㆍ도통이도(治統ㆍ道統二圖)>를 시작으로 27세에는 뒷날 [임관정요(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 <치현보(治縣譜)>와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鄕社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29세에는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 <정전설(井田說)>에 대해 썼고, 30세에는 주자의 글을 모방한 <내범(內範)>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광주 지역 근처에 사는 실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33세에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증 손으로부터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입수해서 읽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 <반계연보>를 짓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계기로 현실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정복은 35세에 자신의 학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안산 첨성 촌에 살고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안정 복의 대표 저술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익과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는 안정복의 학문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 아닌 30대 중반에 어느 정도 학문과 사상 체계를 이룬 뒤였기 때문에 이익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관직 생활과 후진 양성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 안정복은 문음(門蔭: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 종9품)을 시작으로 의영고 참사(義盈庫奉事, 종8품),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종6품)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사헌부감찰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이후 61세까지 18년간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임관정요](1757. 46세), [동사강목](1759, 48세), [열조통기] (1767, 56세) 등 그의 대표 저술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저술은 아니지만 [이자 수어](1753, 42세), [성호사설유편](1762, 51세)과 같은 편집글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저작물들이다.
40~50대를 학문과 저술 활동으로 보낸 안정복은 61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다. 예순이 넘은 그에게 동궁(훗날의 정조)을 가르치는 일이 맡겨졌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서는 고령의 나이인 그에게 목천현감이라는 수령 자리가 주어졌다. 1776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 살이었다.
“풍속은 퇴폐하고 아전들이 교활하나, 이를 개혁하여 백성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녹봉이 비록 박하나 끼니 걱정이 없고 밥상에는 반드시 고기가 오르니, 어찌 집에 있을 때의 모습에 비하겠는가.” [순암선생문집] 13권, 상헌수필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주고, 민폐를 해소하기 위해 온 정열을 기울인지 3년. 백성들은 나무 를 깎아 송덕비를 세우고 그의 치정(治定)을 기렸다. 안정복은 72세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 하여 돈녕부 주부(정6품)ㆍ의빈부 도사(종5품)ㆍ세자익위사 익찬(정6품) 등을 역임했다. 비록 한직이지만, 이 또한 고령인 안정복을 배려한 정조의 처사였다.
천주교를 반대한 보수적인 실학자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안정복은 학자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는데,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신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 ~1801)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후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본격적으로 천주 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책인 [천학고(天學考)]나 [천학문답 (天學 問答)]이 간행된 것도 1785년, 안정복의 나이 74세 때이다.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 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 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는데,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안정복은 죽기 직전인 79세에 가선대부(종2품)에 가자(加資: 관원의 품계가 올라감)되고, 동 지중추부사로서 광성군(廣成君)에 피봉되었으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인 순조 원년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 자헌대부(정2품) 의정부좌참찬겸지 의금부사ㆍ오위도총부총관이라는 벼슬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익의 제자로서 천주교를 믿었던 이가환ㆍ권철신ㆍ정약종 등 남인 학자들은 사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 했다. 그중 권철신은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의 형이며, 권일신도 장인인 안정복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하였다.
[동사강목]은 어떤 책인가?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에 위치한 안정복 묘소.
안정복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대표작은 [동사강목]이다. 평소 자국의 역사가 제대로 서술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절치부심하여 마흔여덟 살에 이 책을 완성하였고, 이후 로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조리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한다.
[동사강목]의 핵심은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단군ㆍ기자ㆍ삼한을 정통의 줄기로 잡고 한족(漢族)이 침입하여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러면 안정복은 왜 [동사강목]을 편찬했을까?
내가 여러 역사책을 읽어본 후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폭넓게 다루 면서 중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역사 자료를 가져와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 ……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 [동사강목] 서문 중에서
안정복은 중국 사서 중에서도 주자가 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최고의 사서로 인정한 인물이다. [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주자의 강목체 서술을 표준 으로 하여 서술된 역사서이다. 강목체는 역사를 기록할 때 ‘강(綱)’과 ‘목(目)’으로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강은 기사의 큰 줄거리를 기록한 것이고, 목은 강의 하위 항목으로, 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강목체를 기본으로 하는 역사서는 보통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른 정통의 구별과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 )을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동사강목]이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데는 역사의 정통을 바로 세운 것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이 그 이전의 사서에 비해 광범위하고 철저했다는 데 있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쓸 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기본 자료로 삼으면서 각 시대의 역 사책과 문집들을 널리 참고하였고, 나아가 중국인이 쓴 기록과 [일본서기]에서도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당시로서는 자료 수집 면에서도 가장 충실한 사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한계점은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책이라는 평가에는 재론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이 가졌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안정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동사강목]에 서술되어 있는 삼한정통론은 일찍이 스승인 이익이 주창한 바 있었고, 안정 복은 그 계승자로서 이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한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단군ㆍ기자 ㆍ위만을 합하여 삼조선(三朝鮮)라고 한 [동국통감]의 역사 체계를 비판하고, 위만은 나라 를 찬탈한 도적이므로 삭제한다고 기술하였다. 안정복의 삼한정통론으로 우리 역사는 1천여 년이 끌어올려졌고, 독자적 역사관이 제시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을지문덕과 강감찬 등 외래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국방 문제나 백성들을 위한 개혁안 등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서술하였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안정복 자신이 처해 있는 조선 사회의 현실 모순을 상징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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