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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간구(약 5장16-18)
성경본문: 야고보서 5:16-18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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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이 자리를 찾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이제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읊던 시구를 떠올리며, 더위에 허물어진 영적인 제단을 다시 수축하기 위해, 내일 새벽부터는 가을맞이 특별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대화는 아닙니다.
어떤 기도는 대화 이상입니다.
기도 가운데는 대화라기보다는 탄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간절한 호소, 애걸, 신원이요, 생의 승부를 거는 씨름과 같은 기도도 있습니다.
이 요청을 들어주어야 살수 있다는 간절한 절규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기도 - 의인의 간구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면 이 선언에 대해서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누구든지 이 진리를 바로 깨닫고 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의인인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의 낱말 하나하나를 살펴서 바로 깨달아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체험합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그러면 본문이 말하는 의인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가리켜 본문은 의인이라고 말합니까?
본문은 앞부분의 계속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앞에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서로 간에 원망과 비난, 시기와 다툼, 저주와 판단, 온갖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얼룩진 공동체이기에, 상호간에 고백해야 할 허물과 잘못을 모두 갖고 있는 평범한 신자들을 향해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거기에 곧장 이어서 나오는 명제적 선언이 오늘 본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그러면 누가 의인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눈앞에 어떤 인생이 의인입니까?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아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정결케 되고, 매일 죄 고백을 통해 씻은바 될 때,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요청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신앙 공동체라고 하면서도 서로 원망하고 서로 비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시기와 다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온갖 더러운 악들이 넘쳐 나오는 하수구와 같은 사람들인데 불구하고, 성경은 놀랍게도 그 동일한 사람들을 향해서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상호간의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위한 공동 기도를 말하고, 곧장 이어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 ‘의인의 간구’라 하는 가장 자연스런 이해는 ‘범한 죄를 사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는 의인들이고, 청함을 받아서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 장로들의 모습이 바로 의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 기도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너희 가운데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지니라.”
그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의인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조금 더 앞부분과 관련시켜 보면 청함을 받은 장로들의 기도 뿐 아니라 고난 중에 기도하는 모든 성도의 기도가 바로 의인의 간구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고난 속에 부르짖는 성도,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원리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는 구절은 그 다음 나오는 구절과 도 무관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 .”
마치 야고보가 의중에 두고 있는 의인의 대표로서 엘리야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러면 그렇지 엘리야만큼은 되어야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모세, 사무엘, 다니엘의 부탁이라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적이 없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간구한다고 할지라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은 대표적 의인의 하나로서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엘리야 정도는 되어야 의인이라고 하겠지 . . .”
하지만 야고보는 급히 그런 오해를 방지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엘리야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다’
엘리야를 예로 들면서도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우리도 역사 하는 힘이 엄청난 간구를 드릴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간구란 무엇인가? - 기도의 구성요소의 하나
그러면 간구란 무엇입니까?
기도의 몇 가지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구성 요소를 살펴봅시다.
먼저 ‘찬양’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찬양’찬양의 요소가 먼저 나오게 하십시오.
‘찬양’찬양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임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기도에 ‘찬양’찬양하는 요소가 포함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한없이 좋은 분인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거룩하신 영광스러운 빛 앞에 서게 되면 자기가 죄인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죄 사함의 요소가 포함됩니다.
사죄가 거기에는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칭송하는 동시에 내 죄를 고백하는 죄 고백이 기도의 요소 중에는 나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하긴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찬양한 다음 바로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반응이라면 감사는 그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우리 됨에 대한 반응입니다.
또 감사는 죄 고백에 이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순서보다도, 있어야 할 요소가 기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빠뜨려서는 안 되는 마지막 요소가 간구입니다.
하긴 대부분의 기도에 빠지지 않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간구로만 구성된 기도를 드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간구란 무엇인가?(2) - 간구의 형태
그러면 간구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의미는 하나님 앞에 내 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에 쓰인 “간구”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으로 ‘자주’ ‘지속적인’ ‘끊임없는’ 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간구의 성격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자주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소원의 아룀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열렬한’ ‘간절한’ 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구’라 할 때는 ‘간절한 아룀’이요 ‘열렬한 아룀’입니다.
‘간구’라는 표현 속에는 시간적인 지속성과 태도에 있어서 열렬함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점에서 신자들의 흔한 기도와 다릅니다.
의인의 간구는 진지한 간구요 열정적인 간구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사람은 기도를 자주 할 뿐 아니라 기도에 그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붙습니다.
기도를 시키면 주저주저하지 않습니다.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존전에 나가기 부족한 자신임을 늘 인식하지만 아들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강권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사람들의 기도는 동기가 순수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구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구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 이다.”
