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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반여량은 밤이 으숙해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어
둠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진 눈. 무엇을 바라보는 것이 아
니라 그냥 허공에 걸어 두었을 뿐이다.
사부님은 문장(文章)에 밝았다. 덕분에 반여량은 어려서부터
온갖 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감룡경(憾龍經)도 그 중 하
나였다.
감룡경을 통독했을 때, 사부는 웃음을 흘리며 물어오셨다.
"무엇을 배웠느냐?"
"생활입니다."
감여가 단지 죽은 사람의 묘혈을 찾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굳이 감룡경을 들춰 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
곽박(郭璞)이 감여를 무덤에 적용시켰다면, 송(宋) 시대의 학
자 왕급(王伋)은 건축양식에 감여를 도입시켰다. 지붕에 새겨
진 조각이나 대문에 붙이는 귀면탈(鬼面奪)은 모두 상서로운
기운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어린 마음에 꿈을 마음껏 펼쳐 보았다.
사부님이 기거하는 처소는 북동쪽으로 정하자. 물론 침상은 두
침(頭枕) 방향을 북쪽으로 해야겠지. 그러면 나는 남쪽...?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가물거렸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당시에는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워지지 않았
으니까.
한동안 잊고 살았다.
여인에게 정신을 빼앗겨 사부님의 온정을 잊어 버렸다. 그래도
운명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올바른 감여가가 되라고 질타하시
면서도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신 사부님.
다시금 느껴보니 사부님만큼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도 없었다.
나 자신을 나 자신보다 더욱 사랑해 주신 분. 그렇기에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감여를 할 적에도, 그렇게 해서 번 돈이
엉뚱한 여인에게 흘러들어 갔어도 질책 한 말씀 없으셨다. 하
기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돈에 대해서는 워낙 담백하셨던 분이
니.
흑의인을 떠올리다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생각이었다.
'사부님, 산귀가... 원방파 총수가 동기감응을 인정했습니다.
만족하시죠? 그런데 왜 숨어 사셨습니까? 당당히 나서서 일하
다 보면 운명하시기 전에 인정받았을 것을...'
뛰어난 감여를 지니고도 무명인으로 숨져야 했던 사부님이 안
타까웠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사부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듯이, 흑의인의 마음 또한 읽을 수 없어
서?
반여량은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때,
쉬익!
실바람이 일렁인다 싶자 방문이 살짝 열리며 전신을 검은색으
로 감싼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여량."
"..."
"시간이 없어서 길게 묻지 않겠다. 제사연공실(第四練功室)에
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라."
걸쭉한 변성음(變聲音)이었다.
반여량은 관심 없다는 듯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반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둠 한구석을 응시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능공십자라는 분, 맞소?"
"기가 막히군. 네 앞에서는 어떤 변장도 소용없겠어. 그래, 맞
다. 내가 능공십자 학구다."
능공십자는 정체가 탄로나자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목소리까지 마른 장작이 부러지는 듯 딱딱 끊어 말하
는 원래의 음성으로 되돌아 왔다.
"왜 변장을 했소?"
"일심각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없다. 비수당 무인 칠
할이 죽었다. 오늘 밤에도 급습을 받았고, 형제 여섯 명이 숨
을 거웠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
학구는 몹시 다급해 보였다.
사람은 이럴 경우에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혈향봉 조중처
럼 마음 속 격동을 그대로 드러내며 오열을 삼키는 것과 능공
십자처럼 더욱 차디차게 굳어지는 것.
반여량은 처음 학구를 만났을 때 마치 감정 없는 목석이 걸어
다니는줄 알았다. 그만큼 인상이 차디찼고, 행동이 절제되었
다.
"나는 돈을 받고 감여를 해주면 그뿐..."
"정말 미련한 놈이군. 아니면 순진한 놈이거나. 죽고 죽이는
싸움을 봤으니 잘 알 터, 이건 무림 일이다. 그것도 매우 지독
한 일에 걸려들었어. 대소(大小) 삼십여 회의 격전을 치른 나
지만 아직까지 영문도 모르고 검을 휘둘러보기는 처음이다. 네
가 무림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 불운이겠지만... 이런 일의 최
후에는 늘 한 사람만 남게 된다. 승자와 패자, 방관자나 조력
자는 모두 죽어. 그래야 말이 없거든."
