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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아테나이스 드 로슈슈아르, 몽테스팡 후작부인(1641.10.5.프랑스 토네-샤랑트-1707.5.27.부르봉 라르 샹보)
모르트마르 공작인 가브리엘 드 로슈슈아르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생 마리 수도원서 교육을 받았고 20세가 되었을 때 왕비 마리 테레즈의 시녀가 되었다. 1663년 1월에 한 살 어린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는데 1665년 태어난 당탱 공작과 딸이다.
왕비 마리 테레즈는 활달한 그녀를 좋아하였었다. 그러나 야심 많은 그녀는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리하여 1667년. 드디어 라 발리에르를 몰아내고 공식 애첩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뒤늦게 사실을 안 마리 테레즈는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몽테스팡 후작도 아내와 왕의 간통을 알고 펄펄 뛰었다. 아내를 사랑했던 그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질투심을 격렬하게 내비쳤고, 왕과 몽테스팡 부인 사이서 태어난 아이들이 법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이라 주장할 정도여서 아이들을 몰래 낳고 기르기 위해 몽테스팡 부인은 맹트농 부인을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루이 14세가 처음 몇 년 간 몽테스팡 부인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라 발리에르를 이용했던 것도 이 후작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몽테스팡 후작은 계속해서 왕의 이중간통을 비난하였고 결국 그는 바스티유로 보내진다. 그리고 나중엔 기엔느로 추방 당했으며 이혼을 한다.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태양왕 통치 초기 그의 사치스러운 궁정의 상징이었다. 조용하고 겸손하기만 하던 라 발리에르와 달리 몽테스팡 부인은 모든 면에서 루이 14세가 원하던 그대로였던 것이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풍성한 금발에 감각적이면서 이목을 끌만큼 아름답고 화려하면서 모든 사회적 우아함에 정통한 몽테스팡 부인은, 시니컬한 생시몽조차도 대단한 미인이라 칭찬할 정도였다. 매일 2시간 씩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장미와 제비꽃 향수를 바르곤 했던 몽테스팡 부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미모는 몽테스팡 부인의 많은 매력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교적인 그녀는 교양 있으면서도 유쾌한 이야기꾼으로 생시몽과 세비네 부인과 같은 지적인 사람들과 곧잘 어울였다.
그녀가 주도하는 모임은 궁정의 중심이 되었고 오락과 음모, 정치적인 뒷거래의 중심지였다. 또한 위트의 중심지면서 아주 독특하고 우아했으며 교활한 곳이었지만 언제나 웃음이 넘치는 매우 즐거운 곳이었다.
화려한 베르사이유서 몽테스팡 부인은 누구보다도 빛나면서 도도하게 아름다웠고 루이 14세도 그러한 그녀를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녀야말로 베르사이유와 그곳의 웅대한 축제들에 어울리는 애첩이었다.
그러한 몽테스팡 부인은 성을 잘 내고, 변덕스러우며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거만하였는데 심지어 국왕한테도 공손하게 대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루이 14세를 두려워하지 않아 종종 역정과 함께 그를 대하였다.
궁정 신하들 모두 그녀의 방 창문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피했는데, 특히 국왕이 그녀와 있을 때 극도로 조심을 하였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않는 사람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무한한 재치를 지녔고 예리한 농담을 잘 했다. 조롱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없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능수능란히 잘 하였다. 선량한 왕비는 라 발리에르 공작부인의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와 다르게, 몽테스팡의 거만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왕비는 몽테스팡 부인에 대해 "그 매춘부가 날 죽일거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30대의 루이 14세는 권력과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고, 태양왕의 영광을 그대로 비춰주는 베르사이유와 그 곳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쾌활한 몽테스팡 부인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베르사이유에서 왕비보다도 더 넓은 처소를 사용하였으며, 루이 14세는 그녀와 즐기기 위해 푸르고 흰 아름다운 자기로 그랑 트리아농을 축조하였다. 또한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아르미드의 궁전'이라 불린 클라니 성도 그녀를 위해 지어주며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루이 14세의 사랑을 받으며 그녀는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클라니 성의 몽테스팡 부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벡생 백작 루이 세자르,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오를레앙 공작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유아기 때 죽은 딸 하나.
