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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 ] 누군가가 ‘바보’라고 부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바보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바보 같은 삶이 오히려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였지만 집 한 채 없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분이 계십니다. 그 주인공,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 할 때 이를 눈치채고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부산 복음병원장, 부산대, 서울대 의대교수를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 대학 교수 겸 부속 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먼저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하는 담뱃값보다도 적은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 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가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 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평생을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혼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 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을 새워가며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는 듯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저 캄캄한 어두움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박사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 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향년 85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칠흑 같은 밤과 같은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사셨습니다.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 박사를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그렇게 바보처럼 사는 위인이 많기를 바랍니다... 제 2, 제 3의 장기려 박사가 많으면 많을 수록 대한민국은 지구촌에서 귀감이 되는 칭송 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 [ 가난한 자와 함께한 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 ]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 의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인술(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 정신의 꽃을 피워 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느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느님 앞에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느님 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작가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 아니면 바보요" 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 '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 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 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 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측근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이 땅에서 지금 만나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받은 분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푸른 십자가'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 ‘천막 무료 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정책인 '청십자의료조합‘ 까지,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 [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평생 가난한 환자들의 친구였던 성산 장기려 박사(1911∼1995)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장기려가 성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성자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 박사는 우리 시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작은 예수', 한국의 슈바이처, 현대판 허준, 바보 의사… ' 그의 별명은 수없이 많다.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내주기도 했으며 입원비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준 이.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을 춥고 배고픈 고학생에게 건넨 의사. 형편이 어려운 환자의 마음까지 어루만진 사랑의 의사였던 셈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무욕의 생활은 때론 그를 바보로 만들기도 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간디에 비하면 너무 가진 게 많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의 호 거룩한 산 (성산)' 조차 그의 아름다웠던 삶을 담기에는 부족한지 모른다. ~~~~~~~~~~~~~~~~~~~~ [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 만들기(소금과 빛에서...) ] 삶 전체를 지배했던 강고(强固)한 신앙, 이것이 장기려 박사의 신앙적 깊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이타적인 신앙과 삶 이면에 있는 신학적 사유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장 박사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면, 그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교신 선생이 꾸리는 집회에 참석했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만난 함석헌 선생과는 평생 친분을 맺었다. 이는 장기려 박사가 김교신과 함석헌의 신학적 사유에 깊은 공감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산은 무교회주의자들인 두 사람과는 달리, 교회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의전에서 배우고 연구하는 동안에는 명륜중앙교회에 나갔는데, 그는 찬양대 대장이었고 아내는 피아노 반주를 맡았었다. 해방 후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이민족의 간섭을 받자, 성산은 더욱 견고한 신앙생활로 혼란기를 헤쳐 나가고자 했다.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평양 산정현교회를 택했다. 그런 교회야말로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이 세상 정치와 타협하지 않을 올바른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부산에서의 산정현교회 재건에 도 참여했다. ▲ 성산 장기려 박사의 침대 머리맡에는 젊은 아내의 모습과 훗날 80대 아내의 모습을담은 두 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않고 재혼하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평생 혼자 지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비록 병원일지라도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구현코자 했다. 복음병원 시절, 밀려드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다 보면 병원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곤 했다. 때마침 미국의 개혁선교회에서 병원 운영비로 지원금을 보내오자, 이를 나누는 성산의 방법은 상식을 초월했다. 돈을 직급에 따라 분배하지 않고 직원의 부양가족 숫자에 따라 나눈 것이다. 그 결과 원장 장기려의 월급은 운전기사의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 방식을 본뜬 것이었다. 초대 교회야말로 장기려 박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다. 