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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여름과 가을사이
(一)
"이건 혈의! 비수당!"
동종관 일행은 일제히 경악성을 토해 냈다.
싸움이라니! 그것도 남창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혈전(血戰)이라
니. 그것까지는 좋다. 곽가장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비수당원
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져 있다니 이건 말이 안된
다.
"최근에 남창으로 집결한 무인들이 있었나?"
동종관은 되지도 않을 소리를 던졌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자신이 모를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물음이라도 던져야
직성이 풀릴 만큼 상황은 답답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비수당원이 이렇게 죽다니, 이해가 안됩니
다."
우모우 진육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답했다. 그는 놀란
표정을 가득 띤 채 사인을 분석해 나갔다.
"이들은 단 네 곳만 노립니다. 얼굴은 동자료, 가슴은 화합혈
(華 穴), 옆구리는 장문혈(章門穴), 그리고 회음혈(會陰穴).
한결같이 치기 어려운... 동자료? 설마 탈명화검을 죽인 검
법!"
"으음...!"
동종관은 아찔한 현기증에 잠시 머리를 짚고 정신을 수습했다.
장주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
다. 그렇기에 일심각 무인들에 이어 비수당원까지 출동시켰다.
중원의 온갖 정보를 농락한다던 정대. 이제는 자부심을 버려야
한다. 자신들이 정보를 캐서 장주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장주가 알고 지시를 내리는 것. 정대는 아무것도 몰랐다. 무림
에 이만한 세력이 있다는 것도, 탈명화검이 엄청난 일에 개입
했다는 사실도.
아직도 산마루에서는 혈향(血香)이 짙게 풍겨 나왔다. 시신들
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생생했고, 검을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말하는 것이 좋겠지."
우모우 진육, 정건 석수, 천애사시 동목, 환제갈 함상.
이들 네 명은 일제히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섰다.
"그 전에 먼저...숙고해 보셨습니까?"
환제갈 함상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넷으로 일행 중 가장 젊었다. 그러나 지혜는 하
늘에 닿아 정대에서는 살아 돌아온 공명(孔明)으로 통했다. 대
주 동종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환제갈이란 작
호를 거둬야 되리라.
"숙고했네. 따르겠는가?"
"..."
일행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여차하면 곽가장 반도(叛徒)로 낙인 찍힐 중대 사안이었다.
곽가장은 그들에게 풍족한 돈을 주었다. 의복도 주었고, 이름
을 주었다. 험난한 무림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는 기반을 주었
다.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날아갈수도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불행히도 생각할 만한 시간이 없
네. 사건은 우리들 생각밖으로 엄청나네. 이번 사건은 각주님
도 정확히 몰랐던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모든 연락을 오
소저에게 의존할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일행은 모두 공감했다.
원래는 우모우 진육 혼자만 따라 나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보는 밀마를 통해 전달될 것이고, 신계각은 단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감지하면 그만이었다.
동종관은 각주가 무심코 마련해 준 기회를 꽉 붙들었다.
그는 노우의 죽음을 직접 파헤치고 싶었고, 더불어서 이번 기
회에 사공 개개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점검하려 했다. 사공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비수당원 절반이 단 이틀 사이에 무
너질 정도로 엄청난 공격이라니. 그에 비하면 탈명화검이 죽은
것은 실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 아닌가.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야. 계속 이 일을 파헤치든가, 아니
면 손털고 돌아가든가. 자네들은 내 생각을 읽었고, 그 동안
충분히 생각했으리라 짐작하네. 답변을 듣고 싶으이."
동종관은 탈명화검의 복수를 논하고 있다.
장주가 직접 나선 일, 이는 장주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
위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장주가 펼쳐 놓은 그물망을 찢는 사
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때,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곽가장을 떠나오면서부터 이런 질문
을 예상했고, 답변을 준비했지만 막상 부닥치니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사공은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누구도 선
뜻 나서서 대답하지 못했다.
"휴우! 됐네.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세나."
한동안을 기다려도 답변이 없자, 동종관은 가볍게 한숨을 말아
쉬었다.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 같지 않아서
나이가 젊다. 곽가장에서 마련해 준 기반을 바탕으로 마음껏
활개치고픈 야망도 있으리라. 그 모든 것을 일순간에 접으라는
것은 무리한 부탁일 게다.