그들은 1673년에 모두 적자로 인정되었고, 막대한 부와 함께 각각 부르봉 분가와 결혼들을 해서 보통 귀족들보다 높은 지위를 받아 잘 살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툴루즈 백작을 제외, 선천적인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멘 공작은 절름발이였고 프랑수아즈 마리는 등이 굽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멘 공작과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왕의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리젤로트의 기록. (그녀는 몽테스팡 부인을 무척 싫어하였었다.)
【 처음에 국왕은 마담 드 몽테스팡을 싫어하였다. 심지어 그녀와 관련된 왕비도 비난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방탕한 여자라기보다는 야심이 많았으며 악마와 같이 부정했다. 야망을 위해선 그 어떤 것도 희생시켰으며, 그녀의 야심에 그 무엇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매우 밝게 빛나면서 대단한 총명함을 나타냈다. 입은 매우 예뻤으며 미소는 몹시 상냥했다. 피부는 라 발리에르보다 희고 부드러웠으며 이목구비는 더 뚜렷했고 전체적인 모습은 매력적인 기질을 나타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밝은 머리칼과 아름다운 팔, 라 발리에르에게는 없는 예쁜 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라 발리에르가 언제나 매우 깨끗한 반면 몽테스팡은 최악으로 추잡했다.
몽테스팡 부인은 대화에서 있어서 매우 유쾌했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지겨워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왕은 그가 라 퐁탕주에게 한 것 이상으로 몽테스팡 부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탱 공작이 그녀의 유일한 적자녀인데 또한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유일한 사람이었다.
국왕이 그녀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할 때 어머니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담 드 몽테스팡은 그들의 어머니가 아닌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몽테스팡 부인과 그녀의 장녀는 취하지 않고도 엄청난 양의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전에 마셔본 적이 없는 독한 'Turin Rosa Solis'를 큰잔으로 6잔이나 마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질거라 예상했지만 그들은 물 한 모금 마신것 마냥 취하지 않았다.

임신한 것을 숨길 목적의 옷인 '로브 바탕뜨'를 발명한 사람이 바로 몽테스팡 부인이었다. 그 드레스에서는 몸매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입었을 때 마치 대중들에게 숨기는 체 한다는 것을 발표하는 것과 같았다.
궁정의 모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몽테스팡 부인이 그 로브를 입었구나. 그렇다면 그녀는 임신한 게 틀림없어.' 나는 그녀가 자신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그것을 입었다고 믿었고 그것은 실제로 그러했다.
그녀는 언제나 왕실 근위대를 데리고 있었다. 국왕이 밤낮으로 그녀의 처소에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대신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였다. 몽테스팡 부인의 처소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등 아주 제멋대로였다.
그녀는 왕비에게 커다란 고통을 일으켰다. 그녀가 왕비를 종종 비웃곤 했다는 것은 꽤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몽테스팡은 모든 이에게도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절대로 왕비께 대담하면서 직접적이고 눈에 띄는 무례함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화려한 세도도 정점과 함께 몰락을 향해 가게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국왕 14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하였었다. 사실 몽테스팡 부인과 이중 간통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마음 깊이 있었는데 특히 독실한 맹트농 부인에 의해 고무 받으면서 그러한 마음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한 왕의 변화는 몽테스팡 부인을 불안하게 하였고 거기다 루이 14세가 아름다운 18세의 퐁탕주 양을 비롯 여러 여인들과 연이어 바람을 피우자 그녀는 파리 시내 유명한 점쟁이인 라 부아쟁을 찾기 시작하였다.
몽테스팡 부인은 흑미사와 마법 가루, 미약에 의지하였고 결국 1680년 '흑미사 사건'으로 전모가 밝혀진다.
루이 14세는 몽테스팡 부인에 대한 혐오가 일었고 당장 쫓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신중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곁에 두되 침묵, 무시...그것만이 12년간 영광과 함께 베르사이유서 군림하던 애첩에 대한 루이 14세의 유일한 태도였다.
자신이 예전에 라 발리에르에게 했던 것처럼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던 몽테스팡 부인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수녀원으로 가는 걸 허락을 받고 말년은 생 조세프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보냈다.
