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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사대강령(四大綱領)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
[복습]
사대강령은 원불교의 네 가지 큰 강령이지요. 정각정행과 지은보은은 교리의 강령입니다. 불법활용과 무아봉공은 원불교 교단의 이념이자 목표입니다.
①정각정행은 바르게 깨닫고 그 깨달음을 실행까지 이어져야한다는 겁니다.
②지은보은은 은혜를 알고 보은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만하는 게 감사생활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형편 따라 보은하는 것입니다.
③불법활용은 부처님의 법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거나 그저 대단하다며 모시는 식이 아니라, 불법을 실제 경계에서 활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생활불교입니다. 불법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활용을 못하면 자학하게 됩니다. 아는 것과 실천 사이에 간극이 커지면 자기가 미워지거든요. 아는 것을 실행으로 이어지려면,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무아봉공]
오늘은 무아봉공을 공부하겠습니다. 정전 제2교의편에서 마지막 장이 사대강령이고, 사대강령 중에서 마지막이 무아봉공입니다.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
원불교에서 서원이라면, ‘일원상 서원’, ‘성불제중’, ‘제생의세’를 말할 수 있지요.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원불교인의 서원은 ‘무아봉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아봉공은 개인주의 가족주의로 살아왔던 방향에서 벗어나 공(公)을 위해 살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을 좋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개인주의, 가족주의가 공도주의, 대세계주의로 바뀌는 겁니다. 이것이 체질화, 습관화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가 다 개인 같지요? 사실은 다 하나입니다. 모두가 사은의 공물입니다. 우주가 한 몸입니다. 손이 다쳤을 때 쓱 쳐다보면서 “너 다쳤냐?” 묻지 않지요? 곧 바로 “아이쿠”하면서 다친 손을 잡게 되지요. 나와 대타 관계에서 하나인 자리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이런 사람을 어디 가서나 주인이라 부릅니다. ‘임금 왕(王)’보다 높은 것이 ‘주인 주(主)’입니다. 주인으로 사는 것은 왕보다 높은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살자는 것이 공도주의(公道主義)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개인주의로 사는 사람은 하인 같은 사람입니다.
개인주의 가족주의는 작은 사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 관리도 못하고, 가족도 건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라는 게 아니지요. 대종사님 말씀은 개인, 가정을 넘어서서 국가, 사회, 세계, 인류뿐만 아니라, 일체생령, 우주만유 전체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산다고 살아놓고는 죽을 때 되면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인 줄 알고 쫓아갔는데, 행복이 아니었어요. 성공이 행복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순서를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행복하면 성공합니다. 그러나 성공을 좇아가면 불행해지고, 결국 실패합니다. 성공과 행복을 병행해야겠지만, 주종과 선후를 따지자면 행복이 먼저이고 주입니다.
[진충보국에서 무아봉공으로]
무아봉공은 처음엔 ‘진충보국’이었습니다. 일제가 불교 등 몇 개 종교를 제외하고는 종교 대부분을 탄압하고 없앴거든요. 불법연구회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진충보국’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지요.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이라는 뜻입니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충’은 ‘공(公)에 마음의 중심을 잡자’는 의미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 국가에 대한 충을 넘어서서, 우주만유 전체에 충성하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 1927년 1932년 1934년 1935년 1935년 1935년 1943년 〃 1962년 1972년 2014년 |
(원기 5) 4월 (원기12) (원기17) (원기19) (원기20) (원기20) 2월 (원기20) (원기28) 3월 20일 〃 8월 중순 (원기47) (원기57) 1월 (원기99) 3월 |
교강 발표 : 봉래산에서 《수양연구요론》 교단 최초 교과서 《보경육대요령》 최초 교서 《삼대요령》 《조선불교혁신론》 · 《예전》 《죄복보응경(罪福報應經)》 《불법연구회근행법(佛法硏究會勤行法)》 《불교정전》 1권 · 《불조요경》 2·3권. 불교정전 출판본 총부 도착. 《원불교 교전》 《정산종사법어》 《대산종사법어》 |
1943년(원기28) 3월 20일에 발행된 ‘《불교정전》 제2편 교의 제1장 사대강령’에는 “몰아 말하자면 정각정행을 하고 지은보은을 하고 불교보급을 하는 것은 무아봉공을 하기 위함이니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개인으로 보면 - 수행의 궁극과 봉공의 인간상을 지향하는 이념이 되며, 대외적으로는 - 세계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실천이념이 된다. 1962년(원기 47년) 정화사에서 《원불교 교전》을 편수하면서 위 내용을 삭제하였다. |
불교정전에서는 “몰아 말하자면 몰아 말하자면 정각정행하고 지은보은을 하고 불교보급을 하는 것은 무아봉공을 하기 위함이니라”라 하셨습니다. 이후 이 부분은 삭제되었습니다마는, 사대강령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무아봉공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제일 중요하는 것은 뭘까요?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입니다.
