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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한밤에 왔다가 정오 무렵에 떠나 버린 일행이지만 막상 조중
일행이 떠나고 난 자리는 확 드러났다. 원래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하지 않던가.
삼십여 명은 죽었고, 또 삼십여 명이 떠났다.
이제는 반여량 일행이 떠날 차례였다.
백부하에 올 때처럼 반여량은 동종관의 마차를 이용했다. 그
주위로는 정대의 함상, 진육, 석수가 좌우에 따랐고, 일심각
무인들이 앞을, 능공십자가 이끄는 비수당 무인들이 뒤를 맡았
다.
"말을 바꾸는 게 좋겠군."
"음? 무슨 소린가?"
환제갈 함상은 반여량이 하는 말뜻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석수라고 했소? 당신이 탄 말은 성질이 날카롭군. 그런 말은
환자에게 어울리지 않지. 오히려 당신보다는 성격이 느긋한 저
사람, 진육에게 맞는 말일 것 같소. 환제갈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이 탄 말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군. 석수에게 주시오. 석
수의 말은 진육, 당신이 타고, 환제갈은 진육의 말을 타면 되
겠네. 아마 지금보다는 편안할 게요."
완전히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상황이었다.
삼공은 반여량의 말대로 묵묵히 말고삐를 주고받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반여량이 보여준 특이한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
다.
"이것도 동기감응인가?"
"말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감응 축에 들지도 못하지만... 굳
이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소. 사람들은 명마(名馬)를
보면 타보지 못해 안달이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죠. 아무리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이라 할지라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필
요 없듯이 말도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골라 타는 것이 좋으니
까."
삼공 같은 사람들이 쉽게 풀어 주기까지 한 말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기운(氣運)이었다. 말이 지닌 기와 사람이 지닌 기의
조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호호호! 정말 괴물이군요."
곽소연이 한마디하며 끼여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동기감응이란 것을 배우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아! 도박(賭博)을 해도 좋겠군요. 사
람을 척 보고 '아! 이 사람은 이런 기운을 흘리니까 도박을 하
면 안 되겠구나' 이러면 잃지 않을 거고, 도박을 해도 되겠다
싶으면 하고."
"하하하!"
"허허허!"
사람들은 일제히 웃어젖혔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한 곽소연이나 반여량은 웃지 않았다.
곽소연은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반여량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
실을. 이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서민들이야 생활이 조
금 나아지고 못해지는 것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정상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달랐다. 구름 위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어울려야 한다. 선녀(仙女)가 땅 위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마음은 한없이 빨려들고 있지
않은가.
반여랑은 곽소연의 말에 또 다른 세상을 배웠다. 그렇기에 옷
을 수 없었다.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것도 많이... 당시에는
수단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독심까지 기르려 하지 않았던다.
그러면서도 곽소연이 말한 것처럼 좀더 효율적인 부분에 동기
감응을 이용할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가.
안목이 좁았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역행하려니 오직 한 가지
만 보였다. 한발 물러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더 나은 길이 많이
있는데.
지금은 어떤가? 넓고 깊게 보고 있는가?
스스로 끝없이 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곽소연은 참으로 좋은 세상을 일깨워 주었다.
두두두두...!
윤명을 필두로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아내는 몸이 뜨거운 여자야. 하루라도 관계를 갖지 않으면
몸살을 않지. 병적이지 않은가?'
삼화일지 최신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지조차 알
지 못했다. 그저 앞서 달리는 각주의 말 꽁무니만 따라서 부지
런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같이 산지가 벌써 사 년째야. 그 동안... 휴우! 말 못할 고민
이 많았지. 모르지 또... 지금도 누구를 침상에 끌어들였는지.
허참! 내가 자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지? 워낙 가깝다
보니 별일을 다하는군. 하하하! 이게 모두 자네를 형제 이상으
로 생각하고 있는 탓이야. 너무 타박하지는 말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조심했는데. 아니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형제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건 아니다. 홍홍록
록은 수하를 수하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최신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곽가장을 나선 이후로 변변히 쉬지 못했다. 운공으로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약간이라도 틈이 생기면
윤명의 행동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약 그가 불륜을
알았다면... 점혈침법 십팔초가 시전될 뿐이다.
물론 하극상(下剋上)을 저지른 벌로 참형(斬刑)을 당할지 모른
다.
