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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말을 합시다(약 5장12)
성경본문: 야고보서 5:12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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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한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만우절을 지키는 대신 하루만이라도 정직한 말을 하는 날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문화에 젖어 사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말의 신실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경 구절이라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뒤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오늘 본문의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부분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앞부분과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같은 본문과 앞 문단과의 관련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야고보서 전부를 일련의 설교제목들을 모아 놓은 책으로 취급해야 할 결정적인 증거로서 제시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야고보 선생이 즐겨 전하던 설교제목의 하나로 보아야하며, 당연히 앞부분과 무관하다는 입장입니다.
얼핏 보면 정말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표면적인 관련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야고보 선생의 가슴 속에 타오르던 동일한 열정을 갖고 본문을 읽어 본다면 그 뜨거움 속에 녹아 있는 관련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부분에서 야고보 선생은 심판자의 강림을 대망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본 절에서도 야고보 선생의 “맹세하지 말라”는 간곡한 권면의 배후에는 동일한 심판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의 그렇다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맹세하지 말라”는 간곡한 명령의 이유로서 ‘죄 정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의 죄 정함을 면하라는 번역은 “심판을 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새 번역이나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모두 그 점에서 같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12절, 표준새번역)
앞 문단에서도 심판주의 강림을 기다리며 길이 참으라고 권면한 야고보 선생은 12절에서도 심판을 마음에 두고 일상대화까지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주님의 산상설교 마태복음 5:33-37과 아주 흡사합니다.
산상설교를 하신 주님이 가진 동일한 관심과 열정으로 서신설교를 통해 야고보 선생은 흩어진 열두지파에게 권면합니다.
한편 우리는 상호간의 말의 문제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주님과 그의 동생 야고보는 같은 맥락에서 그와 같은 열정을 갖고 “맹세하지 말라”고 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세상에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많고 많을 텐데, 하필이면 ‘맹세하지 말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언어 문제를 왜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겠지만 신약 성경은 성도가 행하는 행동 하나, 대화 한마디가 모두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신자의 삶은 산위의 등불과 같이 모든 세상의 주시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는 매우 지대한 중요성을 가집니다.
보십시오. 같은 행동을 해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신자가 저지르면 사람들은 반드시 손가락질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저렇게 말을 함부로 한다.’고 당장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에,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바로 우리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가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고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일에 있어서는 전혀 신임을 할 수 없는 말을 남발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곧 심판하신다는 소식자체를 신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비 콕스는 그의 책 ‘세속 도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광대가 동네에 나타나서 뒷마을에 불이 났으니 도와달라고 해도 사람들이 모두 웃기만 합니다. 더 열심을 내어서 말을 하면 더 많이 웃기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본래 광대로서 웃기는 사람이니까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믿어주지 않습니다. 더 애타서 말하면 말할수록 사람들은 더 크게 웃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복음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할 때는 ‘그렇다’고 말하고 ‘아니라’고 할 때는 ‘아니라’고 말해야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신임하게 됩니다.
보통 언어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도 믿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달려있는 진리를 전해줄 때도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영혼을 실족케 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행동하나 말 하나에 대해서 지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진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교리들을 다 말하고 나서 바로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가 서로 거짓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믿고 있는 모든 진리는 우리의 삶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증거의 능력회복을 위해서도 말의 신실성은 회복되어야 하지만 내일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을 의식할 때 말의 정직성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예’ 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에서부터 나는 것입니다.
실실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악에서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정죄 아래,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심판 아래 떨어지는, 하나님의 정죄 속에 빠지는 가장 빈번한 원인이 말의 실수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서신 앞부분에서 몇 차례 당시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만물은 사람이 다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 .”
“형제들아 피차 비방하지 말라.” “형제들아 서로 (마음속에서도)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 번 본 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5장 9절과 앞 문맥을 나란히 두고 보면 양 구절 모두 어떻게 하면 심판을 면하는가 하는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문 자체를 살펴봅시다.
우선 전반부를 읽어 봅시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여기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는 당시 상황을 좀 살필 때 밝아질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 초기 기독교 사회의 편만한 사회악 중 하나가 되는대로 쉽게 맹세하는 일이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유대 사회적 폐습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폐습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당한 부문을 차지한 유대 기독교인들을 통해 기독교회 내에서도 번져 있던 죄악으로 보입니다.
걸핏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갖다 대고, 하나님의 이름 갖다 대므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신자들의 입에서 서원이 튀어 나오는가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입장을 옹호하는 일들이 예사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서원과 맹세가 너무 범람하던 현실을 직시한 야고보 선생은 주님과 같은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명심할 것은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행해지는 서원이나 맹세를 막기 위해서 일상 대화 가운데 도무지 맹세하지 말도록 명합니다.
