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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옥 이
가야금소리
뻐스가 안도에서 출발해 연길역에 거이 도착할 때다. 봉화의 핸드폰이 울린다. 봉화는 핸드폰을 열며 <야! 영옥이구나! 왜 전화하니?>라고 묻는다. 봉화가 전화에서 우린 지금 연길에 다 도착됐으니 시름놓으라고 하는데 영옥이쪽에서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전화를 다 받고 나서 봉화는 우리와 놀란 기색으로 <야, 이일 어쩌나? 영옥이가 우리를 준 도토리묵밑에 차비를 각각 넣었단다.>라고 말했다. 봉화의 말을 들은 나와 차금숙이도 모두 놀랐다. 그를 도우려 안도 유수천까지 찾아간 우리가 그 가난한 영옥이게서 차비를 받다니, 외려 그에게 부담을 준것이 아닌가?!
나의 동창생인 차금숙이는 동창우정을 각별히 소중히 여긴다. 키가 작달만한 그는 반급에서 무슨 반급간부도 아니고 조용히 공부만 열심히 하는 축이였지만 50년 지난 오늘에도 초중시절 고중시절 동창들의 반급 학적호를 줄줄 내리 외워 동창들을 놀래운적이 있다. 오래전 어느날 우리 동창 몇이서 회찬을 하면서 연변일중시절을 하나하나 회억하게 되였다. 어느 선생님이 교학을 제일 멋들어지게 한다는 이야기며 어느 누가는 여자들만 쳐다보아 으쓸애비라 하면서 얄밉던 이야기며 어느 선생은 녀학생들을 다쳐 학교에서 개출맞은 이야기며 이말 저말 절차없이 꼬리에 물리우는 대로 말하다나니 차금숙이는 자기 한책상 친구였던 영옥이를 얼마전에 만났다는 것이다. 거기서 전화번호를 서로 알고 종종 연락을 가진다고 했으며 영옥이는 몇번이나 옥수수가 익을때 우리 동창생들을 유수천으로 놀려오라 했다고 전했다.
영옥이는 나의 인상에 크게 남지않은 동창생이다. 연변일중을 졸업한지 50년이 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모르며 그 면목도 거이 기억에서 사라진 상태다. 추억속의 영옥이는 키가 작고, 희고 작은 얼굴에 머리가 노오란 그는 말수가 적으며 광신촌인가 하는 어느 농촌마을에서 통근했던 일만 드디여 생각난다.
지난해 10월 어느날 차금숙이는 영옥이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했다. 영옥이는 젊어서 자식내를 못한다고 시가의 핍박에 못이겨 첫남편을 리혼하고 연길에서 유수천으로 재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훝남편도 세상을 뜬지 오래고 길러준 딸도 한국에 가고 외손녀도 대학에 가다나니 신변에 친인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우리는 정말 한번 이 친구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27일 늦가을 아침의 싸늘한 공기를 마시며 차금숙이, 봉화, 나, 그리고 북경에서 온 태금숙이가 연길역에 모였다. 차금숙한테서 영옥이의 대체적인 상황을 료해했기에 우리는 영옥이에게 그 어떤 부담도 안주는 방도를 토론하고 렬차에 몸을 실었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타보는 록색 렬차다. 어릴땐 기차를 타면 별것같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검어칙칙안 렬차에 앉으니 텔레비죤에서 보던 하얀 분기식같은 고속렬차와 너무나 차이가 많아 이 변강은 언제나 번신하겠나 하는 서운한 감정이 맴돌았고 발차하는 시각부터 아직도 가난해 보이는 시골 마을이 눈앞에 안겨왔다. 다행히 렬차가 스치는 바깥은 드문드문 넓은 벌과 자연산 및 멋진 절벽, 그리고 단풍든 나무가 있어 아름다웠고 늘 성시에서 복잡하게 보이던 전선줄이며 달리는 자동차들이 없고 파아란 하늘이 시원하게 안겨오는데다 오랜 세월 보지 못한 동창생을 만나러 간다는 기분에 마음은 설레였다. 오래간만인 동창생과의 여행이라 이말저말 말이 많아 어느새 벌써 40여분이 훌쩍 지나 우리는 안도역에 도착했다.
영옥이가 입원한 중의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에 우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병실을 찾아 들어간 우리는 영옥이를 인차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나 기쁜 상봉이여서 병원이라는 감각을 깜빡 잊은채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동안 8도 높은 소리로 문안을 하면서 애들처럼 펄쩍펄쩍 뛰였다. 영옥이는 나를 알아볼수 없다고 했다. 어릴때보다 키도 더 컸고 체중이 근 20Kg이나 더 늘어난 나는 어느 동창이나 처음 볼땐 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않변했다고 한다.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우리는 한 빈침대에 앉았다. 영옥이는 신장성고혈압이라고 했다. 입원하기 전에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근본상 걸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한참 수다도 떨고 이런저런 문안과 추억속에 어느새 시간이 다 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가지고 온 위문금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많지는 못하나 우리의 마음이였다.