그래도 해야 한다. 자신은 죽더라도 사랑하는 여인, 곽무연에
게는 어떠한 해도 돌아가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신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다. 밥맛도 없었고,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곽무연은 연락을 취해 달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혹여 꼬리라도 잡힌다면 어쩔 텐가.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취
하지 못한다? 그것도 짜증날 만큼 신경 쓰였다.
'죽이고 죽어? 최후에는 그 방법밖에 없겠지.'
윤명은 그 날 이후 아내에 대한 말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
다. 최신이 고민하는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윤명이 불륜을 알아 버렸다면 행동하기가 편하다. 모른다면 더
욱 좋다. 그런데 윤명의 태도는... 아는 것 같기도 했고, 모르
는 것 같기도 했다.
지레짐작인가? 아니면 의처증(疑妻症)?
그럴 수도 있다. 홍홍록록 윤명은 곽무연의 뜨거운 몸을 식혀
주지 못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게다. 성
적 능력은 사내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우월감을
주기도 한다. 열등감을 느꼈다면 의처증이 생길 수도 있다.
"워워!"
히히힝...!
입에 거품을 물고 달리던 윤명의 말이 멈춰 섰다.
최신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줄
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늦어, 하마터
면 윤명과 부딪힐 뻔했다. 말은 윤명을 스쳐지나 두어 걸음 앞
으로 내달린 상태에서 멈춰졌다.
일심각 부대주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 하지만 윤명은 한번 힐
끔 쳐다보았을 뿐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대고령(大姑領)을 넘는 게 아니었어. 산적이 많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이리 온 이상 그들과 부딪치는 것은 피
할 수 없겠지. 삼화일지, 어떤가? 길을 열어 보겠나?"
윤명의 희미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대고령은 숲이 울창해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한밤처럼 컴컴했
다. 그러나 오후의 햇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지랖 넓게 세
상 곳곳을 비쳐 주겠다는 듯이.
반짝이는 물체가 보인다.
잠깐씩 명멸하는 밝은 빛은 햇빛에 반사된 화살촉에서 흘러 나
온 잔광(殘光)이었다.
어림잡아 이십여 명이 나무 위에서, 바위 뒤에서 화살을 겨누
고 대기 중. 그들은 말 한마디만 떨어지면 가차없이 화살을 날
려 버릴 비정한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병장기를 휴대한 무인 육십여 명이 길
을 지나치는 데 공격을 가할 미친놈이 어디 있으랴. 무공도 변
변치 않는 산적 나부랭이가.
대고령에 산적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
나 윤명을 필두로 여기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산적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고령을 넘는 것은 당연했고, 이대로 계
속 말을 달려도 아무런 위해(危害)가 없으리라.
"각주."
"그래. 그렇게 해. 길을 열어 봐."
윤명은 다시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속에는 반드시 피
를 보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나왔다.
덩치가 우람한 자는 귀두도(鬼頭刀)를 들었고, 어떤 놈은 운두
도(雲頭刀)를 들었지만 대부분 검을 들었다.
호흡이 거칠고 몸놀림이 둔했다. 천성적으토 타고난 신력에다
가 외가무공(外家武功)깨나 귀동냥으로 주워 들은 작자들이리
라. 하기는 오가는 사람들의 봇짐이나 털어먹는 놈들이 무공인
들 변변하랴.
"그, 그냥 지나갈 수는...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두목인 듯한 자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남창부 곽가장의 상징인 남의와 혈의를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그러나 궁지에 몰린 새앙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각기 병장기를 꼬나든 꼴이 죽더라도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투
였다.
이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윤명과 나눈
대화를 들었고, 무인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
했을 게다.
"가라. 최대한 빨리... 나는 길을 열 뿐이니까."
"대, 대협! 그 말이 진정이신지...?"
"최대한 빨리라고 말했다."
순간, 산적들은 메뚜기처럼 퉁겨 나갔다. 그때,
두두두두...!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윤명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헉! 소, 속았다! 모두 공격해라!"
두목이 황급히 외쳐댔지만 산적들에게는 모두의 목숨보다 자신
의 한 목숨 구하는 것이 더욱 소중했다.
파앗!
말에서 허공으로 솟구친 윤명의 손에는 어느새 단창 두 자루가
들려 있었고, 창끝은 머리를 곤두세운 독아처럼 날름거렸다.
"커억!"
두목의 비명 소리가 신호였다.
탁! 타악...!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공기결을 핥으며 쏘아진 창끝이 등을
혹은 머리 뒤통수를 찔러댔다.
