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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껍질을 깨고 나면 푸른 하늘이 보일진저 (一) 함상이 청붕분타를 나와 발길을 돌린 곳은 동전 몇 푼에 몸을 파는 싸구려 청루(靑樓)였다. 밤에는 불야성을 이루었을 곳이지만 아침이라서인지 쓸쓸한 햇 빛만 곳곳에 비춰들었다. 토악질해 놓은 술 찌꺼기, 깨진 술병. 그는 조심스럽게 뒤따르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중화옥(中華屋). 송판(松板)에 숯으로 대충 써 놓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 렁이가 기어가는 듯 형편없는 글씨체였지만 그래도 이곳 유산 로(流産路)에서 현판이 걸린 집은 몇 되지 않았다.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아이를 서넛은 지워야 빠져나갈 수 있다 해서 붙여진 거리 명칭이 유산로.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모인 거리였다. 함상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창기들이 득실거리는 거리지만 아침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다. 모두들 곤한 잠에 빠져 있으리라. 낮과 밤이 바뀐 세상. 이곳은 정오를 지나 오후에 들어서야 깨어나기 시 작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들. 뒤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는 지금 청붕분타는 신임 분타주 의 취임과 어젯밤 느닷없이 받은 급습으로 다른 데 정신 팔 겨 를이 없었다. 홍홍록록 윤명, 그는 진육이 알아서 맡아주리라.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값싼 술 냄새와 지분 냄새가 얽혀 코를 찔렀다.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엉킨 방과 방. 이 조그만 중화옥 에는 하루 삼십여 명의 사내들이 찾아들고, 그들은 저 방 중 하나로 찾아들리라. 그리고 채 일다경이 미치지 못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빠져 나오겠지. 함상은 익숙한 걸음으로 곧장 방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이십칠호(二十七號). 역시 더러운 송판에 숯으로 써놓은 조그만 목패(木牌). 똑똑똑! 두들기는 소리가 제법 컸는데도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쥐죽은 듯한 고요... 함상은 불현듯 불길한 생각 에 사로잡혀 왈칵 문을 열어젖혔다. 퀴퀴하게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나왔다. 수많은 사내가 들락거 렸을 더러운 이불 한 채와 화장대 하나가 고작인 조그만 방이 었다. 조금 체격이 큰 사내라면 두 발을 쪽 뻗지 못하리라. 함상은 반나(半裸)의 차림으로 누워 자는 여인을 보고 나서야 불안하던 기슴을 쓸어내렸다. 여인은 편안해 보였다. 빨간 고의(袴依)와 말흉(抹胸)만 걸친 채 빙옥(氷玉) 같은 두 다리를 환히 내놓고 잠든 여인. 함상은 조용히 들어가 여인의 머리맡에 앉았다. 여인은 술을 먹은 듯했다. 짹짹 숨을 고를 때마다 물씬 풍겨나오는 주향(酒香). 그는 손을 들어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척을 느꼈음인가. 여인이 귀찮은 표정으로 부스스한 눈을 떴 다. "어! 오빠!" "잘... 있었니?" "언제 왔어?" 여인은 힘겨운 몸짓으로 일어나 앉았다. "방금... 좀 더 자지." "푸훗! 아냐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일어났는데 어젯밤에 귀찮은 자식을 만났거든. 계집질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는지 본전을 뽑으려고 들잖아. 아함..." 여인은 늘어지게 하품을 토해 냈다. 헝클어진 머리, 눈곱도 가시지 않은 눈, 땀에 젖고 정욕에 젖 은 몸, 많이 봐왔던 그러나 잊어버리고 싶은 모습이었다. 함상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마을, 유산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을사람들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옷을 입었 지만 그녀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몇 명은 어머니와 함께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곤 했 다. 머리채가 헝클어져 울부짖는 어머니, 그 옆에서 패악을 부리는 여인, 멀뚱히 서 있는 사내. 함상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그것이 전부였다. "네 엄마는 창기(娼妓)래." '아냐. 우리 엄마는 그런 여자가 아냐.' "누구나 돈만 주면 잠잔대." '아냐. 아버지야.' 함상은 친구가 없었다. 그는 늘 혼자 놀아야 했다. 심술을 부 릴수도 없었다. 계집아이처럼 몸이 유약한 데다가 성품까지 가 늘어 맞대놓고 덤벼들 용기가 없었다. "얘야, 네 아버지란다. 인사드려야지." 체구가 장대만하고, 손바닥이 느릅나무 껍질보다 투박한 사내 가 어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허억! 나 죽어..." "어떻게 좀 해줘." "나, 나 버리지 마." 