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0장은 사도 요한이 이 장을 기술할 때 염두에 두었던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도가 자신의 다른 글에서 이 부활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복음서에서도 이 두 부활에 대하여 기록한다. 요5:19-29이 그것이다. 이 본문은 계20장을 밝히 비춰준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이탤릭체로 된 부분은 흔히 육체의(bodily), 또는 보편적(general) 부활로 알려진 본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8)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요5:24, 25, 28, 29).
우리는 첫 장에서 계20장을 여는 열쇠가 5절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표현을 통하여 이 사도가 전하려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이 장 전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첫째 죽음은 곧 영혼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기독교인의 첫째 부활체험은 곧 그 영혼의 부활을 뜻함을 부인할 수 없다. 신약의 많은 본문들은 영혼의 중생(regeneration)이 곧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또한 둘째 부활은 곧 몸의 부활이라는 것도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위의 인용구에서 두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부활과 몸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만일 계20장에서 요한이 말씀하는 두 부활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요5:24-29을 당연히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이 부분은 두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본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소중한(important) 자를 고치셨다. 이 행동은 그분을 죽일 준비를 하던 유대인들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성부(The Father)께서 안식일에도 당신의 신적 사역(providential workings)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처럼 아들(the Son) 역시 그러하다. 이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더욱 격분하게 되었다(요5:18).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요5:19-20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these)보다 더 큰 일(Greater works)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20)고 말씀하셨다. 한 소중한(important) 자를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들이 아들을 통하여 성취되어져야만 했다. 이 더 큰 일은 영혼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유의 기적사건은 더 큰 기적들, 즉 두 부활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는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사역은 성부의 몫(the work of the Father)이었다. 예수께서 요5:21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씀하신대로였다.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이 사역은 영혼과 몸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둘을 24-25절(영혼)과 28-29(몸)로 분리하셨다. 모든 종류의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power)은 성자(the Son)의 권능이기도 하다.
영혼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Soul)
그 첫째 부활은 영혼의 부활이다. 가장 먼저(first)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은 영혼의 부활을 통해서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이후에 말씀하신 몸의 부활로 착각하지 않도록 요5:24에 분명하게 밝히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is passed).”
위의 구절은 조건적인(conditional) 부활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몸의 부활을 말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부활은 듣고, 믿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의 부활이 듣고, 믿는데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자들은 신앙과 불신앙에 관계없이 마지막 날에 모두 일으키심을 받게 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이라는 진리를 매우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24절에서 언급한 부활은 조건적(conditional)이다.
이것 역시 부활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의 표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is passed).” 이 표현이야말로 부활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것은 사망으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죽어 있던 것이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영혼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살리심을 입는다. 듣고, 믿음으로 인해 죽은 영혼이 영생을 얻는다. 더 큰 기적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이다. 영혼의 부활과 함께 육체적 죽음(physical dying) 역시 결코 죽은 것(death)이라고 볼 수 없는데, 이는 우리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옮겼느니라(is passed)”는 표현 역시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미래의 부활이 아닌 현재, 또는 과거의 부활을 의미한다. The American Revised version은 헬라어 완료시제인 이 부분을 바르게 번역했다: “옮겼느니라(hath passed).” 헬라어 현재완료시상은 과거행위의 결과가 현재에까지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그의 첫째 부활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past). 그는 단지 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부활시키시는 것과 동일한 엄청난 능력(tremendous power)으로 영혼을 부활시키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엡1:19-2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무덤에서 일으키셨던 것과 동일한 강한 능력(mighty power)으로 각각의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부활시키신다.
요5:25은 24절과 같은 개념을(thought) 계속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영혼의 부활이 갖는 엄청난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두 번 연속으로 사용된 “진실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위의 구절에서도 부활에 대한 제한적인 설명이 다시 나오고 있다. 부활은 듣는 자들에게로 제한된다: “듣는 자들은 살아나리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자신들의 피상적인 귀로는 들으나, 그 영혼의 귀로는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오직 진실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들만이 살아날 것이다.