‘하나님! 내 직장이 도무지 신앙생활 하기 힘듭니다. 옮겨주십시오.’ 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이 직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말없는 탄식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간구는 말로서 나타나지지 않는 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폭포수와 같이 거침없는 말을 쏟아 붓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청산유수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드려지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을 보장받는 기도입니다.
누구나 성도라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성도라고 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이런 간구에 탁월한 모범을 보인 사람들 중에 야고보 선생은 엘리야를 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가 유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차지하는 위치가 별달랐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많은 인물 가운데서 엘리야가 차지하는 위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특별했습니다.
우리도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으면 꼽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 . 하긴 이순신 장군도 요새 와서 대접을 받는 거지, 당대에는 비참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포승줄로 묶여가서 죽도록 고문을 당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가니까 인정을 받는 겁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주 쳐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많은 선지자의 대표가 엘리야였습니다.
구약에서 두 사람 들면 율법을 준 모세, 그리고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성경을 한 권 쓴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엘리야를 부각시킨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엘리야는 죽임을 보지 아니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에녹 다음으로 하늘나라로 직행한 사람이 엘리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살아서 그대로 승천한 사람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치고는 엘리야 흠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의 대표자로서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로서 변화 산상에서 주님을 만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의논하는 3자 회담에 대표로서 거기 나오고 있습니다.
* 엘리야 그는 누구입니까?
그러면 엘리야 그는 어떤 일을 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 이스라엘 역사의 한 암흑기에 등장합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상황을, 영적인 분위기를 급격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자신을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그는 제8학군 출신이 아닙니다.
강남 제8학군에서는 그런 인물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인물은 과외선생 밑에서 나오는 법이란 드뭅니다.
그는 서울 출신도 아닙니다.
남쪽 유다의 서울인 예루살렘 출신도 아니고, 북쪽 이스라엘의 서울인 사마리아 출신도 아닙니다.
서울깍쟁이도 아니고 평양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별 이름도 없는 시골 출신입니다.
예루살렘이건 사마리아이건 도시 사람의 눈에는 촌티 나는 시골사람입니다.
길르앗 디셉 사람이라고 왕상 17장 1절은 소개합니다. 길르앗 디셉이라고 하는 지역은 요단 동편 척박한 지역입니다.
간간이 숲이 있고 양떼들이 풀을 뜯는 미개발 지역입니다. 이런 데는 땅 가지고 있어봐야 백년 가야 땅값이 뛰는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어수룩하면서도 고집이 있는 강인한 시골사람, 그래서 잘난 체하는 도시 사람 눈에는 언제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산간벽지 출신입니다.
옷도 철마다 유행이 바뀐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지, 늘 입는 약대 털옷에다가 장발의 사나이입니다. 그의 장발은 유행 때문이 아니라 퇴폐 이용업소 신세진 적이 없기 때문에 생긴 스타일입니다.
이 엘리야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왕궁에 하루는 불쑥 나타납니다.
본래 왕의 자리나 대통령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앉아서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가 국민에게 소망을, 나라에 축복을 주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앉아야 그 백성과 국민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합왕 보십시오.
왕으로 부름 받아 가지고도 그저 더럽고 방탕한 삶에 내어 맡기고 있습니다.
아합은 욕심이 끝이 없어서 왕이 되고도 만족이 없습니다. 온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한 백성의 포도원까지 탐을 내어 나물 밭을 삼고 싶어 합니다. 보통 권력을 잡으면 거기 만족을 하는데 이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토지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습니다.
어떤 대통령 생각나지요?
그런데 아합 왕의 곁에는 악의 대명사로 통하던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이 씨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First lady들 가운데 그 첫 번째 여인이 이세벨입니다. 이세벨, 이멜다, 이순자 . . .
이세벨 그녀는 사악하고 간교하고 교만하고 모든 사교라고 하면 쌍수로 환영하는 여인입니다. 참 신앙과 순결의 대적 자 입니다. 남편의 성품 중 가장 악한 면을 부추기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시집온 여자입니다. 안으로는 모든 음흉한 흉계를 직접 꾸미고, 밖으로는 하청을 주어 잔인한 권력을 휘둘던 여인입니다.
남편이 그 포도원 하나를 손에 못 넣어서 끙끙 앓는 것을 보니까 답답한 겁니다. 뒤로가 계시라 하고, 자신이 앞장서 그냥 하루아침에 손에 넣습니다. 가짜 명령과 조서를 써 가지고 선한 피를 흘리게 하고, 그것을 남편 명의로 돌리게 할 줄 아는 수완 좋은 여인입니다.