"한 가지만 더 여쭙죠. 어느 선까지입니까?"
천애사시 동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허허! 어느 선이라... 그렇게 가르쳤지. 아무리 사악한 인
간이라도 이용할 때는 이용해야 한다고. 그래서 항시 척결해야
할 선을 구분하게 만들었지. 허허!"
하늘을 보며 허탈하게 하는 말, 더 이상의 답변은 필요 없었
다.
최종까지였다.
정대의 물을 먹은 사람들은 최선의 상황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빠짐없이 설정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찾아냈다. 그
것은 으레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되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약간 달랐다.
탈명화검을 죽인 흉수와 비수당원을 죽인 자가 동사(同死)한
흑의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일심각과 비
수당이 연계한 이상 복수는 하게 된다. 장주가 패주로 군림하
기까지는 수많은 도전이 있었다. 장주는 사양하지 않았고, 늘
이겼다. 이번 일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정대가 몰랐다? 섭섭한 차원에서 그치면 된다. 노우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 아니다. 일심각도 곽가장의 무인이란 점을 상기
하면 간단하다. 최선의 상황 설정이었다.
비수당이 몰살 직전이다. 단 이틀 만에.
일심각이라고 당하지 말란 보장은 없다. 물론 장주는 그럴 경
우도 가정해서 다른 조처를 취해 놓았으리라.
정대가 맡은 일도 아니고, 굳이 끼여들 상황도 아니었다.
진상을 조사한다는 것은 소중분과 동종관의 개인적인 욕심이
다.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행동은 자칫 장주가 하는 일에 방
해가 될 수 있고, 곽가장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축출당할 수도
있다. 장주에게 축출당한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다른 사
람이라면 몰라도 배신자를 수없이 처단해 온 정대의 수뇌(首
腦)가 그런 사정을 모를까. 최악의 상황 설정이지만 추론해 놓
아야 한다.
최악의 순간.
그래도 동종관은 복수해야 된다고 말한다. 정대가 몰살할 수
있는 극한상황까지.
'대주는 탈명화검의 죽음에 너무 연연해 있다. 감정에 휘말렸
어. 위험천만한 일... 대원을 시켜도 충분한 나들이에 사공을
전부 데려 나온 것은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겠다는 뜻... 어찌
해야 하나? 따라야 하나? 아니면 만류해야 하나?'
사공은 일제히 같은 생각을 했다.
진실로 만류하고 싶었다. 허나 그런다고 들을 대주가 아니었
다. 사공이 거절한다면 혼자서라도 의문을 밝혀 낼 사람이었
다. 그리고 사공은 곽가장보다는 정대라는 울타리를 더욱 좋아
했다.
결국, 환제갈 함상이 어깨를 쑤석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환제갈 함상. 대주를 만나 머리로 익힌 지식을 마음껏 활용해
보았습니다. 직위도 국주(局主)에까지 올랐고, 해마다 이천 석
을 수확할 수 있는 땅까지 얻었습니다. 못다 이룬 한이 있다면
진정 강한 상대와 겨뤄 보지 못한 것. 상대가 강할수록 머릿속
에 든 지식을 마음껏 쏟아 낼 수 있겠지요."
"고맙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탈명화검의 뒤를 캐기에는 드러난 것
이 너무 없어요. 하기는 깊이 숨어 있는 보물을 캐는 맛도 쏠
쏠하지만."
천애사시 동목이 말을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아였다. 그래서 가정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부모 복이 없으니 다른 복이라고 있을손가. 사랑하던
애처(愛妻)는 두 번째 자식을 낳다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
하고 절명했다. 물론 사산(死産)이었다. 당시 두 살바기였던
사내아이도 동목이 밀명을 받아 나가 있던 차, 우물에 빠진 시
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그 후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칙칙한 기
운을 풍기고 다녔다.
"고맙네."
동종관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 한 목숨을
기꺼이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남아야 할겁니다. 강서무림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
대원은 사백 명. 그들이 정대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중원 전
역에 많은 형제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 우모
우 진육이면 맡은 몫을 잘해 낼 겁니다."
"후후후! 그건 내가 할말... 네놈 작호는 정건. 우모우보다 정
건이 적임자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일세."
우모우와 정건, 이 둘은 한때 엉뚱한 싸움을 즐겼다.
