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전문가칼럼
‘병신과 머저리’ 표지가 한국 정치 상징처럼 보이는 까닭
[이응준의 포스트잇] [3]
조선일보
이응준 시인·소설가
입력 2023.05.23. 03:00업데이트 2023.05.23. 11:26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5/23/5R26CKHJ3JEDDJVSDYHVGZRC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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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journey·조선디자인랩
이청준 소설집 ‘병신과 머저리’는 ‘이청준 전집’의 첫 권이다. 발행일은 2010년 7월 30일이고, 표제작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1966년 가을에 발표됐다. 이 책의 표지화가 세간에 화제다. 두 사내가 나란히 서 있는 꼴이 초선 국회의원 누구와 누구를 옛날 영화관 간판 그림처럼 닮았다는 것이다. 표지화의 원화(原畫)는 2010년보다도 오래 전 김선두 화백의 작품이다. 화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지 않는 한 두 초선 의원과 ‘병신과 머저리’ 표지화의 상관관계는 제로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는 이 시대 한국 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져 자꾸 쳐다보게 된다.
역사 스토리는 영웅과 악당(villain)이 주로 구성해 나간다. 악당은 반영웅으로서의 품위와 능력이 있다. 매력적이고 심지어는 대중이 그의 깊은 뜻을 모르기까지 한다. 그래서 중후반에 반영웅과 영웅이 뒤바뀌기도 한다. 악당은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악한 대의(大義)이거나 악의 미학(aesthetics)이기 때문이다. 대신 악당은 ‘조롱’이 쥐약이다. 양아치 소리를 듣는 순간, 악당은 이무기에서 개구리로 전락한다.
요즘 한국 정치에는 악당이 없다. 남녀 가리지 않고 양아치들만 우글거린다. 문화, 경제는 선진국이 됐다는데, 정치는 삼김시대(三金時代)보다 타락했다고 체감되는 이유가 뭘까? 과거를 예쁘게 포장하는 인간의 뇌 때문인가? “국회의원과 미스코리아가 한강에 빠지면 국회의원을 구해야 한다. 더러운 국회의원 때문에 수질이 독극물이 되니까.” 그때는 이런 유머가 유행했었다. 물론 지지하는 대통령과 당은 있었지만, 정치인들을 불신하며 지냈다. 사람을 잡아먹은들 한쪽은 무조건 정의롭다고 미화하는 지금보다는, 양쪽 다 쓰레기로 치부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고 역설적으로 ‘건강한 정치의식’이다.
이 타락을 개구멍 삼아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요물들이 대거 국회로 들어왔다. 이것들은 조롱에도 즐거워한다. 자존심 자체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나는 피해잡니다. 경제는 유통이에요. 나는 경제활동을 한 겁니다.” 1982년 포승줄에 묶인 장영자가 이렇게 외칠 때 적어도 장영자를 옹호하는 대중은 없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정치인이 부동산과 암호화폐로 장영자 뺨치는 죄를 저질러도 유권자의 절반은 그 죄를 부정할 것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내 삶에 위안을 주기 위한 증오’가 한국인의 정치 수준이다. 내 거짓말도 소중하고, 나 대신 정치인이 해주는 거짓말은 더 소중하다. 선택이 팩트에 의해 조정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세뇌당한 사람들은 양아치 정치인들의 노예가 되기에 최적화된 캐릭터다. ‘병신과 머저리’의 표지화를 문득 또 바라본다. 이젠 진정 저런 자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란 말인가? 나는 저 코미디언들이 공포스럽다. 비극 속에서 코미디를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응준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