이것이 미래에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음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곧 이 때라(and now is).”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신다: “때가 오나니(The hour is coming).” 이것은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의 부어주심(흘러나옴, outpouring)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미(even now) 구세주의 말씀에 의해 살리심을 입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당신께서 성령을 불어넣으신(breathed) 당신의 제자들이 있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나사로나 어린 소녀, 과부의 아들과 같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개별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24절에서 말씀하는 “영생”으로의 일어남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다시 죽게 될 이생의 삶(earthly life)으로 소생되었을(were re-awakened) 뿐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개별적으로 일어난 자들로 보는 견해는 위의 두 구절의 어법으로 볼 때 정당하지 못하며, 사도 요한이 사용한 “생명(life)”이라는 말의 의미와도 맞지 않다.
요5:24-25이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께서만이 이루실 수 있었던 영혼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일”의 한 부분, 중요한 한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And this is the first resurrection).
몸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Body)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몸이 부활하여 영혼과 결합될(united with)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되어질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부활, 또는 보편적(general) 부활이라 불리는 이 부활에 대하여 28-29절은 말씀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에는 어떠한 제한(limitation)이나 조건(condition)이 없다. 모든 자들이 그분의 음성을 들게 될 것이다. 모든 자들이 앞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로 들을 수 있는 자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앞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덤 속에 있는 몸을 말하고 있으므로 몸에 대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위의 구절을 24-25절과 비교할 때, 어떤 이는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부활에 관해서는 “곧 이 때라(and now is)”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미래에 되어질 일임을 암시한다. 그분은 “듣는 자들”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신다(omits). 죄후의 부활시에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때, 모든 자들은 듣게 될 것이다. 그분은 단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을 “믿는” 자들에 대해서만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몸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life)”이라는 하나의 결과에 대해서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life)”과 “심판(damnation)”이라는 두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두 개의 다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첫째 부활은 영혼의 부활이며, 둘째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이 두 부활을 구별하는 것은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언급한 후메네오와 빌레도의 이단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준다(딤후2:17). 그들은 몸의 부활을 부인하고, 오직 영혼의 부활만을 믿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두 부활이 있다.
독자들 중에는 천 년의 격차로 구분되는 서로 다른 몸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스코필드 성경(the Scofield Bible)-이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관점에서 집필된 주석성경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시, 즉 천년왕국의 시작과 끝에 각각 두 종류의 몸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그것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all) 그의 음성을 들을 때(hour)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 때(hour)에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모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이 양 쪽의 몸의 부활은 같은 시각(same hour)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 구절에서나, 또 성경의 다른 어느 구절에서도 천 년의 간격에 대한 말씀은 전혀 없다.
결론(Conclusion)
계20장 연구에 있어서 요5장의 이 구절들이 갖는 중요성은 두 부활, 즉 영혼의 부활과 몸의 부활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부활은 듣고, 믿는 자들의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 둘째 부활은 의인들과 악인들의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 자신이 기록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 그가 사용한 “첫째 부활”이라는 이 표현이 영혼의 부활이 아닌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인들의 몸의 부활은 첫째 부활체험이 아니므로 첫째 부활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영혼이 하늘로 전이(translation)되는 것 역시 죽음에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이것 역시 첫째 부활의 의미로 볼 수 없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the almighty power)에 의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계시록의 요한은 복음서의 요한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아담 안에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은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다만 육신의 껍데기를 바꿀일만 남았지요(고후5장) 이제 곧 진리의 복음의 진수가 이 지성방에 흘러나올 기미가 보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남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이십니다. 죽었던 영이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성경 어디서도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말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변화육신하셔서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를 부활이라고 하셔서는 안됩니다.