학구는 말을 이어갈수록 차분하고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내 목숨이 걸린 문제라.... 이 말이오?"
"미련하지는 않군."
순간, 눈과 눈이 마주쳤다.
불통이 튀기는 듯 거센 눈길이었다.
능공십자가 말한 내용은 반여량도 이미 감지한 부분이었다.
자신 있었다. 늘 죽음과 가까이에서 살아왔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생기 없는 시신을 대하다 보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
는 회의에 젖어들곤 했다. 그런 감상을 사부님은 혹독한 수련
으로 일축해 버렸다.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모든 의문은 실타래 풀리듯 풀릴
것이다. 조급하게 서둘지 마라. 인생이란 찰나에 불과한 것,
그렇기 때문에 한날 한시도 가볍게 보내서는 안 된다.'
아직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전체 속에 작
은 부분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는
무수한 난관이 산재했다. 대부분이 뇌력과 연관된 부분이었지
만 육체적인 것도 수월치 않았다.
호랑이를 아는가? 이놈은 눈빛 하나로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놈이다. 표범을 아는가? 놈이 턱을 쩍 벌릴 때 드러나는 날카
로운 송곳니를 보았는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무섭고
잔인한 놈들은 굶주린 늑대 무리다. 이놈들은 자신의 동료까지
도 먹어치운다. 겨울 산행에서는 한 번씩 꼭 만나는 동물들.
호랑이를 마주 대하고도 기가 질리지 않는 담력, 표범의 일격
을 피해내는 몸놀림, 늑대 무리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지혜와
건각(健脚)을 갖지 않은 사람이 겨울 산을 탄다면 틀림없이 그
것으로 끝이다.
반여량은 무려 이십여 년이나 산 속에서 고독과 맹수와 싸우며
지냈다. 거주하는 곳은 속세이지만 일 년 중 열 달은 산에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보다 맹수가 더 친근했다. 하물며 무공을
익혔다면 얼마나 익혔을까? 늑대 무리도 어쩌지 못했는데 인간
쯤이야.
철없는 생각이었다.
오급산에서도, 백부하 강변에서도 깨닫지 못했다.
오늘 뒷산에서 직접 검을 겪어보고 무인들이 어떻다는 것을 깨
달았다. 대화를 나눈 흑의인의 수하가 검을 날려올 때도 꼼짝
하지 못했는데 정작 흑의인이 공격해 온다면...
나름대로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전에는 남의 일이었지만, 뒷산에서 살기를 접하는 순간부터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능공십자의 말은 옳을 것이다.
"오래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 제사연공실에서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어서 말해라."
능공십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시신을 보았고..."
"탈명화검의 시신인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지?"
"두 달."
"두 달? 사인은?"
"검상. 오른쪽 동자료에서 예풍혈까지 휘둘려진 검상(劍傷)."
"으음! 그래서?"
"그것뿐이오."
"그럼 이번 여행은 복수로군."
"그건 모르겠소. 나는 단지 악기(惡氣)를 따라가면 되니까."
"음...! 보름 여정이라 들었는데, 기간이 정해져 있다면 목적
지도 분명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소. 이 지방 모든 음기는 파양호의 강랑산으로 모여드니
까. 최종 목적지는 거기가 되겠죠."
학구는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탈명화검이
죽은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산귀가 초대받고, 반여량이
불려오고... 명당(明堂)을 찾는가 했더니, 일심각이 관여한다.
그리고 비수당이 투여된다.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은 가졌다. 탈명화검의 복수이든가, 아니
면 무슨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능공십자가 알고 싶
은 부분은 후자였다. 공격해오는 흑의인들이 너무 강하기에.
악기를 찾아간다. 이 말은 복수를 의미한다. 탈명화검이 다른
일에 관여했다면 목적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게다.
"나도 하나만 물어봅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음...! 부끄럽지만 모른다."
반여량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비수당, 정대. 곽가장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아는 바
가 없다는 것은 일이 의외로 복잡하고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기가 성한 땅이라... 무슨 수로 그런 땅을 찾아가나?"