악한 정권 밑에서 독버섯처럼 무성해진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지역마다 득실거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알숭배요. 거기 항상 수반되는 것이 아세라 숭배입니다. 무속 인이 수십만을 헤아리는 오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일찍부터 섬기는 신 바알은 히브리말로 ‘주인, 남편’이란 뜻입니다. 대표적인 가나인 족속의 신으로 풍요의 신입니다. 말하자면 “잘살아 보세”가 이들이 부르는 대표적 찬양입니다.
가나안 족속 - 세상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서 “잘살아 보세”가 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생의 목표는 다릅니다.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 족속과 사는 목표가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별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바알이 주인, 남편이란 말이다 보니 여호와 역시 바알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이요, 남편이므로 여호와를 나의 바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호와가 바알인지 바알이 여호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들은 결코 여호와를 한쪽 편으로 폐기처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 섬기는 일을 멈추지는 아니해서 안식일마다 종치는 소리는 이전보다 더 많이 울리는데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종교가 늘어났던 것이 그 암흑기에 악한 정권 밑에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알 종교인지 여호와 종교인지 구별이 없이 그냥 뒤섞여지는 시대였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잘살게 해주는 이가 ‘내 남편, 내 주인’이라는 세속 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또 이 바알 숭배는 항상 여신 아세라 숭배와 동행했습니다.
바알 제사장 450명하면 아세라 선지자 400명, 그렇게 엘리야가 대결하는 것 아닙니까?
850명 대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세라 신은 어떤 신입니까?
이 아세라는 번식과 다산, 사랑과 애정,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동시에 전쟁의 여신으로도 통했습니다. 바알 숭배의 찬가가 ‘잘살아 보세’라면 아세라 숭배의 찬미는 ‘즐겨 보세’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국민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풍요롭게 살아보자’ 거기다 ‘쾌락 추구를 하면서 살자’ 그게 전부였습니다. 돈 많이 벌어 enjoy 하는 것이 도시 사람들의 목표인 동시에 시골 사람들의 목표인 시대였습니다. 이런 퇴폐한 국민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디셉 사람 엘리야입니다.
개혁을 위해서 정화 운동 본부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새마을운동, 새마음 운동, 바르게살기운동 등을 벌여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정화운동 본부장으로 앉아서도 더러운 마음을 갖고 있으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위해서 단체를 설립한다든지 기금을 마련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 사람을 택해서 당신의 거룩한 대업을 성취하십니다. 새 구상이나 엄청난 예산의 뒷받침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십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
하루는 갈멜 산에서 호령하면서 이스라엘로 결단토록 촉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어다.”
며칠 뒤에는 광야에서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그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됐습니다. 새로운 계획이고 뭐고 됐으니까 내 생명을 가져가십시오. 더 이상 이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나를 부르셔서 개혁하라고 그럽니까? 난 못하겠습니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때는 열심이 특심해서 온 민족을 호령하다가 다음 순간 낙심되면 죽겠다고 앙탈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본문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점은 그는 모든 열정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생이었지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히브리씩 표현으로 “기도로 기도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고 원하였다’ 히브리 사람들은 동사를 두 번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강조의 표현을 합니다. 그는 ‘기도하고 기도한’ 사람, 열심히 기도한 사람입니다.
기도라는 면에 있어서는 탁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정열을 기도에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엘리야의 능력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간절히 기도한즉” 성경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그가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우리는 때로 간절히 기도가 되지 않으면 ‘간절히’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하나님은 아시지요?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지 그냥 보통으로 부르짖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요청하는지 하나님은 아시는데 자기 설득이 안 될 때 일수록 ‘간절히’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간절히’ 안 써도 간절히 기도하는지 아니하는지 아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엘리야보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간절히 기도했던 겁니다.
“간절히”라는 단어는 제 3자가 사용할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자기가 자기 기도에 사용하는 단어여서는 효력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분 여호와를 섬기는 대신 번영의 신 바알과 쾌락의 신 아세라를 섬긴 대가로 무서운 가뭄을 선포합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열왕기 상 본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여 가뭄을 선언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의 기도의 결과라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가 간절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비를 주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역시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그런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이 영어로는 “before whom I stand" 입니다. 여기 서 있다는 표현은 바로 유대인의 기도 자세입니다.
‘내가 항상 그분 앞에 서 있지만, 기도의 자리에 서 있지만 그 하나님이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말하지 아니하면 이 땅에 수년 동안 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슬 한 방울도 없을 것이다.’
이로부터 3년 6개월 뒤 우리는 갈멜 산꼭대기에서 엘리야를 다시 만납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끓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아주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유대인의 기도의 자세가 ‘땅에 끓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벌써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한 상황 속에서 갈멜 산에 올라가서 그는 자신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비를 다시 주십시오.’