"잠자는 자 중에서 깨어" 여기에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 본문이 부활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십니까? 만약 "잠자는 자 중에 깨어"가 님이 말하는 부활과 같은 의미라면 어떻게 예수님처럼 된 후에 영원히 수욕을 받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몸의 부활도 완전치 못하여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까?
복음자랑님 잠자는 자 중에 깨어 라는 말씀인용이 다니엘서라면 님께서는 일부 말씀을 생략하셨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중 많이 깨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 육체가 죽어서 이땅에 그 육체가 티끌된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많이 깨어서 영생에 참여할 자가 첫째 부활이고 그 후 계시록 기록대로본다면 1천년 후 곡과 마곡의 전쟁 후 두번째 부활 때에 부활된 자들은 영원한 수욕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를 둘째 사망 곧 불못에 참여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 인용도 그 앞선 구절도 함께 인용하셔야 합니다. "(엡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잘 보십시오. 두가지 사건이 따로 구분됩니다. 먼저는 복음 자랑님께서 소위 영의 부활이라고 말씀하시는 사건이 5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후 사건이 6절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확실한 약속과 이루어질 일을 표현할 때 자주 나타나는 표현방식입니다. 가령 무너졌도다 무너졌도 큰 성 바벨론이여.. 하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땅의 티끌을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은 대화가 더 이상 안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표현을 따라 그대로 옮기면 "육체가 죽어서 티끌 된 자들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가 되는 것이네요. "육체가 죽어서 티끌 된 자들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이것이 성령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기록하신 내용이라고요?
이 답변 또한 기이하군요. 그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또한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거나 예루살렘교회의 할례파 성도들도 나실인 서원을 하고 지켰단 말인가요? 너무 억지 아니신지요? 그리고 나실인법을 지키는 과정을 여지껏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바울 또한 나실인 서원이 마쳐지는 때에 결례만 행한 것이 아니라 제사도 드렸단 말인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14] 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17]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19]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민 6:13-20). 이것이 나실인의 결례의 내용입니다.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행 21:26)의 내용입니다.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야고보의 말입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행 21:20). 율법에 열심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도덕법에 열심 있다는 의미로 읽히십니까?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 머리를 깍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하). 나실인의 서원이 끝나고 머리를 깍는 것임을 아시지요. 그런데 결례를 행하고 제사는 하지 않았다고요.
복음자랑님께서는 사도행전 21장 20절의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 다 나실인 서원을 하셨다고 보는군요? 전 전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식구 중 4사람이 나실인 서원을 하였고 그들과 결례를 다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결례는 겐그레아에서 이미 행하였습니다. 거기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와서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나실인 서원기간이 끝나면 행하는 결례의식이 다 행하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야고보의 권면을 따른 것입니다.
두개의 말씀을 비교해보십시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 21:23-24)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 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물론 이방인에게는 나실인법이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음을 야고보가 분명히 밝힙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율법내용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하죠.(행21:25) 그리고 나실인법을 준행한다고 해도 현재 결례의식에서 제사의식은 진행할 수 없음을 복음자랑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성전과 제단이 존재하지 않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잘 아시는 분이 자신의 글의 문제점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의아할 따름입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 아시지요? 그런 그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행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비용까지 대며 용인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혀 맞지 않는 행동 아닙니까? 표면적으로만 보면요. 바울이 이중인격자입니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율법을 따른 베드로의 행동을 책망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율법을 지키는데 비용까지 지원하고. 그런 바울 사도를 본받아라고요. 저는 전혀 본받을 거리가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님의 바울 이해를 따른다면요.