반여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잊은 모양인데... 내가 동기감응 감여가요."
"그럼 지기(地氣)를 읽고 음기를 골라낼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그래 왔소. 오급산을 찾아간 것도, 이곳 청붕성에
들어 온 것도."
"음...! 몸조심해라. 혹,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찾고."
학구는 알 것을 다 알았는지 문틈으로 밖의 동정을 살펴보았
다.
"왜 나를 염려해 주는 거요?"
능공십자가 고개를 돌렸다.
"무인은 은원(恩怨)을 분명히 한다. 너는 백부하에서 도움을
줬다. 네가 흑의인들의 기습을 말해줬고, 덕분에 음대원 삼십
여 명이 유명을 달리했지만... 만약 기습을 받았다면 희생이
더 컸을 것이다. 또한 내 임무는 너를 지키는 것.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지켜 준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오?"
학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외에 달리 무슨 뜻이 있겠느
냐는 듯이.
"무인... 복잡한 사람은 한없이 복잡하고, 단순한 사람은 또
더 없이 단순하구려, 어떤 사람이 검을 잡는지 궁금했는데, 이
해할 수 있겠소. 효웅(梟雄)이 되려는 사람, 아니면 협사(俠
士)."
학구는 묵묵히 반여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얼굴, 행동에는 미미한 변화조차 일지 않아 그가 무
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말없이 몸을
돌린 학구는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부
분만 골라가며 신형을 날리는 모습은 마치 솔개를 피해 도망치
는 두더지처럼 재빨랐다.
'비수당... 저들은 열혈남아(熱血男兒)들이다. 우정을 알고 젊
음을 안다. 흠...! 은원이 분명하다? 좋은 말이야.'
반여량 또한 한창 젊은 나이였다.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니었다. 답답하던 심사가 조금은 풀렸다.
진정한 사내를 만난다는 것은 신분 고하를 떠나서 즐겁지 않은
가.
* * *
삼화일지 최신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너무 고요하고 조용해서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침묵이었다.
그는 윤명의 명을 정면으로 거역했다.
출동하라는데 움직이지 않은 것은 참수(斬首)에 해당된다. 그
러나 윤명은 싸움이 끝난 지 두 시진이 흐르도록 얼굴도 비치
지 않는다.
철저한 무관심.
증오라는 것은 약간의 미련이라도 남아 있을 적에나 표현된다.
그렇기에 증오는 용서라는 형태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
관심은...미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왜? 왜? 윤명은 왜 삼 년이란 세월을 참아왔을까?
곽가장에서 나설 때를 기다려 간통사실을 터트린 저의는 무엇
일까? 그것도 직접 검을 든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산적을 죽
인 솜씨는 무적의 단창잡이로 손색이 없었다. 강서 무림계에
단창 제일인자라는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런 실력 시위
까지 하면서 직접 죽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은 모두 하나로 집약되었다.
곽무연, 그녀를 잃고 싶지 않은 게다.
최신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곽무연을 진정
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윤명은 그렇지도 않았
다. 윤명이 바라는 것은 오직 곽가장이라는 배경뿐이었다. 아
무리 야망에 미쳤다해도 아내가 다른 사내와 간통을 했는데 용
서할 수 있을까?
윤명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나 냉정했고, 일처리는 꼼꼼했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드러
내지 않았지만 공적인 업무에서는 상벌(賞罰)이 뚜렷했다. 아
무리 성품이 나쁜 자라도 무공이 뛰어나고, 충성심을 믿을 수
있으면 버리지 않는다. 그런 반면에 과거 공훈이 아무리 많더
라도 믿을 수 없다 여겨지면 가차없이 버린다.
이번에는 자신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일심각 무인들은 곽가장을 떠나오기 전, 장주의 방문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런 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일이 있
으면 각주가 장주를 찾아갈망정 장주가 직접 찾아온 예는 없었
다.
그렇다면 무슨 말인가 있었을 텐데.
최신은 일심각 무인 전부가 모인 자리에도 늘 배제되곤 했다.
방법이 묘했다. 최신이 외출했을 때, 아니면 무공을 수련하고
있을 때, 하필이면 그럴 때만 골라서 일심각 무인들을 회동시
켰다.