원불교는 공도주의요 대세계주의입니다. 원불교 신앙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위해 사셔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UN에서 일하라는 말은 아니죠.. 항상 국한이 터진 마음으로 세상을 위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서울 안암교당의 교무로 있지만, 저는 안암교당의 교무로만 살지 않습니다. 교구에 소속된 교무, 총부에 소속된 교무, 전세계에 나가 있는 동지들과 함께 하는 교무로 삽니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모든 나라가 다 형제입니다. 모든 것이 일원상에서 나왔습니다. 일원상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우주만유는 천지만물 허공법계이고 사은입니다. 일원상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일원상을 신앙합니다. 우주 전체가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죠.
[무아]
* 무아(無我) ① 나라는 관념을 갖지 않음. ② 사심(邪心)이 없음. ③ 불교에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주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줄인 말.
제법무아는 싼스끄리뜨의 사르웨 다르마 안아트마하(sarve dharmā anātmānaḥ), 빠알리의 사베 담마 아나타(sabbe dhammā anattā)를 번역한 말이며, 불교의 핵심사상인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이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존재의 근원에 대해 올바른 지견을 갖도록 하게 한다. 무아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고정적이며 불변적인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모든 존재가 인연(因緣)에 의해 생성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게 될 때,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실천하게 된다. |
무아(無我)는 ‘나가 없다’는 뜻이지요. ①‘나’라는 관념 없이 산다는 의미이고, ②‘작은 나’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③불교에서 제법무아라 하여, ‘항상하는 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무아, 법무아]
불교에서 무아를 인무아/법무아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 인무아(人無我) = 아공(我空) 마음의 주체인 주관(主觀)의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가 없다. 오온(五蘊)이 공(空)이다. 보는 자(見者)도 없고, 듣는 자(聞者)도 없으며, 느끼는 자(覺者)도 없고, 아는 자(知者)도 없다. ‘나’도 없고(無我), 사람도 없고(無人), 중생도 없고(無衆生), 목숨도 없으며(無壽命), 길흉도 없고(無吉凶), 남자도 없고(無男), 여자도 없다(無女).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망상분별(妄想分別)이고 거짓이름(假名)이다. |
‘인무아(人無我)’는 ‘아공(我空)’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무엇인가요? ‘나의 몸’이 나인가요? 얼핏 ‘나’라고 떠오르는 것은 ‘나의 무엇’일 뿐입니다. ‘나의 몸’, ‘나의 이름’, ‘나의 영혼’, ‘나의 가족’이지요. ‘나 자체’는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조견’은 ‘비추어 본다’는 뜻입니다. 육안으로 현상을 보는 게 아니라, 혜얀 즉 깨달은 눈으로 제대로 비추어 본다는 뜻이지요. ‘오온’은 ‘색수상핵식’입니다. ‘색(色)’은 몸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입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을 비추어 보았더니 모두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색(色)은 지수화풍이 묶였다 풀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몸’도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죽으면 제일 먼저 호흡이 멈추고[風], 몸이 식고[火], 수기가 빠지고[水], 땅으로 가지요[地].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마음도 잠시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것’에 집착합니다. 저는 음향기기를 아주 좋아하는데요. 알고 보면, ‘내 것’이라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본래 ‘내 것’도 아니에요.
저를 보시지요. 저를 보고 아는 것,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있지요?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무언가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이라는 게 있으면 어떤 형상이나 실체가 있을 텐데, 어디에 있습니까?
나타나는 것은 모두 짝하는 게 있습니다. 남자/여자가 있고, 선/악이 있습니다. ‘이것’이라는 게 있다면 그와 짝하는 ‘저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짝은 어디 있나요? ‘참 나’라는 건 짝이 없습니다. 천상천하에 홀로 짝하지 않는 거예요.