이 집중적인 기도, 정열적인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나 아합이나 똑같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그 정열을 어디에 쏟는가에 달랐습니다.
아합은 왕으로서 권력을 다 차지 해 놓고도 이제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이 금한 대상까지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했습니다. 거기에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합도 선택과 집중을 했습니다. 나쁜 일을 선택하고 거기 집중했습니다. 나쁜 일이라고 하면 골라 가면서 열정적으로 하던 임금입니다.
어디 그런 사람이 아합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 하고 싶은 일에 정열을 쏟으면서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꼭 하기 원하는 일은 어떻게 라도 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꼭 해야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것은 하려고 시도합니다.
아합은 이세벨의 충동대로 요란한 우상 숭배, 말 못할 죄악을 짓는데 생을 쏟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니라.”
공동 번역은 더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세벨의 농단에 빠져서 목숨을 내 던져 가며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로 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자기 아내의 농간에 빠져가지고 목숨을 내던져 가면서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일찍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대를 동일한 정열로 살았지만 디셉 사람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역사 하는 힘이 엄청난 간구를 드린 의인의 표상으로 대두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간절히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아합 왕은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성령의 거룩한 충동에 따라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고 싶은 욕망은 성령이 주시는 충동입니다.
다른 모든 충동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건지 아닌지 분별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은 욕망은 항상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욕망입니다.
‘내가 이래 가지고는 되겠나? 내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해서 되겠나? 10년 동안 신앙 생활했다고 하면서 이래서 되겠나?’ 하고 여러분을 향해서 말씀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성령이십니다. 기도의 충동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러운 충동대로 계속 상호 원망과 비난, 시기와 다툼, 저주와 판단으로 온갖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여러분의 입술을 채우시렵니까?
상호간 허물은 서로 고백하십시오.
해가 저물기 전에 지난 잘못들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더 이상 세상 것을 추구해서 다투고 싸우는 속에 휘말려 들지 마십시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한 그런 부질없는 짓에 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땅의 티끌을 핥으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남아 있는 정열을 이제 거룩한 것을 위해 쏟으십시오.
자신을 주께 맡기고 성령에 따라 기도에 자신을 쏟으십시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습니다.
생의 모든 상황을 기도로 이끄는 재료로 삼으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서 만족하지 못한 문제들로 인해서 고통스런 문제들로 인해서 이런 저런 것 때문에 괴롭히는 요인이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기도로 몰아가는 방편일 수 있습니다.
직장은 있지만 결혼대상자가 없습니까?
혹 인간관계의 문제로 고민하십니까?
그것이 시댁과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는 남편으로 인한 고민입니까?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해하십니까?
학자금으로 인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업 자금으로 답답해합니까?
청산해야 할 빚으로 인해서 괴로워하십니까?
질병에서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악습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뜻대로 풀리지 아니할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이 정열을 다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간구해 보십시오.
만족스럽지 못한 일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를 기도의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그 문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십시오.
모든 순풍과 역풍을 다 기도로 나오는 기회를 삼으십시오.
“끊임없이 드리는 열정적인 간구는 반드시 일을 이뤄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인 문제를 여러분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성경을 반드시 일 독을 하고 싶었습니까?
아니면 꼭 한사람을 전도하고 싶었습니까?
그분의 이름을 불러 간구해보십시오. “끊임없이 드리는 열정적인 간구는 반드시 일을 이뤄 냅니다.”
구역에도 간구해야할 제목이 있습니다.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식구들은 없습니까? 먼 거리 때문에 교회 출석을 망설이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드리는 열정적인 간구는 반드시 일을 이뤄 냅니다.”
교회적인 간구의 제목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국가를 위해서도 간구해야할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살고 있는 조국 상황이 아합 왕 시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쪽은 방종하고 북쪽은 억매여 있습니다. 한쪽은 음식 쓰레기로 넘치고 다른 쪽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양극화된 남북관계를 위해서 간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온통 자신을 기도에 쏟아 붓는 7천명을 남기실 것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 여러분의 이름이 있기를 바랍니다. 온통 기도에 자신을 쏟아 부을 때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 하십니다.
다른 것은 다 해보면서도, 그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고 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금만이라도 기미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여기 저기 다 찾아가 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에 자기 자신을 쏟아 붓지 않았다고 하면 올해 남은 날들은 기도에 전념하는 기회로 삼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고 있습니다. 누가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누가 가장 일찍 교회당에 나와서 가장 늦게 나가는가를 살피시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생의 무게를 실어서 간절히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지 감찰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열을 다해서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많습니다. 의인의 간구가 응답되는 것을 목도하는 복된 여생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