횟수가 몇 번 되지 않아 무심하게 흘려버렸지만, 그때부터 최
신은 소외된 셈이다. 사실, 이번 여행에 동참한 것도 탈명화검
의 복수에 관한 것이라는 것만 알 뿐,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다
른 사람들 수준을 넘지 못했다.
최신은 마음을 심연 깊숙이 흐르는 물결처럼 차분하게 가라앉
혔다.
그는 몸을 일으켜 허리춤에 꽂아 둔, 곽가장에 입문하면서부터
한시도 떼어놓지 않던 점혈침을 풀어놓았다.
'곽가장에서 받은 것은 모두 돌려준다.'
행동 방향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어차피 잘된 일이
다. 곽무연과의 밀어상통(密語相通)이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그러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녀 곁에 머물고 싶
다는 생각 또한 진심이었다.
점혈침을 탁자에 올려놓은 최신은 조롱 속에 든 비둘기를 꺼내
팔목 위에 올려놓았다.
곽무연이 기르던 비둘기.
회색 털 곳곳에 그녀의 손길이 머문 듯, 입술이 닿은 듯 정겨
웠다.
이제 이 전서구는 창천(蒼天)을 훨훨 날아 그녀에게로 돌아가
리라.
미리 적어놓았던 전서를 곱게 접었다. 곽무연에게 보내는 처음
전서이자 마지막 전서. 그 날... 욕탕에서 맺은 관계가 마지막
이었다. 그녀를 안은 것도, 얼굴을 본 것도.
푸드득...!
전서구가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가나?"
최신은 어둠 속에서 점점 윤곽이 뚜렷해지는 작은 동체를 바라
보았다. 오 척을 약간 웃도는 단신(短信), 상대를 비웃는 듯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 어깨 위로 삐죽이 솟아나온 단창,
윤명이었다.
"후후후! 삼 년이라면 짧은 세월이 아닌데 부대주라는 사람이
아직도 나를 파악하지 못했다니 섭섭하군. 이봐, 내 작호가 홍
홍록록이야. 이 옷에... 피나 풀즙이 배어 있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지."
최신은 확연히 깨달았다.
윤명은 모든 일을 완벽히 처리한다. 이번 일도 같다. 그는 자
신을 죽이려는 게다.
"대주."
"대주? 아니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음...! 그래, 네
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으니 형님이 되겠군. 형님, 동생하면
되겠어. 안 그런가?"
"곽무연을... 어찌할 생각이오?"
"곽무연? 푸하하핫...! 좋아, 좋아. 그녀는 네 아내이기도 하
니까 이름쯤이야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겠지."
"대주."
툭!
최신의 발 앞에 점혈침이 떨어졌다. 청붕분타를 빠져나오면서
처소에 두고 왔던 병기. 다른 것도 떨어졌다. 처소에서 날렸던
전서구. 전서통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서신은 이미
윤명에게 넘어간 듯했다.
- 무연.
일심각주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소.
나는 떠나거니와 각주가 곽가장으로 돌아가기 전, 대책을 강구
하시오. 그는 삼 년 세월을 참아온 효웅. 그대를 반드시 죽이
려 할 게요. 무연의 입술, 촉감...모든 것을 간직하리다.
최신은 창자가 벌려진 채 목이 꺾인 전서구가 꼭 자신의 모습
처럼 비쳐졌다.
"들어라."
"대주 싸우고 싶지 않소."
"들어. 내가 베푸는 마지막 호의다."
"언제... 알았소?"
"푸훗! 그게 그렇게 궁금하나?"
"나도 여자깨나 품어본 사내지. 그런 내가 손길을 탄 여자와
타지 않은 여자를 구분하지 못하겠어? 참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관계를 가진 날, 꼭 그 날만 무연은 너를 찾았어. 후훗!
더럽지 않나?"
"그녀를... 어찌할 생각이오?"
"후후훗! 어떻게 할까? 죽여? 살려? 죽여야겠지. 더러운 계집
과 살을 섞고 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내가 장
주에 취임한 후에나 해야겠어. 곽가장 현판(懸板)이 윤가장으
로 바뀌는 광경을 못 봐서 어쩌지?"