참 답답하십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이 주축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곳에서 바울과 베드로와 바나바가 믿는 이방인들인 안디옥 사람들과 어우러지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한적이 없는 것처럼 하였던 행동에 대한 책망을 한 것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의 이런 외식적인 모습을 책망한 것이지 그가 율법을 안지켰다고 책망한 것입니까? 왜 이경우를 나실인 서원 후의 결례와 연결하신단 말인가요? 두개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지 이중적 모습이라는 판단재료는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네요. 그 문맥도요. 갈라디아서가 어떤 문맥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왜 베드로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고 하니까 그랬을까요? 단순한 외식이라고요. 베드로는 율법 준수의 차원에서 이방인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도행전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울리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 문제의 근원은 고넬료의 집의 일 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먹고 어울렸던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따졌는데(행11:2-3) 그때 이방인과 먹어도되는지 아니되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한 탈무드에 따른 규례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여전히 잘 지키고있던 야고보나 다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로부터 다시 힐난 받기를 꺼려한 베드로의 입장을 보셔야합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안디옥교회의 교사로 있었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의 그런 행동이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마저 이방인성도들을 베려하지 않는 행동으로 간 것에 대해서 따진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그 일을 바울이 기록한 까닭은 사도면 다인줄 아느냐 하는 뜻으로 그 에피소드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 문제이지 율법의 준수 문제 여부가 아닙니다. 바울이 본 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갈2:14)
답변 드린 것을 다시 꺼집어 내십니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복음 양자에 다 자유하였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양자가 그들에게는 다함께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의 시대가 여전히 유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완전히 파기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법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 사항입니다.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당대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지키는 쪽이었지요. 바울 사도는 지키지 않는 쪽이었고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이 말씀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가능한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같이 된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서원에 대한 지원과 엉터리로 연결시키지 마시길 바랍니다. 위의 본문에서 유대인들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불신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서원에 대한 지원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님의 답변은 바울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만듭니다. 님께서는 바울의 나실인 서원이 율법 하에서 행한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죠? 그럼 나실인 서원이 자원함입니까? 아니면 그냥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에서 나온 어울림의 방법이란 말입니까? 님이 인용하신 말씀을 따라 바울의 행동을 해석하면 이는 바울의 하나님을 향한 자원함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얻고자하는 어울림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아닌가요? 바울이 이러했단 말입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모든 내용을 지켰다는 것은 인정하시지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모든 내용을 지켰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열심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불신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에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하십니까?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 분별이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슥 11:9-14). 스가랴서가 언제 쓰여진 책인지는 아실테고요. 이 본문은 예언입니다. 10절에 옛 언약을 폐하려 하신다는 말씀이 있고 14절에 유대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끝으려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된 말씀이 있습니다. 참빛교회님은 성경에 옛 언약을 폐하는 것과 관련된 가르침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옛 언약의 파기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예언은 성취되었고 앞 뒤의 옛 언약 파기에 관한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님의 인용하신 스가랴서의 말씀에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잘 보시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를 말한다면 분명하게 시점을 바로 하셔야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때에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끊음으로 모든 백성과 맺은 언약을 폐하신 것이고 연락이라는 막대기를 끊어 형제의 의를 끊으려함이었다면 옛언약의 폐함은 십자가 사건이 시점이어야합니다. 맞죠? 그런데 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옛언약이 존재한다고 하시고 새언약과 옛언약이 공존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님이 인용하신 말씀에서 님의 말씀이 모순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보시면 그 언약의 폐함은 은총의 폐함입니다. 동시에 연락이라는 형제의 의도 단절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맺었던 그 은총의 언약이 폐해졌음을 말하는 것이지 율법의 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본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시면 쉽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에 대한 이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님을 보내심 그리고 강림하심까지 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분의 강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옛 언약의 백성들이 그 대상이고요. 그 모두는 한 묶음입니다.
그리고 님이 주장하는 바를 계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을 풀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바울 사도 모두가 범죄하였다고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옛 언약이 파기되는 시점이 십자가이면 성령님께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바울 사도 모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스가랴서가 십자가와 한 선상에서 옛 언약의 파기를 말씀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000년도 더 지난 시점을 넣을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글을 적지 않겠습니다.
님께서는 스가랴서의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본문 기록 이외의 범위로 넘어가셨습니다. 스가랴서에서 한정된 범위는 예언적 측면으로 보면 분명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사건입니다. 님께서는 님의 주장은 옳다고 하시고 저의 설명은 하나도 귀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십니다.
