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광견병에 백발백중의 완치효과로 유명 복용하고 나면 소변으로 광견독 쏟아져 광복 무렵 많은 광견병 환자 생명 구해 전통의 맥 이어지도록 제도 마련 절실하다.
충남 논산에 소재한 한 읍에 내려 '개약국'을 찾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누가 개에 물렸소? 어서 '개약' 사다 먹고 낫으소." '개약국'을 물으면 그곳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개약'이란 광견독을 풀어 내는 약을 말한다. 광견병에 걸린 사람이 그 약을 먹고 낫지 않는 예가 없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전통 또한 대한제국 말엽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1백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개약'은 몇 가지 한약재를 법제하여 만든다. 약은 원약과 보조약 두 가지이다. 원약은 흰 가루약에 약간의 빨간색 가루약이 섞여 있는데, 찍어 먹어 보면 아무 맛이 없다. 보조약은 약간 회색빛을 띠는 가루약으로 되어 있는데, 먹어 보면 밤 껍데기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기운이 돈다.
분량은 마치 양약국에서 조제해 파는 흰가루 소화제처럼 1~2g 정도씩 종이에 싸 있다. 원약과 보조약 1개씩이 1회 복용분이다. 복용법은 원약을 막걸리 3숟갈에 개어서 먹고, 이어 그 찌꺼기가 남은 사발에 보리찻물 3~5숟갈 붓은 다음 보조약을 타서 먹는다. 복용회수와 시기는 하루에 한 번으로 아침 식사 전이다.
약을 먹고 나면 광견독이 있는 개에 물린 사람은 소변으로 개구리 알 같은 흐물흐물한 게 섞여 나온다. 독이 심할 경우에는 대변으로도 나온다. 그러나 개에 물렸다 하더라도 광견병 증상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금기사항은 약을 쓴 후 개고기와 누에번데기를 1년 간 먹지 말아야 하고, 콩밥 콩떡 두부 청국장을 6개월간 먹지 말아야 한다.
광견병약의 효과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전북 익산에서 약을 사러온 김동수(취재 당시 60세 남자) 씨의 말을 들어보면 '개약'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처는 석 달 전에 개에게 왼쪽 허벅지를 물렸는데, 처음에는 팔다리가 쑤시고 한기 든 증세를 보이더니 나중에는 사지 마비와 함께 반 미치다시피 하는 정신이상 증상까지 나타났다.
개에 물린 후 여기저기 병원도 다니고, 약도 지어다 먹었으나 낫지 않았다. 우연히 소문을 듣고 '개약'을 먹었는데, 그날 저녁부터 소변을 보자 개구리가 알을 낳은 것처럼 코같은 흐늘한 게 3~4 숟갈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약을 먹고는 온몸이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 얼굴 까지 부어 올랐다.
그리고 애 나을 때처럼 배와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오면서 배에 헛힘이 써졌다. 점차 흐늘한게 나오는 양이 줄어 들면서 광견병 증상도 덜하고, 약을 먹을 후의 고통도 없어졌다. 김동수 씨는 어릴 적 동네 사람이 개에 물려 정신이상으로 결국 죽어 가는 걸 두 번이나 보았는데, '개약'이 아니었다면 그도 큰일을 치를 뻔했다며 천만다행이란 말을 거듭하였다.
'개약'을 먹고 광견병이 나았다는 이런 김씨의 말은 필자가 아는 바와도 일치했다. 약 20년 전에 필자의 고모도 개에 물려 광견병 증상을 보였는데, 어디를 가서도 낫지 못했다. 이웃사람의 귀띔으로 '개약'을 구해 와 먹었는데 마찬가지로 코처럼 흐늘한 게 소변으로 쓷아져 나오면서 나은 경험이 있다.
'개약국'은 읍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건물은 여느 약국과는 달리 일제시대 때 지은 허름한 가정집이었다.
현관에 놓인 나무로 만든 낡은 진열 탁자와, 그 뒤 벽면에 붉은 색으로 써 있는 '개약'이란 큼직한 글씨가 약국임을 짐작케 해줄 뿐이었다. 그곳에서 광견병 명약의 맥을 이어오던 김우길(金又吉) 옹은 1985년에 74세의 일기로 작고하고 없었다.
한약업자였던 그가 작고함으로써 제도적으로 '개약국'의 전통을 이을 수 있는 길이 이제는 막혀 버렸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약'의 비방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물려져 지금도 광견병에 걸려 원근(遠近)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되고 있다.
필자가 찾아간 날 김우길 씨의 미망인 정씨(취재 당시 70세)는 일체의 취재에 응하길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면허가 없기 때문이었다. 면허가 없어 약을 조제할 수도, 팔 수도 없는 입장이라 괜히 글로 알려졌다가는 그나마 광견병에 걸려 다급히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조차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병을 고칠수 있는 능력보다는 면허를 따지는 우리나라 의료현실이 빚어낸 안타까운 일이었다. '개약국'의 전통만이라도 기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고 되찾아가 설득하고서야 어렵게 그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개약국'의 전통은 1900년대 초 김우길 옹의 선친(金仁濟, 1934년 74세의 일기로 사망) 때부터 시작한다. 그의 직계 6대조는 조선 말기의 명신(名臣)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다.
