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장소]
중도는 무아만큼 이나 이해하는 게 어렵다.
중도는 중용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중도를 부처님 설법하신 내용으로 인용하길..
거문고 줄 소리가 잘 나려면 너무 타이트하게도 또는 느슨하지 않게 적당히 조율되어야 한다는 예를 들며
중도가 그것이라고 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한 제자가 빨리 수행 목표를 이루겠다고 무리하여 열심히 정진하다 건강을 해치는 것을 보셨다.
그런 제자에게
수행을 할때는 너무 급히 또는 너무 여유롭게 가 아닌 적당한 속도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거문고 줄 조율에 비유하셨다.
그렇듯 과유불급인 조율은 수행 방법으로 예를 든 것이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중용과 무엇이 다른가?.
중용은 공자 가르침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키 워드가 아닐 수 없다.
과유불급.. 매사에 작은 일은 물론 아무리 큰 일이라도 서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중용이라 한다.
중용을 달리 설명하면 외 줄 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밸런스로 설명하기도..
중용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중도는 중용과는 달리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취우 치지 않으며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중도는 고락중도만 있는 게 아니라 단상중도, 일이 중도, 유무중도 등이 있다.
간딘히 설명하면..
1. 단견이란 삶은 일회뿐이라는 견해고, 상견이란 삶은 일회가 아닌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는 데..
단견이나 상견이 아니라고 하는 게 단상중도.
2. 영혼과 육체는 같은 하나인가 또는 다른 둘인가에서..
둘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 하는 게 일이중도.
3. 우리가 사는 세계가 있다고 하면 유견, 그런 세간은 없다고 하면 무견이라 하는데
세계는 유견도 무견도 아니라고 하는 게 유무중도.
중도가 무엇인지.. 위 설명을 들어도 오히려 더 혼란해질 뿐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중도를 쌍차쌍조라 하였는데.. 그 뜻은 먼저 일체를 부정하여 일체를 버리고 나면 이제 모두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설명만으로 잘 이해가 안 되고 몸으로 깨쳐야만 이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 고락중도도 그렇지만.. 여러 중도 설명을 들어도 애매할 뿐 중도가 무엇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중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중도는 존재 세계에서 도망치듯 점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살고 있는 이 세계 밖으로 나아가는 게 된다.
달리 말하면 차원이 다른 세계가 된다. 3차원 세계에서 4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그에 반해 중용이란 3차원 세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과유불급이나 거문고 줄 조율 역시 같은 세계인 3차원 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한 게 아닌가..
존재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물질적인 세계에서 마음으로 넘어가는 게 된다.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 사과를 보고 만지고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깊이 관찰해 보면
우리는 보는 사과는 내 망막에 비친 상을 뇌에서 보는 것으로 외부에 있는 사과가 아니고,
만져진 감촉은 내 손에 전해진 사과 감촉 역시 뇌에서 내린 판단이요,
사과 전체에 대한 느낌 역시 빛도 들어가지 못하는 깜깜한 뇌에서 내린 종합판단일 뿐이지..
사과 자체를 내 눈에 들여보내 보고 만지고 느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뇌에서 내린 분석과 판단인 세계일 뿐인데
우리는 스스로 분삭하고 판단한 세계가 그 모습대로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뇌에서 결론 내린 세계가 아닌 참으로 있는 세계를 알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
뇌에서 내린 판단으로 아는 세계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 것을 내려놓는 작업의 시작은 어떤 자는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쾌락이 전부라며 괘락을 추구하고 있는 데 그런 것을 버려야 하고, 또 어떤 자는 죽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겠다면 여기서 죽어라 하듯 고행을 하고 있는데.. 그런 고행은 잘못이기에
그런 것들을 버리고 참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작업을 중도 실천이라 한다.
중도는 괘락과 고행 사이 밸런스로 그 길을 찾아 걸으면 행복하다고 하여.. 밸런스를 찾아가는 중용이 아닌 것이다.
<잡. 335경>을 보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하셨는데.. 타이틀이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다.
그 말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 뜻이 첫번째로 수승한 공 이라는 것이며..
행위는 있지만 그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차원이 달라졌다는 뜻도
3차원에서는 주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세상인데 반해,
4차원 세계는 말하자면 주체가 없이 살아가지만 밖에서 보면 3차원 세계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말하는 나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문장으로는 이렇게 구분이 된다.
1. 나는 글을 쓴다.. 주어가 있고 그가 글을 쓰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그리 알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2. 글을 쓰는 자를 나라고 한다..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하는 자를 나라고 한다는 것으로 주어보다 행위가 먼저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는 주어요 주체인 나는 있는 데..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저 명제를 생각했다.
그는 주체가 행위를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공 차원이란 저 말 그대로.. 생각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어서 그렇게 행하는 자를 '나'라고 한다는 것..
행위를 우선하는 나는 본래 없다는 게 공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용이란 내가 과유불급이 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이고,
중도란 과유불급하는 행위가 있으면, 그렇게 행위하는 것을 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과거에 행위를 한 나는 분명히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는 없다.
고락중도의 뜻은 쾌락의 길로도 고행의 길로도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아무런 이익도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고행을 하는 이유는 지금은 어렵지만 끝은 성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고행하는 본인이라는 주체에게.
그런데 그런 주체는 본래 없다. 그렇다면 고행한 업보는 누가 받을건가.. 주체가 없는데.. 하여 고행은 헛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란?.
주체나 주어는 없는 것임을 깨닫고[분명히 이해하고].. 그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확인하려는 길이다.
완전한 확인이 열반이요 부처라 불리는 것이다.().
중도를 알려면..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넓히고
명상이나 참선으로 외부 존재와 나 사이에 연결되는 고리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리라.().
첫댓글 정치 에서는 부동층 을 중도라할수있는지요
저는 정치를 세간 중도와 비교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인데..
부동층(浮動層)이 중도인가?.. 하는 질문에 금방 답을 드릴 수 없군요.^^.
생각을 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답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