좀더 깊이, 좀더 빨리... 함상은 남녀가 몸을 섞을 때 흘리는 모든 소리를 열 살이 채 넘기 전에 터득했다. 그러나 그 사내는 어머니의 임신 소식을 듣자,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훌쩍 떠나 버렸다. 어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함상에게는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다. "네 애비만 죽지 않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적한 밤이면 어머니는 함상을 껴안고 볼을 비렸다. "너는 네 아비를 빼다박았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이마를 만지고, 코를 만지고, 입술을 만졌다. "엄마..." "희(禧)아. 희아라고 불러 줄래? 네 아빠는 항상 희아라고 불 렀단다. 희아라고..." "희아." "예. 여기 있어요. 저 여기..." 그럴 때면 어머니의 숨결이 유난히 거칠다고 생각했다. 미친 듯이 몸 구석구석을 만지다, 울부짖다, 어느새 잠이 들곤 하셨다. 함상이 장성한 후에도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고운 몸매와 팽팽한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하셨다. "도마뱀을 구워서 먹으면 좋다더라." 도마뱀을 잡아서 햇볕에 말린 다음 꿀과 버무려 드렸다. "살구씨가 그렇게 좋다며?" 어머니를 위해 산과 들을 뛰어다녔다. 살구씨를 구해 가루로 만든 다음 한 통은 먹을 수 있게, 다른 한 통은 얼굴에 바를 수 있게 만들어 드렸다. 열세 살에 겁간을 당하고 열네 살에 자식을 낳은 어머니. 함상이 스무 살을 넘어서자 모자간은 오누이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헉헉! 그래, 거거, 거기, 아...!" "이제 됐어?" "좀더 세게, 좀더..." 집 안으로 들어서려던 함상은 열락에 들뜬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래 전에 터득했다. 움막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 생각에 몰두했다. '어머니는 선녀야. 어쩌다 옥황상제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지상 으로 쫓겨온 거야.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도 상제님의 벌. 사내 백 명을 겪으면 다시 불러 올리실 거야. 아냐. 백 명은 너무 많아 오십 명.' '어머니는 원나라의 황족(皇族)이야. 명나라가 들어서고 퇴로 가 막힌 황족들은 군사들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지. 어머니가 택한 곳은 유산로. 그래, 이곳이라면 관병을 피할 수 있어. 이 렇게 목숨을 부지하다 때가 되면...' '어머니는 대부호의 딸이야. 대부호가..." '어머니는 명장의 후손이야. 역적 누명을 쓰고...' 덜컹! 방문이 열렸다. '보면 안 돼. 누군지 보면...'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함상은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을 의식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야아! 네 엄마 대단하더라. 두 푼 값은 충분해. 우리 자주 볼 것 같지 않니? 하하하!" 마동(馬憧)! 함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마동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하, 함상... 너 왜 이래. 나는 돈을 지불... 커억!" 어떻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친 듯이 낫을 휘둘렀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랏! 정신을 차려보니 두 손에는 붉고, 끈끈한 핏물이 가득했고, 뭉 묵한 낫에 처참히 짓이겨진 시신 두 구가 눈에 들어왔다. 마동, 그는 기억난다. 낫으로 정수리를 찍었을 때 느껴지던 촉감도 생생했다. 그런데 고의(袴依)만 입은 어머니와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배 다른 동생은 왜 혈해(血海) 속에 잠겨 있단 말인가. "아아악! 어머니!" 함상은 마동과 친어미, 여동생을 살해한 현상수배범(懸賞手配 犯)이 되었고, 관부(官府)에 쫓기고 또 쫓겼다. 쫓기는 일은 지겨웠지만 커다란 곤란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한정된 울타리 안에서 먹을 것을 찾아야 했던 유산로 생활보다 더 자유로웠다. 세상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졌 다. 그러다 혹여 무슨 말이라도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피에 절 은 낫으로 찍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너무도 공허했다. 죽음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서 안으 로 들어가고자 서성이는 축에 속했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힘 들고 지친 영혼을 편히 안식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일 년, 이 년... 해가 바뀌어 오 년이 지나자 심경의 변화가 일었다. 함상은 이미 무명인사가 아니었다. 