궁정을 물론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그녀에겐 참회와 경건만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했으며 오직 기도와 봉사활동에만 몰두하였었다. 그리고 부르봉 라르샹보에서 온천 요양을 하던 중 1707년 5월 27일 수요일 새벽 3시, 몽테스팡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국왕은 그녀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상복을 입는 것도, 장례식에 가는 것도 금지하였다.
화려했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이 가졌던 영향력은 이미 어떠한 자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클라니 성은 버려져 오늘날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자기로 된 그랑 트리아농은 부서져서 분홍 대리석으로 다시 지어진 후 이번엔 왕과 맹트농 부인의 휴식처가 된다.
스쳐간 연인들
마리 만시니(1639-1716)>-루이 14세의 첫사랑
추기경 마자랭의 조카였던 그녀는 예쁘고 대단히 똑똑한 여성이었다.
"나는 영리하고 재치 넘치는 사람들이 좋다"라고 말할 만큼 루이 14세는 언제나 재치 있는 여자들에게 매료되었었다. (물론 미모는 베이스고..)
20세의 루이 14세는 매력적이고 재기 넘치는 그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었고 만약 마자랭이 동의했다면 분명히 그녀와 결혼했을 것이다. (비밀리에 둘이 약혼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왕은 결혼에 있어서 마음에 끌리는대로 해서는 안되며 왕관과 국가의 이익에 따라야 했다. 거기다 그때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두고서 평화조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자랭은 루이 14세에게 사랑을 포기하도록 애원하였다.
"폐하의 영광과 명예 그리고 신에 대한 봉사와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황공하오나 자제하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루이 14세는 마리 만시니를 몹시 사랑했지만, 왕으로서의 의무를 잊을만큼 지각없지는 않았다.
마자랭은 마리를 한 귀족남성과 결혼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보냈고, 그녀가 떠날 때 루이 14세는 격렬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녀는 마지막 만남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국왕이십니다. 당신은 울고 계시지만 전 떠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루이 14세는 스페인과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피레네 조약으로 마리 테레즈와 결혼하였다.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안(1644-1670)>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의 첫 아내이자 영국 찰스 1세의 딸인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야심이 많은 여성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는 매우 섬세하고 흰 피부에 마치 장미꽃과 재스민처럼 조화된 장밋빛 볼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눈은 빛났고 코도 예뻤으며 입술도 아주 붉고 하얀 치아였었다. 앙리에트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고 1661년 17세인 당시에도 신비스런 매력을 갖고 있었다.
리젤로트와 달리 그녀의 결혼은 몹시 불행했는데, 리젤로트가 남편과 극과 극이어서 오히려 사이가 괜찮았던 반면 앙리에트와 필리프는 서로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똑같이 앙리에트는 치장, 보석, 궁중 오락들을 좋아했고 바람기가 많아서 남자들에게 늘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순종적이기만 한 왕비 마리 테레즈를 대신해 궁정의 중심을 이끌었는데 그런 앙리에트에게 젊은 루이 14세는 당연스럽게 빠져든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필리프가 눈치채고 질투에 사로잡힌 남편처럼 행동했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다 평소에는 전혀 재빠르지 않던 왕비까지도 알아챘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왕의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을 법 위에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루이 14세와 앙리에트가 실제 성적 관계를 가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마리 테레즈는 그런 관계였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는 루이가 앙리에트의 시녀인 라 발리에르에게 눈을 돌리면서 끝나게 된다.
그녀가 26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을 때, 그녀 자신도 그랬지만 많은 이들이 오를레앙 공작의 남자친구인 로렌기사와 데피아 후작에 의한 독살이라고 믿었었다. (그녀가 자주 마시던 엥디브 물에 의한 독살이라 하였는데 생시몽이나 리젤로트 모두 독살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고, 심지어는 유령 소동도 있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연사라 얘기된다.

<(왼쪽부터) 마리 만시니, 앙리에트, 수비즈 공비>
<마드무아젤 드 퐁탕주, 마리 앙젤리크 드 루시유(1661-1681)>
루이 14세의 공식 애첩이 되겠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가진 그녀의 상승은 몽테스팡 부인의 치세동안 첫 번째의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퐁탕주의 영광은 짧았다. 왕과의 관계가 시작된 지 1년 후 아기를 낳지만, 아기는 곧 죽고 만다.
