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수 兄에게 받은 마카리오스(makarios, μᾰκάριος) 『축복』
전주 한마음병원장 최경수원장님에세서 받은 詩글 속에서 마카리오스 를 회상한다.
그는 창조 하늘 안에서 마카리오스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글 속에서 예수는 갈리리 호수 북서쪽 산 위에서 가난한 죄인들에게 마카리오스로 살라하시고 하늘나라 초대장을 보냈다고 한다.
철학자이자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는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성경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헬라어(그리스어)에는 "복" 혹은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는 세 단어가 있다.
이 세 단어의 차이를 알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이해하기 쉽다.
첫째는 율로게토스(eulogetos, εὐλογητός)이다.
이 단어의 뜻은 "높이다, 높여주다, 찬양하다"인데, 유로게토스의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적 관계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고(복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린다는 표현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에베소서 1:3절의 내용을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둘째 의미로는 유다이모니온 (eudaimonia,ευδαιμονια)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단어인데, 인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보면 , 모든 존재는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기능을 우수하게 잘 수행하는 것을 "덕" , "아토스 아레테"(virtue, ἀρετή)라고 하는데, "덕"을 행하는 동안 인간이 느끼는 영혼의 상태 혹은 감정이 곧 유다이모니온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기 존재 목적대로 잘 살 때 느끼는 내적 감정"이 행복이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① 도시국가(polis)의 유다이모니아가 개인의 유다이모니아를 앞선다. 국가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에 앞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다이모니아는 도시 국가 운영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② 유다이모니아는 하나님 없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스토익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비중 있게 사용되었지만,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다이모니아는 인간이 하나님 없이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추구하는 행복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세번째 사용되는 단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 μᾰκάριος)이다. 마카리오스의 뜻은 위의 1, 2번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율로게토스와 비교할 때 마카리오스는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이다. 아주 드문 예외가(딤전 1:11, 6:15) 있기는 하지만, 마카리오스는 하나님에게 사용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베푸셔서 인간이 누리게 되는 은혜와 그 은혜에 힘입어 인간이 누리게 되는 외적 내적 상태를 뜻한다.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은, 호의, 위로, 보상, 격려 등인데, 특별히 인간의 어떤 고난, 인내, 헌신, 칭찬받을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과 위로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마카리오스는 환경에 구애됨이 없는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마카리오스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스스로 누리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상태가 마카리오스이다.
정리하면, 마카리오스는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는 인간에게 위로와 보상의 방편으로 일방적으로 내려 주시는 은혜,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말한다.
영어 단어에서도 행복은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할까?
그러나 성경 복음서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는 복이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Blessed)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씀한다.
blessing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앵글로 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사귀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은 끊어지고 말았다.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적극적일 때는 하나님께 반항하게 되며, 소극적일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증거, 즉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인생의 운전대를 홀로 잡고 인생을 사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신실하시고 영원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행복을 위한 시작이다.
무지개를 쫓다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던 철학자 괴테처럼 '빛이 그립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 빛이시고 생명수 되시며 사랑이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1편에서는 행복자의 정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5장의 산상수훈의 팔복 강해 말씀을 통해 행복해지는 비결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예수님은 또 자신의 인생의 짐에 눌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애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더라.' (마태복음11:28-30)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행복에 대해 더 이상 첨가할 것이 없는 참 주옥과 같은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모든 분들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다" (요한복음 6장 26~29절)