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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강림을 대망하라 1(약 5장 7-11)
성경본문: 야고보서 5: 7-11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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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기독교의 예배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배자의 정성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요즈음 우리가 살피는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이 쓴 편지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편지를 받는 “흩어진 열두 지파”들이 처한 형편의 한 단면을 지난주일 살핀 야고보서 5:1-6은 보여 줍니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현실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의 사치가, 그 연락이 도를 넘은지 오래입니다.
외식 한 끼 하면서 수십만 원을 우습게 쓰는 오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몇 백만 원짜리 코트는 이제 보편화되고,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옷이 팔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닮았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며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절)
옛날 시골에는 잔치 때가 되면 집에서 키우는 돼지에게 살을 찌웁니다.
그래서 잔칫날 잡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료를 먹여 살을 찌웁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가진 자들을 잔치 날 도살할 짐승에 비유합니다.
이제 가진 자의 불의에 희생을 당하는 성도들의 인내가 그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오직 하나의 소망이 성도들로 하여금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공급했습니다.
주님의 강림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그들로 하여금 극한 상황 속에 버틸 수 있는 힘을 부여했습니다.
더 나은 변화가 임박한 것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강림을 대망 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던 주님의 좌우에 섰던 천사들이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동시에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하신 최후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러므로 디도서에서 바울은 이를 가리켜 “우리의 복스런 소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귀한 인내의 원천은 이 소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 원천으로부터 자기 시대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
그때 이후 고난과 오래 참음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야고보 선생은 핍박 속에 처한 성도들의 삶에 용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 세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맨 먼저
1. 농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씨를 뿌린 후에 수확을 하기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에서 얻는 지혜입니다.
사도들의 뒤를 이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우리는 교부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교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농부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농사짓는 생활에서 나오는 비유들이 가끔 등장하나 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
씨를 뿌린 후 추수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른 비도 내려주어야 싹이 트며, 늦은 비도 와 주어야 결실 합니다.
조급하게 군다고 수확을 앞당길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는 정성을 다해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비를 주시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와야 합니다.
한 방울의 비라도 농부가 좌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합니다.
농사짓는 일이 ‘천하지대본(天下之 大本)’이라고 하듯이 본래 농사짓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농사짓는 일이 힘드니까 도시로 와서 살려고 합니다.
농사짓고 살 때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을 의존할 줄 알았는데 인간의 근본이 되는 토지를 갈지 않고 도시에 살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도시에서는 자기 수완만 좋으면 될 것처럼 쉽게 착각합니다.
사실 사업을 해도 그렇고, 직장을 다녀도 모든 것이 사람에게 달린 게 아닙니다.
따라가서 돈을 모으는 것은 힘듭니다. 돈이 따라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시 삶은 자기 능력에 달린 것처럼 쉽게 착각합니다.
하지만 속절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는 농부들처럼 하늘에서 오는 구속의 완성을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 바람직한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 조금 더 인내합시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우리가 지극히 선할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믿기 때문에 확신해도 좋습니다.
“능히 우리를 보호 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야고보 선생은 우리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2. 선지자들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10절)
고난과 오래 참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선지자들의 삶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선지자’란 주의 이름으로 말을 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대언 했던 사람들을 보고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직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한 번만 교회에 오는 사람은 목사는 주일날 설교 한번만 하면 되는 쉬운 일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그렇게 한가하거나 쉬운 일 만은 아닙니다.
전에 서울에 살 때 어떤 택시 기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개척 교회를 하는 목사라고 소개를 하자 자기는 개척 교회에 나가는 집사라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절대로 아들에게 목사는 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택시 기사를 시켰으면 시켰지 목사는 못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자기가 개척 교회에 나가 보니까 특히 개척 교회 목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택시비를 기어코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 같은 각박한 곳에서 개척교회 목사라고 공짜 택시를 한번 탄 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목사의 직무는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거고 저는 직무상 여러분들이 잘못하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못하는 것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제가 맡은 일 아니겠습니까?