스가랴서의 기록 한도내에서 먼저 바르게 해석하셔야할 것입니다. 복음자랑님께서 인용하신 스가랴서는 십자가 사건의 경우에 한하여 말씀하고 있지 나머지 경우를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을 경우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비유도 이 스가랴서의 예언과 궤를 같이합니다. 이를 복음자랑님께서는 넘어가신 것입니다. 님께서 바로 하셔야 합니다.
님의 주장과 같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합시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교인들은 파기된 옛 언약인 율법에 열심이었고,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 제사하며 결례를 아무렇지 않게 행한 범죄자들로 정하고요. 바울 사도도 이전까지는 지조를 지키다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그러한 나실인의 서약을 따라 결례하는 비용을 대고 용인한 범죄자로 단정하고요. 그렇게도 그들을 범죄자로 정하고 싶으신가 보네요. 님도 일관성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나실인의 서약을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임도 인지하시고요. 어휴, 답답하여라.
답답한 분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구약의 제사법과 유대인법(할례법 절기법 등)에 관하여는 이방인과 상관없기에 페지되었다고 신약에서 증거한다고 보고 거기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실인법은 유대인법이 아니라는 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지금 님께서 주장하신 옛언약과 새언약의 공존에 관하여 근거로 제시하신 구절에서 님 스스로 오류에 빠지셨습니다. 이것은 답답한 상황아닙니까? 성도의 부활에 관한 말씀들을 예루살렘 멸망 사건과 관련 짓는 님의 해석 또한 저에게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저는 토론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님께서는 저와 다르지만 님 나름대로 일관성있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것은 일관성을 잃은 님이심을 아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서 일관성을 잃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말씀하시고 답답하다 하시든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실인 서원을 하고서도 구약의 나실인법 전체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머리를 깍고 제사를 드려야한다면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머리를 깍고 결례를 행하여야하겠지만 바울은 겐그레아라고 하는 고린도 근방에서 머리를 깍았습니다. 거기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제사장에게 기간이 다 찼음을 고했습니까? 나실인 서원을 하였지만 나실인 법 그대로에 메이지 않는 바울도 보셨으면 합니다. 님이 가지신 것이 가장 옳다는 그런 확신은 좋은 것이나 다른 이의 님과 다른 해석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아담 안에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은 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다만 육신의 껍데기를 바꿀일만 남았지요(고후5장) 이제 곧 진리의 복음의 진수가 이 지성방에 흘러나올 기미가 보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남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이십니다. 죽었던 영이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성경 어디서도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말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변화육신하셔서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를 부활이라고 하셔서는 안됩니다.
"잠자는 자 중에서 깨어" 여기에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 본문이 부활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십니까? 만약 "잠자는 자 중에 깨어"가 님이 말하는 부활과 같은 의미라면 어떻게 예수님처럼 된 후에 영원히 수욕을 받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몸의 부활도 완전치 못하여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여기에서 "함께 일으키사"가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제까지 부활로 알고 그렇게 설교했는데,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님은 그렇게 설교하지 않으시는가 보네요.
복음자랑님 잠자는 자 중에 깨어 라는 말씀인용이 다니엘서라면 님께서는 일부 말씀을 생략하셨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중 많이 깨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 육체가 죽어서 이땅에 그 육체가 티끌된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많이 깨어서 영생에 참여할 자가 첫째 부활이고 그 후 계시록 기록대로본다면 1천년 후 곡과 마곡의 전쟁 후 두번째 부활 때에 부활된 자들은 영원한 수욕을 받을 자들입니다. 이를 둘째 사망 곧 불못에 참여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말씀 인용도 그 앞선 구절도 함께 인용하셔야 합니다. "(엡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잘 보십시오. 두가지 사건이 따로 구분됩니다. 먼저는 복음 자랑님께서 소위 영의 부활이라고 말씀하시는 사건이 5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후 사건이 6절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확실한 약속과 이루어질 일을 표현할 때 자주 나타나는 표현방식입니다. 가령 무너졌도다 무너졌도 큰 성 바벨론이여.. 하는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땅의 티끌을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은 대화가 더 이상 안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의 표현을 따라 그대로 옮기면 "육체가 죽어서 티끌 된 자들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가 되는 것이네요. "육체가 죽어서 티끌 된 자들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이것이 성령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기록하신 내용이라고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는 중생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는 부활입니다. 그것이 표현법이라고 생각하시네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도 표현법입니까?