싸움은 너무 싱거웠다. 어린아이 팔목 비트는 것보다 쉬웠다.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도살. 최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하하하! 이들은 양민을 괴롭히는 산적들이니 죽어도 싸지. 어
떤가? 볼 만했는가? 자네에게 맡기려 했는데 갑자기 아내 얼굴
이 떠올라서 말야."
'안다!'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전율.
최신은 단언했다. 윤명은 모든 사실을 안다. 이제 윤명을 죽이
고 자신도 죽는 길만 남았다.
그는 허리춤에 꼽힌 점혈침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곧 청붕성이야. 하하하! 그 동안 편히 쉬지도 못했는데
오늘밤은 두 발 쪽 뻗고 잠잘 수 있겠군 그래. 나는 말야. 참
운이 따라주는 놈이야. 장주님의 세 사위 중에 내가 이번 일을
맡았으니까. 아니지. 이런 행운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
니지.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랬어. 골칫거리가 있으면 내가 나
서기 전에 스스로 해결되곤 했어. 하하하! 잠자고 일어나 보면
사태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는 게 아니겠나. 정말 보기 드문
행운이지."
윤명은 너절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최신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최신은 점혈침을 뽑지 못했다. 그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윤명은 자진(自盡)을 요구한다. 그러면 아무런 일
도 없었던 것처럼 하겠다고 말한다. 믿을 수 있는 말인가. 곽
무연을 위해 한 목숨 버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헛된 죽음이
될까 그게 두려웠다.
청붕분타(淸崩分舵)에 들어선 것은 해거름이 질 무렵이었다.
일심각 무인들은 곧장 청붕분타주 금사일살(金絲一殺) 유백언
(劉伯彦)이 마련한 거처로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하지만 비수
당 무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청붕분타 무인들과 함께 경계에
돌입했다. 당주가 흑의인을 찾아 나선 마당에 수하 된 자로서
편히 쉴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따가 봐요."
곽소연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반여량
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돌아가시오."
"예?"
"곽가장으로 돌아가시오. 이번 여행에는 유난히 죽는 사람이
많아. 감여는 사람을 살리는 행위요. 죽은 사람을 편하게 해주
는 것이 감여. 나는 오늘 처음으로 감여가란 사실에 회의(懷
疑)를 느꼈소."
반여량의 응답은 싸늘했다.
대고령에서 산적들의 죽음을 본 다음부터였다.
"아니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지만 저는 이번 여정에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두 가지 목적이 있어요. 하나는 언니를 위해서
고, 또 하나는 바로 나를 위해서죠. 아직 확실히는 모르지
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찾은 것 같아요."
곽소연의 눈빛은 몸을 살라 버릴 듯 뜨거웠다.
청붕분타주가 동종관을 위해 마련해 준 거처는 서재 바로 곁에
있었다. 동종관은 분타에 들어서는 즉시 서재로 향했다. 온갖
고서(古書)들로 가득한 서재는 어쩐지 묵직한 공기로 가득했
다.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한 공기였다.
그는 곧장 불경(佛經)을 쌓아 놓은 곳으로 걸어가 서적을 뒤적
였다. 그가 그러는 동안 삼공은 사전에 미리 약속이라도 해놓
은 듯 재빨리 움직여 문과 창문을 봉쇄했다.
홍범(洪範).
정치법전(政治法典)으로 기자(箕子)와 주나라 왕실이 정리해
놓은 서적이었다.
동종관은 그 속에서 작게 접힌 서찰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서
찰은 얼마 전에 적어 놓은 듯 아직도 묵향(墨香)이 짙게 풍겨
나왔다. 여인이 쓴 듯 섬세하고 가녀린 글씨체.
- 명(命).
각주(閣主) 명(命), 일관(一貫).
차기 정대주 우모우 진육, 접수(接受).
서찰 내용은 간단했다.
동종관은 서찰을 작게 접어 입 속에 넣고 꿀꺽 삼켜 버렸다.
"대주!"
환제갈의 물음, 아니 모두의 물음.
동종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삼공의 얼굴에 환한 미소
가 감돌았다. 그때,
벌컥!
문이 세차게 열리며 홍홍록록 윤명이 들어섰다.
동종관을 흘겨보는 싸늘한 눈초리. 실내공기는 한설에 서리를
맞은 듯 급격하게 동결되었다.
"긴요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나?"