교통순경의 직무는 잘못하고 있는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지도는 하지 않고 딱지만 떼는 것은 자기 직무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직무에 따라서 해야 될 일이 결정이 되듯이 목사라는 일의 직무는 사람들에게 ‘잘 합니다’ ‘잘 합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을 지적하고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며 돌이키기를 호소하는 일은 언제나 인기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우리 중에 누가 악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치 간첩 포스터를 그릴 때 항상 험상궂은 모습을 그리는 것과 같은 잘못입니다. 간첩이라고 해서 험상궂게 생기라는 법은 없습니다.
험상궂은 사람을 간첩으로 파송하지는 않습니다.
간첩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 하니까 특별한 죄악을 행하는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악인’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고 소홀히 여기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을 성경은 ‘악인’이라 말합니다.
‘죄인’하면 끔찍한 ‘표시’를 달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홍글씨>의 주인공처럼 간음을 했다는 ‘A’자 표시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인데 그냥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늘 자기 해 오던 대로 습관대로 하면 성경은 그런 사람을 보고 죄인이라 부릅니다.
주일날 교회에 잘 나올 수도 있고, 들어오면서 습관적으로 연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악인일 수도 있고 죄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도 한 주간을 살듯이 생각하고 처신하면 오만한 자라 성경은 규정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와 가지고 예배만 참석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당에 나오는 유일한 이유는 “빨리 끝내고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그런 마음으로 오신 분은 없습니까?
자기 죄악을 애무하는 자들은 그 죄를 지적하는 이에게 등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끼리끼리 패를 만들고 힘을 뭉쳐 대적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직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이 일을 충실하게 하면 어떤 대가가 돌아오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당히 제사장, 선지자 노릇하면서 적당하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이야 어깨동무를 하고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하던 사람들 치고 핍박을 받지 아니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핍박을 받은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경우가 예레미야일 것입니다.
그는 본래 성격상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명한 눈물의 애가를 쓴 사람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볼 때에 아픔을 느끼고 그들이 받을 고통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하면 내 머리는 눈물의 근원이 되며 내 눈은 눈물이 흐르는 샘이 될꼬?” 통곡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 백성의 죄악을 볼 때에, 그리고 그 죄악 때문에 당하게 될 내일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지나칠 만큼 민감하고 다감한 마음을 소유했던 그는 백성들이 반기지 않는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웅덩이 속에 빠뜨려 지기도 하고 결국은 톱으로 켬을 당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톱으로 켬을 당했다는 것은 대개 예레미야의 경우로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예레미야입니다만 여기 야고보는 한 선지자가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예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진실한 선지자들을 예로 내세웁니다.
그들의 충실한 직무를 오래 참음의 예로 살고 있습니다.
충실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핍박을 받는 역설적인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선지자들 - 늘 평강과 축복을 선언하는 설교자들은 고난과 핍박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합니다.
금으로 번쩍이는 팔 시계를 가리키며 이것은 수백만 원짜리이고 이번 명절에는 수십만 원짜리 한복 티켓이 몇 개나 들어 왔다고 목회 성공 사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 충실하게 사는 결과는 가끔 고통과 핍박을 동반합니다.
앞서 간 선지자들의 생애 - 그 고난과 오래 참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아니 받는 것이라고는 무시와 조롱이지만 사람들을 향해 감정적인 대처를 하지 않은 뿐더러 그 마음속에 미움의 씨앗을 심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로 본을 삼으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마음으로 말한 그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이 무엇이었는지 너희가 기억해 보아라.’
야고보 선생이 들고 있는 마지막 예는
3. 욥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당시 동방에서 부유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시 동방에서 경건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게다가 욥은 아들 일곱, 딸 셋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들 딸 농사에서도 복 받은 사람이라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즈음 별 설득력이 없을지 모르겠어요.