‘아공’은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습니다. 저를 보고 제 목소리를 듣고 훤히 아는 작용이 있잖아요.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는 겁니다. 있다 하자니 실체가 없고, 없다고 하자니 작용이 있지요. 그래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 법무아(法無我) = 법공(法空) 마음의 대상 즉, 객관(客觀)의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가 없다. 일체법은 원인(因)과 조건(緣)따라 임시 존재하는 것일 뿐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즉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선정, 지혜, 사문과 등 일체법의 자성이 공(空)한 것이다. |
‘법무아(法無我)’는 ‘법공(法空)’이라고도 합니다.
법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의 의미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일컫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바깥 대상 모두를 ‘법’이라 부릅니다. ‘제법’이라 하지요.
일체의 모든 것 중에 고정된 것은 없지요. 제가 유리컵을 들었습니다. 유리컵이 수 천 수 만 년간 이 모양 그대로 존재할까요? 실수로 떨어뜨리는 순간 깨져버리지요? 여러분도 다 변합니다. 생로병사로 다들 변하십니다. 명예욕이 많으신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뭐 하러 박수 받으려합니까? 박수 받는 당신도 관짝에 곧 들어가고요, 박수치는 저 사람들도 관짝에 곧 들어갑니다.
[진공묘유, 색즉시공, 공즉시색]
진공묘유(眞空妙有) = 이것이라는 실체가 없는데 작용은 있다. |
무아는 ‘진공묘유’입니다. 진공묘유는 ‘나라는 실체가 없는 데 묘하게 작용은 있다’는 뜻입니다. 저를 보고 아는 이것,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것을 ‘마음’이라 합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니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는 없는데, 보고 듣는 작용은 묘하게 있다는 거지요.
무아가 곧 진아(眞我)입니다. ‘나 아닌 것’이 ‘참 나’입니다. 무아는 학식이 높고, 책 많이 읽었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무아는 깨달아야 합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 물질(色=입자)의 본체(體)는 공(空=파동)이요, 물질 = 분자 〉 원자 〉 원자핵 〉 전자 원자의 직경은 0.1나노미터정도, 원자핵의 직경은 1페르미(0.000001나노미터)다. 부피로 치면 10⁻¹⁵ 정도로 원자핵이 더 작다. 전자는 원자핵보다도 훨씬 더 작아서 질량 9.1090×10˜³¹이며 약 0.511 MeV로 크기를 측정할 수 없다. 사실상 부피가 없는 것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 공(空=파동)의 작용(用)은 물질(色=입자)이다 |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합니다.
[진실무아]
한울안 한이치에 제1편 법문(法門)과 일화(逸話) 6.돌아오는 세상 53절
"세간에서 우리 교단을 좌니 우니 하고 평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나, 그는 종교의 대의를 모르는 말이다. 종교는 근본 마음을 가르친다는 말이요, 근본 마음이란 도덕심인데 여기에 어찌 좌우가 있겠는가. 또, 본교의 사대 강령 가운데 하나가 무아봉공이 아닌가? 내가 없는데 어디에 좌우가 있으리요. 만일 종교가에서 좌우 어느 한 편에라도 치우치고 보면 어찌 양편을 원만히 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정치는 정치가에게 미루고, 종교는 양편 교화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원시 시대부터 종교가 아니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었으니, 이후 공산주의 사회에도 종교가 없지 못할 것이다. 대범, 무아 가운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① 진실 무아(眞實無我)이니 일체 사욕을 떠나서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요, ② 수세 무아(隨勢無我)이니 그때 그때 권세에 의지하여 자기의 이욕을 추구하는 것이며, ③ 맹종 무아(盲從無我)이니 자기의 주견과 비판이 없이 맹목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진실 무아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대로만 나아가면 세상의 비난이 그칠 것이며, 세상에 좌우가 있다 하더라도 필경에는 단합이 될 것이다. |
[봉공]
봉공(奉公) : 공즉공(空卽公). 공즉전(公卽全). 공즉덕생(公卽德生). 개인보다 전체 사회를 위하는 것, 곧 사사(私私)로운 이익보다 공익(公益)을 우선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호법봉공은 법을 수호하고 공 또는 공익을 우선시 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제생의세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물질과 정신과 육신을 다 바쳐 수호하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
봉공(奉公)은 공(公)을 위해 봉사[奉]한다는 것입니다. ‘공변될 공(公)’과 같은 말은 ‘온전 전(全)’이고, 반대말은 ‘사사로울 사(私)’입니다. ‘사’는 부분이고, ‘전’은 전체를 의미하지요. 어떻게 해서 전체냐 하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空]. 비지 않으면 전체를 품지 못합니다. 허공은 비었기에 전체를 품습니다. ‘공변될 공(公)’은 ‘빌 공(空)’이고 ‘전체 전(全)’입니다.