완벽이란 탈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결과는 무승부(無勝負).
양쪽이 모두 조그만 허점도 남기지 않았다. 일하는 방식은 달
랐다. 우모우가 기다리는 성격이라면, 정건은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일을 만들었다. 한쪽이 소극적이라면 다른 한쪽은
능동적이었다. 어느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완벽한 것만
은 틀림없었다.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우모우, 자네가 정대를 맡게. 자네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은 큰 장점이
야."
동종관은 결단을 내렸다.
차기 정대주는 우모우 진육으로.
"환제갈, 우리들만의 밀마를 만들게. 그것은 여기 있는 우리
다섯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것이라야 될 거야. 우리가 일하는
방식대로 이제부터 우리는 방관자야. 곽가장에 충성을 바칠지
라도."
"저는 이놈들의 뒤를 캐보겠습니다. 처음 보는 놈들이라 쉽지
않겠지만 많은 인원이 움직였으니 행동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
했을 겁니다. 누군가 본 사람이 있겠죠."
동목은 흑의인의 시신을 발로 톡 건드리며 무심히 말했다.
"천애사시, 위험한 일이다."
"후후후! 우리가 하는 일에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요?
머리가 둔해서 기억나지 않는군요."
"정건, 천애사시를 도와줘."
"혼자서도 됩니다."
"그건 적성에 안 맞는군요."
비슷한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사공은 누구와 손발을 맞춘 적이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일
지라도 혼자서 해결해 냈다. 어쩌면 이런 반응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정건과 천애사시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는 다른 쪽에 흥미가 있습니다. 반여량, 그가 문제를 풀어
주는 열쇠입니다. 장주님이 만사를 제쳐놓고 감여가 따위에게
연연하는 일과 탈명화검께서 돌아가신 연유와 상관 관계가 있
을 것 같고... 반여량이라는 감여가를 지키지요."
"그것도 좋겠지."
확실히 이들은 일을 만들어서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정건이 말한 것은 동종관도 생각했던 바였다.
오소저는 현명하지만 워낙 무공이 약해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다. 정대에서도 누군가 한 명쯤은 반여량과 동행해야 되지 않
을까? 동행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반여량이라는 감여가가
하는 일을 일심각주보다 먼저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반여량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동종관도 선뜻 지시하지
못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건이 스스로 나서
준다. 그 역시 정대에서 커온 몸,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는 어
렵지 않았을 게다. 그리고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있을 게다.
'만약 이들을 잃는다면 곽가장은 날개가 잘리는 거야.'
동종관은 침침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송이들이 동종관의 복잡한 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
히 흘렀다.
* * *
소중분은 아침에 전달된 나뭇조각을 살펴보았다.
환제갈 함상은 기발한 밀마를 만들어 냈다.
벙어리들의 언어인 수화(手話)에 착상하여 개발한 그림 문자.
난해한 밀마이지만 이미 칠서(七書:사서삼경)에 통달한 대원들
은 가볍게 오의(奧意)를 깨달았다.
나뭇조각에는 온갖 그림이 빼곡했다.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일심각주가 떠났고, 비수당이 뒤를 받
쳤다는 사실은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무심히 그림을 훑어 나가던 쇄심파의 안색이 더욱 차게 굳어졌
다.
'몰살 직전!'
볼품없는 나뭇조각은 참으로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비수당 양대가 몰살 직전이라면 곽가장의 뿌리를 뒤흔드는 엄
청난 사안이었다.
강서무림에 누가 있어 곽가장에 검을 들이민단 말인가.
쇄심파가 파악한 바로는 그럴 만한 문파는 한 곳도 없었다. 흑
도(黑道) 무리를 규합한 사우맹(死雨盟)이 발악을 하고 있지
만, 어둠속에 숨어 전전긍긍해야 하는 신세였다.
'잘못됐다. 이 일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맹수의 본능보다 날카로운 직감이었다.
혈향봉 조중은 연무장(練武場)에서 수하들을 지켜보았다.
비수당원은 수련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
게는 더 이상의 수련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길들여지지 않
은 난폭한 성품에, 냉혹한 손속, 그리고 약간의 통제조차도 거
부하는 강한 반발력이 최상의 무공이니까.
지금 모습이 꼭 그렇다.