이십칠도(二十七刀) 함상. 사람을 죽이면서 갈고 다듬어진 낫질은 정교하고, 빨라졌다. 낫을 버리고 좀더 빨리 죽일 수 있는 도(刀)를 든 이후에는 관 병들도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무림(武林) 명가(名家)인 육양문(陸陽門)이 멸절되고, 그의 악 행을 저지하고자 했던 명숙(名宿)들이 오히려 살해당했다. 이십칠파도(二十七破刀). 사람들은 함상이 전개하는 도법을 이십칠파도라 불렀다. 눈보라가 퍼붓던 겨울. 세상 만물이 하얀 눈 속에 잠겨버린 듯했다. 대낮임에도 불구 하고 사방을 칠흑처럼 메워 버린 눈보라는 천군만마가 달리는 듯 만물의 소리를 죽여 버렸다. "오늘은 기어이 결판을 내라. 이십칠파도, 놈의 목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특별히 은화 삼십 냥을 얻어 주겠다." 정주지부(汀州支部)의 관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기병(騎兵)에다가 궁수(弓手)까지 가세하여 총규모는 삼백 명 에 달하는 대인원이었다. 그들이 오직 함상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싸움은 은강(銀江)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눈보라 사이로 날아오는 화살들, 질풍처럼 쳐오는 창과 칼, 그 리고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이글거리는 눈동자. 이십칠파도의 도결이 풀려나갔다. 비명소리가 들린 듯했다. 손목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지고, 그 날 보았던 붉은 피보라가 확 번져나왔다. "어머니!" 어떻게 싸웠는지 모른다. 그 날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에서 쏟아지는 눈보라를 보아야만 했다. 함상은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눈이 벌거벗은 어머니의 나신(裸 身)처럼 보였다. 눈 속에, 하얀 분가루 속에 어머니는 아름다 운 미소를 흘리며 춤을 추었다. 육욕(肉慾)에 몸부림치는 얼굴 이 아니라 평온을 얻은 듯 아늑해 보였다. "여기 있다! 이십칠파도, 놈이 여기 있다!" 싸울 때는 한낮이었는데 어두운 밤이 되었나 보다. 횃불이 일렁이더니 다급히 눈밭을 헤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함상은 눈을 감았다. 이제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로부터 너무 오랜 세월이었다. 하루도 손에서 피가 마르지 않았고, 하 루도 어머니의 육신을 잊은 적 없었다. 벌거벗은 채 낫에 심장 이 찍힌 모습을. 크릉...! 개 한 마리가 팔목을 물어뜯었다. 다른 한 마리는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옆구리를 문 것 같았다. '크크큭...!' 웃으려고 입을 벌렸지만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다고 말한다. 왜일까? 혈연(血緣)으로 맺어졌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이 두려울 게다. 하지만 함상은 잊혀질 게 없었다. 단지 추웠다. 어머니도 이렇게 추웠을까? 낫에 찍혀 죽는 그 순간에. 육신이 얼음동굴에 던져진 듯 이빨이 따닥거리며 맞부딪쳤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 버렸다. "지금부터 네 몸과 정신은 우리가 소유한다. 동의할 수 있나?" '크크큭!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너는 함상으로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이십칠파도는 버린다. 만약 다시 한 번 악행(惡行)을 저지른다면 우리가 용납하지 않 는다." '염병할 놈들! 마음대로 지껄여라.' "은강변에서 관병은 추적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계속 쫓지도 않을것이다. 왜인 줄 아는가? 여기는 죽어서야 나갈 수 있다는 멸옥(滅獄)이니까." '멸옥? 그럼 곽가장!' "너의 과거를 알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도... 다 잊어라. 앞으 로는 무림 정의를 위해 한 목숨 내맡겨라. 충분히 가치 있을 것이다. 누가 알아 주지 않는 일이다. 설혹 임무 수행 중에 목 숨을 잃는다면 길가에서 죽은 개보다도 더한 천대를 받을 것이 다..." 몇 마디 더 중얼거린 것 같다. 그러나 함상은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야! 이 씹어 죽일 년아! 감히 내 남편에게 꼬리를 쳐!' '내가 네 남편을 도둑질했냐? 제 발로 스스로 걸어온 것을 어 쩌란 말야! 썩을 년... 잠자리가 오죽 신통치 못하면 제 계집 놔두고 도둑괭이처럼 기어들까.' '뭣이 어째! 이년 주둥이는 살아가지고...' 어머니가 살아온 세상에는 정의(正義)가 있었을까? 참으로 낯선 말이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너를 주목해왔다. 아무리 심성이 악마와 버금가는 자라도 악행을 저지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원인을 제거하면 사람은 변화하게 되지. 우리는 네가 변화하리 라 믿는다." '후후! 원인을 제거하겠다고... 개가 물어갈 소리.' "네가 죽였다고 생각한 사람 중에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 '....?' "이름은 장십랑(張十郞). 나이는 열아홉." '장십랑? 십랑! 