무아를 제대로 깨쳐 알면 봉공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으니 ‘모두가 나’입니다. ‘모두인 나’를 위해 형편껏 도움을 주자는 것이 무아봉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무아봉공이 안 됩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으면 ‘너’도 있지요. 상대심으로 편가르기하고 경쟁하며 삽니다.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이치를 모릅니다. ‘하나’는 모르고 ‘둘’만 알 뿐입니다.
‘빌 공(空)’을 모르다보니 ‘공변될 공(公)’을 모르고, 그러면 ‘사(私)’를 위해 죽어라 사는 겁니다. 당장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돈도 명예도 다 도망가 버리게 됩니다. 범죄자들 보세요. 당장은 돈도 벌고 부분적인 쾌락을 취하기도 하지만, 결국 법의 심판을 받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사실 미운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건져야할 불쌍한 중생이지요. 천하의 연쇄살인범도 공(公)에 들어가거든요. 물론 그 사람에 맞는 불공법이 다르지요. 때로는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본인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공과 사 중에 공을 제치고 사를 취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원불교에서 두 개의 마음 보물을 꼽으라면, 신심과 공심(公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신심은 결국 공심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 개의 마음 보물을 꼽으라면 ‘공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정산종사님은 사가 없으셨습니다. 자식이고 명예고 재산이고, 다 바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공 덩어리로 사시다 가셨습니다.
[원불교 봉공은 무아봉공]
무아 봉공(無我奉公) 무아봉공은 진리에 바탕한 수행적 의미를 나타낸다. 곧 일원의 진리와 사은의 이치를 깨달아 원래 나라는 것이 없으며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사은의 공물임을 알아 보은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임을 자각하고 보면 무아봉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아봉공은 교리의 사대강령 마지막 조항으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결론 또는 목적을 나타내는 말이다. 원불교 신앙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무아 봉공인을 많이 나오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무아봉공인이 많아야 사회나 세계가 평화롭게 되고 원불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낙원 곧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와 세상의 병과 중생의 고통이 자기 본위로만 하려고 하고 자기 이익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봉공의 정신을 기르지 않으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가 다 반목과 불화와 전쟁을 벗어날 수 없다. |
원불교 봉공은 단순한 봉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좀 나누어 주고 보람을 느끼는 식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 안타까우니 돕자는 식이 아닙니다. 남들이 박수쳐준다니까, 다음 생애 복을 받는다니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원불교 봉공은 무아봉공입니다. 진리에 바탕한 실행이요, 깨침에 바탕한 실행입니다. 수행에 바탕한 신앙 행위입니다. ‘세상은 한 집안이다. 나라는 실체가 없이 모두가 나이다. 그러니 전체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무아봉공입니다.
무아봉공 = 시방이 일가이니 무아로써 봉공하자. (믿고 알고 열리고 깨친)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1. 가정에 당하면 가정에 봉공 2. 사회에 당하면 사회에 봉공 3. 국가에 당하면 국가에 봉공 4. 세계에 당하면 세계에 봉공 * 나를 없애야 참 봉공이 되고(我死法生) 참된 세계주의가 실현된다. (대산) |
봉공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심만 있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든 공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주, 부, 명예가 공적으로 환원됩니다. 반면, 공심이 아니라 사심을 갖고 있다면, 내가 가진 재주, 부, 명예는 사적으로 쓰이겠지요. 공심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처지와 형편에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지와 형편이 안 되는데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있이요. 그러면 안 됩니다. 돈도 없고 체력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면서, 영웅심으로 봉공하려 한다면 결국 문제가 발생합니다.
[공사의 표준생활]
공사(公私)의 표준생활 1. 빙공영사(憑公營私)인가. 2. 선공후사(先公後私)인가. 3. 지공무사(至公無私)인가. |
법마상전급 정도 되시는 분은 선공후사합니다. 법강항마위가 넘어가면 지공무사를 시작합니다.