차금숙이를 제외하곤 봉화와 태금숙이 그리고 나는 영옥이를 처음 만난다. 영옥이는 몇십년만에 동창들을 처음 만나는데 이렇게 자기가 몸이 제일 아플때에, 더구나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상황이여서 어쩔바를 몰랐다. 그는 옷을 주어 입으며 저기 어느 식당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자고 하였다. 우리는 올때에 이미 계획한바가 있기에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사실 영옥이는 많이 걸음할 정황도 오래 앉아 있을 정황도 못된다. 우리는 오늘은 병문안을 온것이고 이후 병이 다 나으면 다시 올테니 인차 11시차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영옥이는 안된다며, 어데 이런법이 있냐며, 반세기만에 처음 만나는데 그 멀리서 와가지고 어찌 이럴수가 있냐며 기어코 밖을 나섰다. 밖에 나온 영옥이는 얼굴이 파럤다. 우리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기어코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그는 옆구리의 바지호주머니를 열고 우리에게 차비라도 쥐여 주자고 돈을 꺼내려 하였다. 순간 나는 가슴이 털렁했다. 입은 바지는 몇십년전 우리가 입던 옆구리를 여는 바지인데 빈침을 채웠다. 이런 바지는 지금 우리 안목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물론 그의 옷차림에서 그의 생활은 너무나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우리는 영옥이에게 너의 마음은 받아들이지만 돈은 못받는다며 무작정 그가 기어코 주려는 차비를 사절하였다. 먼지 바람이 이는 거리는 많이 싸늘했다. 우리는 영옥이가 감기에 걸릴가봐 어서 들어가라고 하면서 후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작별했다. 돌아오는 발길은 많이 무거웠고 나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영옥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2014년도가 다 지나가고 새해 구정명절이 이제 돌아올 것이다. 나는 또 영옥이가 생각났다. 나는 봉화와 영옥이 보러 안가겠냐 토론했다. 그래서 우리는 차금숙이랑 함께 영옥이 보러 가자고 약속했다. 나는 시장에 나가 한국산으로 예쁜 웃옷 한견지와 엷은 바지 하나 두꺼운 바지 하나를 샀다. 그리고 나의 옷견지중 그에게 맞춤한 코드며 속옷들을 알뜰한 쪽으로 몇견지 더 골랐다. 그리고 양말이며 목수건이며 모자며 여하튼 동창생에게 주는 것이니 알뜰한 것들로 다 골라 놓았다. 봉화와 금숙이도 이것저것 알뜰하게 겨울옷 여름옷이며 양말이며 모자며 머리수건이며 그리고 고기 감자국수 과일등 먹을것도 준비하였다. 우리는 동창의 우정을 안고 또 렬차에 몸을 실었다.
유수천 역에 내려 그의 집으로 향하는 사위는 산과 깍아지듯한 절벽들이 보여 푸름이 없는 겨울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이였다. 우리는 낯선길의 알려준 목표물을 찾으며 얼마 안 걸었는데 영옥이는 벌써 우리를 맞으러 걸어오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는 그의 병든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의 집은 역전에서 한 4리가량이나 떨어진 산밑에 자리잡은 초가집이였다. 집에 들어서니 메주냄새가 푸짐히 안겨왔다. 전형적인 6~70년대 시골집이다. 널판을 깐 부엌이 있고 이미 력사속에 잠겨간 낡은 식장이 있고 헐음한 미닫이로 가른 두간짜리 집인데 방쪽에는 곱게 빚은 메주덩이 한 20개를 주렁주렁 달아매 놓았다. 혼자 살면서 메주는 왜 저리 많이 했느냐 물으니 혼자 사는 몸이기에 이웃 신세가 많다며 신세진 사람들에게 된장이나 간장이라도 맛있게 만들어 퍼주며 신세를 갚는다는 것이다.. 매번 마을에서 명절이나 공공일로 회찬할 때도 영옥이네 된장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영옥이는 우리가 간다고 이미 없는것 있는것 다 꺼내 맛나는 음식을 많이 갖추었었다. 동네집에서 먹으라고 가져온 순대도 얼구어 두었고 도토리 묵도 만들고 오누이 장도 만들고 입쌀만두도 만들고 세치네국도 준비하고 그리고 돼지고기도 사놓고... , 때마침 한국에 갔던 딸이 와 있기에 우리에게 한상 푸짐히 시골음식을 차려 올려 우리는 거기서 고운 추억속에 웃음꽃 진진하게 고향같은 음식을 뜨거운 동창의 순결한 정을 나누며 맛나게 먹었다.