"곽무연이 불쌍하군. 너 같은 놈을 남편으로 맞다니."
최신은 점혈침을 집어들었다.
장주에게 입은 은혜는 컸다. 자칫 거리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
는 일가족을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 그것은 윤명도 마찬가지
다. 멸문직전까지 치달았던 신창윤가가 회생한 것이 누구 덕이
란 말인가. 인간의 탈을 썼다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 그
는 윤명을 죽이기로 작심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호오! 이제 막말을 하는군. 좋아. 그런데 죽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둘 게 있어. 방금 곽무연이 불쌍하다고 했나? 천만에! 인
간은 끼리끼리 만나는 거야. 못난 인간은 못난 인간끼리, 잘난
인간은 잘난 인간끼리. 너는 그 와중에 끼여든 애완견에 불과
해. 후후훗!"
"닥쳐!"
최신은 점혈침법 십팔초를 번개처럼 펼쳐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더라도 한 점 위축됨이 없이 전개하기 위하여 얼마
나 고련(苦練)을 했던가. 가지 한 개에서 뻗어 나온 세 송이의
혈화(血花). 환(幻)이 극치에 달해 삼화일지란 무명까지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역시 삼화일지답군!"
창! 창창창...!
윤명은 너무 간단하게 막아냈다. 뿐만 아니라 짓쳐오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으며, 일침(一針)을 쳐내느라 비틀어진 침향(針向)
때문에 공격부위를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쉬릭! 차앙!
일초식을 다시 교환한 두 사람은 서로 엇갈렸다.
"네 침법은 잘 알고 있지. 곽가장은 지겨워. 모두 삼혼검법의
영향으로 삼검(三劍), 삼침(三針)... 이런 식이야. 세 가지에
서 벗어날 줄을 몰라. 나도 삼창(三槍)이란 게 있지. 무(舞),
섬(閃), 타(打). 삼초로 이어지는 연환결(連環訣). 가전창법에
삼혼검법의 오의를 가미한 거야. 꽤 맛있을걸?"
윤명은 자신만만했다.
일 검을 주고받은 결과였다. 윤명은 승세를 잡은 반면에 최신
은 점혈침법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어깨가 찔렸는지 싸하게 쓰
려왔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윤명은 단창 한 개만을 사용하고 있다. 무적단창의 진가는 쌍
창에서 나온다. 음양(陰陽)을 기조(基調)로 한 창법. 음창, 양
창으로 나뉘어 유성(流星)처럼 거센 물결을 쏟아내면 막을 방
도가 없다.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
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과연 신창윤가의 창법이다. 그는 간
교하게도 사람들 앞에서는 무공의 진수를 드러내지 않았다.
윤명은 벅찬 상대였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침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싸움은 준비된 싸움이었다. 완벽하게 함
정을 파놓고 기다린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고육지책(苦肉之策)
밖에 없다. 그래야 살 한 점이라도 깍을 수 있다.
"무(舞)!"
윤명은 우렁찬 일갈과 함께 쾌공(快功)을 쓸어냈다.
차앙!
창과 침이 부딪치며 점혈침 중간이 뚝 부러져 나갔다. 동시에
귀곡(鬼哭)을 토해낸 창날이 오른손을 찔러왔다. 아니, 가슴을
노렸다. 그것도 아니다. 배를 찔러온다. 질풍처럼 연속적으로
펼쳐진 창공은 빠르기도 빠르거니와 공격부위가 하나같이 종잡
을 수 없었다.
써걱! 파앗!
치솟는 핏줄기. 최신의 오른 어깨에서 살점이 뭉텅 잘려나가
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섬(閃)!"
다시 터져나온 일갈. 그리고 조금 전보다 배는 빠른 창법.
창! 써걱!
이번에는 가슴이 벌어졌다. 한치 깊이로 가슴살을 헤집고 떠난
창날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옆구리를 찔러왔다.
"약해, 약해. 삼화일지가 이렇게 허약했나?"
창! 창! 써걱!
빠르기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전신 진기를 모아 전개
한 일침은 허공을 가르거나, 아니면 가볍게 휘두른 단창에 가
로막혔다. 그리고 벌어진 틈새를 용케도 찾아낸 단창은 여지없
이 살뭉텅이 한 줌을 베어냈다.