무아봉공은 지공무사입니다. ‘지극히 공변되어서 사가 없다’는 말이지요. 일원상 자리는 원만구족 지공무사라 하셨습니다. 지공무사로 사는 것이 나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공을 위해 아낌없이 살 때 묘하게 행복합니다. 그것이 내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잠이 부족하고 피곤하지만, 행복합니다. 공을 위해 사니까요. 공을 위해 살면,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쁩니다. 그러나 사를 위해 살면, 내면에서 양심이 불러요. 양심에서 성에 안 차다보니, 술 한 잔씩 하게 되고 이 산 저 산에 여행 다니게 되는 겁니다.
[무아봉공의 단계]
무아봉공의 단계 체면적(인위적) 봉공 --> 사회적 보상 --> 진리적 보상(인과) |
①봉공의 첫 단계는 체면으로 하는 거고, 시키니까 하는 거고, 책임 맡았으니까 하는 겁니다. 상(相) 내면서 하는 거지요. 나쁜 일이 아니에요. 자기는 일 하지도 않으면서 일 하는 사람이 상 낸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봉공 하다보면 첫 단계에서는 상이 나는 겁니다.
②두 번째 단계는 사회적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③마지막 단계가 무아봉공입니다. 그러면 인과의 이치에 따라 진리적으로 보상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유아주의]
유아주의(唯我主義), 개인주의(個人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 |
범부들은 유아주의로 삽니다. 우주의 중심이 자기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아요. 자기밖에 모릅니다. 철저한 의기주의요 가족주의입니다. 무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병에 들었는데 그 첫째가 ‘돈 병’이라 하셨습니다[대종경 제2교의품 34장]. 이기주의 병이지요. 일본 어느 교당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교당에 와서 국제전화를 막 쓰더랍니다. 자기 돈은 아깝고, 교당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제가 원불교학과 다닐 때, 공양이 있으니 먹을 거 받아가라고 방송 나오면 사람들이 복도에 다다닥 뛰어가더라고요. “제초작업이 있으니 나오십시오” 방송하면 안 나오고요. 무아봉공으로 살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인데도 그렇지요. 무아봉공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공부삼아” 하라 하셨습니다. 하기 싫어도 공부삼아 해봐야 합니다. 공부삼아 해보다보면,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런 느낌이 있구나, 이런 재미가 있구나, 이런 보람이 있구나, 이런 가치가 있구나,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나는구나’ 알게 됩니다.
빙공영사(憑公營私), 선사후공(先私後公) |
‘나’가 있다고 생각하면, ‘너’가 있게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로 살고, 빙공영사하거나 선사후공합니다.
중생은 선사후공으로 살지요. 당장은 ‘내 것’을 취하려 하고, ‘공’은 뒤로 합니다. ‘내가 성공해서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후원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하지요. 순서가 바뀐 겁니다.
일정이나 약속이 겹쳤다 쳐요. 안 겹치게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겹쳤을 때, 저는 공을 선택합니다. 중생들은 아마 사를 먼저 선택하겠지요. 아직은 공심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심을 깨닫는 것이 초견성입니다.
사를 취하고 공을 뒤로하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지요.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이기적인 사람들도 싫어하거든요. 진리도 그런 사람은 호념해주지 않습니다. 진리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인과의 이치기 있으니, 받을 수가 없지요. 여러분, 이왕 복 지을 거 빨리 지으세요. 그래야 빨리 받아요. 늦게 지으면 늦게 받습니다. 지을까 말까하다 지으면, 나중에 받으려 할 때도 받을까 말까 하다가 받게 돼요.
소아(小我). 가아(假我) |
소아는 ‘작은 나’입니다. ‘작은 나’는 ‘가짜 나’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작고 국한이 작으면, 묘하게 오므라듭니다. 눈도 작아지고 눈코입이 몰아지고요. 인물도 작아지지요. 반면, 국한이 크면, 다 툭툭 커집니다. 눈도 커지고요.
아생(我生). 아상(我相) |
‘아생’은 나만 살려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일에는 얼릉 피하려 들지요. 내가 피하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야하는데 말이에요. 약삭 빠르게 내 것 취하는 사람이 진짜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한 줄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서 안 취하겠습니까?