십랑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때 분명히 죽었어. 내 낫에... 내 낫에 죽었어.' "육 년도 훨씬 더 된 일이라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거... 짓말..."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산로에서 이름난 창기로 살고 있다." '창기... 크큭! 빌어먹을 창기... 십랑, 너마저...' 함상은 배다른 누이동생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자 연스럽게 살고자 하는 의욕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다. 학자를 많이 배출한 옥계 함가의 종손. 새로운 신분을 받는 데 지장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계함가는 돌림병으로 멸문했고, 함상이 관병을 피하며 보여 준 지략은 그가 뛰어난 정대원이 될 것을 예감해 주었다. "내 이름은 동종관이다." 함상은 비로소 눈을 떠 영원히 잊지 못할 얼굴을 보았다. "정대주가 죽었다며?" 확실히 청루의 정보 수집은 빠르고 정확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길은 멍하니 낫에 팬 동생의 가슴팍 을 바라보았다. 옷깃을 여민다고 여몄지만 말흉 위로 낫에 찍 힌 자국이 보기 흉하게 드러났다. 워낙 상처가 길게 째어졌기 때문에. '사내들은 참 묘해. 후훗! 이 상처를 보고 더욱 짐승처럼 달려 드는것 있지? 욕정이 자극되나봐. 오빠도 그래?' 그때, 함상은 말없이 한쪽 피밖에 섞이지 않은 여동생을 꼭 껴 안아 주었다. "지금 곤란하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곽모천 명의로 된 서신이 왔어. 사공에게 어떠한 협조도 하지 마라. 그들의 소속은 신계각에서 일심각으로 변경되었다." '일심각으로? 변경? 그렇게까지...' 장주, 역시 장주가 한 일이다. 나뭇가지를 잘라내듯이 수족을 절단할 수 있는 힘은 장주밖에 갖지 못했다. 왜? 왜? 그것은 탈명화검이 누구에게 죽었고, 반 여량이 왜 음지를 찾아가느냐 하는 질문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핵심 하나만 풀면 슬슬 풀려나갈 난제(難題). "명을 어길 경우 일급 죄로 간주하여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오빠도 알지? 박탈되는 권리 속에는 목숨도 들어 있어. 후훗! 목숨 따위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권리를 박탈당할 수 없어. 오빠 미안해. 도와줄 수 없어." 함상은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십랑에게는 일곱 살 난 아들이 있었다. 자신들처럼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자식. 하지만 장십랑은 그 아이만은 자신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이름이 장해(張海)라고 했던가. 그 아이는 천재들만 수학(修 學) 한다는 일신서원(日新書院)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 곽 가장에서 후원을 지속하고 있는 한, 그 아이는 탄탄대로를 걸 어가리라. 장성하면 문인(文人)의 길을 걸어갈 테고, 언젠가는 요조숙녀를 만나 살림도 차리겠지. 자신의 친부모는 곽가장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생각하면서. 그 아이는 누이동생의 모든 것이었다. "오빠, 하나만 말해줄게." "...?" "흑의인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산 속에서 야영(野營)하나봐. 호랑이 가죽을 얻어서 돈푼깨나 만진 늙은 이가 왔었는데... 그렇게 말하더군." 동생은 옷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랬다. 수많은 사내들에게 내놓고 사는 몸이라 그리 고 그런 냄새가 배어 있는 방이라 그런 모양이다. "간다." 함상은 몸을 일으켰다. 동생을 지저분한 거리에서 빼내야 했는 데. 하지만 동생은 자식을 위해 기꺼이 유산로에 머물렀다. "이미 더러워진 몸이야. 여기다 비단 옷을 걸친다고 뭐가 달라 져? 그리고... 이제 나는 사내 없이는 살 수 없어.' 안개꽃은 그리움이다.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 속에서 그리움을 찾는다면... 장십랑 너는 그리움이 될 거야. "조심해." "너도..." 누이동생은 피식 웃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장십랑은 사납게 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무인을 보는 순간, 어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남의... 일심각의 상징이지 않은가. "일어서라." "어, 어디로...?" "가보면 안다. 얌전히 따라가면 네 아들은 계속 후원을 받겠지 만 만약 사람들 눈에 띄게 되면 곤란할 거야. 선택은 너에게 맡기겠다." 장십랑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벗어놓은 옷을 집으면서도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나왔다. 이까짓 더러운 놈의 세상, 언 제 버려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서 옵쇼. 헤헤!" 주루에 들어서자 하관이 빨아 약삭빨라 보이는 점소이가 다가 서며 실실 웃었다. "제길! 