"아닙니다. 한담을... 오랜만에 서적을 대하니 장에 있는 기분
이라서요. 허허허!"
"앉지."
윤명의 얼굴에는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허나 아무리 인간적
으로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목적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제거
하는 냉혹성을 지닌 사내. 지금이 바로 그랬다.
"비수당주가 도움을 청했다고?"
"네."
"하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대저부가 답답했던 모양이지? 정
대주와 사공을 함께 내보내고."
"피곤하군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동종관은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넘어가지 않았다. 정대주로 지
내는 동안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경륜을 쌓은 그가 아닌
가. 그는 예의를 차려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동어구천."
"말씀하시지요."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말하지. 이번 일은 너무 경솔했어.
장주님이 하시는 일에 나서다니."
"..."
이번에도 동종관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다.
"이것은 장주님께서 하사하신 선물이다. 올해가 환갑이라 알고
있는데 그 선물인가?"
윤명은 조그만 목함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동종관은 목함을 받아 들면서 손을 가늘게 떨었다.
봉황(鳳凰)이 아름답게 양각(陽刻)되어 있는 목함. 그 속에 무
엇이 들어 있는지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인대주
(人隊主) 파로가관(把路加寬) 담구(譚九)와 숙의 끝에 만든 물
건이니까.
이단자(異端者)를 제거하는 사형집행목함(死刑執行木函)이었
다.
"장주님, 말씀을 전하지. 동어구천의 뜻을 존중한다. 차기 정
대주는 우모우 진육이 될 것이다. 인대주도 가장 적합한 인물
이라고 천거했으니 그렇게 한다. 단, 대주 취임은 장으로 돌아
간 다음이나 될 것이다. 그 전에는 나의 수족이 된다."
"감사합니다."
"슬하에 사남이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심성이 유약하고, 머리가 둔해서 낙향(落鄕) 시키려던 중입니
다."
"식솔은 염려하지마. 자, 그럼 다음에 또..."
윤명은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삼공은 동종관 앞에 앉은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비록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수천만 마디의
밀어(密語)가 함축되어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들 돌아가시게."
동종관은 그윽한 시선을 접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락을 같이 해온 수하들의 면면을 살펴보았
다. 천애사시 동목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이랄까? 남은 사람이
나마 이렇게라도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후후후! 부모가 돌아가시면 천붕지괴(天崩地壞)라는 표현을
씁니다. 일러주십시오."
동종관은 가는 실소를 터트렸다.
"천붕지괴라... 심성이 곧으면 혼돈(混沌)이 걷히는 법."
이들은 선문답(禪問答)처럼 난해한 말을 주고받았다.
진육은 차후 정대가 나아갈 길을 물었고, 동종관은 진육의 뜻
에 맡겼다. 각주의 심중은 끝까지 일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있
었다. 탈명화검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그 오랜 세월 동안 탈명
화검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그것은 중원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하는 정대로서는 당연한 권리 행사였다.
이제 그 모든 결정이 진육에게 넘어갔다. 진육이 이 일을 끝까
지 마무리 짓든 아니면 여기서 그냥 돌아가든 그건 진육의 몫
이다.
"천양무궁(天壤無窮)입니다. 끝이 어디인지 일러 주십시오."
정건 석수가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물어왔다.
천양무궁(天壤無窮).
천(天)은 하늘, 양(壤)은 땅, 무궁(無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다.
지금의 곽가장이 그렇다. 정보를 장악하고 있다는 정대이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데는 제약을 느꼈다. 장주가 하는 일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대주를 죽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넓
은 하늘을 어찌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죽음이 끝일세."
"죽음후에도 무궁이 있습니까?"
"그렇겠지."
"그럼 개죽음이 아닙니까?"
"생각하기 나름일세."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향 한 자루가 탈 시간이 흘렀을 즈음, 환제갈 함상과
정건 석수는 재배(再拜)를 올렸다. 모두들 담담한 표정이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가들 보시게."
동종관은 세 사람이 방문을 닫고 물러가자 탁자에 놓인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윤명은 식솔을 걱정하지 마라 했지만 가족들은 벌써 황천길을
걸어가고 있으리라. 곽가장은 이단자로 낙인 찍은 사람의 일가
식솔을 살려주는 법이 없으니까.
장주는 지기(知己)와 같았다. 공적으로는 상하 관계이지만 사
적으로는 비슷한 연배에 그만큼의 세월을 같이 살아와 누구보
다 친근감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정녕
비통한 일이다.