성산에게 있어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결단을 내리며 가난하고 아픈 이웃들을 위한 헌신 속에서 성도와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여야 했다. 아들 장가용 교수에 따르면, 그가 말년에 참여했던 공동체는 이름마저도 갖기를 거부했던 작은 모임이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단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산은 특정 교파에 구속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참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다. 비록 1949년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앙 태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에 대하여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장기려 박사. 그분은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치료한 분이셨습니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북조선의 제1호 의학박사였고, 이산가족으로 전쟁의 아픔을 평생 안고 사신 분입니다. 1986년 박사님은 국제회의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북녘의 가족 소식을 듣습니다. 장남인 장택용씨가 약학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박사님은 정부로부터 북한 방문을 제안 받았습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였습니다. 그때 박사님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뒤에 박사님이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들이 몇몇 지인들로부터 들렸습니다. "나는 매일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쪽에서 살 수 있든지, 둘 중 하나라면 평양에 가겠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이 저 혼자이겠습니까? 저만 그런 특혜를 받을 수야 없지요." 그리고 1995년의 성탄절, 세상을 떠나기 전 박사님은 아내 김봉숙씨에게 전해달라며 마지막 말씀을 남겼습니다. "떠날 때 두고 온 2남3녀의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에 고마움을 보내며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만남을 기약한다."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6월입니다.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장기려 박사님의 삶은 그래서 오늘에도 희망입니다. 오늘 박사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당신의 사랑이 가족애에 머물지 않고, 민족애에만도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을 희망을 길어오기 때문입니다.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장기려 박사, 상패까지 팔아 가난한 이웃 위해 봉사한 참된 의사 ]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남한에선 처음으로 부산에 무료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 병원에 일하면서 집 한 칸이 없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못한 병원에서 방 한 칸을 마련해 줬습니다. 생전에 막사이상 등을 받았지만 선생은 상금은 물론 상패마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인류애를 실천한 참다운 의사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공격해 왔습니다. 서울은 물론 낙동강까지 점령했던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까지 점령당했습니다.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병원 의사들은 깜짝 놀라 모두 피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장기려 박사가 의사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저 밖을 보시오…….” 창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장기려 박사와 동료 의사들은 7 개 수술실에서 49 건의 중요한 수술을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이 평양에 입성하자 이번에는 국군 장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끼어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님, 다친 국군을 도와 줬으니 북한군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해 준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박사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제가 평양역으로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장기려는 둘째 아들 기용과 평양역으로 나가 군의관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지 4 시간 후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섰습니다. 이 자동차를 급히 몰아 집으로 가 봤지만 나머지 가족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가족을 못 만난 채 평양 종로 앞을 지날 때 둘째 아들 기용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예요. 어머니!” 기용은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지만 차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피난민 행렬 속에서 차를 세웠다간 큰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용아! 그만 울음을 그쳐라. 곧 만나게 될 게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는 이때 본 아내와 자식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들은 대동강을 못 건너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 부산서도 오직 치료에만 전념 부산으로 내려온 박사는 육군 병원에서 숱한 병사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 알고 지내던 한상동 목사 등이 찾아와 5000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 돈으로 1951년 6월 20일, 민간인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비록 천막 병원이었지만 피난지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가 하루에 200여명씩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생은 ‘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병’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환자 한 사람이 원장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습니다. “원장님, 지금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퇴원해 돈을 벌면 반드시 치료비를 갚겠습니다.” “사정이 딱하군요. 제가 몰래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도망치세요. 발각되면 나도 사정이 곤란하니…….” 원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사내에게 교통비로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습니다. 박사는 이처럼 남한 최고의 의사가 되었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가진 게 너무 많다.’며 늘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살았습니다. 1985년 9월, 장기려는 분단 40 년 만에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있는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그럴 순 없소.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겠소. 나를 이번 고향 방문단에서 빼 주시오.” 박사라고 어찌 가족이 그립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는 그런 혜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렇듯 젊은 시절 ‘경성의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의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첫 결심을 잊지 않고 살았던 참된 의사였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을 종합한 것임> |
첫댓글 '가난한 자와 함께한 참 아름다운 의사 장기려 박사'
요즘 의대증원에 반대하여 의사들의 집단파업을 보면서
오로지 환자만을 위해 사신 진정한 의사였던 장기려박사님이 생각나서
2023년 2월에 참나에 소개했던 글을 다시 한번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