그리고 그녀의 건강도 몹시 나빠졌고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리젤로트의 기록.
【 나는 보베라는 이름의 시녀를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단히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다. 국왕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국왕의 모든 시도에도 그녀는 흔들림 없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그래서 국왕은 그녀의 친구인 매우 예쁘지만 현명하지는 않는 퐁탕주에게 관심을 돌렸다.
국왕은 그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퐁탕주는 나의 시녀가 되기 전 어느 꿈을 꿨었고 신앙심 깊은 신부가 그녀가 꾼 꿈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퐁탕주는 국왕의 정부가 되기 오래 전에 그 꿈에 대해서 나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그녀는 높은 산에 오르는 꿈을 꿨는데, 정상에 도달하고서 대단히 밝은 구름에 의해 압도당하였다. 그리고서 갑자기 자기가 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공포를 가져왔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고해 신부에게 말했을 때 그는 말했다.
'조심하시오. 산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명예가 있는 궁정이오. 그러나 그것은 짧게 지속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신을 버린다면 신은 당신을 버릴 것이고 당신은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이오.'
퐁탕주가 독살되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의 원인으로써 몽테스팡을 고소했다.
그 애첩에게 매수 당한 퐁탕주의 하인은 우유에 독을 섞음으로 그녀와 그녀의 몇몇 시녀들을 죽였다. 그들 중 두 명은 퐁탕주와 함께 죽었고 그들이 독살되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말해졌다.
퐁탕주는 조그만 새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었지만 아주 선량한 마음씨였다.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지녔는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
사실 별다른 한 일도 없고 일찍 죽어버린 그녀가 많고 많은 루이의 연인들 중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복식사에서 퐁탕주(Fontange)라는 길고 우아한 머리 장식이 그녀의 이름을 땄기 때문일 것이다.
'퐁탕주'는 린넨이나 레이스를 주름잡아 마치 부채를 편 것같은 모양을 만들어 머리 위로 탑같이 층층이 세운 형태로 1690년대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전해오는 바로는 그녀가 승마를 하는 도중에 땋아 올린 머리가 헝클어지자 자신의 양말 대님으로 머리를 묶었다고 한다. 그게 너무 매력적이어서 루이 14세가 만찬 때에도 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으라고 요구했다고...
근데 퐁탕주는 그 머리 모양이 유행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그 밖의>
마드무아젤 드 로렌 뤼드레 부인은 아름답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앙리에트의 시녀였고 그녀의 죽음 후에는 왕비궁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리젤로트의 시녀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때 루이 14세는 그녀에게 반했었다.
루이 14세와는 반짝 관계로 한 2년 간 사랑을 한다. 왕은 곧 그녀에게 싫증을 느꼈고 거기다 몽테스팡이 왕의 관심을 끊기 위해 모함을 하자 관계는 완전히 끝난다.
모나코 공비 카트린 샤를로트 드 그라몽의 경우, 루이 14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동안 여기에는 로죙 공작이 끼어서 삼각관계를 이루게 된다.
로죙은 연인에게 왕과 만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정원에서 그녀가 왕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질투심이 폭발해버린다. 곧 달려가서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 하였고, 왕은 로죙을 질책하였었다. 그러나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무례하게 굴다가 결국 로죙은 바스티유 행 신세가 되고 만다.
안 드 로앙 샤보-수비즈 공비. 수비즈 부인은 교활했고 위선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는데 사리사욕 때문에 루이 14세에게 접근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묵인 하에, 왕에게 자신을 바치고서 자신과 남편, 아이들을 위한 모든 종류의 이익을 얻어냈다. 특히 선량한 왕비 마리 테레즈를 엄청나게 속였다고 한다.
마리 만시니의 자매인 수아송 백작 부인 올랭프 만시니는 왕의 마음에 들려고 엄청 노력했던 부인 중의 하나였고 라 발리에르와 왕과의 추문을 왕비에게 고해 라 발리에르의 추락을 바라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아들인 오이겐(오스트리아의 장군. 스페인 계승 전쟁 등에서 프랑스에 큰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의 친부가 루이 14세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왕은 이를 극구 부인하였었다.
루이 14세는 그녀에게는 언제나 사랑보다는 우정의 감정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