‘아상’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에서 봅니다. 절대 손해 안 보 려해요. 그러나 그럴 수 없거든요. 어떻게 항상 이익만 있겠어요. 음양의 이치에 따라 이익이 있을 때도 있고 손해가 있을 때도 있지요. 어떻게 날씨가 맑기만 하겠어요. 눈도 오고 비도오고 바람도 부는 것이지요.
자유방종. 아집(我執). |
진정한 자유는 깨칠 때 옵니다. 인내할 때 옵니다. 책임질 때 옵니다. 인내 없는 자유는 구속입니다. 책임 없는 자유는 고난입니다.
아집은 죽을 때까지 들고 갑니다.
독선기신, 동일시 |
독선기신은 ‘자기 편한 것만 취한다’는 말입니다. 교당에서 설거지 있다 하면 싹 빠지는 식이지요. ‘독권독한’이라 하셨습니다. 자기 홀로 좋은 것을 취하면 나중에 한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집착 소유, 성공만을 향함 |
무아를 모르면, 집착하고 소유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향해 살아요. 다른 사람도 성공시켜줘야 자기도 성공한다는 이치를 몰라요. 자기만 성공하려하면 결국 자기는 실패하거든요.
나태. 탐욕. 착취. 적폐 반목. 불화. 전쟁 |
무아를 모르면, 나태하고 탐욕스럽습니다. 남들을 착취합니다. 그런 자가 적폐입니다. 남들과 반목하고 불화하고 전쟁합니다.
[무아/봉공]
무아(無我) |
봉공(奉公) |
헌신(獻身) 멸사(滅私) 호법(護法) |
봉공(奉公), 봉공(奉公), 봉공(奉公) |
무아봉공은 ‘헌신봉공’, ‘멸사봉공’, ‘호법공봉’이라고도 합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무사(無私) 대아(大我) 진아(眞我) |
지공(至公) 대세계주의. 공도주의 |
무아는 ‘대아’입니다. ‘나없는 나’가 ‘큰 나’입니다. ‘이것’이라 할 게 없는 ‘전체의 나’입니다. 이를 ‘진아’, 즉 ‘참 나’라 합니다.
♪ 나 없으매(성가 138장) ♬
나 없으매 큰 나 드러나고 내 집 없으매 천하가 내 집이라 이것이 참 나요 내 집 내 고향 삼세의 모든 성자 모든 부처님 언제나 머무시고 거기사시네 |
삼세의 모든 성자 모든 부처님이 무아의 자리에서 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가 일원상 자리입니다. 일원상 자리에 그대로 합일하는 것이 무아요. 일원상 자리를 그대로 쓰는 것이 봉공입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아사(我死) 살신(殺身) |
법생(法生) => 아생 성인(成仁) |
‘아사법생 법생아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나, 업력의 나, 욕심의 나, 집착하는 나를 죽이고[我死], 법을 살려라[法生]. 내 입장이 아니라 교법의 입장, 진리의 입장에서 살아라. 그러면, 법이 살고[法生], 나도 산다[我生]’는 말입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원불교가 나 죽이네” 말씀하는 교도님들이 있더라고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죽어야 살아요. 내가 안 죽고 싶어서 편한 것만 찾아다니면 절대 진급 못해요. 정체 아니면 강급입니다. 그러니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자식을 키울 때도 편하게만 키우면 나중에 골치 아파지잖아요.