당주가 지켜보고 있건만, 어떤 당원은 그늘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했고, 어떤 당원은 대낮부터 술병을 꺼내 들었다. 무공을 수
련하는 당원은 극히 일부, 그러나 그들조차도 몸씨름을 즐길
뿐이지 무공을 수련하는 열정은 비치지 않았다.
한심하지 않은가? 아니다. 이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밤을 낮 삼아 수련하는 인간들이다. 살기 위해서 검의 비정함
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혈향봉은 그런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히 관찰했다.
장주와의 약속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곽가장을 떠나기 위해서 미리 각 대의 대주와 부대주
감을 새겨두려는 의도였다.
음대주(陰隊主) 파가자(擺架子) 황보청(黃甫淸)은 키가 작은
대신 몸이 날렵하다. 아마 신법에서는 비수당 전체에서 가장
빠를 것이다.
능공십자 학구와 비교하면...
무공면에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만약 검을 부딪친다면 그
날의 일기(日氣), 지형(地形), 심리적 영향에 따라 승패가 나
눠지리라.
성격은? 능공십자는 얼음장을 보는 듯하다. 수하들과 말도 잘
나누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하들이 목숨을 기꺼이 맡긴 것은 마음 속 진실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파가자는 늘 같이 어울려 웃고 떠든다. 고주망태로 취해 추태
를 부리는가 하면, 말이 많아 실수도 자주 한다. 하지만 수하
들 일이라면 내 일 같이 생각하는 진심이 있다.
우열을 논하기 힘든 두 사람이었다.
부대주도 마찬가지였다. 현빙검 고장복이나 음대 부대주 일성
검(一星劍) 성하추(成夏楸)나 대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다.
'허허! 이것 참 힘드네. 그러고 보니 인대주 파로가관 담구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는 어떻게 사람의 능력을 꿰뚫어 볼
까?'
시급한 문제가 아닌지라 혈향봉은 그 동안 눈여겨봤던 다른 대
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어차피 누가 당주가 되던 간에 한 명은
부대주로 승격해야 하니까. 그때,
뚜벅! 뚜벅!
등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혈향봉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고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저부(姐夫:처자형)...?'
여간해서는 비수당에 들리지 않는 소중분이었다. 그는 마치 신
계각이 온 세상인 양 조그만 집무실에 틀어박혀 나올줄 몰랐
다.
"하하하! 오늘은 서쪽에서 바람이 불겠구려. 저부가 웬일이
오?"
"매부(妹夫:처매부), 긴히 할말이 있는데...자리 좀 만듭시
다."
혈향봉과 소중분은 저부, 매부 사이로 항렬은 소중분이 위였
다. 하지만 나이는 혈향봉이 서른넷, 소중분이 서른둘로 오히
려 혈향봉이 두 살이나 많아 서로 온말을 사용했다.
혈향봉은 소중분의 안색이 유난히 딱딱하다고 느꼈다. 원래가
찬바람이 씽씽 도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싸늘한 것이 아니라 경
직된 얼굴이었다.
"그럽시다. 하하! 이거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 잔하려면..."
"술 마실 상황이 아니오. 집무실이 좋겠는데..."
"그럼... 그럽시다."
혈향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을 향해 앞장섰다.
"쉰여섯 명이나! 지, 지금 그게..."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오. 그 중에는 양대 부대주인 현빙검
고장복도 포함되어 있소."
"고장복까지!"
"어떻게 하시려오?"
혈향봉 조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나같이
내몸처럼 아끼던 수하들. 그들이 곽가장을 나선 지 삼 일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황량한 들판에 드러누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혈육로까지 거친 사나운 맹수들을 누가
사냥한단 말인가.
"저, 저부! 지금 그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오. 정대주 동어구천이 보내온 전갈이니까."
"으음!"
혈향봉의 눈두덩은 금방 시뻘개졌다.
"능공십자 학구에게 천광탄(天光彈)을 주었소."
"천광탄을?"
소중분이 어찌 모르랴. 천광탄은 신계각에서 만든 걸작 중 하
나였다. 제조각에서 심혈을 기울인 점은 인정하지만 처음 도안
(圖案)을 그린 사람은 환제갈 함상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빠른 연락망. '퍼엉!'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버섯같은 검은 구름이 피어 오르며 현 위치, 인원수, 전달사항
을 정확히 표현해 주는 밀마의 극치.