올 여름은 왜 이렇게 더워? 아침부터 찌네 쪄. 어디 시 원한 자리 없냐?" 갈의(葛衣)로 갈아입은 일심각무인은 제법 거칠게 내뻗었다. "헤헤 이층으로 올라가십쇼. 바람이 아주 잘 통합니다." "그래? 그럼 안내해 봐." 이층도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사방이 환히 뚫려 청붕성 내가 환히 내다보이기에 마음만은 시원했다. "이쪽 자리로 오십쇼." 점소이는 한적한 자리로 안내하며 장십랑의 옆구리를 살짝 찔 렀다. 아침부터 어디서 큰놈 하나를 물었냐는 뜻의 눈짓을 하 면서. 장십랑은 경직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간신히 웃음을 띠어 보 였다. "흠! 안주는 오리고기로 하고, 술은 죽엽청(竹葉淸)으로 주게. 급하니까 빨리 가져와. 신경질나면 그냥 갈 거야." "예, 예. 빨리 가져오겠습니다요." 점소이는 빈말이 아니었는 듯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구운 오리고기와 죽엽청을 가져왔다. 술은 모르겠으되 오리고기는 구운 지 오래된 듯 껍질이 말라 있었다. "자, 한 잔 들어 볼까?" 장십랑은 일심각 무인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술은 무척 독했다. 뱃속에서 불이 인 듯 활활 타는 느낌이었 다. 그러나 마셔야 한다. 장해, 그 아이를 떳떳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어미를 죽인 한으로 평생을 고적하게 살아가는 오 빠, 그리고 운명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사내들 품을 전전하는 계집, 모든 비아냥거림을 죽엽청에 담아 마시련다. 장십량은 일부러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하하! 이 독한 죽엽청을 단숨에 들이키다니 주량도 배포만큼 큰 모양이네. 자, 한 잔 더..." 장십랑은 마시고 또 마셨다. "이 사람아, 술만 마시면 재미없지 않은가. 어디 구수한 입담 이나 늘어놓아 보게." 특유의 걸쭉한 입담을 쉼없이 토해 냈다. 어떤 놈은 동전 한 닢 가지고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더라. 어떤 놈은 잠도 못 자게 열댓 번을 해대는데 그때는 성질나서 혼났 다. 이야기는 간단한 주담(酒談)에서 세류한탄(世流恨歎)으로 이어 졌다. 하지만 장십랑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 했다. 일심각 무인이 술잔에 하얀 가루를 타는 것도 무심히 지 나쳤다. 그런 점을 기억에 담기에는 마신 술이 너무 많았다. 결국 술을 마신 지 한 시진도 못 돼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장 십랑은 주탁에 얼굴을 묻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허! 이 사람아, 여기서 자면 어떡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장십랑은 일 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보게, 점소이! 이거 안 되겠네. 어디 괜찮은 객사(客舍) 없 나? 이거 이 사람, 아주 사람을 잡네그려." "쩝! 어쩐지 폭음을 하더라니." 점소이는 무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장십랑은 술이 무척 강해 여간해서는 정신을 놓지 않는 여자였 다. 그런 여자가 이토록 술이 취한 것은. 점소이가 보기에는 완전히 고의였다. 제법 윤기나게 차려입은 놈이 장십랑을 기녀 가 아닌 여염집 규수로 보고 어찌해 보려는 생각일 게다. '한심한 놈.' 점소이는 장십랑보다 갈의를 입은 놈이 불쌍해 보였다. "저희 주루에도 방이 있습죠. 괜찮으시다면..." "괘, 괜찮다 뿐인가." 사내는 동전 닷 문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눈을 찡긋거리 며... '아침부터 괜찮은데... 이거 영 미친놈이네.' 점소이는 장십랑을 안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헉! 주, 죽었다!" 그의 입에서 소스라치는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뭐, 뭐라고?" 사내도 몹시 놀란 듯했다. 장십랑의 얼굴은 깊은 꿈이라도 꾸는듯 안온했다. "여, 여보게! 십랑! 십랑!"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장십랑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손. "여, 여보게! 나, 나는 모르는 일일세." 그는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통째로 주탁에 던져놓고 부리나케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런 제길! 뒈지려면 다른 곳에서 뒈지던가. 아침부터 재수없 게 송장이라니. 이거 팔자에 없는 초상 치르게 생겼잖아." 그는 전낭부터 챙겨 넣었다. 장십랑은 유산로 창기가 죽으면 늘 그렇듯 가마니에 둘둘 말려 청붕성 한 귀퉁이에 묻혔다. 그녀가 떠난 중화옥 이십칠호는 이제 새로운 여인을 주인으로 맞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즐~~~감!
잘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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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