정말 답답하시군요. 성경 말씀 그대로 해석하셔야할 것 아닙니까? 순서적으로 쓰여졌으면 순서적으로 해석하셔야지 복음지랑님께서도 님의 가지고 계시는 무천년설에 맞게만 해석하실려고 하시니... 결국 같은 경우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자체이십니다(요11:25) 무덤에서 일어나셔서 아담안에 죽은 자들 안에 부활로 계십니다. 그 분을 모시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살아난 영생의 사람이 됩니다.
(참빛교회님에게) 지난 글과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바울 사도는 실제로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실인의 헌신에 있어서는 결례를 행하여야 합니까? 행하여도 됩니까?
행한다고 하여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미 나실인법 이상으로 성도들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함을 일부러인지 아니면 신학의 영향인지 오늘날 관심사가 아닌 것이 문제겠지요.
제가 반대로 여쭙겠습니다. 왜 바울은 나실인법을 준수하여야한다고 보고 또 서원을 하고 나실인법을 준수하였을까요? 무슨 이유 때문에요? 단순히 유대인으로서 지켜야할 법이니까 그런 것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요? 나실인의 결례에는 제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요? 황당...
바울 사도는 나실인의 법을 준수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준수해도 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오해를 받고 부딪치는 일을 겪지 않기 위하여 야고보의 말을 들어준 것입니다.
이 답변 또한 기이하군요. 그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또한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거나 예루살렘교회의 할례파 성도들도 나실인 서원을 하고 지켰단 말인가요? 너무 억지 아니신지요? 그리고 나실인법을 지키는 과정을 여지껏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바울 또한 나실인 서원이 마쳐지는 때에 결례만 행한 것이 아니라 제사도 드렸단 말인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였다고 할 때에 서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아시지요. 결례를 행한다는 것은 나실인의 서원을 다 행하고 난 이후에 나실인의 법을 따라 결례를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시지요?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14] 그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17]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19]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민 6:13-20). 이것이 나실인의 결례의 내용입니다.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행 21:26)의 내용입니다.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야고보의 말입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행 21:20). 율법에 열심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도덕법에 열심 있다는 의미로 읽히십니까?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 머리를 깍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하). 나실인의 서원이 끝나고 머리를 깍는 것임을 아시지요. 그런데 결례를 행하고 제사는 하지 않았다고요.
복음자랑님께서는 사도행전 21장 20절의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이 다 나실인 서원을 하셨다고 보는군요? 전 전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식구 중 4사람이 나실인 서원을 하였고 그들과 결례를 다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결례는 겐그레아에서 이미 행하였습니다. 거기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와서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나실인 서원기간이 끝나면 행하는 결례의식이 다 행하여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야고보의 권면을 따른 것입니다.