"타(打)!"
마지막 일갈! 윤명의 신형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몸은 손
발을 움츠린 거북이처럼 돌돌 말아졌고, 빙그르 회전하며 달려
드는 모양이 영락없이 성난 들소였다.
'공격은 가지각색, 하지만 창은 하나.'
최신은 정신을 집중하여 종잇장보다도 얇은 창날을 주시했다.
고오오오...! 허공의 울림, 쇳조각의 울림...!
"타앗!"
최신은 점혈침에 운집된 진기를 일시에 풀어 버렸다.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 옥당혈(玉堂穴)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의 전신은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윤명의 삼창(三槍)은 확실히 무서웠다. 무창법(舞槍法)은 상대
의 힘을 빼는 데 효율적이고, 찰나간에 십창(十槍)을 쳐낸다는
섬창법(閃槍法)은 방비할 틈을 주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검.
타창법(打槍法)은 섬창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공격하는 줄
도 몰랐다.
쉬릭!
한 점 빛으로 화한 창날이 옥당혈로 짓쳐들었다. 그리고,
푸욱!
"컥!"
짧은 단말마를 터뜨린 최신은 옥당혈에 틀어박힌 창날을 멀거
니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그것
도 잠시 오른 장심(掌心)에 운집된 진기가 번개처럼 터져나갔
다.
"헉!"
짧은 경악성이 들렸다. 누구나 사혈(死穴)을 격중당한 사람이
반격을 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리라.
마지막 일격. 최신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옆머리 천충혈(天衝
穴)만 노리는 최혼장(崔魂掌)이니 즉사 아니면 무위(無爲)로
끝났겠지.
최신은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스르륵 주저앉았다.
"크윽!"
윤명은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가슴팍 뼈가 산산이 부서지고도 일격을 전개할 힘이 남아 있다
니. 최혼장은 어깨에 격중되었다. 다행히 뼈가 상하지는 않았
지만 퉁퉁 부어올라 한동안 무공을 전개하는 데 지장이 있으리
라.
신경질이 난 윤명은 단창에 힘을 주어 갈비뼈마저 으쓰러트렸
다.
'음...! 자네도 알고 있었군. 그럼 내가 공연히 말을 꺼냈나?
허허허! 무연이가 외로웠나 보이. 후우! 자네가 이해해야지 어
쩌겠나. 최신, 그놈이 배은망덕하게 무연이에게 손댈 줄이야.
자네에게 선물하나 주지. 이번 여정에서 최신을 죽여도 좋아.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어. 놈을 죽이고 나면 각원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야 해. 일심각원들은 자네가 일심각을 맡기 훨씬
전부터 최신과 손발을 맞춰왔어. 분명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
을 거야.'
"후후후! 불만을 품는다? 그런 놈이 있으면 이놈과 같은 꼴이
될 뿐이야."
삼화일지 최신이 산적토벌에 불만을 품고 각주를 암살하려 하
다가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 분타주 금사일살 유백언은 흑의인
들의 급습이 시작되면서 종적을 감추었다. 공금(公金) 삼백 냥
이 사라지고, 일가족 모두가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혼란을 틈
타 도주한 것 같다.
가뜩이나 어수선하던 청붕분타는 때 아닌 소문이 번지면서 더
욱 소란스러웠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분타주
아니면 삼화일지에 대한 말을 나누었다.
금아일살 유백언은 패도(覇道)를 추구하던 사람이었다.
굶어 죽을지언정 비굴한 밥은 먹지 않는 사람. 그런 분타주가
금품을 챙겨서 도주했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속이 훤히 들여
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소문의 출처가 일심각주 윤명
인지라 대놓고 묻는 사람 또한 없었다. 밀명(密命)을 받았거
나, 아니면 비밀리에 장에서 불렀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더군
다나 흑의인들의 급습이 있고 난 다음 날 발표된 일인지라 더
욱 그렇게 확신을 굳혔다.
분타주의 직위는 당분간 부대주인 부동조검(不動調劍) 순전(旬
田)이 맡기로 했다. 그리고 별다른 하명이 없는 한 그대로 직
첩(直帖)이 떨어질 것이다.
청붕분타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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