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전문가칼럼
[조은산의 시선] 어느 젊은 정치인의 富 축적, 누가 가난을 ‘활용’하는가
조선일보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
입력 2023.05.23. 03:00업데이트 2023.05.23. 07:28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5/23/Y4443KGQWFCHNOQIUT3RXILA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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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정치인은 가난을 내세우더니 더 큰 부를 축적했다
이런 위선자들이 가난을 아름답다 말하며 오히려 모독한다
가난은 극복해야 할 대상… 누가 가난을 찬양하고 권장하나
/일러스트=이철원
#가난에 대하여
1. 가난의 정의-가난의 사전적 정의는 ’살림이 넉넉지 못함. 또는 그런 상태’다. 그러므로 가난은 보통명사이며, 동시에 추상명사 지위를 갖는다.
2. 가난의 본질-그러나 본질적으로 가난은 청국장이다. 혼자 먹을 땐 구수했는데, 지하철을 타고 보니 구린내였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추상적 파편에 불과했던 가난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 실체를 얻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비교를 통해 인식되고, 강해지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3. 가난의 근원-또한 가난은 대물림된다. 그것은 찌그러진 냄비의 밑바닥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삶의 궤적을 눌어 붙인 채로 자식들에게 건네진다. 그래서 가난은 눈물겹도록 잔인하다. 그러나 그 대를 끊고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토록 어렵다. 결국 부를 물려주거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정신을 물려주거나 둘 중 하나인 세상인데, 답을 알면서도 그러질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가난은, 장판과 벽지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정신마저도 썩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4. 가난의 분류-그러나 극복하는 가난이 있다. 그것은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을 물려주는 것은 중죄다’라는 책임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만큼, 더 많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과 행동의 반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가난에 직면한 자의 사위는 소란스럽다. 그러나 가난을 직시하는 자의 눈빛은 고요하다. 그는 원망의 눈으로 불평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로지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양만을 바라보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다.
5. 가난의 분류 2-반면에 굴복하는 가난은, ‘욜로(You Only Live Once)’라는 무책임함에서 시작해 ‘스리 푸어(카 푸어, 백 푸어, 트래블 푸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가난에 굴복한 그들은 이미 의지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욕망만은 뚜렷하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삶 앞에 가상의 자신을 내세워 대리자의 삶을 살아간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 원룸에 거주하며 캐피털사 명의의 벤츠를 끌고 유흥가를 질주하는 모습이 진정한 저 자신이라 믿는 자가 있다. 없는 형편에 겨우 모은 여윳돈으로 ‘고생한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중고 숍에서 구입한 샤넬 백을 인증한 후, 종잣돈이 뭐냐고 반문하는 자가 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여행 유튜버로 성공한 극소수 사례에 빙의된 채, 신용 대출을 받아 유럽 일주를 다녀오는 자도 있다. 그런 자들이 텅 빈 계좌를 노려보며 나라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부자 탓을 하며 자신의 가난을 정당화한다. 결국 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대부분은 부모가 대신 짊어지거나, 각자 영역에서 충실히 살아온 자들의 세금으로 충당될 것이다.
6. 가난의 모순-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찬양되고 권장된다. 이렇듯 가난은 모든 분노와 증오의 원천이며, 시기와 질투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은 언제나 가난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찬양하는 것은 언제나 고결한 인류애의 표출 방식이며, 어느 한쪽의 사상과 이념적 무결성을 논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으므로 가난은 끝까지 그 추악한 아름다움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언제까지나 위로 대상이고 박애의 상징이며 절절한 아픔이고 고통이므로, 가난은 영원히 세상 속에 남아 그 어떤 극복과 독려의 말들을 거부한 채, 찌그러진 냄비 안에 담겨 그 특유의 구린내를 풍기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7. 가난의 활용-그리하여 마침내 가난은 활용되고 있다. 부유한 자들이 가난을 노래하며 더 큰 부를 축적하고, 가난의 필연성 안에 가난한 자들의 가능성을 가둬 넣는다. 가난을 내세워 입신한 어느 젊은 정치인은 화면 터치 몇 번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부의 쾌거를 이루었다. 가난을 신성시함으로써 오히려 모독되기 쉽게 만들고, 가난을 아름답다 말하며 오히려 비참하게 만드는 반작용들이, 이러한 자들이 가진 위선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건재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치는, 초심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양심마저 썩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8. 가난의 해제-그러므로 가난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가난은 더러운 것이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