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유훈영 선생, 박기홍 선생, 나, 김종승 선생. 나는 박기홍 선생처럼 조금은 수더분하고 소탈하고 조금쯤 빈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조금쯤 인정머리가 있어 보이는 타입을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몽골 인종의 순수할 혈통도 박 교감이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박 선생은 꽤 여러 해 전에 목포를 떠나서 지금은 나주 혁신도시에서 살고 있단다. 유치초중학교까지 삼사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단다. 박 교감, 고마워요! 어제가 초복이었는데 오늘 박 교감 덕분에 눈물 쏙 빠지게 맛난 토종닭으로 복달임을 해서 쐬주 맛이 얼마나 환장스럽게 좋았는지 몰라요.
박기홍 교감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눈 인사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서글프다.
“고 선생 전화 첫 마디가 ‘조명준 선생님’ 하기에 나는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돼서 깜작 놀랐어요. 이렇게 정정하고 씩씩하신데.......” 말하자면 그게 칠십 먹은 내가 아직도 생각보다 썽썽하다고 칭찬하는 뜻이었겠지만 나로서는 꽤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에 나주서 약국 하던 초등학교 동창생이 식도암으로 죽고, 반 년 전에는 다른 나주 친구가 심장 수술 도중 죽었으니 내 나이가 염라대왕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나이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박 교감, 눈치가 빵점이다. 백 살 먹은 노인한테도, “이백 살까지 오래오래 사십시오.” 해야 좋아하는 것이 나이 든 사람들의 멍청한 속셈이거늘, 노인들 속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 속으로 깜짝 놀랐을망정, 눈치코치 없이 돌아가신 줄 알고 걱정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쓰겄는가. 박 교감이 다 배웠는데 때로는 거짓말이 참말보다 효과적이라는 진리는 아직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다 아직 젊어서 그러겄제.
박 교감과 작별하고 귀로에 오른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운다. 강성서원, 오죽헌과 비슷한 분위기다. 그러나 오죽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아늑한 느낌이다. 이 서원만 보아도 유치면은, 장흥군은 면면히 이어진 전통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영암 월출산! 나는 이 산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한국에서 이렇게 빼어나게 아름다운 구도를 지닌 산을 구경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규모가 좀 작아서 그렇지 중국의 계림이나 장가계에 비해도 절대로 손색이 없는 천하일색이다.
규모가 작은 산이라고 깔보아서는 큰 코 다친다. 선친께서는 월출산 다녀오시더니,
“아따, 거 징허게 악산이더라.”
나는 악산이라는 말씀을 바위가 많고 깔크막이 심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벌써 삼십 년이 넘었는갑다. 내가 마흔 살 언저리였던갑다. 목포제일중학교 근무할 때 동료 선생들 여남은 명과 월출산을 올랐다. 내 보기에는 다들 다람쥐 같았다. 그 중에서도 새마을주임이 특히 인상에 남았다. 예순이 다 되어가는 분이었는데 작은 체구에 뱃살도 없고 깡마른 체격에 어찌나 날렵하던지 험한 월출산 가풀막을 거의 훨훨 날아다니다시피 하였다. 그런 면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주도하기에 아주 적임자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다들 날고 기고 뛰고 소리 소문 없이 올라가는데 맨 꽁무니에 두 명이 쳐져 헐떡거렸다. 예순 가까운 이 선생님과 마흔 살 먹은 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똥배가 불룩하다는 핸디캡이었다. 무거운 배를 이끌고 경사가 심한 바윗길을 오르자니 죽을 맛이었다. 숨은 가쁘지, 배는 꼬이지, 땀은 비 오듯 쏟아지지........ 허위적 허위적,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서 엉금엉금 기어올라 언덕배기를 올라채면 멀찌감치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일행이 보였다.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언덕 위로 우리 코빼기가 보이자마자 두 말 없이 뽈깡 일어서서 가 버렸다. 그 때의 야속함이 뼈저렸다. 그 뒤로 나는 등산 대열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월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기찬랜드’에 잠시 차를 세우고 숨을 고른다. 월출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빛이 옥빛처럼 곱다. 도회지 가까운 곳에서 이처럼 맑고 고운 물빛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기가 차고 기가 막힌다. 그러나 나는 ‘기찬랜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가 차다’는 말은 ‘어이가 없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기찬랜드’보다는 ‘기똥찬 랜드’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배불뚝이가 되어 월출산 오르려면 헐떡거리기 일쑤지만 소년 시절에는 수월했다. 나주 금성산을 내 운동장으로 알고 가볍게 오르내려서 스스로를 ‘금성산의 타잔’이라고 자부했다. 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몸이 무거워 수영이 힘들지만 소년 시절에는 물개처럼 자유롭게 물속을 휘저으며 온갖 재주를 다 부렸다.