사용하는 화약(火藥)과 염료는 일급 비밀이었다.
밤에는 인(燐)처럼 반짝이는 빛을 뿜어 냈고, 낮에는 묵빛을
띠며 떠올랐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색깔의 농도가 정해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천광탄이 터지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분타(分舵)에서 뒤
를 이어받는다. 똑같은 천광탄을 터트리는 것이다. 그러면 또
그 다음 분타가 뒤를 잇고...
인편(人便)으로 서신을 전할 경우 기마술(騎馬術)에 능숙한 무
인이 말을 타고 달려도 사십 리가 고작이있다. 그때쯤 되면 말
도 사람도 지치게 된다. 설혹 역참(驛站)이 있어 다음 사람이
뒤를 이어준다 해도 하루에 다섯 번 교체하기가 벅찼다. 하루
이백 리 천 리 밖에서 사단이 벌어졌다면 닷새가 지난 다음에
야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전서구(傳書鳩)도 속도 면에서는 그리 탁월하지 못했다. 더군
다나 전서구는 회귀본능(回歸本能)에 따라 길들여진 곳만 찾아
가기 때문에 널리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천광탄은 눈으로 보고 손을 들어 터트리면 그만이다. 천 리 밖
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해도 일다경(一茶更)이면 모든 상황을
알게 된다. 실로 획기적인 밀마였다.
함상은 봉화(烽火)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터트리지 않을 게요. 수하들이 전멸해도... 전멸을 감수
하는 한이 있어도 도움은 받지 않을 게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내가 가야겠어."
혈향봉은 능공십자를 잘 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해 꺾일
지언정 굽힐 줄 모르는 위인이다. 비수당만 독자적으로 활동한
다면 지금같은 상황에서 천광탄을 터트리지 않을 리 없다. 하
지만 이번 여행은 일심각과 같이한다. 그들에게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으리라.
오급산에서 곽가장이 가깝다는 것도 한 몫을 했으리라. 거리라
고 해봐야 빨리 달리면 고작 하루거리.
인편이다. 그는 수하를 보내 상황을 전달하게 했을 것이다. 그
런데 정대를 통해서야 위급 상황을 알게 되었다? 전령무인(傳
令武人)은 모조리 죽었다는 결론이 된다.
비수당을 공격하는 무리, 퇴로를 차단하는 무리.
이건 조직적이다. 그들은 곽가장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
고,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다. 양대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양대는 전멸이다. 실력을 확실히 알고 준비한 자들인데 천광탄
을 터트린다 해도 그때는 이미 손쓸 겨를도 없으리라.
혈향봉은 다급한 마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소중분은 맞따라 일어서며 혈향봉을 붙들었다.
"장주님께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소. 사실 비수당원의 죽음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라..."
"어차피 출동해야 하는 것. 내가 보고하리다."
"아니오. 그건 모양새가 나쁘지. 같이 갑시다. 매부는 출동을
보고 드리고, 나는 정대원이 발견한 상황을 보고하고..."
혈향봉과 소중분, 그들은 각기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장주가 이번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짙은 그늘을 감추
지 못했다.
"동종관은...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을 뿐입니다."
얼굴에 하얀 분가루를 발라놓은 듯한 쇄심파 소중분이 감정 없
는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허! 그래? 정대는 항시 바쁘군그래.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래, 무슨 일 때문에 나갔나? 정대주와 소연이
가 만났다고 하던데 그 일 때문인가?"
곽모천이 전도(剪刀)로 나뭇가지를 자르면서 물었다.
소중분은 등골에 얼음이 스쳐 지나는 것 같았다.
장주의 이목을 속이지 못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
야. 장주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처제(妻弟)와 정대주
가 밀약(密約)을 맺은 것까지. 그러면서 왜? 왜 처제를 여행에
동참시켰단 말인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구하게 변명을 늘
어 놓는다면 그처럼 추한 꼴이 없으리라.
다행스럽게도 혈향봉이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장주님! 양대가 몰살 직전입니다. 어서 하명(下命)을 내려 주
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보다못한 혈향봉이 명령을 촉구했다.
비수당이 공격을 당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데도 장주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투였다.
