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꼴로 본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 |
문서의 진위 여부나 누가 작성했는가를 따질 때 필적 감정이라는 것을 한다. 육필 문서의 경우는 글쓴이의 습관이 곳곳에 드러나게 되어 흡사 지문처럼 나타나므로 이것을 분석하여 누가 쓴 글씨인가를 판명한다. 활자로 작성된 문서는 그 지문과도 같은 특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활자는 저마다 통일된 조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굵기와 비례, 기울기가 균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자(디지털 활자를 통상 폰트로 통칭함)는 손글씨에 비해 분명하게 구분이 가능하다.
최근 국회에서 미래통합당 주호영 의원의 공개로 진본, 사본, 위조문서 논란이 일어난 남북 간의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TV에서 본 순간 ‘어, 저건 아주 간단하게 어느 쪽에서 만든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 동안 활자를 다루어 온 필자는 그 문서로 알려진 그림 파일을 받아 보고 단번에 ‘이건 대한민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폰트로 만들어진 문서는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북한 폰트에 대한 연구를 하였거나 많은 북한 출판물을 접해 볼 수 없어 어떤 서체인지를 단정할 수 없었다. 궁금증이 생겨 인터넷 서핑을 해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북한 서체에 대한 이미지 파일들이 있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샘플 이미지만으로도 글자의 조형적 특징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북한 폰트는 개성이 뚜렷했다.
필자는 평생 한글꼴 연구와 개발을 해 온 가까운 연구자에게 파일을 보내고 통화를 했다. 그 연구자도 단숨에 제목은 ‘천리마체’, 본문은 ‘청봉체’ 계열의 북한 폰트라는 의견을 냈다. 필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그 연구자의 도움으로 북한 서체를 연구한 서울대대학원의 석사 논문을 받아 볼 수 있었다. 2018년에 작성한 이 논문에 따르면 북한의 주요 서체는 백두산 명필체, 청봉체, 붉은기체, 평양체, 물결체, 궁체, 천리마체, 3·1월간체, 장식체 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북한에서 만들어져 사용하고 있는 서체는 서예서체와 활자서체를 포함해 약 70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합의서’는 2000년 4월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보다는 서체의 종류가 훨씬 적을 때일 것이다.
이 논문에서 2014년 오광섭이라는 북한 연구자가 쓴 ‘조선글서예’를 인용해 북한 서체는 크게 서사체 6종, 도안체 3종으로 총 9가지이고, 700여 종으로 알려진 북한 서체 대부분은 이 주요 서체에서 파생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그림1 참조)
필자는 또 다른 현역 폰트디자이너에게 ‘합의서’ 파일을 보내서 폰트 감정을 의뢰하였다. 이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북한 폰트 중 ‘합의서’의 본문과 가장 유사한 한 폰트의 굵기를 달리해 두 가지로 조판하여 비교한 결과를 사진과 함께 알려왔다. 서체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틀림없는 북한 서체라는 결론이고, 획의 조형과 붓의 끌림을 표현한 것이 같고, 특히 문장 중에 아라비아 숫자의 조형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 서체의 특징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수많은 한글 폰트를 직접 디자인한 현장 전문가인 이분은 “그냥 척 봐도 이건 북한 서체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제목으로 사용된 폰트는 천리마체 중 하나일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폰트의 특징은 부리 장식이 없다. 부리란 획이 시작하는 머리 부분으로 새의 부리처럼 꼬부라져 튀어나온 모습과 같은 조형적 특징을 말한다. 또한 종성 이응이 정원이나 타원이 아니라 납작한 모양인 게 대표적인 특징인데 이 천리마체는 그 종류가 매우 많아 몇 호 서체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천리마 5호 또는 천리마 7호에 근접해 보인다. 이를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합의서’도 복사본인 데다 대조할 수 있는 북한 서체도 몇 글자만 예시되어 있는 복사본이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한 서체 전문가 세 명의 의견을 종합하면 ‘합의서’에 사용된 폰트는 북한이 만들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폰트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북한 폰트는 연변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온라인상에 돌아다니는 게 있다. 따라서 누구나 컴퓨터에 설치해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서체가 북한 것이라고 해서 문서의 작성과 출력(프린트)이 북한지역 또는 북한 사람이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사람이 사무용 문서 작성을 북한 서체로 했을 가능성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만 위작을 만들기 위해 고의로 했을 경우는 한 가지 변수일 수 있으나 정치인이 외부인 도움 없이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의환(曺義煥)
전 (사)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수석부회장
동협회 한글꼴특별위원회 위원장
전 조선일보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