금성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금성천이었다. 우리 동네 앞으로 맑은 물이 철철 흘렀다. 일제강점기부터 포도주공장이 있었다. 포도주공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보를 막았다. 거기가 소년들의 훌륭한 수영장이었다. 깊은 곳은 아이들 키를 훌쩍 넘었다. 나 같은 초등학교 일학년 조무래기들이 헤엄을 못 치고 물가에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놀고 있으면 오륙학년 상급생들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들이당창 어깨에 들쳐 메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놔야, 놔, 이 새끼야, 울 어메한테 일러부러, 엉엉.”
악다구니를 쓰며 발버둥을 쳐보지만 상급생들은 쿨럭쿨럭 웃었다. 깊은 곳에 다다르면 매끈한 알몸뚱이를 슬쩍 내동댕이치고 살짝 도망쳐버렸다.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허우적거리며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면 입과 코로 뜨뜻미지근한 물이 쿨렁쿨렁 쏟아져 들어왔다. 오메, 나 죽어!
유 선생과 나는 요즘 하당 ‘한아름 탁구장’에 다니면서 탁구를 친다. 요가 배우랴 기타 배우랴 등산 다니랴 자전거로 방방곡곡 누비랴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유 선생은 짬나는 대로 다니고 나는 거의 매일 탁구장에만 나간다. 나이 먹은 사람들한테는 탁구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를 탁구장 앞에 내려놓은 김 선생 차가 휭 사라진다.
유 선생과 나는 탁구대에 마주 서서 탁구공을 또각또각 주고받는다.
“손목을 쓰지 말고 반듯이 코 방향으로 밀어. 어깨에서 힘 빼고 딱딱 소리가 나게 때리라니까.”
내가 조언을 한다. 나는 꾸준히 안 쳐서 그렇지 탁구 경력이 육십 년이고 유 선생은 겨우 일 년이다.
다섯 대의 탁구대에 회원들이 빽빽이 들이찼다. 레슨을 받는 별실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 사람 직업이 무엇이든 성격이 어떠하든 탁구채를 잡는 순간만큼은 다들 열정적으로 순수하다. 알 수 없는 희열과 넉넉한 충만감과 열기가 탁구장 천장을 휩싸고 돈다.
게다가 선수 출신인 관장은 항상 웃는 낯으로 교습생들의 마음을 편하게 이끌어준다. 교사로 치면 훌륭한 교사다. 교습생들은 수대로 간식을 사 온다. 과자, 빵, 수박, 족발. 탁구장 분위기가 늘 화기애매하다.
내 보기에는 교회당이나 사찰보다 탁구장이 훨씬 세파에 찌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싱싱하고 건강하게 구원해주는 것 같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하나이다. 오늘도 저로 하여금 세월의 저 건너편에서 낚시질하던 보림사 계곡을 되돌아보게 해주시고, 복달임으로 맛난 토종닭을 맛보게 해주시고, 고난을 함께 이겨내던 동지를 만나게 해주시고, 기똥찬 산천 옥빛으로 철철 흘러내리는 냇물에 발을 담그게 해주시고, 선비들의 꿋꿋한 기백이 살아 숨 쉬는 서원을 보여주시고, 너른 평야가 융단처럼 눈부신 초록빛 융단으로 변하도록 마법 같은 빛을 쬐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조금 메마르고 쭈그러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성성한 발과 손으로 탁구를 치면서 사우나보다 열 배나 좋은 땀을 뻘뻘 흘리게 해주셔서 거듭 감사드리나이다.
아무것도 없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어둡고 헛헛한 공(空)에서 홀연히 저를 발탁하시어 색계(色界)로 끄집어내어 주셔서 너무나 황홀하고 황송하나이다. (끝)
첫댓글 제가 보기에는 교회당,사찰,탁구장 보다는
이 들꽃연구회가 세파에 찌든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곳인 것 같습니다.
늘 허기진 마음으로 왔다가는 가슴 가득 뭔가를 채워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믿기도 하고 참구하기도 하고 치기도 하고 그라고 연구도 쪼까 하는거죠뭐~~^^! 집시님도 여름건강 잘 유지하시고 워디가 아프면 상담도 주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