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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 180주년에 맞이하는 성소 주일은 다른 때와는 달리 새로운 의미로 와 닿습니다.
조선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참된 믿음과 식별력 그리고 실천적인 노력으로 조선 선교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특히 조선 입국 전, 중국 사천대목구에서 6년간 신학생 교육을 담당한 경험으로 사제 양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쳤는데, 그것은 조선 실정에 맞게 속성 신학교육으로 사제를 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제 양성은 조선교회의 가장 큰 희망으로, 이는 1838년 11월 30일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현지인 사제 양성입니다. 모방 신부가 작년에 보낸 3명의 어린이는 너무 훗날의 희망입니다. 통킹에 계셨던 베리트(Berytte)명의의 주교님을 비롯하여 초기 우리 대목구장들께서 행하신 모범을 따라 저도 도착하자마자 중년 대상자를 물색하였는데, 42세 나이로 독신을 지키고 있는 그는 우리 셋을 조선으로 인도한 안내자였고, 영광스러운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입니다.” 앵베르 주교는 열의와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발굴하여 속성으로 사제로 서품하려는 계획으로 독신자 중에 사람을 뽑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정하상입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의 손과 발이 되어 조선교회 발전을 위해 순교로 투신한 신학생 정하상과 아버지 정약종, 어머니 유선임, 형 정철상, 동생 정정혜 등 가족 모두는 순교하여 성인과 복자 반열에 올랐습니다. 사제 영입에 정성을 쏟고, 사제들과 함께 선교에 열정을 쏟은 정하상 성인은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의정 이지연에게 상재상서를 올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라며 천주교의 정당성을 알렸습니다. 그는 서소문에서 참수를 당했지만 박해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첫 사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글. 김귀분 리나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