워낙 ‘하나 낳아 알뜰살뜰’ 하던 선전에 세뇌를 당해, 아들 일곱 딸 셋 낳았다 하면 고대 ‘야만인들은 할 수 없다’ 고 결론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야만인지 그 시대 사람이 야만인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옛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십시오.
윗대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자식을 죽이진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엔 자기 유익을 위해 자식도 부모도 서로 죽이는 것 보면 어떤 쪽이 야만인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인류의 세상에 하나님이 지으신 땅위에 사람들이 살고 난 다음부터 50 년 전만 해도 아들 일곱, 딸 셋 가지고 다 키워 내면 참 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인류가 이 땅에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 오늘 우리의 가치관이 서로 다를 때에는 어느 쪽이 옳을까 잘 생각해 봅시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요?
훈련소에 아들 면회를 가서 연병장에 있는 삼천 명 군인이 다 왼발 오른발 나갈 때 우리 아들만 오른 발 왼발 나가면 우리 아들만 맞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십중팔구는 자기 아들이 발을 잘못 맞추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인류는 자녀가 많은 것을 축복으로 여겼는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야만으로 여기면 어느 쪽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바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여간 성경은 아들 일곱 딸 셋 낳은 욥의 이야기를 복된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양도 칠천 마리이고 약대로 삼천입니다.
약대는 사막에서 짐을 나르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픽업이나 타이탄 급이 될는지 모르지만. . . 소가 오백겨리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은 사람 -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끔찍이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닥친 일련의 불행을 기억하시지요?
“어찌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했습니다.
“네가 내종 욥을 보았느냐 악에서 떠나서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네가 만나 보았느냐?”고 하나님이 자랑을 합니다.
그러니까 ‘별말씀도 다 하십니다 하나님! 어찌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욥처럼 축복해 주시고 욥처럼 하나님이 지켜 줘 보십시오. 하나님 사랑 안할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의 시샘에 내어 맡겨진 욥의 삶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되고 맙니다.
자녀들은 함께 모여 잔치를 하고,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풀을 뜯는 그 평화스런 장면은 일순간에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고 맙니다.
갑자기 나타난 소바 사람이 그 가축을 빼앗습니다.
“나만 홀로 피하였는고로 주인께 고하려 왔나이다.” 그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끔찍한 재난의 보고가 잇달았습니다.
인재와 천재가 교대로 계속 밀어닥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 온 양과 종을 살라 버렸다고 보고합니다.
떼 지어 나타난 갈대아 사람이 약대들을 탈취하고 갑작스런 태풍으로 열 자녀가 압사를 당했다는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사탄은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그 몸까지 질병을 뒤집어씌웁니다.
그 품에 아내까지 조소하는 형편에 처합니다.
친구들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철저히 혼자서 이 고통을 겪습니다.
그처럼 신앙생활 잘했는데 욥에게 재난이 닥쳤다면 우리도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약대를 가지고 있지 않고 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벌려 놓았던 이 사업도 날라 가게 되고 토지도 남의 이름으로 넘어가게 되고, 자녀들로 빗나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빗나간 자녀, 살아 있지만 부모 마음에 떠난 자식들 같으면 죽은 자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 욥의 이야기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상황 속에서도 각색해 보십시오.
고생고생 해서 자식들 키웠더니 그 자식들이 하나도 부모 마음 몰라주면 죽은 자식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형편에 자식들도 신앙생활 제대로 안하고, 마누라마저 주일날 교회 가자고 하면 반대입니다.
백화점이나 영화관 갈 때는 자기가 앞장서서 잘 가다가도 교회 가는 일에는 늘 늦장만 피우고 있다면 남편으로서 얼마나 힘 드는 일이겠습니까?
고통 뒤편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한 가닥 신앙은 놓지 않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5~27)
극한 고통 속에서도 욥은 마지막까지 자기 상황에 대답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어떻게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설명해 주실 때까지는 내가 물려 서지 아니하리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했지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뵈옵고 자기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기를 고집합니다.