‘맹세코 이 말은 진리야.’ ‘맹세코 이 약속은 지킨다.’고 말하지 아니하면 통하지 않는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만큼 거짓과 부 정직, 속임과 사기가 범람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서원이나 맹세가 제 값을 지니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경우에만 행해져야 합니다.
족장들도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경우가 있었지만 매 주일마다 되풀이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생애 고비에 자기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대한 문제를 두고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해보고 맹세를 남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맹세하지 말지니’라는 말을 가지고 어떤 기독교 사람들은 ‘맹세는 도무지 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국회의 증언대에 여러분이 혹 서게 되면 양심껏 바로 말하겠다고 선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정 선서도 하실 수 있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국기를 인격화 시킬 때 문제이지 그리스도인이기에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꼭 쓰일 장소에 사용될 때 우리는 이런 서원이 중요하고 진지한 일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는 제발 좀 그렇게들 쉽게 맹세하지들 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도들의 예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우자를 구하려 보내면서 자기 종으로 맹세토록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에게 죽은 다음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맹세시키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 갈 때 자기 해골을 매고 올라가도록 맹세 시키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더불어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지요?
구약율법은 이 문제에 대해 한 법을 주고 있습니다.
레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뻔히 자기가 지킬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우선 설득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대는 거짓 맹세는 금합니다.
이것이 제 3계명의 저촉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의 다른 일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2-13).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자신도 심문을 받으시며 맹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해 증인 선서하라는데 대해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엄숙한 요청 앞에 비로소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는 맹세 자체를 해서는 안 되리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자리에서는 엄숙한 진리를 증거 한 것입니다.
‘나는 메시야이고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온 유일한 구원자이고 내가 권능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 모든 사람이 볼 것이고 장차 거기서 부터 구름을 타고 세상에 심판하러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특히 바울 사도의 경우 뚜렷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롬9:1)
이것은 맹세의 한 형태입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후 1:23).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거기서 사역을 했지만 말이 많았습니다.
가도 문제고 안가면 안 간다고 오해하니까 바울이 답답하고 달리 어쩔 수 없어서 “내가 내 영혼(생명)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인으로 삼나니 내가 고린도에 들르지 아니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이간하는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맹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예 맹세한 사실에 근거해서 자기 논지를 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히6:16).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보다 높은 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는데 아브라함을 복주고 복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비춰보면 오늘 본문이 금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이런 사실을 비춰보면 성경의 한 부분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충돌되게 해석해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전체와 서로 조화되게 한 부분을 이해할 때 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당시 범람하던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일상 대화에서의 맹세를 단연코 금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다음 구절은 당시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 . .”
‘하늘이 갈라져도 땅이 두 조각이 나도 . . .’
우리 한국 사람들도 이런 말을 씁니다.
유대 사람들이 한국사람 닮은 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드려내려고 하늘을 불러 맹서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교묘하게 피해버리고 대신에 ‘하늘이 어쩌고’ 라고 말합니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같을지 모르지만 자기로서는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듣지 않았다고 빠져나갈 길을 마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재에 대해서는 도사들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맹세와 맹세를 구분하는데 명수였습니다.
어떤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하고 다른 맹세는 안 지켜도 된다고 구분했던 것입니다.
맹세를 세분화시켜 구속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마 23:16-22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킬 필요가 없고 성전을 입혀진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제물과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습을 주님은 여지없이 폭로하십니다.
“어떻게 금을 가지고 맹세하면 지켜야 되고 성전을 가지고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느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성전이냐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성전이지 그 금이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우리 가끔 건물이 웅장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 가운데 좌정하실 때에 그 모든 관련된 것이 엄숙한 의미를 지는 것입니다.
제단이 중요한 것이지 제물이 중요한 것이냐 제물 되게 하는 제단이 중요한 것인데, 거꾸로 제물 가지고 맹세하면 지켜야 되고 재단가지고 맹세하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관습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련 배경을 갖고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아무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를 읽어 볼 때 좀 이해가 쉽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들이 대고 맹세를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미신적으로 하나님의 보응을 두려워해서 적당히 하늘을 둘러대고 빠져 나갈 여지를 만들어 두고 맹세를 남용하였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도 네 하늘이 아니고 땅도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느냐?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하나님께 속한 일부분을 남용해 놓고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줄로 생각하느냐?”
그런 폐습에 익숙해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향해 “오직 너희의 그렇다하는 것은 그렇다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며 죄 정함(심판)을 면하라”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런 것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 입장이 어려우면 ‘아’해야 할 자리에 ‘어’합니다. ‘아’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르다고 하지요?
적당하게 빠져나갈 - 심하게 양심의 가책 없이-여지만 있으면 정직하지 못한 주장을 합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고들 열을 올립니다.
물론 꼭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식의 인상을 주려고 말해 놓고도 시침을 땝니다.
예,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면할 수 있습니다. 급한 궁지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십시오.