돌아 올 시간이 되였다. 영옥이는 우리를 거기서 하루밤 자면서 놀자고 하였다. 우리는 사정이 그렇게 안되기에 그의 요구를 사절하였다. 우리가 막 일어서려 하는데 그는 우리더러 잠간만 기다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창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후에 웬 비닐주머니 세개를 들고 나왔다. 그것이 뭐냐고 물으니 <나는 너희들에게 별로 줄것이 없으니 이 된장과 도토리 묵이나 가져다 먹어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그것은 영옥이가 손수 만든 것이며 영옥이의 마음인 것이다. 푸짐히 담은 된장을 보며 우리는 쾌히 그 진귀한 선물을 받아들였다. 영옥이는 우리를 신작로까지 나와 바래주었다. 연길에 도착할때까지 우리의 흥분은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래도 좋은 일을 했다고,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하고싶던 일을 해서 시름놓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바로 봉화의 핸드폰이 울리고 놀란 소식이 전해온 것이다. 영옥이가 우리에게 차비를 도토리묵밑에 깔아 주었다니 이게 무슨.소리냐?! 누구도 그 도토리 밑을 둘춰본 사람이 없다. 우리 셋은 도토리묵 밑을 들어 보았다. 와! 매 한사람에게 빠알간 인민페 백원짜리다! 우리 세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나는 무슨 일깨움이 머리를 진동한다. 누가 말했나, 가난하면 뜻이 짧다고! 아니, 틀렸다. 그것이 아니다. 영옥이에게는 3백원이라는 돈이 몫돈인 것이다. 치료비에 수요되는 엄청난 돈이다. 나는 잠시 어쩔바를 몰랐다. 사실 도와주려 문안간 우리가 외려 신세를 진 것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대책을 토론했다. 그 허약한 몸을 보고 온 우리는 절대로 그 돈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
정녕 50년, 반세기를 떨어졌던 영옥이는 다시 우리 어린시절 반급에 돌아왔다. 병든 몸이고 늙어가는 몸이지만 그때 그시절 착한 마음은 그의 거동에서 여전히 벅차게 숨쉬고 있었다. 갚고 싶은 마음, 베풀고 싶은 뜻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영옥이의 마음에도 새싹처럼 푸르싱싱하게 살아있고 리라꽃처럼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일생을 살아오며 가난속에 동정을 알며 착한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들과 사귀면 마음이 편안하고 친근히 보내기 싶고 권세를 피우거나 돈자랑하는 사람들과는 마음이 멀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자신은 고독하고 병든 몸이나 베푸는 뜻이 굳은 영옥이를 오늘도 마음에 떠올린다. 시골의 단풍쌓인 숲속에서 봄꽃을 만난 마음으로...
2015. 3. 17.
첫댓글 어린시절 친구를 도와주시는 세 여사님 너무 멋지세요.세분의 사랑 입어 영옥님이 건강해지셔서 더 아름다운 우정을 빛냈으면 좋겠네요. 가야금소리님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상 되세요. 보고싶어용.
서로 나누며 사는 세상이 그래도 더욱 좋네요. 행복한허니님 정말 많이 보고 싶네요. 이 봄에 항상 즐거운 일상되시길~~~
사랑은 나누면 커지고 실천하는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오고가는 따뜻한 정이 넘쳐나는 글을 읽으면서 풋풋한 사랑의 향기를 함께 느껴보는 좋은시간 되였네요.옛 동창생들과의 소중한 우정이 살아가는 인생의 희망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합니다.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지기님 고운 발길 반갑습니다. 화원에서 느끼는 우정 행복합니다. 타향에서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늘 즐거운 일상 되세요~~~
동년의 추억을 함께 떠올리는 글속에서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따뜻한 마음들이 넘쳐나네요.소중한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래요.
동창이란 어린시절의 순결한 인정의 터전입니다. 항상 서로 돕고 리해하며 즐겁기만한 꽃이 핍니다. 백일홍같은 꽃이랍니다. 들려주셔 고마워요. 내내 행복하세요~~~
포근한정이 넘쳐나네요.고운인연속에 엮어가는 멋진 추억들이네요.좋은밤 되세요~~~
항상 반가운 님, 순수한 정이 넘치는 동창의 정은 언제나 고운 추억만 만드는가 봐요. 그 긴글을 다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남기시여 응원해 주시는 님 고맙습니다. 늘 즐거운 일상되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3.18 04:5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3.18 05:29
걸어오신 그길이 옛정을 그리게하구 엣 동무가 생각나고 구구한 어릴적의 동무들과 오랜 정을 남기시고 지내신 가야금 소리님의 온유한 정겨운 이야기를 읽고나니
어렵고 힘들었던 그 옛날은 추억으로 남게되고 지금은 동무들을 만나는 기쁨이 더 없는 행복이지요
늘 건강하시면서 좋은 친구들과 고운 생각으로 지내시면 더없는 행복일수 있지요 삶의 한 페이지 같은 친구들의 마음 마음 헤아려 가면서 건강하시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은 너무나 순결한 시절이였죠. 그때 그 마음이 사라지질 않네요. 그래서 고운 추억만 많고 고운 추억만 만들어 가는것 같아요. 영옥이는 가난하고 아픈 몸이나 여전히 베풀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감동이얘요. 우리 동창들 가운데 이런 동창들이 몇몇이 되여요. 참으로 착하고 마음의 감동을 자주 자아내게하는 좋은 친구들이죠. 마음의 촉동을 받을때가 많으며 배울 점이 많아요. 그 기나긴 글에 오래 머무시며 마음을 함께 나누신 실개울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쩌다 오래간만에 들려 가야금소리에 감탄하며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