'인생은 죽음이 끝이라... 후후후! 아니야. 죽음이 바로 시작
이야. 그대들이 있으니까. 탈명화검... 그대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를 죽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
어. 정대원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그렇지. 장을
나온 사람 중에서 정대원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
니까. 예상 외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대들의 노고가
심하겠구먼.'
죽음은 예상했다. 신계각이 제외되는 것을 보고 장주의 의도를
알았다. 정대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이 장을 박차
고 나왔으니, 그리고 탈명화검의 복수를 위해 모든 힘을 집중
시키려 했으니.
동종관은 목함 옆에 뚫린 조그만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
다.
순간, 따끔한 아픔과 함께 오른쪽 반신이 싸하게 마비되었다.
'칠보사(七步蛇)로군.'
목함 안에는 독사(毒蛇)가 들어 있었다.
죽지 않을 만큼 굶겼기 때문에 성정이 매우 흉폭했고, 독이 강
렬했다. 더욱이 칠보사는 독액(毒液) 한 방울로 능히 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맹독사(猛毒蛇)로, 한번 물리면 일곱 걸음을 걷
기 전에 절명한다고 했다. 적멸사(寂滅蛇)와 함께 신계각에서
준비한 두 종류의 독사 중 하나였다.
우당탕...!
독기(毒氣)를 감당하지 못한 동종관은 탁자 위로 거세게 무너
져 버렸다. 살색은 푸른색으로 변색되었고, 손가락 끝은 아직
도 목함에 끼어져 있었다. 독기에 퉁퉁 불어 빠지지 않은 것이
다. 목함 속에 들어있는 칠보사가 먹이를 놓지 않으려고 꽉 물
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잠시 후, 방문이 스르륵 열리며 물러갔던 석수와 함상이 들어
왔다.
석수는 목함을 힘껏 잡아당겼다.
칠보사가 얼마나 강하게 물었는지 동종관의 검지손가락 마디가
잘라지며 검은색으로 변색된 죽은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이단으로 낙인찍힌 분, 공식적인 장례는 치를 수 없다. 뒷산
에 묻되 봉분도 세우지 않을 것이며, 위패도 모시지 않는다."
말을 마친 진육은 천정을 바라보았다.
감시하던 자는 사라졌다.
놀라운 은신술(隱身術)이었다. 정대 대원과 버금가는 은신술.
일신 무공이 저 정도라면...
"가가."
말을 하는 석수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졌다.
환제갈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피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반여량은 여느 때처럼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죽
음을 맞이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노구(老軀)를 시상판
(屍床板) 위로 옮겨놓고 팔다리를 바로잡았다.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겠지만 묘혈은 어떤가? 자네가 감여가라
서 묻는 말이야."
"좋은 자립니다. 흔히들 길지, 길지 하지만 길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길
지죠."
"잘 모셔주게. 무인이란 길에서 죽는 것이 다반사지만 이분은
무인이 아니셨네."
진육이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
반여량은 정성을 다해 정화수(井華水)로 동종관의 나신을 씻어
냈다. 시신을 염하는 일은 언제나 하는 일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숙달이 문제다. 어떤 일이건 손에 익으면 건성으로 하
기 십상이다. 반여량은 그런 태만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항
상 정갈히 다듬었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최고의 예의니까.
동종관에게는 향탁(香卓)이라든가 향로(香爐), 향합(香盒), 위
패(位牌) 등을 놓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깨끗하게 목욕시킨 후, 수의( 衣)를 입혔다.
평온해 보였다. 소작농(小作農)의 자식으로 태어나 뛰어난 학
문 하나로 당당히 강호를 걸어온 강인한 면모가 물씬 풍겨 나
왔다.
'허허! 수고하게. 이 늙은 육신 하나 떠나는 것에 연연하지 말
고.'
짜릿한 전율과 함께 감응(感應)이 느껴졌다.
'그러지요. 이제 편히 가십시오,'
경건한 마음으로 시신을 소렴금(小殮錦)으로 싼 다음 일곱 매
듭으로 묶었다. 그 위에 대렴금(大殮錦)을 싼 다음 다시 묶었
다. 그 동안 행동이 민활한 진육이 곽소연과 함께 허름한 목관
(木棺)을 가져왔다.