"허허허! 비수당주 장기(將棋) 둘 줄 아나?"
"장주님!"
"장기를 둘 적에는 말일세. '내 기물(器物)은 하나도 안 죽이
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면 지게 되지. 얼마나 기물을 적절하게
운용하느냐 하는 것이 장기일세."
혈향봉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럼 장주는 비수당 양대를 죽이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장기판
졸(卒)처럼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란 말인가.
"장주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없
습니까? 저는 비수당주입니다."
"허허허! 장기판에는 왕(王)이 있다네. 하지만 그 왕도 장기를
두는 사람에 따라서 생사가 결정되지. 졸(卒)도, 차(車)도, 포
(包)도... 허허! 이렇게 생각해 보게. 한(韓)과 초(礎)는 서로
병력이 같아. 장수도 같고, 졸병도 같지. 그러면 당연히 무승
부가 되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도 장기를 두면 승부가 나거
든."
"..."
"같은 기물이라도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은 장기를 두는 사람
일세. 차를 잘 운용하는 사람은 차가 제일 용장이 되는 것이
고, 포를 잘 쓰는 사람은 포가 제일 용장이지. 기물이 생각을
한다? 그래서 제멋대로 움직인다? 허허! 신계각주, 어떻게 생
각하나?"
"..."
소중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장주님... 음대는 출동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조중은 몸이 바싹 달아올랐다.
"허허! 그런가? 이왕 준비한 것, 가봐. 자네가 인솔할 참인
가?"
조중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것은? 비수당 양대를
구하라는 소리가 아닌가? 장기판 기물까지 들어가면서 버릴 듯
말하더니.
"이것만은 명심하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일심각이 하는 일
을 방해해서는 안 돼. 자네에게는 매부가 되겠지만 장을 나가
는 순간부터 자네는 일심각주의 명을 받아야 된다는 말일세.
그래도 좋다면 가게나."
"장주님!"
혈향봉 조중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치미는 격동을 간신히 억누
르는 모습이었다.
누구의 아래로 들어가면 어떤가. 사랑하는 수하들을 수렁에서
건져 내면 그만인 것을.
"지금 곧 가겠습니다."
조중은 깊숙이 허리를 수그려 보이고 황급히 신형을 돌렸다.
"신계각주 전서를 보내라. 정대주와 사공, 모두 돌아오라고.
허허! 나는 두 번 말하는 성격이 아닌데 자네는 두 번이나 말
하게 하는군. 자네는 궁(宮)을 지키는 포장(包將)이야, 포장.
허허허!"
싹둑!
곽모천은 벌레 먹은 가지를 잘라 냈다.
"존명(尊命)!"
처음으로 존명이란 말을 사용했다.
지금은 악부(岳父:장인)와 여서(女壻:사위) 사이라고 할 수 없
었다.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상하관계일 뿐.
"만약 동종관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래, 돌아오지 않을 거
야. 그와 탈명화검은 막역한 사이니까. 흠...! 그럼 내버려둬.
일심각주에게 뛰어난 두뇌가 붙어 있는 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모양새는 차려야 될 테니...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이
번에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넘을 수 없는 산, 장주 곽모천.
위용은 대단했다. 썩은 나뭇가지를 자르는 장주, 그 손길은 언
제든지 검을 들 수 있고, 궁을 지키는 장수라 할지라도 과감히
버릴것이다. 장기판 기물이 생각을 한다면, 뜻과 어긋나게 움
직인다면.
음대는 파가자 황보청을 중심으로 숨가쁘게 출동 준비를 마쳤
다. 이미 양대가 처한 상황은 전해들은 터였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혈의에 손에 익은 병기 하나, 그리고 닷새 분 식량으로 건포
(乾脯)를 챙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도 양대원들처럼 식솔들과 작별인사 같은 것은 하지 않았
다. 늘 조용히 장을 나섰고, 그들 중 몇 명은 영원히 가족과
상봉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별의 정보다는 비수당원이라는 명
예를 더 존중했다.
"가자!"
조중은 간략하게 명을 내린 후 늘 비수당원이 장을 나서던 뒷
문을 벗어났다. 그 뒤를 음대원 백 명이 따르고, 더 뒤에는 아
내 곽선연이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일행을 배웅했다.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그녀는 무가의 핏줄답지 않게 눈물
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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