예전에 학자 집안치고 명의(名醫)가 나오지 않은 예가 없듯이, 그의 선친은 의술이 뛰어나 대한제국 말에 어의(御醫)를 지냈고 충청도 일원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지금도 원근(遠近)의 나이 든 사람들은 그의 집을 어의(御醫) 집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김우길 옹도 그의 선친으로부터 의술을 물려받아 광견병은 물론, 한약으로 연주창(목이나 겨드랑이 등지에 여러 개의 멍울이 생기면서 잇따라 곪아 터지는 병) 후발주(머리 종기) 광사증(발작) 등을 치료하는 데 능했다.
그는 일제시대 때부터 현재의 집에 '일신당 한약방'이란 간판을 내걸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견병 만은 어느 곳에서도 치료하지 못했는데, 그의 약은 백발백중 효과를 보여 약의 명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연히 개에 물린 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오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의 집은 '일신당 한약방'이란 이름 대신 '개약국'으로 통했다.
"김씨 가(家) 비방이 천하명약. 당지(當地)에 유품(類品)이 유(有)하니 주의하라. ㅇㅇ읍 황금정 일신당 한약방 김우길." 일제시대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장을 지내던 이가 김 옹의 광견병 약의 탁월한 효과에 경탄한 나머지 자비를 들여 동아일보 제호 밑에 무료로 실어 주었다는 광고 내용이다.
그 지국장의 아들이 개에 물려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몰렸는데, 김옹의 '개약'을 먹고 나아 보은의 뜻으로 광고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발병됐다 하면 1백 퍼센트 사망하는 광견병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 주었으니 억만금 주고라도 광고를 내주었을 법도 하다.
이 광고는 1백 년 '개약국' 전통 속에 유일한 광고였다고 김씨 집안 사람들은 말한다. 그만큼 '개약'의 명성은 선전이 아닌 실체험의 효과를 통해 이어져 왔다. 김씨 집안의 '개약'이 유명해지자 그 명성을 업고예나 지금이나 인근에 비슷한 약이 떠돌기도 한다.
그렇지만 유사품을 복용한 사람도 결국은 김씨 집안의 '개약'을 먹고서야 병을 나을 만큼 그 명성의 위치는 확고하다. 광고 문안에 보이는 '천하명약'이란 말과 '유사품에 주의하라'는 말, 그리고 '황금정'이란 일제 때 지명이 '개약'의 명성과 전통의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읍내에 사는 이곳 토박이 이채운(취재 당시 70세)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와 광복 무렵에는 광견병 환자가 무척 많아 사회적으로 큰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그때 만약 '개약국'이 없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개약국'의 명성이 어찌나 자자했던지 외지에서 오는 사람치고 열에 하나 '개 약' 사러 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요즘은 광견병 환자가 뜸하지만 1960년 이전에는 이 옹의 말대로 광견병 피해가 적지 않아 사회적으로 큰문제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대강만 뒤져 보아도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가공할 광견! 미친 개에 물려 석 달 만에 죽어'(1921년 7월 6일자), '광견병 사고 증가, 지난달에 18명'(1922년 10월 13일자), '광견병으로 사망, 미친 개에 물려 미쳐 죽었다.'(1925년 8월 16일자), '광견 출현 4~5명 물어, 용인의 참사'(1928년 2월 19일자), '미친 개 출현 7명 물어 이태원의 대소동'(1933년 6월 23일자), '광 견의 피해, 1천 1백여 명'(1934년 2월 28일자), '광견 횡행, 피해 2천 건'(1935년 1월 15일자),
'발호하는 광견,피해자 6천 명'(1937년 6월26일자), '광견에 피해 1천6 백여 명'(1938년 3월 5일자), '미친개에 주의하자, 1년 통계 광견에 물려 3백여 명 사망'(1948년 7월 4일자), '미친개 발광, 8명이 물려'(1960년 9월 24일자), '개주인 을 구속, 공수병으로 물린 소년 절명'(1962년 9월 15일자) 이렇게 광견병이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그 치료는 아주 난해하여 당시 일반 병원에서는 광견병을 치료할 엄 두도 못 내고 중앙 정부 산하의 대학병원에서만 치료가 시행되었다.