그녀는 동종관이 서재로 갈 때, 청붕분타를 빠져 나가 목관을
맞춰 놓았다. 동종관은 '쓸데없는 일이다.',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하고 만류했지만, 그녀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 동안 석수와 함상은 넉넉한 깊이로 천광을 파내려갔다.
산귀는 한구석에서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모습으로 이들이 하
는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세 사람이 동종관의 시신을 가져오기 전, 반여량은 지금 이 자
리에서 정좌를 하고 앉아 지감(地感)을 느꼈다. 산귀가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동기감응 감여였다.
몰아경(沒我境)!
"크으윽!"
고통스런 침음이 흘러 나왔다. 그의 인상은 잔뜩 구겨졌고, 이
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원방파 칠감로의 말이 사실이었다. 과거에 안철주는 동기감응
을 펼치며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이기는 하되
감여법은 다르다. 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허억! 으으음...!"
반여량의 안색이 검붉게 변했다. 곧이라도 칠공(七孔)에서 검
은 피가 주르륵 흘러 내릴 것 같았다. 꼭 감은 눈썹이 부르르
떨리고 있어 극심한 충격을 받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감(地感)을 느낀다?
땅 속에 흐르는 음기(陰氣)를 체내로 받아들여 속성을 읽는다?
산천이 내포한 기(氣)는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을까? 죽
은 시신을 통해 후손에까지 전달하려면 엄청날 것이다. 그런
기운을 몸으로 받아 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동기감응은 그래서
어렵다. 미증유의 거력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자
칫 뇌를 다쳐 정신이상자가 되는 것은 여반장이요 목숨을 잃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평범한 기라도 자연이 만들어 낸 기운은 불가항력이거늘, 하
물며 묘혈로 정한 땅이야...'
산귀는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음기를 느꼈다.
이것이 동기감응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받은 감응이다. 하지
만 이런 느낌만 가지고 좋은 지 나쁜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감여가에게 풍수(風水)는 전쟁이었다. 활과 칼 대신 나경을 들
었을 뿐 혼신의 기력을 짜내 한 올의 빈틈이라도 거슬려서는
안 된다.
묏자리를 잘못 쓴 인과(因果)는 감여가에게도 돌아온다.
당대에는 운명(運命)을 거슬리지 못하지만 후손이라도 잘되기
를 바라는 마음은 감여가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인과를 체
득하고 있기에 한치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온갖 기력
을 다 짜낸다.
잠시 더 지감을 느끼던 반여량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미 혈(穴)을 감지했고, 방향까지 정한 것이다.
"천광은 어떤가?"
"넉 자면 되겠군요."
"좌향(坐向:시신이 놓이는 방향)은?"
"평범합니다. 남쪽이 좋더군요."
산귀는 듣고 싶은 특이한 답을 듣지 못했다. 천광 넉 자, 시신
을 남쪽 방향으로 놓는다는 것은 평범한 말이었다. 좀더 색다
른 답을 원했는데.
이번에는 산귀가 나경을 꺼내들고 묘혈을 탐지했다. 반여량은
반대로 산귀가 그랬던 것처럼 멀거니 서서 산귀가 하는 냥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원방감여에 호기심을 가졌지 않았던가.
사랑들은 동기감응보다 원방감여를 알아주니까.
지금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사부님이 당부하시던
비보감여(悲報堪與)에 매달린다면 돈벌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
다. 하지만 중원을 사등분한 이면에는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
문, 원방감여를 탐구하고픈 생각은 변함없었다.
'이럴수가! 부귀를 얻는 자리도, 자손이 번창할 자리도 아니
다. 하지만 이보다 좋은 길지는 없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
온해진다. 이것이 동기감응인가?'
원방 감여법으로 살펴보면 명당이라 할 수 없는데 묘혈이 아늑
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칠, 팔순 먹은 노인네라면 한 번쯤 쉬
었다 갈 자리였다.
'조금은 알 것 같군. 동기감응...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어.'
산귀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동종관의 시신은 잘 안장되었다.
곡성(哭聲) 대신 분루(忿淚)를 흘린 삼공은 조용히 흙을 덮고
봉분을 만들었다. 그때,
"쉿!"
반여량이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황급히 땅에 주저앉
았다. 그리고 지감을 느낄 때처럼 무아경에 접어들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눈을 뜬 반여량의 눈빛은 깊숙이 잠겨들었다.
"포위됐어."
담담하게 흘러 나온 음성이었다.
< 第 一 卷 終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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