무아(無我) |
봉공(奉公) |
대공심(大空心) 대지혜(大智慧) |
대공심(大公心) 대자비(大慈悲) |
‘대공심(大空心)’은 ‘텅 빈 마음’입니다. ‘그저 빈 마음’인 ‘공심(空心)’과는 다릅니다. ‘공심’은 빈 마음이 되려고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거예요. ‘대공심’은 견성을 한 마음입니다. ‘이 자리가 비었구나’ 깨달았어요. 그러면 자성반조, 회광반조가 됩니다. 그저 ‘공심’만 있는 사람은 자성반조를 할 수 없죠. ‘법문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더라’며 법문대조할 거고요.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로요
무아(無我) |
봉공(奉公) |
공(空) =>도(道)가 생산 |
공(公) =>덕(德)이 생산 |
‘공즉도생((空卽道生)이요 공즉덕생(公卽德生)이라’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이 “한난 유순한 사람을 도인이라 하니 우습다”라 말씀하셨습니다. 공부 안 한 사람들은 편안하고 좋은 사람을 도인이라 불러요. 그게 아니에요.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도인이지요. 도를 실천하면 덕은 알아서 와버립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위법망구(爲法忘驅) |
위공망사(爲公忘私) |
‘위법망구 위법망사’는 ‘법을 위해 내 몸을 잊고 공을 위해 사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엄청난 타력을 입을 수 있고, 업력이 녹아납니다. 사람이 환골탈태합니다. 그리고 인연이 아주 넓어집니다. 생일 축하를 할 때에도 집에서 가족끼리 축하하는 것보다는 대중공양을 하면 인연이 달라집니다. 천도재를 지낼 때, 천도재를 통해 교육사업이나 자선사업에 희사하면 인연이 넓어지겠죠. 그런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도움 주는 선연이 많아집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교당 갔더니 돈 내라 하더라”라 말하지요.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응무소주(應無所住) |
이생기심(而生其心) |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셨습니다. ‘주한 바 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자리,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내라는 거지요.
무아(無我) |
봉공(奉公) |
흔적 없이 |
실적 있게 |
무아는 “흔적 없이 실속 있게”입니다. 봉공은 “상(相) 없이 실적 있게” 입니다.
불교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실적 있는 걸 피하려하더라고요.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생 살고 가는데, 실적이 있어야 겠지요.
원력이 있는 사람은 실적이 있게 됩니다. 생을 마감할 때 보니까 실적이 없었다면 그 사람은 원력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력이 있으면 그 목표에 집중하고 에너지를 쓰고요, 그러면 주변 인연이 도와주게 되어있고 진리가 합력하거든요. 그러니 기가 막힌 큰 원력도 이루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안 난 폭 잡고, 죽은 셈 치고 |
이곳을 지켜 교단의 기본 인재를 양성하자. |
정산종사님이 수계농원을 운영하던 근산 지해원 선진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안난 폭 잡고 죽은 셈 치고, 이곳(수계농원)을 지켜 교단의 기본 인재를 양성하자”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9인 선진님께 법명을 주면서 “과거의 너는 죽어버렸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새 사람이 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법명 받으셨죠? 법명 받았는데 아직도 과거대로 사십니까?
대산종사님은 30년간 산송장이 되라 하셨습니다. 살아 있으되 송장과 같이, 감정의 기복에 속지 말고 나라는 것에 속지 말고 탐욕에 무너지지 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불리자성(不離自性) |
응용무념(應用無念) |
불리자성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응용무념은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는 것이지요.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대라.’ |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예수님께서 하신 위 말씀이 무아봉공입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리라.’ |
주는자가 받는자. |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리라’는 말은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귀로 들은 이야기를 쟁여두곤 하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면서요. 그러지 마시고 흘려버리세요.
인과에서 ‘주는 자가 받는 자’라 하였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요, 받는 자가 주는 자’입니다. ‘오는 자가 가는 자요 가는 자가 오는 자’이고요.
‘해생어은(害生於恩)’이라는 말이 있지요. ‘해가 은혜에서 생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 쳐요. 그 은혜가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나누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 외에는 뿌리셔야 해요. 안 그러면 액이 됩니다. ‘내 것’이 아니거든요. 나에게 잠시 왔을 뿐입니다. 사은의 공물이에요. 이 몸도 사은의 공물이고 모든 것이 다 공물입니다. 나누지 않고 자기가 챙기면 해독이 됩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불석신명(不惜身命),금욕난행(禁慾難行) |
희사만행(喜捨萬行) |
‘몸이나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 ‘욕심을 참고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것’이 무아입니다. ‘형편껏 최대한 희사하는 것’이 봉공입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시방일가(十方一家) 사생일신(四生一身) |
동척사업. 공생공영 |
‘시방이 한 집안이고 태란습화 사생이 한 몸이다’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무아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업을 할 때 동척사업, 공생공영의 세계사업을 합니다. IMF 외환위기 때 생각해보세요. 혼자 열심히 일해 놨더라도 망할 때는 같이 망하거든요. 함께 잘사는 법을 생각해봐야합니다.
무아(無我) |
봉공(奉公) |
진리는 하나 |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
대산종사님께서 하신 위 말씀 중에서 ‘진리는 하나’는 무아를 의미합니다.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는 봉공을 의미합니다.