두개의 말씀을 비교해보십시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 21:23-24)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 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잘 보시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결례는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겐그레아에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네사람의 결례에 함께한 것이고 그들의 비용(결례로서 드려진 제사제물의 비용)을 댄 것입니다. 두개의 말씀을 명확하게 구분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방인에게는 나실인법이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음을 야고보가 분명히 밝힙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율법내용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하죠.(행21:25) 그리고 나실인법을 준행한다고 해도 현재 결례의식에서 제사의식은 진행할 수 없음을 복음자랑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성전과 제단이 존재하지 않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잘 아시는 분이 자신의 글의 문제점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의아할 따름입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 아시지요? 그런 그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행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비용까지 대며 용인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혀 맞지 않는 행동 아닙니까? 표면적으로만 보면요. 바울이 이중인격자입니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앞에서는 율법을 따른 베드로의 행동을 책망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율법을 지키는데 비용까지 지원하고. 그런 바울 사도를 본받아라고요. 저는 전혀 본받을 거리가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님의 바울 이해를 따른다면요.
참 답답하십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이 주축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곳에서 바울과 베드로와 바나바가 믿는 이방인들인 안디옥 사람들과 어우러지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한적이 없는 것처럼 하였던 행동에 대한 책망을 한 것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베드로의 이런 외식적인 모습을 책망한 것이지 그가 율법을 안지켰다고 책망한 것입니까? 왜 이경우를 나실인 서원 후의 결례와 연결하신단 말인가요? 두개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지 이중적 모습이라는 판단재료는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네요. 그 문맥도요. 갈라디아서가 어떤 문맥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왜 베드로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고 하니까 그랬을까요? 단순한 외식이라고요. 베드로는 율법 준수의 차원에서 이방인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도행전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울리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 문제의 근원은 고넬료의 집의 일 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먹고 어울렸던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따졌는데(행11:2-3) 그때 이방인과 먹어도되는지 아니되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한 탈무드에 따른 규례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여전히 잘 지키고있던 야고보나 다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로부터 다시 힐난 받기를 꺼려한 베드로의 입장을 보셔야합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안디옥교회의 교사로 있었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의 그런 행동이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마저 이방인성도들을 베려하지 않는 행동으로 간 것에 대해서 따진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그 일을 바울이 기록한 까닭은 사도면 다인줄 아느냐 하는 뜻으로 그 에피소드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 문제이지 율법의 준수 문제 여부가 아닙니다. 바울이 본 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갈2:14)
저도 다시 한번 복음자랑님의 정확한 답변이 없으신 듯 하여 질문 드립니다. 왜 바울은 나실인법을 준수하여야한다고 보고 또 서원을 하고 나실인법을 준수하였을까요? 무슨 이유 때문에요? 단순히 유대인으로서 지켜야할 법이니까 그런 것입니까?
답변 드린 것을 다시 꺼집어 내십니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복음 양자에 다 자유하였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양자가 그들에게는 다함께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의 시대가 여전히 유효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완전히 파기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법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 사항입니다.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 당대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지키는 쪽이었지요. 바울 사도는 지키지 않는 쪽이었고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이 말씀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가능한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같이 된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서원에 대한 지원과 엉터리로 연결시키지 마시길 바랍니다. 위의 본문에서 유대인들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불신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서원에 대한 지원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님의 답변은 바울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만듭니다. 님께서는 바울의 나실인 서원이 율법 하에서 행한 것임을 인정하신 것이죠? 그럼 나실인 서원이 자원함입니까? 아니면 그냥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에서 나온 어울림의 방법이란 말입니까? 님이 인용하신 말씀을 따라 바울의 행동을 해석하면 이는 바울의 하나님을 향한 자원함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얻고자하는 어울림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아닌가요? 바울이 이러했단 말입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모든 내용을 지켰다는 것은 인정하시지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모든 내용을 지켰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열심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불신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에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하십니까?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 분별이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슥 11:9-14). 스가랴서가 언제 쓰여진 책인지는 아실테고요. 이 본문은 예언입니다. 10절에 옛 언약을 폐하려 하신다는 말씀이 있고 14절에 유대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끝으려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된 말씀이 있습니다. 참빛교회님은 성경에 옛 언약을 폐하는 것과 관련된 가르침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옛 언약의 파기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예언은 성취되었고 앞 뒤의 옛 언약 파기에 관한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님의 인용하신 스가랴서의 말씀에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잘 보시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를 말한다면 분명하게 시점을 바로 하셔야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때에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끊음으로 모든 백성과 맺은 언약을 폐하신 것이고 연락이라는 막대기를 끊어 형제의 의를 끊으려함이었다면 옛언약의 폐함은 십자가 사건이 시점이어야합니다. 맞죠? 그런데 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옛언약이 존재한다고 하시고 새언약과 옛언약이 공존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님이 인용하신 말씀에서 님의 말씀이 모순됨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보시면 그 언약의 폐함은 은총의 폐함입니다. 동시에 연락이라는 형제의 의도 단절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맺었던 그 은총의 언약이 폐해졌음을 말하는 것이지 율법의 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본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시면 쉽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에 대한 이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님을 보내심 그리고 강림하심까지 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분의 강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옛 언약의 백성들이 그 대상이고요. 그 모두는 한 묶음입니다.