그것도 척추에 수십 대의 주사를 놓아야 하는 치료이기 때문에 척추 신경이 손상되어 후유증과 마비가 속출하는 바람에 보호자부터 '병신이 되어도 좋다' 라는 각서를 받아 놓고 치료하였다. 이런 처지에 간편하면서도 큰 효과를 내는 '개약'은 광견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찾을 수 밖에 없었슴은 당연한 일이요, 유용한 구급수단으로 명성이 자자할 수 밖에 없었슴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개약'이 오늘날 인근에만 알려져 있다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된 것은 요즘미친 개에 물리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도 있지만, 한방을 가정비방으로 전수만 할 뿐 대중화의 방법을 모색하지 않은 한의약 종사자의 노력 부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일제의 전통의학 말살 정책과 광복 이후 보 건당국의 서양의학 위주의 의료정책에 편승, 전통의학을 천시했던 사회의 경향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본다.
김씨 집안의 광견병약의 비법은 공개하지 않아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의보감>에 실려있는 방법이 김씨 집안과 비슷한 점이 있어 참고가 되기에 소개한다.
"광견병은 곱돌 40g, 석웅황 4g, 사향 1g, 반묘(다리 날개를 떼어버리고 찹쌀에 넣어 볶아 법제한 것) 7마리를 가루내어 1~2g씩 더운 술 또는 미음에 타서 먹는다. 그리고 천남성·방풍·구릿대·천마·강호리·백부자를 같은 양으로 보드랍게 가루 내어 한 번에 8g씩 데운 술에 타서 먹고, 상처를 깨끗이 씻은 다음 붙인다."
광견병은 개나 고양이, 쥐 등에 물렸을 때 감염되는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다. 현재 2종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광견병 바이러스는 상처로부터 말초 신경을 따라 중추 신경계에 들어가 각종 이상 증상을 일으킨다. 물린 후 발병하기까지의 기간은 짧게는 2주일 정도이고 길게는 1년이 되지만, 평균 40~60일이라고 의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처음에 나타나는 증세는 물린 자리로부터 찌릿찌릿한 신경통 같은 감이 들고, 이와 동 시에 이유도 없이 심한 불안감에 사로 잡혀 불면·식욕 부진·동공확대·발한증이 일어난다. 2~3일 지나면 흥분기에 들어가 체온이 섭씨 38도 정도에 이르고, 바람 소리나 빛 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음침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숨이 가빠 캑캑거리는 반응을 보인다.
나중에는 음식물을 먹으려 해도 근육이 경련을 일으켜 삼킬수 없게 되고 침을 질질 흘리게 된다. 이때에는 특히 물을 보거나 물을 마시는 소리만 들어도 공포에 떨게 된다.
따라서 광견병을 공수병(恐水病)이라고도 한다. 이후 발작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드디어는 광폭해진다. 그런 상태로 2~3일 지나면 온몸이 마비되고 혼수상태로 발전하여 끝내는 사망한다.
현재 모든 의서나 의학백과사전을 보면, "광견병에는 치료약이 없고 발병하면 중추신경을 침해 당하여 1백퍼센트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파스퇴르가 1885년 실험적으로 염소나 토끼의 뇌를재료로 하여 광견병 백신을 만들었으나, 이 또한 광견병을 치료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백신의 접종은 일반 주사와 달리 18일간 매회 1회씩 척추에 맞아야 하는데, 동물의 뇌를 재료로 쓴 관계로 마비와 신경염 등의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광견병 환자에게 상처 부위에 파상풍 치료 정도를 해 주고 항생제를 복용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정황을 대비해 볼 때 김씨 집안의 '개약'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가치 있는 의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개약'을 먹으면 광견병이 백발백중 낫는다는 사람들의 말을 전부 인정하지 않고, '개약'을 먹고 목숨을 되찾은 일이 한 달에 한 명씩만 있다손 치더라도 백년의 '개약' 전통을 감안하면 지금껏 '개약'으로 재생의 길을 얻은 사람이 1천2백 명에 이른다. 이런 '개약'의 공로를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김씨 집안 사람들은 오늘날 의료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개약'의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광견병 환자를 살리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다. 그 손해는 결국 광견병에 걸린 환자에게 돌아오고 있으니, 국민건강을 위해 생각해 볼 문제라 하겠다.
물론 오늘날은 방역사업이 발달하여 광견병 환자가 덜한 점이 있긴 하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사망원인통계연보>를 보더라도 광견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90년 1명, 1992년 3명 등으로 나타나 있다. 통계청의 한관계자에 따르면 광견병으로 인한 죽음은 집안의 부끄러운 '재앙'이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보고 하지 않는 경향 이 있어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될 것이고 한다. 하지만 광견병의 피해가 예전보다 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요즘 광견병은 뜸하다 하여 그 치료의술마저 사장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이란 돌고 도는 것이라 했다. 언제 다시 광견병이 심각하게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때가 올지 모르는 일이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의술은 새로운 질병 치료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어 찌 되었든 최근 경기ㆍ강원도 일대에 광견병 환자가 빈발한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1백년 전통의 '개약'은 오늘에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남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광견병을 낫게 해 주고, 더군다나 다른 데에서 광견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없으니, 당연히 광견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해서 '개약'의 명맥이 이어지도록 법적으로 보호해 줘야 한다 는 그곳 번영회의 한 관계자 말이 의미있게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