결국 폭풍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하여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질적, 세상적 소유만이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만 영적 회복의 가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욥이 그 재산이 배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그 보다 더 예쁜 딸 셋 더 용감한 아들 일곱을 낳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욥이 받게 되는 영적인 축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인간 고통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욥도 친구들처럼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저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못 했구나’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욥은 자기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욥은 전능자의 위엄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처절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참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을 단련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보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따름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십니다.”
극한 고통 속에서 번민했지만 결국 인생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생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 선생이 이런 세 가지 예를 들면서 주의 강림을 대망 하도록 권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며 사는 동안 우리를 향한 실제적인 권면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바깥을 돌아보니까 극한 사치와 방탕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나와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현실도 보입니다.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짜증을 냅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전가를 합니다.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비난을 중단하라고 명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원망’이란 단어는 마음속의 원망이요. 아직 표현되지 않는 -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뜻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분출되지 않은 감정이지만 상대방을 향해 품고 있는 나쁜 감정은 거기서 당장 중단시키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불만스런 감정은 표현되든지 품고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금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싹도 싫어하십니다.
“네가 뭔데 남을 향해서 불만을 가지느냐”고 하십니다. “네가 심판자냐?”고 도전하십니다. 형제를 향해 불만과 원망을 일삼는 것은 심판 행위요. 그 심판은 자기 스스로를 심판 아래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주님 오셔서 하실 일이 심판하시는 일인데, 우리가 왜 주님을 대신해서 판단하겠습니까?
우리가 왜 서로서로 판단해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하실 일인 것입니다.
문제만 생겼다 하면 그 책임은 다른 누구한테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그런 불만을 갖는 것을 금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이 급히 오실 줄 알았는데 오시지 않고 악은 흥왕해 가니까 사람들이 견디는 힘에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만스럽고 짜증스러우니까 누구에게나 터뜨리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아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기다리느니라.”
형제들을 향해서 불만과 원망을 일삼는 것은 심판 행위요 그 심판은 스스로를 심판 아래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동료 신자를 향한 계속적인 불만과 원망은 단호히 멈추라고 경고합니다.
스스로 심판하게 자신을 끌어들이는 어리석음을 모면하라는 경고입니다.
‘네가 내뱉은 동일한 말로써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것이다.’
‘도대체 집사가 그렇게 해서 되느냐, 장로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 말 가지고 나중에 여러분이 그 자리에 갔을 때 잘못하면 그 말로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무슨 법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했던 그 말만 가지고 여러분을 판단해도 충분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누가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뭔가 잘되지 아니할 때 연속적인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극한 상황 속에 접어듭니다.
상호간의 불만과 원망을 초래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심판자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해서 안 될 마지막 행위가 미리 서로를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강림하시는 주님 그분만이 심판자이십니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분에게 맡긴 그 권리를 여러분이나 내가 찬탈하려 드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그분이 곧 오시고 계십니다.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느니라.”
여기 문은 헬라어에서 복수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마음 마음마다, 그 문밖에 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문밖에 저가 지금 서 계시며 듣고 계십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아시며 입술의 말을 다 들으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강림을 대망 하십시오.
주님의 강림이 가까움을 기억하게 되면 사람들을 관용하게 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우십니다.
사흘만 고생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시한부 인생의 시어머니가 아무리 문제의 시어머니라 하더라도 다 잘 모시려고 할 겁니다.
문제는 주의 강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니까 짜증만 나는 거예요.
주안에서 서로서로 관용 하십시오.
주안에서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으십시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는 남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형제자매를 향해 원망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남을 향해 원망할 때는 자기 자신을 잊었을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 잊어버리고 나면 다른 사람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어요.
자신의 부족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죄악된 모습을 직시하는 자는 남을 향해 판단할 여유가 없는 자들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서신 앞부분에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긍휼을 행치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