그리고 님이 주장하는 바를 계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을 풀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바울 사도 모두가 범죄하였다고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옛 언약이 파기되는 시점이 십자가이면 성령님께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바울 사도 모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스가랴서가 십자가와 한 선상에서 옛 언약의 파기를 말씀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000년도 더 지난 시점을 넣을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글을 적지 않겠습니다.
님께서는 스가랴서의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본문 기록 이외의 범위로 넘어가셨습니다. 스가랴서에서 한정된 범위는 예언적 측면으로 보면 분명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사건입니다. 님께서는 님의 주장은 옳다고 하시고 저의 설명은 하나도 귀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님을 보내심, 강림-을 한 묶음으로 보지 않는 님의 관점에서만 성립되는 주장일 뿐이랍니다.
스가랴서의 기록 한도내에서 먼저 바르게 해석하셔야할 것입니다. 복음자랑님께서 인용하신 스가랴서는 십자가 사건의 경우에 한하여 말씀하고 있지 나머지 경우를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을 경우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비유도 이 스가랴서의 예언과 궤를 같이합니다. 이를 복음자랑님께서는 넘어가신 것입니다. 님께서 바로 하셔야 합니다.
님의 주장과 같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합시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교인들은 파기된 옛 언약인 율법에 열심이었고,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 제사하며 결례를 아무렇지 않게 행한 범죄자들로 정하고요. 바울 사도도 이전까지는 지조를 지키다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그러한 나실인의 서약을 따라 결례하는 비용을 대고 용인한 범죄자로 단정하고요. 그렇게도 그들을 범죄자로 정하고 싶으신가 보네요. 님도 일관성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나실인의 서약을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임도 인지하시고요. 어휴, 답답하여라.
답답한 분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구약의 제사법과 유대인법(할례법 절기법 등)에 관하여는 이방인과 상관없기에 페지되었다고 신약에서 증거한다고 보고 거기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실인법은 유대인법이 아니라는 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지금 님께서 주장하신 옛언약과 새언약의 공존에 관하여 근거로 제시하신 구절에서 님 스스로 오류에 빠지셨습니다. 이것은 답답한 상황아닙니까? 성도의 부활에 관한 말씀들을 예루살렘 멸망 사건과 관련 짓는 님의 해석 또한 저에게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저는 토론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님께서는 저와 다르지만 님 나름대로 일관성있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것은 일관성을 잃은 님이심을 아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서 일관성을 잃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말씀하시고 답답하다 하시든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실인 서원을 하고서도 구약의 나실인법 전체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머리를 깍고 제사를 드려야한다면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머리를 깍고 결례를 행하여야하겠지만 바울은 겐그레아라고 하는 고린도 근방에서 머리를 깍았습니다. 거기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제사장에게 기간이 다 찼음을 고했습니까? 나실인 서원을 하였지만 나실인 법 그대로에 메이지 않는 바울도 보셨으면 합니다. 님이 가지신 것이 가장 옳다는 그런 확신은 좋은 것이나 다른 이의 님과 다른 해석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