적어도 기독교인의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세상이 나와야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인이 전하는 증거에 신실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남아프리카에 있을 때 이런 일에 있어서 저한테 좋은 교훈이 되었던 ‘반루이’ 교수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크리스마스 휴가 때 몇 번 저희들을 자기 집에 초청해 준적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는 외국에는 가족이 함께 모이는 기간입니다.
모두 뿔뿔이 헤어지고 나면 두 교회가 한 곳에 모여야 예배가 될 만큼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다보면 상당히 교회가 썰렁해지지요.
자기들은 친척들 찾아 다 가는데 우리 한국학생들이 고국의 친척을 찾아 가지 못하는데 대해서 마음이 안 되서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 교수님과 교제를 하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분은 ‘아니’라고 할때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동시에 ‘예’ 할 때 ‘예’하는 겁니다.
우리는 반대해도 선명하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주 완곡하게 해서 표현해서 나는 너하고 입장이 같지 않다고 전하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끊는 법이 잘 없거든요.
주로 그런 사람하고 삼십년 넘게 살면서 더불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정면에서 ‘노’할 때 ‘노’라고 해버리고, 그 대신 ‘노’‘했던 일을 자기가 잘못 생각했으면 ‘예스’라고 정확히 밝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의 새로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끝으로 본문의 교훈을 요약해 봅시다.
1. 맹세는 합법적이며 위엄과 권위를 부여합니다. 모든 다툼을 종결시킬 만한 최종 호소 처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을 축복과 저주에 생각 없이 남발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시대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특히 강단에서 축복이 선포되고 저주가 선포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기분대로 쓰고 있는 이런 현실 앞에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도 적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뿐 아니라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도원 가서는 이 서원하고 저 기도원 가서는 저 서원하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서원한다는 자체가 의미를 상실합니다.
3. 어떤 피조물이나 생물이라도 그것을 이용해서 맹세하는 것을 금합니다.
4. 사랑 가운데 항상 진리를 말하도록 본문은 요청합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맹세를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지 마십시오.
5. 침소봉대하는 것도 - 과장하는 것도 금합니다. 잘못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6. 악의 없는 거짓말 까지도 금합니다.
언어생활의 정직성 회복만큼 우리 민족에게 시급한 과제는 없습니다.
도대체 말에 신용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일을 마무리해 준다하면 해줄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게 안 되지 않습니다.
말의 신실 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입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더욱 오리발 내미는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서는 돼지 코에 금장식과 같습니다.
그 가슴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선서를 해도 자기 이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 짚어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다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언어부터 신실성 정직성을 회복합시다.
복음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부터 말의 신실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날 거룩하신 분 앞에 서게 될 때 여러분의 양심을 찌르듯이 고통스런 순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며 목전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옹호한 기억이 생생하게 여러분을 덮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입술의 죄악 됨으로 고통 하던 이사야 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더러운 입의 죄악으로 인해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그날 영원한 후회의 이를 갈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겸손히 주 앞에 고백합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기 죄의 자각이 있는 다음에 사죄의 선포가 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는 말의 정직성 결여에 있습니다.
노사 간의 문제도 서로의 말을 신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국민이 서로 불신하는 것도 말의 신실성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어가지고 자기 말을 식언을 한다는 것은 청소부 자격도 없고 통장, 반장도 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말의 정직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한 그룹의 지도자들에게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실 성을 자기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교회의 문제 역시 목사 장로 집사들의 말의 정직성 회복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공중누각을 짓는 종교가 아닙니다.
공중에서 여러분에게 흰옷을 하사하는 종교가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디디고 있는 이 땅에서 새로운 개조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막 해대는 불신실한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젠 조심해야 하겠다고 새롭게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믿고 살만한 공동체 건설의 기초를 서로 거짓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거룩한 일은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으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실감하십시오.
신자가 미리 거짓말을 하려고 연습하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는 순간에도 튀어나옵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직면해야 여러분의 새로운 삶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자기가 얼마나 입술이 부정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정결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내가 늘 정직을 외치면서도 부정직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입술의 말을 들으시는 그분은 과장을, 거짓을, 맹세를 싫어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비 진리를 싫어하십니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성령께서 싫어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 안에 성령이 거하고 계시다고 하면 구분의 본성은 진리신데 여러분이 거짓을 좋아하고 그저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서 얼렁뚱땅 이야기를 하면 그때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고 있는 소리에 여러분이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양심의 귀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때에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 질수 있습니다.
그 입에 궤사가 없으신, 거짓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나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야 말로 가장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 자체가 거짓말입니다. ‘나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신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자기와 같이 닮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할 때 ‘예’하십시오. ‘아니오.’할 때는 ‘아니라’고 하십시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자기 시대의 위선자들을 향한 주님의 선언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거기에 대해서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