대산종사님께서 법문하실 때 대(大) 자리 법문을 많이 하셨어요. 훈타원 양도신 선진님이 “종법사님은 부왕부왕하게 만날 ‘대대대’ 그러셔”라 하시더라고요. 대산종사님이 항상 일원상 자리에 근간해서 말씀을 하셨던 거지요. 일원상 자리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보통사람은 나누어진 세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다가 가끔 일원의 세계를 볼 뿐이지요. 관점이 달라요.
[원불교 교단의 무아봉공]]
1. 교단의 이념이 봉공임은 교단 초기 1918년(원기3) 3월부터 했던 1년간의 방언공사 중 나타난다.
2. 원기 3년(1918·戊午) 구간도실(구간道室) 12월 준공하고 도실 이름을 이름을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달 만물건판 양생소 (大明局靈性巢 左右通達 萬物建判 養生所 = 크고 밝은 영성의 보금자리에서 모든 주의와 사상을 막힘없이 통하게 하며 천지만물을 새롭게 살려내는 곳)라 한 것은 진실 무아주의임을 나타낸 것.
3. 원기 4년(1919·己未) 3월, 방언 공사를 마친 후 9인기도 시 - 이타적 대승행 강조
4. 혈인법인상(血印法認相) : 사무여한 · 무아봉공의 전무출신정신으로 음 . 양계의 인증을 받아 공도주의를 부활시키셨다. 사무여한의 전무출신정신으로 일원주의를 구현하신 점이다. 대세계주의는 일원주의로 재가 출가 성직자가 다 받들 수 있도록 하시었다.
5. 개인적으로는 무명에 가린 마음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광명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개인수행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무아란 개인 수행의 궁극이다. 무아봉공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적 봉공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된다. ex) 100점 맞아 좋아하는 제자에게 ”같이 80점 맞아라”
6. 무아봉공의 강령은 사요의 공도자 숭배의 정신과 상통한다. 공도자 숭배의 실천적 방향은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는 것이므로 이 무아봉공은 사요의 정신과 통하면서도 봉공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다.
7. 무아봉공의 이념은 정치의 근본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정산은 (《정산종사법어》 국운편27)에 “우리 사대강령에 무아봉공은 고금좌우를 통한 도덕정치의 근본이니 진정한 주의자는 무아의 이치를 철저히 깨쳐서 사심 없이 봉공하는 이요, 명예나 권력에 추세하여 망동하는 이는 한 국가의 건설에 주인은 될 수 없나니라” 8. 나아가 이 무아봉공의 이념은 일개 국가나 민족의 정치이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요, 평화의 세계, 하나의 세계를 이룩하는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정산은 원기 31연 유일학림 개학식에 ‘유일’의 뜻을 밝히면서 “유일한 목적이란 곧 제생의세요, 유일한 행동이란 곧 무아봉공이요, 유일한 성과란 곧 일원세계 건설”(《정산종사법어》 경륜편4)이라 하여 일원세계로 화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행동은 무아봉공의 이념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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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ex) 머리가 둘 달린 뱀 이야기 |
머리 둘 달린 뱀이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 하나가 쥐를 잡아서 혼자만 맛있게 먹었습니다. 나머지 머리가 화가 난 나머지 일부러 독약을 먹었어요. 결국 같이 죽었지요. 정산종사님께서 이를 “간단한 이야기로만 보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나 하나 살려고 내 것만 취하다가 결국 자기도 죽게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아봉공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나타나는 봉공’ 말고 ‘숨어서 하는 봉공’도 있어요. 기도 한 번 하는 게 봉공입니다. 그런데 이왕 기도하실 때 큰 것부터 하라 하셨습니다. 초입자들은 작은 거부터 하셔도 되지만, 특신급부터는 기도문 내용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 것’부터 기도할 게 아니라, ‘큰 것’부터 챙겨서 내려오는 기도문으로 바꾸셔야합니다.
바라는 공심, 상내는 공심이 아니라. 누가 보든 말든, 칭찬하든 말든, 보상을 주든 말든 하는 공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중생은 대가가 있을 때 에너지가 나지요. 그러나 진짜 도인은 대가가 있든 말든 상관 안 하거든요. 오히려 남들이 안 볼 때 맘 편하게 봉공합니다. 여기서도 그런 도인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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